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무림맹 군사
늦은 밤.
어둠이 짙은 시간, 영화당으로 한 사내가 찾아왔다.
“이천영주요. 군사님을 모시고 있소이다.”
“으으…… 졸려 죽겠는데…….”
졸음이 잔뜩 묻어 늘어지는 남하림의 목소리.
예상치 못한 후개의 반응에 이천영주 인종은 황당했다.
“꼭 지금 이 시간에 가야 하는 겁니까?”
“군사님께서 조용히 만나고 싶다고 하셨소.”
“비밀 이야기 할 것도 없어요……. 저기 탁자 위에 구천신품이 있으니 가지고 가세요…….”
휙!
인종은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탁자 위에 붉은색 노리개가 있었다.
“흐하암- 그걸…… 드리면 될 겁니다. 그럼 나는 잠이 모자라서…….”
남하림은 반대로 돌아누웠다.
어이없는 얼굴로 남하림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인종은 고민에 잠겼다.
‘우선 군사님께 드려야…….’
붉은 노리개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에이!”
벌떡!
그때, 돌아누웠던 남하림이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이 싹 달아났네! 이 야밤에 일을 시키다니. 어디다 항의할 수도 없고, 군사가 부르는데 정말 안 갈 수도 없고……!”
남하림은 탁자에 놓인 노리개를 팩 잡아 들었다.
“앞장서세요. 군사께 가겠습니다.”
“아아…… 알겠소이다…….”
* * *
남하림은 뚱한 얼굴로 이천영주를 따라 군사전에 들어섰다.
복도 사이로 길게 뻗은 가느다란 불빛들이 한 방향으로 이어졌다.
“여깁니다.”
드륵-
인종은 옆으로 돌아서며 문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남하림은 안으로 들어섰다.
스윽.
등을 지고 앉아 있던 군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돌아섰다.
‘쯧.’
이 눈동자다.
여섯 살 때 만났으니 얼굴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눈동자만은 아직까지도 또렷했다.
찌릿.
몸이 본능적으로 경고 신호를 보냈다.
백색의 문사건.
무림맹 군사 제갈령이 틀림없었다.
‘여전히 기분 나쁘군.’
남하림은 그의 눈빛을 마주치지 않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자신의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올 것 같았다.
‘내 시선을 피하는군.’
“후개, 늦은 시간에 불러서 미안하네.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군.”
“사실대로 말할까요?”
“후후, 그 말은 실례가 되었다는 뜻이로군. 다시 사과하지. 조용한 시간에 자네를 만나고 싶었네.”
“군사의 신분이시라면 무림맹을 통째로 비우실 수도 있을 텐데요.”
“해가 떠 있는 시간에는 태산처럼 할 일이 많다네. 중원 무림 전체를 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지.”
“그렇습니까? 제가 한량 거지 팔자다 보니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흐흠, 누가 내 고통을 알겠는가?”
제갈령과 남하림은 자리에 마주 앉았다.
“산동세가와 백리세가에서 후개의 도움을 많이 받았네. 맹의 일원으로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아닙니다. 무림맹이 있어서 무림이 평온한 거 아니겠습니까? 정파의 일원으로 당연한 일을 한 것입니다.”
“후개의 협의가 이 정도로 높을 줄은 몰랐군.”
“개방도라면 당연히.”
남하림의 대답은 어긋나지 않을 만큼 올바르게 들렸다.
“이번에도 구천신품을 가지고 왔더군.”
“그렇지 않아도 신려세가에 받아온 물건이 있습니다. 오는 도중에 천사회를 만났지만 무사히 넘어갔죠.”
남하림은 붉은 노리개를 꺼내 제갈령 앞에 내밀었다.
“오호…… 이것인가.”
제갈령이 붉은 노리개를 천천히 살폈다.
‘……구천신품의 문양이 확실하군.’
노리개의 문양을 확인한 제갈령이 다시 남하림을 보았다.
“정말 신려세가에서 순수하게 맡긴 것인가?”
“예. 어떻게 하든지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천사회 눈 밖에 날 것인데. 의심스럽진 않던가?”
“애지중지하는 자식의 목숨을 노렸으니, 주고 싶겠습니까?”
군사 제갈령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말도 일리는 있군. 나중에 확인을 해보지.”
“그러시죠.”
딸깍.
제갈령이 미리 준비를 한 상자를 열자, 붉은빛이 퍼져 나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붉은 노리개를 상자 속에 넣었다.
“후개는 구천신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별생각 없습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요.”
‘자신은 욕심이 없다? 후후, 여전히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군.’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남하림의 시선은 미묘하게 허공을 향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 부친인 상왕을 만난 지 오 년이 넘은 것 같은데, 잘 지내고 있다던가?”
“하늘이 무너져도 잘 지낼 분입니다.”
“왜 자네를 개방으로 보냈는지 모르겠구먼.”
“저도 의문입니다.”
“십 년이라 했으니, 이제 오 년이 남았겠군. 후개를 수락한 것을 보니 개방에 아주 적을 둘 생각인가?”
“아직 특별히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특별히?”
“네.”
“후개를 수락한 이유는 말해줄 수 있는가?”
“사적인 일이라서.”
제갈령은 시선을 교묘히 옆으로 돌린 남하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가 알아서는 안 될 중요한 일인가 보군.”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알려 드릴 수는 없습니다.”
남하림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짝!
갑자기 손뼉을 친 제갈령이 빙그레 웃었다.
