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군사의 명
슈우우욱-
유극지는 구단공에서 슬쩍 십단공으로 내력을 끌어 올렸다.
‘어떻게 된 녀석이…… 내력이 이 정도로 강하다니.’
남하림의 전신에서 뻗어 나온 기는 구단공으로 상대하기에 버거웠다.
십단공의 내력으로 무공을 펼치는 것은 그로서도 오랜만의 일.
‘그러고 보니 그때가 마지막이었군.’
구천마제와의 마지막 결전을 떠올린 그가 피식 웃었다.
차악!
슈욱-
남하림이 양발을 벌리고 금강수체를 펼치자, 황금색의 금강력이 온몸을 감쌌다.
‘흐음…… 대단하군.’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호신강기에 유극지가 호기심을 보였다.
콰아아아아아왕---!
단번에 펼쳐지는 강룡파세(降龍破世)의 초식!
남하림의 손에서 뻗어나간 일장.
강룡의 거친 기세가 유극지를 단숨에 덮치기 위해 날아들었다.
‘멋진 일장이군. 그럼 나도……!’
우우우우웅-
유극지가 일장에 내력을 끌어 올렸다.
푸른 장막이 서서히 커지면서 전방을 덮친 강룡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콰콰콰콰아아아!
세상에 이보다 강대한 기는 없다는 듯, 사위가 진동했다.
전신의 힘을 다한 남하림과 유극지.
하지만 두 사람의 차이는 얼굴에서 바로 나타났다.
편안한 표정의 유극지와는 달리, 남하림의 얼굴에는 핏줄이 곤두서 있었다.
‘세기만 완벽하게 다룬다면 가히 오 년 내에 충분히 적수가 될 수 있겠어.’
곧바로 이어지는 은하암공(銀河暗空).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번쩍!
유극지의 손에서 다시 푸른빛이 퍼져 나갔다.
‘우우욱- 이건…… 도저히…… 막을 수가……!’
승부를 결정짓는 최후의 초식.
그대로 있다가는 유극지의 공격에 몸이 잠겨들 터.
그때,
남하림의 몸을 보호하던 호신강기가 떨리기 시작했다.
유극지의 공격에 의해 소멸하기 직전의 상황.
그리고 눈부신 황금빛을 발하며 마치 살아 있는 듯, 최선의 방법을 스스로 찾아냈다.
퍼어어어엉-!
금강력이 스스로 폭발하며 은하암공을 벗어났다.
이휘연의 손에 땀이 찼다.
‘막아냈어. 천하제일인의 공격을.’
털썩.
충격에 받은 남하림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끄으으응.”
“하림 형, 정신이 들어?”
눈을 뜨자 자신을 둘러싼 동료들이 보였다.
“괜찮아?”
“젠장…… 내가 기절했어?”
스윽.
남하림은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 몸을 살폈다.
“죽을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역시 부장은 튼튼해. 난 아무 일 없을 줄 알았어.”
성철각은 말과 달리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남하림이 주위를 살폈다.
“맹주님은?”
“여기 있네.”
유극지는 예설란과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역시 젊음이 좋구만. 금방 일어나는군.”
“……제가 남들보다 튼튼한 편이죠.”
“후후후, 그런 듯하구만.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무엇입니까?”
“개방의 무공만 익힌 것 같지는 않더군.”
“어릴 때 집에서 심심풀이로 익혔습니다.”
“심심풀이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 말해줄 수 있겠는가?”
“맨입으로요?”
“거 장사꾼 아들 아니랄까 봐 나와 흥정을 하는구나.”
“사람을 상대할 땐 삼 할은 숨기라는 말이 있지요. 아버지께선 최소한 오 할은 숨기라고 하셨지만.”
“가르쳐 주지 않겠다는 말이군.”
“이것도 엄연히 따지면 제 장사 밑천인데 쉽게 까발릴 순 없죠. 앞으로 또 싸우게 될지도 모르는 분인데.”
