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92화 (93/328)

92. 유극지를 만나다

무림칠천과 비무를 마친 뒤.

걸협오성은 영화당으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가졌다.

벌떡!

“엇차, 충분히 쉬었는데 가볼까?”

“좋아요!”

남하림을 따라 다른 네 사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구대경은 영화당을 나서는 걸협오성을 급히 붙잡았다.

“저어…… 어디들 가시는지…….”

처음 이들이 영화당에 들어섰을 때와 달리, 이제는 절로 높임말이 나왔다.

“줄 물건도 주고, 비무 부탁도 들어줬으니, 무림맹에서 볼일은 다 본 것 같아서요. 이젠 돌아가야죠.”

이대로 보낼 순 없었다.

“잠시만…… 제가 상부에 보고를 한 뒤에-”

처억!

성철각은 긴 팔로 밖으로 나가려는 구대경의 어깨를 잡았다.

“부장이 간다는데 무슨 상부에 보고할 게 있습니까.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그렇지만…….”

“그동안 잘 지냈습니다.”

‘억, 왜 이리 힘이 세?’

구대경은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영화당을 나온 다섯 사람은 곧장 무림맹 정문에 도착했다.

휙!

“잠깐 멈추시오.”

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겠다는 듯, 한 무리의 무림인들이 나타났다.

“무슨 일로 우리들의 걸음을 막아섰는지 모르겠군요.”

“무림이천 소속이오.”

“아, 우리를 감시하던 사람들이군. 무슨 일로 모습을 드러내셨습니까?”

“군사님의 허락이 없었으니 무림맹을 나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왜 군사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림맹 소속도 아닌데.”

“무림맹 소속이 아니라도 중원 무림인이지 않소이까? 개방도 무림맹의 일원이지요.”

스윽.

남하림은 앞을 막아선 사내 앞에 바짝 다가섰다.

꿀꺽.

사내는 마른침을 삼켰다.

전혀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만일 기습을 했다면 피하지 못했을 터.

“무림인이라면 모두 군사의 명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오?”

“…….”

“그를 따르고 말고는 내가 정하는 것이지요. 또한 개방은 무림맹의 일원이지 수하는 아니외다. 혹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남하림의 말에 사내는 반박하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힘으로 막지 않고서는 다섯 명을 잡아놓을 수 없다.

‘큰일이다. 군사님이 아니고서는……!’

그를 지나쳐 정문으로 나가는 다섯 명을 보며 다급해진 사내의 뒤로,

“허허허, 뭐가 그리 급한가?”

끝판 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하림은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한 손에 든 백색의 봉황선(鳳凰扇)을 가볍게 흔드는 제갈령.

마치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것처럼 가벼운 걸음걸이다.

“누가 우릴 못 가게 막을까 싶어서 내빼는 중이지요.”

“하하하, 맹에서 그대들이 가는 것을 막을 사람은 없다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자네가 이대로 정문을 나선다면 무림맹을 무시한 것이겠지.”

“…….”

“영화당을 내주며 대접도 섭섭지 않게 했을 터인데…… 그렇지 않나?”

“저희는 신려세가에 얻은 구천신품을 무림맹에 넘겼습니다. 산동악가에서 찾아온 구천신품까지 두 개를 준 것만으로도 그럴 자격은 있다고 봅니다만.”

“허허허, 그것도 이유가 되긴 하지.”

“그럼, 우리에게 다른 볼일이 있다는 뜻이군요.”

“그렇네. 아직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지. 가령 신려세가에서 구천신품을 넘긴 이유가, 천사회와 본 맹의 사이를 이간질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은 어떤가.”

“……!”

“의심의 여지가 없진 않지. 천사회는 구천신품을 노리고 신려세가의 여식을 죽이려 했으니까. 물건을 무림맹에 넘기면 자연스레 싸움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이대로라면 무림맹에서 신려세가를 조사할 이유는 충분하다네. 아니 그런가.”

‘웃기는군.’

남하림은 처음으로 제갈령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욱.’

제갈령의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기.

‘그만…… 멈춰라!’

남하림은 머릿속으로 들어오려는 제갈령의 눈빛을 서서히 밀어냈다.

‘허허, 나를 밀어내고 있군.’

“무림맹 군사라는 분이 은근한 협박을 잘하실 줄은 몰랐군요.”

“군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일일세. 의심이 들면 조사를 해보는 게 맞지.”

“그럼, 열심히 하세요.”

남하림은 정문으로 향해 돌아섰다.

제갈령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은근히 협박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장기 말로 쓸모가 없다면 버릴밖에. 아쉽군.’

그때 남하림의 움직임이 다시 멈췄다.

“후개, 잠깐만 서게나.”

“……?”

