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조여하를 만나다
천년고목을 잘라 만든 바둑판.
바둑돌을 내려놓던 혈군사 기성의 손이 중간에 멈췄다.
부복한 흑의사내가 보고했다.
신려세가에서 일어난 사건.
#NAME?
괴동이 부상을 당했다면, 신려세가가 사음문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의미다.
‘신명항, 결국 나에게 적의를 드러내는구나.’
신려세가는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신명항은 천사회가 아닌 혈사천주의 뜻을 따르는 인물이었으니까.
‘언젠가는 사라져야 할 인물이지.’
“천주가 폐관을 마치고 나오기 전에 직접 신려세가를 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천주님의 노여움이 가득하실 것입니다.”
“그건 당연하겠지. 천주가 가장 신임하는 인물이니.”
하나 괜히 이번 기회를 놓치면, 후환이 될 수 있다.
천주가 다시 나타나기 전에 신려세가가 없어진다면 그라도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한 소리를 들으면 그만인 것을.
“사음문에 본인의 뜻을 전해라. 신려세가를 칠 것이다.”
“사음문 문주 완여붕이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하겠습니까?”
“클클, 본인의 명을 듣지 않는다면 나에게 죽는다는 것을 아는 인물이다. 물론 당근도 하나 준비해야겠지.
신려세가와 싸워 이긴다면 그들의 모든 것을 사음문에서 가져도 된다고 전해라. 그러면 움직일 테지.”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흑의사내는 대답 후 잠시 머뭇거렸다.
“한 가지 더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가?”
“혈사단이 당했습니다.”
빠직.
바둑돌이 부서지며 가루가 되어 바둑판에 흘러내렸다.
화산파에서 구천신품을 훔친 범인을 쫓던 혈사단이 전멸했다?
기성의 표정에 살기가 피어올랐다.
“화산파 도사 놈들에게 당했나?”
“아닙니다. 개방의 후개에게 당했습니다.”
“허, 또 그놈들인가?”
“송구하옵니다.”
‘또 거지 놈들과 엮이다니…… 그 녀석들과는 정말로 악연인 모양이군. 역시 동존할 수 없겠어.’
“그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구천신품을 찾으려는 것이겠지.”
기성은 결심을 내렸다.
“주작령을 보내라.”
“혈군사님, 그건…….”
“천사회에서 움직이기엔 시선이 너무 많아. 그 녀석들을 잡기 위해 움직이다 개방에서 날뛰면 무림맹에게도 괜히 빌미를 줄 수 있으니.”
“무림맹도 움직인다는 것은…….”
“제갈령. 그는 그렇지 않아도 천사회를 치기 위해 명분을 찾고 있던 인물이다. 지금까지는 선을 넘지 않았기에 가만히 있었을 뿐이고. 이미 우리 동맹은 끝이 났다고 봐야지.”
“알겠습니다. 주작령에게 지시를 전하겠습니다.”
혈군사 기성은 잠시 흥분했던 호흡을 가다듬었다.
“구천신품을 훔친 자의 정체는?”
“현천회가 의심스러워 보입니다.”
“현천회라.”
기성은 순간 실소를 지었다.
‘겁쟁이 놈들이 서서히 기어 나오는 모양이군.’
“그를 의심하는 이유는?”
“화산파 장서원에서 발견된 미혼독이 혼향심(魂香沈)인 듯합니다.”
“혼향심이라면…… 미향독녀(尾香毒女)가 주로 뿌리고 다녔던 독이지. 귀찮게 됐군.”
“그렇사옵니다. 근데 화산파에선 젊은 여인을 쫓고 있다고 합니다.”
“미향독녀가 그 나이에 돌아다닐 일은 없을 것이고, 전인이겠군. 주작령에게 현천회가 움직인다고 알려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척.
흑의사내는 서너 걸음 뒷걸음으로 물러난 뒤 사라졌다.
탁.
기성은 다시금 백돌을 바둑판에 내려놓았다.
‘바둑에 거기부정(擧棋不定)이라 했지.’
