110. 구출
혈군사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휘익!
하지만 그의 수염은 세차게 흔들거렸다.
‘최근 일들이 이상하게 흘러가는군.’
하나씩 생기는 변수들.
늘 범위 안에서 움직이던 것들이 하나씩 예상을 벗어나자, 본래 세워둔 계획들이 빗나가기 시작했다.
이번 일도 그러했다.
“사음문이 무림에 봉문을 선언했단 말이지?”
“송구하옵니다.”
“내 허락도 없이……!”
천사회의 군사인 자신에게 한마디 전언도 없었다.
‘그 녀석이 나타난 뒤로 이상하게 꼬이는군.’
현재 일어나는 모든 변수들의 원인.
“후개, 그놈을 먼저 잡아야겠군. 그렇지 않고선 정리가 되지 않겠어.”
혈군사는 결심을 굳혔다.
“주작령에게 명을 내려라.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처리하도록.”
“알겠습니다. 곧바로 전달하겠습니다.”
휘리릭!
흑의사내는 뒤로 물러난 뒤 사라졌다.
“클클클…….”
혈군사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놈들이 화산파의 구천신품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는 소식을 그도 들었다.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얻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도 가져서는 안 되지.’
“제갈령, 당신도 피곤하겠소이다. 이런 놈을 당신 손 위에서 부리려고 했다니…… 그런 놈은 절대로 협박에 따르지 않을 놈이지.”
그도 알고 있었다.
제갈령이 구천신품을 찾는 목적이 구천마제의 정체를 밝히는 것임을.
‘나 또한 그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다.’
무림맹주가 싸워 이겼다고 전해질 뿐, 쓰러진 상대가 진정한 구천마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랜 시간이 지나, 사라졌던 구천신품은 다시 중원에 나타났다.
구천마제, 그가 죽은 것은 확실한가?
‘어쩌면…… 우리를 가지고 노는 것일 수도…….’
* * *
연홍의 행방을 찾기 위해 유운정을 감시하던 개방도들.
슬그머니 뒷문이 열리며 중년여인이 나왔다.
[일조장, 저 여자 맞지?]
[맞는 것 같은데.]
[개구멍으로 나오는 걸 보니 뭔가 구린 짓을 하는 것 같지 않아?]
[목표물이 나왔다고 연락 띄워.]
개방도들의 추격법은 보통 이들이 생각하는 방법과는 다르다.
그들은 절대로 목표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개방도만의 주고받을 수 있는 신호음.
목표가 움직이는 방향에 미리 대기하고 있다 미행하는 방법이었다.
중년여인은 계속 뒤를 돌아보며 조심했지만, 자신이 감시를 당한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호호호, 연홍을 데리고 오면 금전 백 냥을 주겠다고 적혀 있었어!’
얼마 후, 중년여인은 삼 층으로 된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여기에 있다고 했지?’
휘익!
남하림과 팽유도가 건물 정문에 섰다.
“여기서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아라!”
“넵! 후개님!”
창걸과 분타 개방도들이 건물을 빙 둘러쌌다.
남하림은 팽유도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흡!’
안으로 들어서자 썩은 냄새가 콧속으로 밀려왔다.
“형, 이 냄새는?”
“속각이군.”
사방에 속각 냄새가 퍼져 있었다.
“어이…… 누구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사내가 일어났다.
건장한 육척 장신의 사내.
팔뚝은 거의 성인의 허리만큼 두껍다.
“거지?”
사내가 남하림과 팽유도를 내려다보았다.
“캬캬캬캬! 거지 놈들이 여기엔 무슨 일이냐? 네놈들도 환상을 맛보고 싶은가 보지?”
“딱 보니 인생 막장인 놈들이 모여 있는 곳이네.”
“어허…… 쪼끄만 놈들이 죽고 싶은 모양이군.”
휘익!
사내가 바위 같은 주먹을 남하림을 향해 내리쳤다.
따악!
타구봉이 다가오는 사내의 주먹을 후려쳤다.