“하핫, 네 말이 맞다. 언젠가는 싸우게 되겠지. 네가 천하제일인이 되고자 한다면 나를 꺾어야 할 게다.”
이미 날은 어두워졌다.
예설란은 다섯 명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늦었으니 불편해도 이곳에서 자는 게 좋겠어요. 저를 따라오세요.”
“검후님께서 신경을 써주시니 감사합니다.”
“후후, 오랜만에 젊은이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니 즐겁군요.”
* * *
무림맹의 금지(禁地).
여명(黎明)이 길게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밖에서는 시린 검명(劍鳴)이 울려 퍼졌다.
남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레 밖으로 나왔다.
무림맹주 유극지와 검후 예설란.
검무를 추는 듯한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름답군.’
세상에 어떠한 광경이 이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
예설란의 하늘거리는 옷자락을 따라 백색 검이 긴 꼬리를 만들며 원을 그렸다.
그 사이로 유극지의 청의검이 푸른빛을 내며 예설란의 몸을 휘감고 벗어났다.
화르르-
백색과 청색의 합일로 청백의 꽃이 만들어지면서 하늘을 수놓았다.
스윽.
어느새 그를 따라 나온 이휘연이 다가섰다.
“검의 극의에 다다른 검무군.”
“형도 저 정도 할 수 있잖아요.”
“할 수는 있겠지. 저분들처럼 아름답지는 않겠지만.”
두 사람은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반각 동안 조용히 지켜보았다.
스르르릉-
하늘로 솟아오른 청백의 꽃.
아래로 떨어지는 한 송이, 한 송이가 청의검과 백의검의 검신 위로 앉았다.
유극지와 예설란은 검신에 올라앉은 꽃을 허공으로 다시 날렸다.
차아아앙-
청백의 꽃잎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스러졌다.
그들의 비무가 끝이 났다.
유극지와 예설란은 검집에 검을 넣었다.
유극지가 남하림과 이휘연을 보며 돌아섰다.
“일찍 일어났군.”
“제가 지금까지 본 비무 중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남하림의 칭찬에 예설란은 기분이 좋아졌다.
“고마워요.”
“어떤가? 아침에 차 한잔 마실 시간은 있는가?”
“급한 일은 없습니다.”
“어제 무림맹을 떠나려 했으니 물어봤네. 그럼 여기서 한잔 마시고 가게나.”
“좋습니다.”
차를 준비하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간 예설란을 보며 유극지가 말을 꺼냈다.
“자네는 군사를 어찌 생각하는가?”
“…….”
남하림은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아는 군사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사람이지. 아마 자네에게 무시당했다고 화가 났을 게야.”
“제가 잘못한 것도 없지 않습니까?”
“후후후, 그것을 떠나 군사가 화가 났다는 게 문제라는 것이지. 내가 자네를 여기에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분명 큰일이 났을 게야. 신려세가는 물론이고, 은근히 남천상국과 개방을 괴롭히는 계획을 세우고도 남을 인물일세.”
“만일 그렇다면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네. 자네도 보통이 아닌 것은 알지만 그 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칠 수 있으니까.
“……처음부터 무림맹에 오지 않는 건데. 완전 꼬였네.”
“후개, 갈수록 힘들어지는 이유가 뭔지 아는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지켜야 할 게 많아지기 때문이지.”
“맹주님도 그러하십니까?”
“후후후후.”
남하림의 물음에 유극지는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 * *
결국 무림맹을 나갈 생각을 바꿨다.
금지에서 나온 후, 다섯 명은 영화당으로 돌아왔다.
후령이 목욕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다시 돌아올지 알았습니까?”
“군사님의 전언이 계셨습니다.”
“완전 귀신이네요.”
“바로 물을 받아 놓을까요?”
“그렇게 해주세요.”
끼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수증기가 가득했다.
남하림은 욕조에 몸을 깊숙이 담갔다.
쑤욱.
