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107화 (108/328)

107. 당문 도착

사음문은 침묵에 잠겼다.

신명항을 만나고 온 위종의 보고에 완여붕은 말이 없었다.

선전포고.

내일 오전까지 합당한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신려세가는 둘 중 한 곳이 멸문할 때까지 싸울 것이라 선언했다.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위종이 침묵을 깼다.

“결정을 내릴 시간입니다. 저들과 싸울 것인지, 아니면 공멸을 피하기 위해 화해를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위 당주. 그의 뜻이 단호했소이까?”

갈명신은 종전과 달리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수하를 보낸 것만으로 확고했습니다.”

“끄으으응.”

시종일관 강경론을 펼치던 그였지만 막상 내일 오전, 모든 것을 걸고 피 터지게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심히 부담스러워진 모양이다.

“부문주, 만일 저들과 싸운다면 본 문에게 승산이 있다고 보는가?”

스윽.

그때, 중년인이 한 걸음 나섰다.

사음문의 부문주 완여신.

문주 완여붕의 아우이기도 한 그는,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한마디 말도 없이 경청했었다.

“예나 지금이나 본 문은 신려세가에게 밀리는 게 사실이지요. 예전에도 서로 큰 피해를 입는 게 싫어 물러났을 뿐입니다. 문주님께서 승산이 있느냐고 여쭈시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승산은 없습니다.”

“…….”

부문주 완여신의 솔직한 대답에 대전의 분위기는 한층 더 침울하게 변했다.

“부문주께서는 본 문이 머리를 숙이자는 뜻입니까?”

“갈 당주. 하나면 물어봅시다. 그대는 위신과 목숨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오?”

“그거야…….”

갈명신은 쉽게 답을 못 했다.

때론 위신도 중요하지만,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었다.

“쉽게 답을 못하는구려.”

“…….”

완여신은 그에게서 돌아서며 이번에는 사음문의 주요 인물들을 향했다.

“여러분들에게도 한번 묻겠소이다. 그대들에게 사음문이 중요하오? 아니면 사음문의 위신이 중요하오?”

“……,”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 중에서 가장 힘드신 분이 누구겠소?”

파혼을 빌미로 신려세가에 괴동 장약금과 이공자 완비연을 보내야만 했던 이유.

천사회 혈군사의 뜻이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부문주께서는 우리가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보는군요.”

“본인도 사음문의 사람이외다. 자존심이 없지 않소이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말씀이오?”

“사음문을 지키며 명예도 지키는 방법이 있소이다.”

웅성-

순간 각 당의 인물들과 장로들까지 부문주 완여신의 말에 집중했다.

“부문주. 그 방법이라는 게 무엇이오?”

스윽.

완여신은 문주 앞으로 돌아섰다.

척.

그러고는 공손히 예를 취했다.

“이번 일은 문주께서 나서야 합니다.”

“…….”

“신려세가의 가주와 문주님, 두 분께서 결정을 지으시면 됩니다.”

끄덕.

완여붕은 그의 뜻을 읽었다.

“부문주, 신 가주가 나의 뜻을 받아들이겠는가?”

“문주님, 두 분께서 담판을 짓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신려세가에 유리한 조건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문주님께서 이길 시에는 신려세가가 물러날 것이며, 만약 신 가주가 이길 시 사음문은 오 년간 봉문에 들어선다는 조건입니다. 그러면 신려세가에서도 충분히 돌아갈 수 있는 명분이 생길 것입니다.”

‘오 년간의 봉문!’

“정당한 대결에서 문주님이 패하시더라도 사음문의 위신은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숙부. 너무한 게 아닙니까? 아버지의 위명은 생각지도 않습니까?”

“일 공자, 무림인들은 비겁함을 욕하지. 정당하게 싸우다가 졌다고 해서 문주님을 깎아내릴 사람은 없네.”

스윽.

결심을 한 얼굴.

완여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가벼웠다.

“후, 부문주의 의견에 따르겠다. 혹시 반대하시는 분들은 지금 바로 의견을 주시오.”

“…….”