빠직!
“아아아악!”
손등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함부로 주먹을 쓰면 다친단 말이지.”
“이…… 거지…… 새끼가……!”
덜렁거리는 손을 붙잡던 사내는 다른 손으로 바닥에 놓여 있는 쇠망치를 들어 남하림을 향해 내리쳤다.
부우웅!
쇠망치는 남하림의 앞을 스쳤다.
“이익!”
부우우웅!
사내는 쇠망치를 다시 한 번 더 옆으로 휘둘렀다.
“이번에는!”
턱!
남하림이 발을 들어 사내의 쇠망치를 막았다.
“이런 망할 새끼가!”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거지 놈을 왜 맞힐 수가 없지?!
“이봐, 덩치. 여기를 봐.”
슈우욱!
사내가 고개를 돌리자 바위덩어리 같은 주먹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퍽!
팽유도의 일격.
사내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수고했어. 어라, 많았네?”
두두두두-!
싸움 소리를 들었는지, 사방에서 삼십여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몰려 나왔다.
“네놈들은 누구냐?”
“때려잡아야 할 썩을 놈들이 많군.”
“미친 각설이들이 죽고 싶어서 별 짓을 다 하는군. 뭐 해?! 당장 이 새끼들을 조져!”
부응-!
휙.
사내들이 남하림과 팽유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팟! 팟!
따따따딱따따!
두 자루의 타구봉이 사내들 주위를 종횡무진 날아다녔다.
“아야!”
“악!”
내력이 실린 타구봉을 삼류 동네 건달들이 받아내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은 끙끙대는 덩치들로 가득해졌다.
팍! 팍! 팍! 팍!
팽유도는 타구봉을 들어 쓰러진 사내들을 공평하게 두드려 줬다.
“으아아! 사람 살려!”
비명 소리가 워낙 컸는지, 안쪽에서 하나둘씩 밖을 내다보았다.
‘저기 있군.’
남하림은 연홍을 찾으러 온 중년여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휘익!
남하림이 사뿐히 중년여인 앞에 내려섰다.
건장한 사내들을 때려잡는 남하림의 모습에 여인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공자님. 살려주세요. 전…… 시키는 대로만……!”
“그녀는 어디 있소?”
“저기…….”
두꺼운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는 문.
파아악!
남하림은 그대로 쇠사슬을 잡은 뒤 잡아당겼다.
덜컹!
문이 산산조각 났다.
‘흐음.’
남하림은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침상을 살폈다.
축 늘어져 있는 여인.
뼈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이보시오, 정신이 드시오?”
연홍은 남하림의 목소리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거의 희미해진 맥박.
스윽.
남하림은 연홍을 안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하림 형. 그 여자야?”
“당문으로 가야겠다.”
“알았어.”
* * *
소당원에서 개방도의 연락을 받은 당무독은 별관으로 빠르게 들어섰다.
“무독 형, 오셨어요?”
“어어, 무슨 일이야? 부장은?”
“안에 있어요. 들어가 보세요.”
“혼자?”
드륵.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침상에 웬 여인이 누워 있었다.
“부장, 누구야?”
“소가주와 함께 보낸 사람.”
“아.”
당무독은 침상 곁에 다가섰다.
자세히 살피지 않아도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 단번에 보였다.
“서윤 형님과 같은 독에 중독됐어.”
“살릴 수 있겠어?”
“그렇지 않아도 방금 전에 해독제를 만들었어. 서윤 형은 지금 깨어난 상태야.”
“역시 무독이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딱 여기까지.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다 한 것 같지 않냐?”
끄덕.
당무독도 남하림의 말에 동의했다.
이제 당문이 연홍을 통해 중독시킨 인물만 찾으면 끝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곧 모든 일이 해결될 줄 알았다.
* * *
타앙!
내려친 손바닥에 탁자가 부서졌다.
중년여인의 목소리에 독기가 가득했다.
“방금 뭐라 했는가?!”