그러고는 얼굴을 완전히 물속에 담근 뒤 그대로 멈췄다.
‘군사의 기분을 맞춰주면 편안하다…….’
하림이 보기에 군사는 자존심보다는 자부심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맹주는 사실 무림맹에 큰 관심이 없었고, 실제 권한을 지닌 인물은 군사 제갈령.
‘무림맹은 군사의 뜻을 실행하는 곳이군.’
다만 무림맹주는 군사의 뜻에 대해선 말문을 닫았다.
‘대체 두 사람의 관계는 뭐야?’
한참 생각하던 남하림이 머리를 물 밖으로 꺼냈다.
“퓨후…… 하는 수 없군. 무림맹을 간단히 나가려면 심부름을 해주는 수밖에…….”
* * *
똑똑.
문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구대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후개님, 군사님께서 오셨습니다.”
“군사?”
뜻밖의 인물.
생각지도 못했다.
걸협오성이 의문의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드륵-
제갈령이 봉황선을 한 손으로 가볍게 흔들며 들어섰다.
“다들 편히 쉬었는지 모르겠네.”
“잘 쉬었습니다.”
“얼굴들을 보니 그런 것 같군.”
제갈령은 자연스레 빈자리로 가 앉았다.
“맹주님을 만나 보니 어떠하던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은 분이시더군요.”
“맞네. 딱히 뭐라고 설명하기 애매한 분이시지. 구천마제를 물리친 천하제일인이라 설명하기에도 아쉽고.”
남하림도 그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으, 저 눈동자가 또.’
제갈령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변했다.
남하림은 그가 머릿속에 기어 들어오는 느낌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살랑살랑.
제갈령이 봉황선을 가볍게 흔들었다.
“부탁을 들어주면 신려세가 문제는 그냥 넘어가겠네.”
“……한 가지면 됩니까?”
“현재로서는.”
한 가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일단 부탁이 뭔지 들어나 보죠.”
“어렵지 않네. 여태까지 자네들이 하던 일이니까. 화산파에 가서 구천신품을 가지고 오게.”
“…….”
“무림맹의 이름으로 가면 줄 것이네.”
“농담이 아닌 건 알겠는데 어째 농담처럼 들리는군요.”
“하하하하!”
제갈령은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말이었네.”
“마음에 들고 싶어서 한 말은 아닙니다. 군사님께선 화산파서 구천신품을 가지고 오는 것이 정말 쉬울 거라 생각하십니까?”
다른 곳도 아닌 화산파다.
“그러니 자네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닌가.”
스윽-
팽유도가 손을 들었다.
“정말로 궁금해서 여쭙는 것입니다. 군사님께서 직접 화산파에 가셔서 요청하면 더 쉽게 주지 않겠습니까?”
“내가 직접 가서 받아올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가겠네. 한데, 만약 그들이 들어주지 않을 경우 치러야 할 대가가 커지지.”
“……화산파를 칠 수 있습니까?”
“백리세가도 쳤는데 못할 것은 없지. 아니 그런가?”
‘백리세가는 완전 잘못 걸렸구나. 제대로 본보기가 되어버렸어.’
흔들.
봉황선이 흔들렸다.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으려면 누군가는 욕을 먹어야 하지.”
“그 욕을 걸협오성이 먹어야 한단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무림맹의 이름으로 나선다면 중원 무림에 보기가 좋지 않을 게야.”
“우리가 없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었습니까?”
“누군가 대신 했겠지. 자네들보다 잘하진 못했을 거고. 지금 자네들의 위명은 화산파에서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정도니까.”
“누군가에 무림맹도 포함되는 것인가요?”
“그럴 수도 있지만, 내키지는 않지. 연합체의 조직을 움직이려면 사심이 없는 명분이 필요하거든. 이해가 가는가?”
‘그놈의 명분.’
“게다가 무림맹이 움직이면 그에 상응하는 또 다른 세력이 움직인다. 이게 무림의 이치라네. 물론 자네들이 큰 싸움을 원한다면 굳이 가지 않아도 좋아.”