포석할 자리를 결정하지 않고 둔다면 한집도 이기기 어렵다는 뜻.
‘내가 두는 한 수 한 수는 명확한 방향이 있거늘. 이 녀석들 때문에 계획이 흩뜨려지고 있어. 신명항, 후개. 본인의 심기를 건드린 죄. 네놈들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살려주지 않을 것이다.’
* * *
“아악!”
“어허, 참으시오. 겨우 이 정도 상처 가지고 엄살은…….”
당무독이 화산파 도사들의 상처에 소독 가루를 뿌렸다.
“이 정도면 상처는 덧나지 않을 겁니다. 우선 응급처치는 했으니 돌아가거든 치료를 받으시고.”
“고맙소이다.”
“고마우면 오백 냥.”
“…….”
“아하핫! 무슨 정색을 그리 쎄게 하십니까. 농담인데.”
탁탁.
당무독은 손에 묻은 가루를 상처에 털어냈다.
명조도인이 포권을 했다.
마음에 들지 않던 이들 덕에, 목숨의 위기를 넘겼다.
“후개, 고맙네.”
“별말씀을. 상처가 심하니 돌아가시는 게 좋겠군요.”
“도둑놈을 잡아야 하는데…….”
“목숨보다 구천신품이 더 중요한지요? 그게 아니라면 돌아가셔서 몸조리를 하십시오.”
“……흐음.”
“장문인께서도 구천신품을 찾는다고 해도 어차피 화산파에서 가질 수 없는 물건이라 하셨습니다. 무림맹에 주기 싫었는데 차라리 잘됐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명조도인도 구천신품에 의해 잠깐 탐욕의 주화입마에 빠져들었다.
혈사단까지 나선 이상 구천신품은 몸에 지니기에 위험한 맹독이다.
“후개는 왜…… 구천신품을 찾으려고 하는 것인가?”
“군사님 성격이 더러우시니 찾는 시늉이라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후후, 그렇구려.”
군사의 성격을 한마디로 나타내는 남하림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제가 진짜 구천신품을 몇 개 봤는데, 중원에 떠도는 소문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정말로 구천마제의 기연이 숨겨져 있다면, 제가 미쳤다고 군사에게 줬겠습니까?”
“…….”
그 또한 후개가 산동악가와 신려세가에서 얻은 두 개의 구천신품을 군사 제갈령에게 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화산파에서도 구천신품을 수십 년 동안 지니고 있으셨잖습니까. 건진 게 있으십니까?”
‘……후개의 말이 맞군. 우린 그저 허울 좋은 기연에 탐욕을 가졌을 뿐…….’
스윽-
명조도인은 진심으로 후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후개, 미천한 노도인에게 깨우침을 줘서 고맙네. 더 이상 구천신품에 미련을 가지지 않겠네.”
“네. 몸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휘익!
남하림은 화산으로 돌아가는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만통자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았다.
‘가끔씩 하는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종잡을 수가 없군.’
“부장, 이제 어떻게 도둑을 찾지? 화산파 도사들이 돌아갔잖아.”
“노인장께서 서안으로 가면 된다고 했잖아. 아마 비상시를 대비해 사전에 약속했던 접선 장소가 있겠지.”
“아항. 만통자님, 맞습니까?”
“허어…… 그렇네.”
“그럼, 빨리 갈 필요가 없겠네요! 다 같이 천천히 가요.”
“이보게들…… 당장 쫓아오는 사람들이 없다고 해도 빨리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천사회에서 다시 올 수도 있고…….”
“지금까지 안 잡힌 것을 보면 도망가는 솜씨가 상당히 좋은 것 같은데요. 걱정 안 해도 되겠어요.”
스윽.
남하림은 돌아서서 느긋하게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다른 네 사람도 천천히 따랐다.
‘이 녀석들이…… 노인네 속이 터져 죽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냐…….’
* * *
휙!
쨍그랑!
조여하는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바닥에 던졌다.
“젠장.”