“죄…… 송합니다. 갑자기 거지 놈들이 쳐들어와서…….”
“거지 놈들?”
“네…… 거지 두 놈이 쳐들어와 그년을 들고 도망을 갔다고 했습니다.”
휙.
중년여인은 머리를 조아리는 사내의 등을 후려쳤다.
퍽.
“아아악!”
사내는 그 자리에서 바닥에 뻗었다.
‘젠장…… 그년을 살려주는 게 아니었어.’
자신의 일이 끝날 때까지 연홍을 가두어놓으려고 했었다.
같은 여인으로서 기구한 삶이 불쌍해 목숨만은 살려주었던 것이 실수.
연홍 또한 당서윤처럼 중독되어 있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큰일이군. 일단 거지 놈들이 누구인지 먼저 찾아야겠는데…….’
끄으응.
중년여인은 바닥에 쓰러진 채 끙끙거리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아직 자신의 신분이 당문에게 알려져서는 안 된다.
스릉.
중년여인은 검을 뽑았다.
어차피 이놈들은 썩은 놈들이라 죽여도 상관없다.
‘……운이 좋군. 이놈들은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해.’
“당장 죽고 싶지 않다면 이곳을 떠나라!”
후다닥.
사내는 살기 위해 억지로 몸을 일으켜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쳇. 일이 꼬이는군.”
휙!
그녀는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거지가 무공을 펼쳤다면 개방이 분명해.”
성도 인근에는 개방 분타가 없을 텐데.
“어떤 녀석들인지 찾아봐야겠어.”
중년여인의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 * *
당서윤은 침상에서 일어나 자신을 치료해 준 인물을 붙잡고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무독, 고맙다.”
“형님이 잘 버티셨어요.”
“안 그래도 소식은 많이 들었다. 무림에서 잘나가더군.”
“흐, 그건 전부 부장 덕분이죠.”
“후개, 고맙소이다.”
“아니, 전 한 일이 없습니다. 무독이 아니었다면 소가주의 중독을 치료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서윤은 남하림을 살폈다.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남하림의 신형에서 흐르는 기는 벌써 가주인 당염청을 능가할 듯했다.
“무독, 근데…… 내가 어떻게 중독된 거지? 아버지께선 네게 물어보면 안다고 하던데…….”
아직 당서윤은 중독의 원인에 대해서 몰랐다.
계속해서 궁금하던 찰나.
“형님, 이제 웬만하면 그런 곳에 함부로 가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엥?”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던 그는 이내 얼굴이 붉어졌다.
“제기랄…… 그년이…….”
“아닙니다, 형님. 그 여인도 아무것도 모른 채 당한 듯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부장이 그녀를 구해왔습니다. 형님처럼 같은 독에 중독당한 채 죽어가던 중이더군요.”
“…….”
“그나마 형님보다 적은 양이어서 지금까지 살아 있었던 모양입니다.”
당서윤 또한 당문의 소가주.
상황 판단이 빠르게 돌아갔다.
‘내가 그곳에 가는 것을 아는 사람은-’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진 당서윤.
“무독, 나를 그곳에 데리고 간 녀석은 주영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붙여놓았습니다.”
“고맙다. 정말 큰 도움을 받았다.”
“전 단지 해독만 했을 뿐입니다. 나머지는 부장이 했죠.”
척!
당서윤이 남하림을 향해 포권을 했다.
“고맙소이다.”
* * *
남하림은 소당원에서 나온 후 별관으로 향했다.
‘우와, 여전하네.’
건너편에서 솟아오르는 모닥불 연기.
불 위에선 무엇인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창걸이 얼른 남하림을 반겼다.
“후개님, 오셨습니까?”
“이게 무슨 냄새입니까?”
“닭 서너 마리 잡았습니다요. 같이 드시겠습니까?”
“큭큭, 아닙니다. 많이 드세요.”
“하핫! 저희가 그건 또 잘하지요.”
그때, 팽유도가 남하림의 목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왔다.