정문 옆에서 모습을 드러낸 중년인.

‘이분은……!’

천하제일인이자 무림맹주.

유극지가 한 손에 호미를 들고 목에는 수건이 감은 채 나타났다.

“맹주님.”

“군사, 오랜만이구려.”

뜻밖의 상황이었다.

제갈령조차 그가 직접 정문에 나타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최근 몇 년 동안 그가 하는 일이라곤 무림맹의 개인 금지(禁地)에서 농사를 짓는 것뿐.

유극지는 걸협오성을 천천히 살폈다.

“제법 쓸 만하겠어. 이보게들, 잠시 일꾼이 필요한데, 다섯 명이면 충분하겠군. 도와주겠는가?”

“……집에 가야 하는데요?”

‘혀어어엉! 맹주님이야!’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맹주를 바라보던 팽유도는 깜짝 놀랐다.

안 그래도 군사와 좋지 못한 대치 중인데, 무림맹주 유극지의 부탁을 거절하고 있었다.

“이런, 천하의 후개가 약속을 안 지키는군.”

“약속이요?”

“기억이 날 텐데. 예전에 육포를 얻어먹고 훗날 꼭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지.”

무표정하던 남하림은 이윽고 피식 웃었다.

“십 년이나 지난 일인데. 그걸 아직도 기억하시네요.”

“내가 기억력 하나는 남들보다 뛰어나지. 물론 무공도 뛰어나고. 아마 여기에서 나보다 강한 사람은 없을걸?”

“자랑하시는 건가요?”

“맞다. 자랑이지.”

팽유도는 슬쩍 당무독 곁으로 얼굴을 붙였다.

“세상에 하림 형만 한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러게. 인정.”

그들이 보기에 남하림과 유극지는 굉장히 닮은 성격이었다.

“……육포 얻어먹은 값은 해야겠죠.”

“하하하, 당연하지. 일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게다. 제법 양이 많아서 그렇지. 따라오너라. 네놈들도.”

“네, 맹주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걸협오성은 유극지를 따라 사라졌다.

‘흐음, 맹주께서…….’

살랑살랑.

제갈령은 봉황선을 흔들며 맹주 유극지와 함께 걸어가는 그들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 * *

스으윽.

‘뭐지?’

완여붕은 잠에서 깨며 바로 인상을 썼다.

‘이런 황당한 일이 있나.’

사음문 문주의 침실에 살수가 침입했다.

스윽.

침상 아래에 세워둔 검을 천천히 잡았다.

“완 문주, 일어나시오.”

침입자의 목소리에 살기가 없었다.

벌떡.

완여붕은 빠르게 일어나 침실에 들어온 인물을 찾았다.

침실 끝에 복면인이 서 있었다.

“혈군사님께서 보내셨소.”

‘휴, 일단 적은 아니군.’

완여붕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침상에서 내려섰다.

‘이들이 암영사신인가?’

혈군사 기성의 호위로 알려진 인물들.

“그대는?”

“문주가 생각한 사람이오.”

“혈군사를 호위하는 그대가 여기까지는 온 이유가 궁금하군요.”

“혈군사님께서 욕심이 과하면 몸에 해롭다고 하시었소.”

“……!”

찌릿.

온몸에 털이 서는 듯했다.

‘내가 백리세가에서 구천신품을 가지고 온 사실을 알고 있군.’

사음문에서 이 일을 알고 있는 인물들은 몇 명 되지 않는다.

‘배신자가 있다.’

완여붕의 표정이 굳어졌다.

“문주, 지금 내부자를 찾는 게 우선이라 생각하시오?”

“……!”

“혈군사님께서 나를 보내신 이유를 모르겠소? 그대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오.”

척.

완여붕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혈군사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혈군사께선 구천신품에 대해서는 일단 잊겠다고 하셨소. 그 대신.”

“무엇이옵니까?”

“신려세가를 가만히 둘 수 없다고 하셨소.”

그도 무림의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멍청한 놈.’

신명항은 구천신품을 후개에게 주었다.

“문주, 할 수 있겠는가?”

“……혈군사님의 뜻을 따르겠소이다.”

스르르륵-

암영사신의 신형이 방 안에서 사라졌다.

“휴우…….”

완여붕이 몸을 일으켰다.

‘신려세가를 칠 수밖에 없게 되었군…….’

* * *

걸협오성은 호미를 든 유극지를 따라 밭에 들어섰다.

“너무 넓지 않습니까?”

“허허, 이 정도는 돼야 무림맹 사람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지 않겠나.”

“이걸 혼자서 하시는 겁니까?”

“별로 어렵지 않네. 호미로 천천히 땅을 파서 꺼내면 되네.”

“어떻게요? 한번 시범을 보여주세요.”