“좋소이다. 위 당주.”

척!

위종이 한 걸음 나섰다.

“그대가 수고스럽겠지만 신 가주를 한 번 더 만나 봐야겠네.”

“알겠습니다. 소신이 다녀오겠습니다.”

* * *

신명항은 전방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중년인을 보았다.

“흐음…… 오는군.”

사음문의 무리들이 멈춰 섰다.

“그럼, 가볼까.”

신명항은 천천히 중앙으로 나섰다.

‘신명항…….’

완여붕도 그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중앙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완 문주, 오랜만이외다.”

“그렇군요.”

“언젠가는 이런 자리에서 만날 줄 알았소이다.”

신려세가와 사음문은 예전에 남겨 놓았던 감정에 의해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어떻습니까?”

“걱정 마시오. 본 가에서 잘 지내고 있소.”

“고맙소.”

완여붕은 대결을 하기 전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혈군사의 명이 두렵지 않소?”

“완 문주. 난 주군을 따를 뿐이오. 그는 주군이 아니외다. 그대는 지금까지 주군을 따랐소? 아니면 혈군사를 따랐소이까?”

그들은 혈사천주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우리의 주군은 천주님이시지.’

완여붕은 그의 뜻을 읽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명항은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주군을 위해 목숨은 얼마든지 바칠 수 있다. 하나 군사를 위해 바칠 생각은 없소이다.”

“알겠소. 그럼, 마무리를 짓도록 하지요.”

스스슥-

두 사람은 천천히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났다.

완여붕은 한 손에 사사검(蛇邪劍)을 잡았다.

스르르릉-

사사검이 햇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쉬이이이익-

뱀의 혓바닥에서 나는 소리.

차앗!

사사검을 앞으로 뻗자,

독향이 퍼져 나왔다.

핏핏핏!

살모사의 날카로운 이빨에서 독이 뿜어져 나가듯, 사사검의 끝에서 검기가 찔러 나갔다.

‘독기는 불에 태운다!’

슈우우우우-

신명항의 쌍장에서 흐르는 화기가 이글거리는 화염을 만들어냈다.

파아아아-

화르르륵!

타들어가는 화염에 사사검의 독검기가 녹아내렸다.

“여전히 명왕의 화공은 대단하시구려.”

“멸사 또한 예전과 변함이 없소이다.”

완벽하게 태우지는 못한 듯, 신명항이 독기에 구멍 난 소매를 슬쩍 보았다.

다시 스치듯 움직이는 완여붕!

차르르르-

사사검이 살모사의 꼬리와 같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최근에 깨우침을 얻은 무공이오!”

“얼마든지 상대해 주겠소.”

우우웅-

완여붕은 사사검을 잡은 손을 하늘로 향하며 폈다.

둥둥.

허공에 뜬 사사검.

‘어기어검?’

초절정의 내력을 넘어서야 펼칠 수 있는 경지의 무공.

완여붕 최후의 초식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렇다면…… 나 또한 최후의 무공으로 싸울 수밖에.’

지옥명왕장의 후구초식 광배염천(光焙炎天).

신명항의 손에서부터 일어난 화염이 점점 팔을 타고 전신으로 번졌다.

화르르르르-

완여붕은 화신(火身)이 된 신명항을 보며 숨을 죽였다.

“명왕, 마지막 한 수외다! 잘 부탁하겠소!”

천혈사사(天血死死).

사사검이 하늘을 가르자 허공에서 피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화염이 솟구쳤다.

콰아아아아-

거대한 기의 격돌.

슈우우우-!

공중에서 억수처럼 떨어져 내리던 천혈은 시간이 흐를수록 화염에 타들어가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터어어어엉-

화신으로 변한 신명항이 큰 걸음으로 뻗어갔다.

휘익!

완여붕의 코앞에서 사사검을 그대로 잡아채자,

화르르르-

화염이 번지면서 사사검을 붉게 물들었다.

순식간에 칼날로 번져 나간 불꽃은 곧 완여붕의 손으로 옮겨 붙었다.

‘욱……!’