“왠지 우리가 가지 않으면 무림에 피바람이 불도록 만들겠단 협박처럼 들리는군요.”
“하하, 그러지 않도록 그대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닌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가?”
“왜 구천신품을 가지려고 하시는 겁니까?”
“흐음, 이 정도는 심부름에 대한 답례로 알려주지. 구천마제는 공신 해정에게 열 개의 구천신품을 의뢰하면서, 물건에 자신의 것임을 증명하는 증표를 숨겨두었네. 그의 이름 말이야.”
“겨우 구천마제의 이름을 알고자 찾는 것입니까?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닌 것 같은데.”
“하림 형, 중원에서 구천마제의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은 한 명밖에 없어요.”
팽유도가 슬쩍 끼어들었다.
“맞네. 오직 맹주께서 그자와 대면을 했을 뿐.”
“맹주께서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죽은 자를 보긴 했지. 하지만 그가 구천마제인지 아닌지는 오직 맹주님밖에 모른다네.”
“……!”
“난 말이지. 세상에서 궁금한 것을 제일 못 참는 편이라서.”
뜻밖의 이야기에 다섯 명은 순간 멈칫했다.
‘그래. 궁금한 건 못 참지. 근데…….’
무림맹의 군사가 맹주의 말을 믿고 있지 않다니.
“……알겠습니다. 화산파에 있는 구천신품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십쇼.”
“후후,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하도록 하지. 오늘은 푹 쉬게나.”
“그냥 지금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
“오늘은 말을 많이 했네. 이런 이야기는 조금씩 풀어가는 게 재미있거든. 내일 보세.”
제갈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영화당을 나섰다.
‘굳이? 하, 진짜 성격 이상하네.’
남하림은 사라진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맹주 유극지의 말을 떠올렸다.
“지켜야 할 것이 많기 때문에 힘든 것이네.”
‘군사는 신려세가를 내 약점으로 봤나 보군.’
남하림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협박이라. 하지만 내게 이것을 넘긴 순간 신려세가도 결심을 한 셈입니다.’
허리춤에 손을 넣자, 붉은 노리개가 만져졌다.
“하하하!”
남하림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림 형, 좋은 일 있어요?”
“하, 군사가 멍청한 것 같아서.”
“휴우, 세상에 군사를 멍청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형밖에 없을 거예요. 혹시 주눅 들까 봐 걱정했는데.”
“내가 누구냐? 조만간 천하제일인이 될 사람이지. 닭털 부채나 흔드는 사람에게 주눅이 들겠어? 걱정하지 마.”
“아하하, 역시 부장. 나도 사실 좀 걱정됐는데.”
“난 당연히 부장을 믿었지.”
당무독에 이어 성철각도 환하게 웃었다.
“부장, 화산파에 갈 건가?”
“군사의 명에 의해서 가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가는 거죠. 그가 말한 게 사실인지 궁금해졌거든요.”
번쩍.
남하림은 한 손을 들었다.
“구천마제가 누군지 궁금한 사람.”
휙. 휙. 휙.
동시에 손을 든 세 사람.
스윽.
마지막으로 이휘연도 슬쩍 손을 올렸다.
“구천신품에 자신의 존재를 남겨놓았다는 구천마제. 그를 죽였다는 맹주. 그 사실을 의심하는 군사.”
“…….”
다섯 명은 동시에 전율이 돋았다.
“유도야, 어때?”
“엄청 위험할 것 같지만…… 엄청 짜릿할 것 같기도 해.”
“그럼 모두 찬성하는 거지?”
척.
남하림의 손이 앞으로 뻗는 동시에 네 명의 손이 차례대로 겹쳐졌다.
“앞으로 정말 힘들 거야. 하지만 우리가 서로 힘을 합치면 못할 게 없어. 제대로 사고 쳐보자.”
“좋아. 우린 항상 부장을 따른다. 죽는 순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