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재회
화려하면서도 험준한 산세.
서악 화산.
이곳에 중원 무림의 이대 도가로 알려진 무림 명문정파, 화산파가 자리 잡고 있다.
반짝!
눈부신 빛에 팽유도가 미간을 찌푸렸다.
‘으아.’
찰랑거리는 머릿결에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하림 형!”
스윽.
남하림이 고개를 돌렸다.
“왜?”
“혹시 우리 몰래 머리카락에 따로 뭐 발라요?”
“따로? 없는데…… 왜?”
“형 머리카락만 유독 반짝 찰랑 빛이 나잖아요.”
“아, 난 또 뭐라고. 그건 어릴 때부터 관리를 잘해서 그런 거야. 유도도 지금부터 신경 쓰면 갈수록 좋아질 수 있지.”
탁!
당무독이 다가와 팽유도의 어깨를 감쌌다.
“유도야, 그냥 포기하는 게 좋아. 뱁새가 황새 따라하면 다리 찢어져. 부장처럼 되려면 머리를 하루 한 번 감은 뒤 마르기 전에도, 마른 후에도 해홍화(海紅花) 기름을 꾸준히 발라야 해. 우린 돈이 없기도 하지만, 있어도 물건 구하기 힘들어.”
“아항…….”
팽유도는 하림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잡은 후 문질렀다.
“으엑. 뭐 하냐.”
“와, 진짜 비단보다 더 부드럽고 매끄러워요.”
“그래? 나도 한번.”
성철각도 손을 뻗었다.
“와아, 진짜 찰랑거린다. 희한하네.”
그렇게 하림을 둘러싼 일행이 희희낙락(喜喜樂樂) 걸어가는 사이.
‘……저것들이 대낮에 뭣들 하는 짓이여.’
멀리 길가에 앉아 있던 노인이 눈꼴사나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눔들아, 봤으면 빨리 오지 않고 뭘 하느냐?”
“앗, 노인장께서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저 녀석이 아직도 노인장이라고……!’
동평에서 헤어졌던 만통자가 틀림없었다.
“만통자님, 그동안 무탈하셨습니까?”
팽유도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래도 네놈의 인사성이 제일 낫구나.”
만통자 앞에 차례대로 도착한 나머지 세 사람도 인사를 했다.
“무탈하셨는지요?”
“나야 늘 건강하지. 한심걸, 자네도 잘 지냈는가?”
“별일 없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한 명.
남하림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아. 넌 안 반갑다. 웃지 마라.”
“노인장 얼굴에 보고 싶었다고 다 적혀 있습니다.”
“하여튼 네놈은 몇 달이 지나도 변한 게 하나도 없군.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음…… 얼굴색이 더 좋아지신 걸 보면 그동안 돌아다니면서 한탕 잡으셨나 봐요.”
휙!
만통자가 손을 뻗었다.
타악!
물론 중간에서 막혔다.
씨익.
“많이 늦네요. 이래서 한 대라도 때릴 수 있으실지…….”
“허어……! 이런 놈이 무슨 무림의 대영웅이니 대협객이니…… 세상 사람들이 이 싸가지를 직접 봐야 하는데…… 에잉.”
“제가 언제 노인장을 무시했다고 그러세요. 그냥 반가워서 그런 거죠. 그리고 사실 점괘는 맞는 것보다 틀린 게 많잖아요.”
“됐다, 이놈아. 괜히 왔어.”
“하하, 괜히 왔다는 말은 일부러 오신 거군요? 전 그냥 우연히 만난 줄 알았는데.”
만통자는 흠칫했다.
어차피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다들 눈치챘겠지만, 그걸 자신의 입으로 다 불어버릴 줄은.
“그래, 네놈들 만나러 왔다.”
“왜요? 우리가 보고 싶으셨던 건 아닌 것 같고.”
‘이 녀석…… 점점 속마음을 읽을 수가 없군.’
무작정 입 밖으로 내뱉는 말처럼 보이지만 허튼소리가 아니다.
“대답을 안 하시는 걸 보니 뭔가 중요한 볼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하하, 그래도 아는 얼굴을 뵈니 반갑긴 하네요.”
“흥. 엎드려 절 받기구만. 공경의 공 자도 모르는 녀석이…….”
와락.
남하림은 그를 덥석 안았다.
“하하하, 완전 삐치셨네요.”
“떨어져라. 이 녀석아! 사내놈이 달라붙어서! 징그럽다! 떨어져!”
스윽.
한바탕 드잡이질 이후.
남하림은 옆에서 걷는 만통자를 슥 보았다..
“뭘 보느냐?”
“등에 지고 다니시던 점통이 안 보여서요. 밥줄을 어디에 버리셨어요? 아, 혹시 점이 하나도 안 맞는다고 소문 나셨어요? 아님 정말 크게 한탕 하신 건가?”
“휴우…… 됐다. 네놈하고 말을 하면 끝이 안 나. 입이 아프다.”
“에이, 궁금한데 알려주세요.”
“네놈 말대로 당분간 점은 접었다.”
“헉, 그럼 뭘 먹고사시게요? 모아놓은 재산도 없을 것 같은데…….”