붉은색의 파편.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그냥 진품인 줄 알았다.
그런데 우연히 반지를 살피는 도중 구천마제의 문양이 지워졌다.
아주 깨끗하게.
“쳇. 화산파 도사 놈들이 이런 잔머리를 쓸 줄이야.”
그녀는 잠시 멍하게 깨진 반지를 보다가 주워 들었다.
“지금 돌아갈 수도 없잖아. 서안에서 만통자 어르신을 만난 뒤 어떻게 할지 의논해야겠어.”
그때,
‘엇, 이건…….’
주위에서 살금살금 다가오는 기.
휘익!
조여하의 신형이 사라졌다.
잠시 뒤.
차악-
십여 명의 도의를 입은 도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한 갈의도복.
종남파의 도사들이다.
“킁킁, 장주님. 방금 전까지 이곳에 있었습니다.”
천용당 당주 중조는 인상을 썼다.
“대단한 년이군. 우리 기척을 알아내다니…… 하지만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터.”
“두자수! 다시 그년을 찾아라.”
“넵, 장주님.”
두자수는 후각이 일반 사람보다 뛰어났다.
킁킁.
“저쪽 방향입니다.”
조여하의 신형에서 흐르던 냄새를 찾아낸 두자수가 신형을 날렸다.
휘이이이익!
조여하의 머리카락이 세차게 휘날렸다.
혈사단과 화산파까지 처리한 이상 서안까지는 편안하게 가겠다 싶었건만!
‘아, 망했어. 종남 도사들에게 제대로 걸렸네.’
방심했다.
주위에서 수많은 기들이 흐르며 점점 포위망을 좁혀왔다.
벗어나고자 빠르게 움직였지만, 종남파의 천라지망(天羅地網)을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어떻게 빠져나가지?”
서안으로 갈수록 종남파의 영역과 가까워진다.
“왜 날 잡으려고 하는 거야? 벌써 소문이 종남파에도 퍼졌어?”
조여하는 포위망의 구멍을 찾으며 머리를 굴렸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서안까지만 가면 되는데…….’
하지만 과연 이 천라지망을 뚫고 서안까지 갈 수 있을까?
꼬르륵.
며칠 동안 쫓기느라 제대로 먹은 것도 없다.
‘생각보다 너무 꼬였어. 이럴 줄 알았으면 비상식량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신법을 장시간 동안 펼칠 수 있으니, 계속해서 달리면 중원에서 자신을 따라 잡을 사람이 없다고 확신했다.
자만이 만악의 근원이다.
“후, 내가 지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야. 조금이라도 쉬는 기색을 보이면 들어올 수도…….”
종남파는 급하지 않게, 천천히 포위망을 유지하면서 그녀의 뒤를 쫓고 있었다.
“후후후, 조금씩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지는군.”
“당주님, 이 속도로 움직인다면 한 시진 뒤에 우자림(宇紫林)에 들어설 것입니다.”
“우자림이라…….”
종남파 천용당 당주 중조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잘됐군. 전방에서 움직이는 제자들에게 연락해라. 우자림에서 한 발자국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세 겹, 네 겹으로 막는다.”
“네, 알겠습니다!”
삐이이익-
종남파 도사가 빠르게 신호를 보냈다.
‘여기는…….’
우자림.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뻗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이어졌다.
계속 달린다면 모를까, 앞에서 막고 있다면 그녀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어쩌지?’
우자림으로 들어서면 어쩔 수 없이 움직임에 제약이 생긴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방향을 돌릴 수도 없다.
‘완전히 포위됐어.’
두두두두-
뒤에서 거친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쯧. 할 수 없군. 이곳을 넘어갈 수밖에.”
혀를 한 번 찬 조여하가 우거진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일각 후.
샷! 샷! 샷!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나뭇잎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피이이잉-
‘암기!’
나무들 사이로 가느다란 비검이 날아왔다.
조여하는 내력을 좀 더 끌어 올려 신법에 박차를 가했다.
팟! 팟! 팟!