사사검을 빼내기 위해 내력을 끌어 올렸지만, 빠지지 않는다.

휘이이익-

신명항이 자유로운 왼손을 폈다.

‘명왕의 미소……!’

죽음의 미소.

퍼어어억!

왼손으로 펼친 일장에, 완여붕의 어깨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커어억!”

완여붕은 단번에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충분히 그의 얼굴을 가격할 수 있었다.

완여붕은 머리를 조아리며 마지막 말을 뱉었다.

“졌…… 소이다.”

* * *

신려세가와 사음문에 대한 소문은 하루도 되지 않아 중원으로 퍼져 나갔다.

“대단하지 않아? 완전 사음문을 눌려 버렸대.”

“허허, 당연한 일이었다. 요즘이야 사음문이 이름깨나 높아져서 그렇지, 지옥명왕 신명항을 어찌할 수 있는 깜냥은 아니었느니라.”

만통자가 중간에 대답했다.

“만통자님, 그러고 보면 저쪽 동네도 복잡하네요. 정파만 어지러울 줄 알았거든요.”

“점점 무림이 혼란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조용했던 구천신품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중원에 일파만파 퍼져 나가지 않더냐.”

만통자의 말이 맞았다.

“누군가 일부러 사건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세요?”

“그러고 싶지 않은데……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구나.”

“음…… 이런 계획을 꾸밀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글쎄다. 만약 있다 하더라도 무림에 나타나겠느냐?”

만통자는 순간 미소를 짓는 남하림과 시선이 마주쳤다.

“네놈은 왜 웃느냐?”

“그냥…… 웃음이 나와서요.”

“비웃냐?”

“에이, 그게 아니라, 뭔가 아시는 듯한데 일부러 숨기는 것처럼 보여서 말이죠.”

“…….”

만통자는 말을 멈추었다.

‘저 자식…… 눈치가 너무 빠르니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어.’

후다다닥!

그때, 창걸이 전방에서 빠르게 달려왔다.

“후개님, 잠시 뒤에 성도에 도착할 것입니다.”

“알겠어요.”

반각이 지나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성도의 문이 나타났다.

성문 앞은 사천성 최고의 도시답게 정신없을 만큼 시끄러웠다.

웅성웅성.

성문으로 다가오는 수많은 거지들의 행렬.

구경거리가 생긴 일반인들의 시선이 거지 무리로 죄다 몰려들었다.

장추당 소속으로 성문을 지키던 수오단주 당소 또한, 성도로 다가오는 이백 여명의 거지 행렬을 발견했다.

‘개방의 거지?’

독전대항을 앞둔 시기라 성도의 분위기는 민감했다.

‘무슨 일이지? 개방의 거지들은 성도에서 함부로 몰려다니지 않을 텐데…….’

당소는 긴장하면서 다가오는 그들을 주시했다.

창걸이 앞서 성문에 도착했다.

“안녕들 하시오. 개방의 장구분타 창걸이라 하외다.”

“장구분타라면 성도에서 꽤 떨어진 거리이거늘, 성도에 무슨 큰일이 생겼소이까?”

“큰일은 아니고 본 방의 대영웅이신 걸협오성 다섯 분께서 성도에 가신다고 해서 내가 직접 모시고 왔소이다.”

‘걸협오성?’

개방도들 사이를 뚫고 나오는 다섯 사람.

눈에 익은 얼굴이 보였다.

“와아, 당소 형님이 아니십니까?”

“당…… 무독.”

“맞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어…… 반…… 갑다.”

걸협오성의 위명, 그중에서도 사천에서는 당문 출신 당무독에 대한 소문이 수없이 들려왔다.

당소는 망설이듯 쭈뼛거렸다.

“당소 형님, 여전히 훤칠하십니다.”

“뭐…… 나야 늘 똑같지. 근데 무슨 일로……?”

“아, 형님, 우선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당무독은 먼저 남하림을 가리켰다.

“본 방의 후개입니다.”

‘본 방이라…….’

당무독의 한마디에 당소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여전히 마음에 두고 있군.’