“형, 소가주는 괜찮던가요?”
“살 만하더군.”
“다행이네요. 무독 형이 솜씨가 좋긴 해요.”
“그치?”
“닭 삶고 있다는데 넌 안 먹어?”
“괜히 말 나올까 싶어서요. 저 닭도 저기 뒷산에서 잡아왔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당문에서 키우던 닭 같거든요.”
“푸후훕, 진짜?”
“당문에서 알아서 맛있는 걸 주는데도 굳이 닭을 잡아와서 먹겠다고 하니 좀 황당은 해요.”
“큭큭, 자, 네가 가서 닭값은 주고 와. 들어가자.”
“에휴, 알겠어요.”
드륵.
남하림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휘연 옆으로 만통자가 앉아 있었다.
“어? 노인장은 여기 웬일로…….”
“이놈아! 난 장로원에 던져놓고 네놈들끼리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게냐?”
“별일 없었는데요.”
“그럼 저 건넌방에 있는 여인은 누구냐?”
“아픈 사람요.”
만통자는 눈을 흘겼다.
“똑바로 이야기해 봐라!”
“진짜 별일 아니라니깐요. 그리고 지금은 알려 드릴 수 없어요. 가주님과 약속했거든요.”
“아…… 진짜 서운하네.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이 얼마인데……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다니.”
“당연히 믿지 않는 게 정상이지 않나요? 현천회가 뭐 하는 곳인지 설명도 해주지 않잖아요.”
“나쁜 곳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에라이…… 나쁜 놈. 난 네놈들을 그렇게 안 봤다.”
만통자는 돌아앉았다.
“하하하, 알겠어요. 조금 믿어 드릴게요. 돌아앉는 건 아니잖아요.”
“…….”
“여기서 나가셔야 하는 게 맞지 않나요?”
‘이 자식이……!’
화락!
만통자는 열불이 난 표정으로 휙 돌아섰다.
“야!”
“후후후, 화내지 마세요. 가르쳐 주면 되잖아요. 나이가 많을수록 많이 참는다고 하던데…… 노인장은 아닌가 봐요.”
“그건 네놈 때문이잖냐. 네가 화를 불러일으키게 만들어.”
“저 여인이 누구인지 알려 드릴게요.”
남하림은 만통자에게 며칠 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어떤 놈들이 그런 짓을 한 거야?”
“그걸 알아보려고요. 그래서 저 여인을 치료하는 겁니다.”
“여인을 이용한 음독이라…… 상당히 악독한 방법을 썼구나.”
“그러게요. 죄 없는 여인을 이용해서 중독을 시켰으면 원래대로 돌려놔야 하는데. 그런 곳에 던져놓다니.”
드륵-
방문이 열리며 성철각이 얼굴을 내밀었다.
“부장, 왔어?”
“철각, 무슨 일이야?”
“정신을 차린 것 같아. 눈을 떴어.”
“그래? 알았어.”
남하림은 문을 열고 연홍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여인은 애써 침상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괜찮습니다. 그대로 누워 계세요.”
“고…… 맙습…… 니다.”
여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남하림의 그녀의 손을 잡았다.
‘기가 미세하지만 안정됐어. 다행이군.’
스윽.
남하림은 의자를 당겨 여인의 곁에 앉았다.
“내가 뭐로 보이십니까?”
“거지…… 죄송합니다…….”
“하하, 제대로 봤습니다. 난 개방의 후개입니다.”
“아……!”
무림인이 아니라 하나, 그녀 또한 개방의 후개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다.
연홍은 세상 누구보다 따뜻한 웃음을 짓는 남하림의 얼굴에 마음이 편해졌다.
“고, 공자님, 제가 어떻게……?”
“우선 몸조리부터 신경 쓰세요. 우리들이 항상 지키고 있으니 다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막 깨어났으니 편히 쉬시고,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어요.”
“아…… 네…… 고맙습니다.”
툭툭.
미소만큼이나 부드러운 목소리에, 연홍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