“부자인 네놈 따라다녀야지. 이번에 호북상국과 표강표국도 꿀꺽했다지?”
“아니, 꼭 내가 도둑놈인 것처럼 이야기하시네. 원래 제 것이라 가지고 간 거예요.”
“헹.”
“여하튼 그것도 알고 계시다니 대단하네요. 노인장도 어디 이상한 조직에 가입하셨는가 보죠?”
“이상한 조직은 무슨…… 네놈에게 관심이 있으니깐 알게 된 거다.”
“그렇다면야…… 그래도 염려가 돼서 하는 말인데, 나쁜 조직에는 들어가지 마십쇼.”
‘졸지에 나쁜 조직이 되었군. 허허.’
휙.
만통자는 뒤에서 따라오는 네 사람을 보며 소리쳤다.
“이눔들아, 이 녀석을 따라다니는 이유가 뭐냐?!”
“우리 부장이니깐요.”
성철각이 히죽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게 이유냐?”
“네.”
‘쩝, 이 녀석이 워낙 이상해서 그렇지 저놈들도 만만치 않게 이상한 놈들이야.’
* * *
휘익.
삼십 대 정도의 사내가 말 위에서 내렸다.
쿵.
살이 찐 육중한 몸매.
사각형 얼굴에 두꺼운 매부리코 때문인지 고집이 강해 보인다.
“이 공자, 오늘은 늦었으니 여기에서 하루를 보내고 가겠소이다.”
“장 장로, 그렇게 합시다.”
괴동 장약금은 사음문 이 공자 완비연과 함께 객루로 들어섰다.
덜컹.
점소이 호진이 주방에서 달려 나왔다.
‘헉, 뭐야…….’
점소이는 장약금과 완비연을 보면서 순간 멈칫했다.
“어서…… 오십시오.”
“방이 필요하다.”
“네에, 네에……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호진이 두 사람을 데리고 객실로 올라갔다.
“……방금 올라간 괴인은 사음문의 괴동 장약금이다.”
“저자가 왜?”
“세가에 연락해야겠어. 세가의 영역에 사음문이 들어왔다.”
“알겠네.”
휘익!
곧이어 객잔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사내가 객루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신려세가 정문.
아수군 군장 대하벽이 전방을 노려보았다.
“괴동, 오랜만이오.”
“크큭. 누군가 했더니 지옥검향(地獄劍香)이 아닌가. 우리가 안 본 지 십 년이 넘었지 않소?”
“정확히 십이 년이오. 창선포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지.”
차악!
장약금이 허벅지를 치며 웃었다.
“크크큭, 기억력이 참으로 좋소이다. 내 왼손 엄지를 잘라버린 인물이 누군지 잊고 있었군.”
“참으로 아까웠지. 그대의 목을 자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큭큭, 만일 그대가 내 목을 노렸다면 누가 먼저 죽었을지 모를 일이외다.”
신려세가와 사음문은 본디 한 지역의 패권을 두고 싸운 가문.
만일 천사회의 중재가 없었다면 두 곳 중 한 곳이 멸문할 때까지 싸웠을 것이다.
그리고 휴전하는 조건으로 자식들 간의 혼례를 치르기로 결정했던 것.
“사음문에서 본 세가에 볼일이 없을 텐데. 무슨 일로 왔지?”
스윽-
그때, 괴동의 옆으로 뚱뚱한 사내가 다가섰다.
“본인은 완비연이다. 그대가 지옥검향 대하벽인가?”
빠직!
순간 인내심이 부러졌다.
‘어린놈이 반말을.’
대하벽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사음문 문주의 둘째 자식.’
그는 완비연을 보면서 내심 다행이라 여겼다.
‘아가씨께서 이런 돼지 새끼에게 시집을 갈 뻔했다니. 천만다행이군.’
“이 공자, 말이 짧소이다.”
“하하, 발끈하는 걸 보니 기분이 나쁜 모양이군.”
슈우욱.
대하벽이 살기를 뻗어냈다.
“큭, 지옥검향, 그만 살기를 거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괴동 장약금이 나섰다.
대하벽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당장 찾아온 이유를 말하라.”
“우린 두 가문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어긴 신려세가에 책임을 묻고자 왔다.”
“…….”
“당장 신려세가의 가주를 만나 일방적으로 파혼한 일에 대한 사과를 받을 것이다.”
“감히 누구에게 사과를 받겠다는 것이냐! 그리고 아가씨께서 돼지 같은 네놈을 좋아할 것 같은가? 꿈에 나올까 겁이 나는군.”
쉬익쉬익.
완비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콧구멍에서 숨소리가 거칠게 새어 나왔다.
“뭣이…… 돼지…… 라고?”
투우웅!
완비연의 몸이 바닥에서 튕겨 나가듯 대하벽을 향해 달려들었다.
휙. 탁!
대하벽은 오른손을 뒤로 뺀 후 왼손과 함께 겹치며 완비연의 신형을 막아냈다.
쿠우웅!
그의 육중한 무게에 대하벽은 서너 걸음 뒤로 밀렸다.