한때 당문 출신인데도 독을 만지지 못하던 당무독을 놀리면서 괴롭혔다.

개방에 기간 한정 제자로 가는 것도, 가장 만만했던 그가 갈 수밖에 없었다.

“남하림입니다.”

“후개의 소문은 많이 들었소이다.”

남하림에게서 흐르는 신위가 당소를 짓누르는 듯했다.

‘마치 가주님을 뵙는 것 같다.’

아무리 봐도 겨우 약관밖에 되지 않는 나이이건만.

그는 남하림의 무형기에 절로 압도되었다.

‘대단한 인물들이다.’

남하림뿐 아니라 당문에서 무시당했던 당무독을 포함, 모두가 자신이 가늠하기 버거울 정도의 무공 수준이었다.

“당소 형님. 우연히 서윤 형님의 상태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아하.”

“혹시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왔습니다. 서윤 형님께서는 어떻습니까?”

당소는 주위의 눈치를 보았다.

“그건…… 본 가에 가면 알게 되네.”

“아, 그렇죠. 제가 급했던 모양이군요. 알겠습니다.”

“내가 본 가까지 안내하지. 따라오게.”

“고맙습니다.”

당소는 앞장서서 걸협오성과 함께 온 만통자를 당문으로 안내했다.

그 뒤를 이백여 명의 개방도들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뒤를 따랐다.

* * *

‘끄으으응.’

당문 가주 당염청은 머리가 아팠다.

며칠 뒤에 있을 독전대항을 앞두고, 가장 중요한 당서윤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대체…… 어떤 독이기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건지 모르겠군.’

수많은 독문의 서적을 뒤졌지만 중독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똑똑.

그때, 가주원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가주님, 학소입니다.”

“들어오시게.”

드륵.

학소는 안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인가?”

“방금 정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걸협오성이 찾아왔습니다.”

“누구?”

당염청은 듣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개방의 걸협오성입니다. 그리고 만통자님께서도 함께하셨습니다.”

“걸협오성이라면 무독…… 그 아이도 왔는가?”

“네. 그런 모양입니다.”

“음……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후개와 만통자님이십니다. 가주님께서 만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알겠네. 당가원에서 만나지. 자네가 그들을 데리고 오게.”

당염청은 가주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그 아이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군.’

당염청은 당가원으로 가면서 당무독을 떠올렸다.

개방에 보낸 아이.

중원에 자자한 소문을 들을 때마다 아쉬움이 많았다.

‘아까운 녀석을 보냈어.’

어릴 때부터 당무독의 재능은 분명 뛰어났다.

독에 대한 이해력과 암기력은 자신의 아들인 서윤보다 훨씬 뛰어난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치명적인 단점을 지녔다.

독에 너무 민감한 체질이라, 독성에 면역되지 않는 한 독을 다룰 수 없었다.

독공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모두가 원치 않았지만 누군가는 개방에 가야 했으니, 당무독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개방만 좋은 일을 만들어주었어.’

당가원이 가까워졌다.

당염청은 순간 걸음을 멈췄다.

‘으으음, 이 정도였단 말인가?’

거대한 기가 느껴졌다.

저벅저벅.

계단을 오르며 당가원에 오르자 당가원 원주 당민이 그를 맞이했다.

“가주님, 오셨습니까?”

“걸협오성과 만통자께서 안에 있다고?”

“안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드륵.

당염청은 문을 열고 자리에서 일어난 인물들을 보았다.

‘걸협…… 오성.’

다섯 명의 청년.

순간, 그들에게서 광채가 솟구치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어깨에 사선으로 가방을 맨 당무독의 모습은 이제 어엿한 성인이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옥기린의 청년.

“무독이구나. 어릴 적 모습이 조금 남아 있군.”

당무독의 전신에 흐르는 무형기.

당문의 후기지수에게서 느낄 수 없는 절대자의 기가 느껴졌다.

‘허어, 이거 진짜로 개방만 좋은 일을 시켜주었구나.’

그는 당무독을 보면서 반가우면서도 아쉬움이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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