“좋아. 잘 보게.”

팍! 팍! 팍!

유극지는 호미에 내력을 밀어 넣은 뒤 밭을 찍으면서 앞으로 움직였다.

그의 호미가 지나가는 자리 뒤에는 주먹만 한 감저(甘藷)가 쌓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십 장 정도의 이랑에 있던 감저를 모두 캤다.

“와, 대단하시네요. 무인보다는 농사꾼이 제격이신 것 같은데.”

“밭일도 하다 보니 숙달되더군. 자네도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지.”

“굳이 숙달이 안 돼도 어렵진 않겠는데요.”

“글쎄, 이게 쉬운 일은 아니라니까.”

“한번 해볼까요?”

남하림은 몸을 반쯤 숙이고는 내력을 미세하게 끌어 올렸다.

팍팍!

남하림은 맹주 유극지가 호미를 어떻게 움직였는지 손동작을 떠올리며 내력을 불어 넣었다.

‘여기에서…… 이렇게.’

휘익!

손끝에 짧게 반동을 주자 감저가 이랑으로 올라왔다.

“하하하,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군.”

“제가 눈썰미 하나는 끝내주죠.”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정확하게 호미질이 이어졌다.

이것도 곧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팍! 팍! 팍! 팍!

남하림이 지나가는 자리 뒤로 감저들이 예쁘게 모습을 드러냈다.

“하림 형, 잘하는데요?”

“내가 못하는 게 없잖아.”

“어떻게 하는 거야?”

“모두 잘 봐.”

남하림은 호미를 잡는 방법과 어디에서 내력을 끌어 올리는지 천천히 가르쳐 주었다.

“알겠어?”

“한번 해볼게요.”

팽유도와 성철각은 호미를 하나씩 들고 각각의 밭을 맡은 뒤 땅을 파기 시작했다.

툭, 툭, 툭.

두 사람이 지나가는 뒤로 감저들이 쌓여갔다.

“둘 다 잘하네. 그렇게 하면 될 거야.”

“나도 해보고 싶군.”

이휘연도 남하림에게서 호미를 받았다.

팍팍팍.

처음에는 상당히 넓다고 생각했던 밭은 다섯 명이 움직이자 한 시진이 되기도 전에 금방 끝났다.

“하하하! 자네들이 도와주니 일이 금방 끝나는군.”

“그럼, 끝난 게 맞죠?”

“이것들을 창고에 넣어두어야지 않겠나.”

“아.”

“저기 뒤로 가면 수레가 있을 게다. 가지고 오너라.”

덜거덕. 덜거덕.

남하림은 수레에 감저를 가득 실고 창고로 끌었다.

“이것도 일이라고 힘드네.”

감저를 싣고 나르기를 수십 번.

이번이 마지막 수레였다.

와르르-

창고 바닥에 감저를 부었다.

텅 비어 있던 창고가 반 이상 감저로 가득했다.

“모두 수고했네.”

“진짜 끝난 게 맞죠?”

“그래, 맞다.”

창고를 정리하자 해가 지고 있었다.

“날도 어두워지는데 한잔들 하겠나? 일을 도와줘서 고마우니 집으로 초대하겠네.”

“얻어먹는 것도 개방의 일이죠.”

“그럼 나를 따라오게. 이왕 마신다면 다홍치마로 경치가 좋은 곳에서 마셔야지.”

다시 무림맹주의 뒤를 따라 밭을 지나자 정원이 나타났다.

스윽.

정원 안에 작은 집이 보였다.

“저곳이 내가 머무는 곳이네.”

“맹주의 거처라고 하기에 소박하군요.”

“내가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오히려 개방에 적합하신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하하하, 그렇지 않아도 한 번 정도는 생각을 해봤지. 그런데 딱 한 가지가 마음에 안 들더군. 난 하루에 최소한 세 끼는 먹어야 해.”

“그건 좀 힘들긴 하네요.”

“후후후, 들어가세나. 오랜만에 손님들이 왔으니 좋은 술을 꺼내야겠어.”

끼익.

정원에 들어섰다.

뚝.

‘흐음.’

남하림은 맹주를 바로 따라 들어가지 않고 걸음을 멈췄다.

여의항진(如意抗陣).

정원에는 진법이 펼쳐져 있었다.

‘허, 이 기운을 느낀단 말인가? 현경(玄境)에서도 오룡봉성(五龍奉聖)을 이해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거늘.’

유극지는 멈춘 채 움직이지 않는 남하림을 보다 물었다.

“왜 안 들어오는 겐가?”

“……초대를 받았는데 맨 몸으로 들어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

‘하하, 알 수 없는 녀석이군. 진짜인지 아닌지 속을 전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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