‘신력이군.’
물렁살이라 힘이 약할 줄 알았다.
‘더 이상 밀리면 안 된다!’
슈우우욱-
대하벽은 다시 오른팔에 내력을 올려 앞으로 쏟아부었다.
퍼어어억!
완비연의 복부가 쑤욱 들어가면서 곧바로 튕겨져 나왔다.
터어어엉!
‘이 자식……! 괴물이군.’
“하하하, 지옥검향의 무공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모양이지?”
“…….”
척!
대하벽은 검을 잡았다.
끝을 볼 생각이었다.
“잠깐, 여기서 멈추는 게 좋겠군.”
괴동이 앞으로 나오며 두 사람 사이에 섰다.
“장 장로, 왜 말리는 것이오? 이 자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소!”
“이 공자, 우리는 지금 고작 정문을 지키는 이들과 싸우고자 온 것이 아니외다. 저들에게 무례함에 대해 사과를 받고자 하는 것이지. 싸움은 언제든지 할 수 있지 않겠소이까.”
“쳇, 알겠소.”
완비연은 마지못해 물러나면서도 대하벽을 향해 살기를 쏟아부었다.
* * *
만통자는 흥분했다.
그렇지 않아도 만나면 따질 생각이었다.
“산동악가에서 찾은 구천신품을 네놈이 가지고 있었다면서? 맞느냐?”
“네. 맞아요.”
“분명 그때는 모른다고 하지 않았느냐?!”
“당연히 그 자리에서 내가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순 없었죠. 거기다 산동악가에서 처음 뵌 분한테.”
“……!”
남하림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근데 너무 화가 났다.
“내가 못 미더우냐?”
“구천신품에 관한 것이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럼 문제없잖아요.”
또 말렸다.
“네놈 때문에 쫓겨난 악군악이 불쌍하지도 않더냐? 그를 부상까지 입혔다면서?”
“우와, 정말 모르는 게 없으시네요. 노인장은 정말 그를 동정하십니까? 먼저 싸움을 건 데다, 전부 그가 뿌려놓은 씨앗이었는데요.”
“……그것도 맞지만. 매정한 놈.”
“마음대로 부르세요.”
“치사한 놈…… 물어봐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는 녀석에게 내가 뭘 바라겠누…….”
남하림은 다시 만통자를 바라보았다.
“그럼 노인장이 가입하신 이상한 조직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으세요?”
“…….”
“봐요. 못 하잖아요. 하지만 노인장께선 지금 우리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고 있겠죠.”
“흥, 그래. 알고 있다. 화산파에 구천신품을 가지러 간다고 하더군.”
“역시. 그래서 우리를 기다리셨군요. 요놈의 세상은 속고 속이는 게 참 일상이야.”
“세상이 그런 것이지. 속지 않으면 될 뿐이다.”
“좋은 말씀이에요. 속지 않으면 된다. 마음에 들어요. 그렇다면 더 열심히 속여도 문제가 없겠네요.”
“오냐. 네놈이 그건 잘하지. 여전히 피곤한 녀석. 이번에도 구천신품을 얻으면 군사에게 줄 테냐?”
‘신려세가에서 얻은 구천신품도 알고 계시군.’
씨익.
남하림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군사의 부탁으로 화산파에 가지러 가는 길이니까, 주고 싶지 않아도 줘야 하지 않을까요?”
“네가 가서 구천신품을 달라고 하면 ‘여기 있습니다’ 하고 잘도 주겠다.”
“‘주세요’ 하면 그냥 줄 거라던데요?”
“어떤 미친 녀석이 그런 말을 하더냐?”
“아하하! 내가 봐도 미친 게 맞는데, 군사가 한 말이라서.”
“넌 바보냐? 그 말을 믿게?”
만통자는 눈에 힘을 주었다.
“……제 생각엔 줄 것 같아요.”
‘어휴…… 이걸 그냥.’
만통자는 천진난만하게 쳐다보는 남하림을 한 대 치고 싶었다.
“노인장이 가입한 조직에서도 구천신품을 원하는가요?”
“……흥.”
만통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여하튼 눈독 들이지 마세요. 삶아 먹든 구워 먹든 내 손에 있을 때는 내 것입니다. 이상한 생각 하시면 정말 다칠지 몰라요.”
“허허, 이젠 협박까지 하려는구나.”
“그게 아니라, 서로 좋은 얼굴로 지내자는 뜻이잖아요.”
“네놈만 잘하면 다들 조용히 지낼 수 있다, 이눔아. 그리고 우린 네가 생각한 것만큼 나쁜 조직은 아니야.”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몇 명이나 있어요?”
“왜, 관심이 생기는 모양이지? 너도 들어오고 싶으냐?”
“아니, 그게 아니라 노인장같이 나이 많은 사람도 받아줘야 할 만큼 인원 부족인가 싶어서요.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 분을 현장에서 죽도록 고생시키다니 고연 놈들…… 수당은 주나요?”
“이 자식이!! 네놈 여기서 진짜 죽어봐라!!”
휘익!
만통자가 달려들기 직전, 남하림의 신형은 이미 앞으로 쌩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