암기들이 그녀를 스쳐 지나가며 나무에 그대로 꽂혔다.
‘훗, 이 정도로는 나를 맞힐 수 없어.’
그녀는 아직도 여유가 있었다.
조금 더 가면 우자림을 벗어난다.
‘여기서 따돌리면 천라지망을 벗어난다!’
우자림만 벗어나면 종남파의 천라지망을 뚫을 수 있을 터!
“어딜 가느냐?!”
타아앗!
그때,
십여 명의 도사들이 전방에서 날아오르며 조여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번쩍.
조여하를 향해 쏟아지는 열 가닥의 검기!
휘릭!
그녀는 공중에서 옆으로 몸을 날려 나무 사이로 검기를 피했다.
“여기도 있다!”
“윽!”
일렬로 서 있던 종남파의 도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검을 앞으로 쭉 뻗었다.
슈우우욱-!
도사들이 검기가 빛살처럼 빠르게 날아들었다.
‘앗!’
조여하는 뒤로 몸을 한껏 젖히며 검을 피했지만,
휘익!
그녀가 움직이는 방향마다 종남파의 도사들의 검이 휘둘러졌다.
‘빠져나갈 수 없어!’
조여하는 처음으로 당황했다.
퍼어어엉-!
위기에 몰리자, 그녀는 재빨리 연막탄을 터뜨렸다.
휘이잉-
하지만 빽빽한 나무 사이로 부는 세찬 바람에, 검은 연기는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건 또 뭐야!’
그녀의 얼굴에는 점점 다급함이 올라왔다.
종남파 도사들이 지근거리까지 포위망을 좁혀왔다.
“후후후후, 이젠 도망 갈 곳이 없는 모양이군.”
“……쯧.”
조여하는 뒤로 돌아보았다.
중조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도둑년을 드디어 잡았군.”
“도둑년이라고? 내가 뭘 훔쳤다는 거지?”
“하하하! 도둑년이 얼굴 낯짝도 두껍구나.”
“당신은 누구야?”
“본도는 중조라고 한다.”
“항일검(抗日劍) 중조. 대단한 분이 납시셨네.”
“본도를 잘 아는군.”
“당연히. 종남오검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말이라도 고맙군. 그건 그렇고, 화산파에서 가지고 온 물건을 구경하면 좋겠는데.”
조여하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믿을진 모르겠지만, 나에게 없다면?”
“본도와 농담을 하려는 것이냐?”
“이 시국에 무슨 농담을 한다고 그래?”
“……!”
‘이년이 말끝마다 반말이군.’
중조의 눈빛에 살기가 비쳤다.
“할 수 없지. 잠시 본 파와 함께해야겠군.”
“그건 됐어.”
“됐다면 물건을 내놔. 강압적으로 나가기 전에.”
“진짜로 없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화산파에서 분명 훔치지 않았느냐?! 거짓말은 소용이 없다!”
“……가지고 오긴 했는데. 가짜였어.”
채애애앵-!
중조가 조여하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좋게 대해주니 본도가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군. 뭣들 하느냐! 이 도둑년을 당장 포박하라!”
휘익-!
조여하의 머리 위로 철망이 날아왔다.
“앗!”
다급히 옆으로 피하려 했지만, 종남파의 도사들이 바짝 다가서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당황한 표정을 짓는 순간,
도광(刀光)이 번쩍였다.
‘누구?’
스걱!
철망이 마치 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웬 놈이냐!”
중조는 철망을 잘라낸 팽유도를 보며 소리쳤다.
‘반도?’
거지복을 입은 청년.
“……도천걸?”
조여하가 앞을 막아선 사내를 멍하게 쳐다봤다.
‘이자가 왜 나를 도와주지?’
순간 어리둥절하던 그녀는 만통자가 이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중조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대가 왜 나서는 것인가?”
“그건 우리 부장이 가르쳐 줄 겁니다.”
“부장이라니?”
“저기 보이지 않나요? 세상에서 제일 잘생기고 싸움 잘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