“후개, 나를 똑바로 보는 것이 겁이 나는가?”
“이유는 군사께서 알고 계실 것 같군요.”
“이런, 하하, 오늘은 여기서 그만하세나. 보아하니 늦은 시간에 불러서 화가 난 것 같군.”
“그건 아닙니다. 그럼 이제 볼일도 끝났으니, 저희는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나머지는 다음에 이야기하지.”
“……지금 하면 안 되는 모양이군요.”
“좋은 날이 있을걸세. 그럼 맹에 있는 동안 편히 지내도록 하게나. 불편한 점은 언제든 말하시고.”
“딱히 다른 건 없고…… 군사님이 좀 불편하네요.”
“하하하하!”
제갈령은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아닌가?”
“기분 나빴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하,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네. 여하튼 잠시 재미있는 시간이었어. 이만 돌아가 쉬시게.”
제갈령은 방을 나가는 남하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생각한 대로 맹랑한 놈이군. 아쉬운 대로 사용하려면 조금 꿈틀거리는 것은 봐줘야겠지.’
* * *
군사전을 나온 남하림은 영화당으로 돌아왔다.
턱.
침상에 걸터앉은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군사 제갈령의 눈동자.
“확인할 필요는 있었지만…… 이거…… 괜히 눈에 띈 거 같은데.”
구천신품만 빨리 넘기고 바로 돌아가야 했나?
‘아무래도 군사가 그냥 보내줄 것 같지는 않군.’
그냥 내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주위에 그들을 지키는 시선이 너무 많았다.
‘호위를 빙자한 감시지. 피곤한 놈들.’
털썩.
침상에 대자로 누워 버린 남하림은 천장을 보다 피식 웃음을 뱉었다.
신려세가로 끌려가듯 돌아간 신소소.
‘갑자기 그 녀석 얼굴이 왜 떠오르냐.’
* * *
“무림맹이라…….”
“송구하옵니다.”
“기분 나쁜 녀석에게 갔구나.”
혈군사는 길게 내려온 수염을 받치며 차를 마셨다.
“부운이 어떻게 되었다고?”
“무너진 둑으로 쓸려가는 바람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했습니다.”
“무림인이라는 놈이…… 쯧.”
“소신이 조사해 본 결과, 상황이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되었다. 이유가 어떻든 변명일 뿐.”
“송구하옵니다.”
“지금 당장 부운의 단주직을 파면한 뒤 천사수호군으로 보내 백의종군을 명하라.”
“알겠습니다.”
군사의 명을 똑바로 수행하지 못했으니 목숨을 잃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단주에서 물러나 일반 무사로 가는 벌은 가볍진 않아도, 목숨은 건질 수 있다.
그리고 언제든 단주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군사님의 아량에 그는 더욱더 충성할 것이옵니다.”
타악.
혈군사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제갈령이 앞으로 그 녀석을 어떻게 사용할지 궁금하군. 걸협오성 정도면 무궁무진한 수를 펼칠 수 있거늘.”
그의 시선이 옆에 놓인 바둑판으로 옮겨졌다.
‘사석(捨石)으로 사용하기에 정말로 좋은 돌이 될 수 있겠지.’
* * *
다음 날 아침.
모두 한자리에 모여 남하림이 야밤에 군사전에서 제갈령을 만난 이야기를 했다.
“특별히 별말 없었다는 거네?”
“맞아.”
“그럼 그 시간에 왜 불렀대? 신종 고문인가?”
당무독은 웃기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반응할지 찔러봤다는 말이네요.”
“무림맹이 찜찜할 줄은 몰랐어.”
팽유도와 성철각도 한마디씩 했다.
“하림 형, 그냥 나가면 안 돼요?”
“내가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이휘연이 가만히 말했다.
“여긴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다.”
“우리가 도망가지 못하게 지킨다는 말인가요?”
“그게 맞을 거야.”
“나 참…… 무림맹이 왜 이래?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르잖아.”
“누군가에게 우리가 정말로 필요한 모양이야.”
팽유도는 몸을 뒤로 젖히면서 투덜거렸다.
“하림 형, 이제 어쩌지? 무턱대고 여기에 있을 건 아니잖아.”
“유도 말이 맞아. 무작정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은데?”
남하림은 결심을 내렸다.
“……모든 소지품 챙겨.”
“어엉?”
“우리가 무림맹 사람도 아니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들어줄 것도 아니잖아. 줄 건 줬으니깐 할 일 다 했어. 그냥 뚫자.”
“푸후후웁, 역시 부장이야.”
“형, 우린 챙길 것도 없어요. 그대로 가면 돼요.”
팽유도와 당무독은 당장 일어나서 나갈 준비를 했다.
“으음…….”
“철각, 왜? 무슨 일 있어?”
“그래도 밥은 먹고 가도 되지 않을까?”
“…….”
이휘연은 가만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일찍부터 급할 건 없을 것 같다. 군사에게 반항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니까.”
“그것도 그런가?”
“하림 형, 여기 밥이 맛있더라구.”
“……좋아. 실컷 먹고 곳간을 쫑내주는 거야.”
* * *
웅성웅성.
갑자기 영화당 밖이 시끄러워졌다.
그러더니 영화당주 구대경과 함께 젊은 사내가 찾아왔다.
“저어…… 식사를 하는데 죄송하게 되었소이다.”
“죄송하면 나중에 오세요. 밥 먹잖아요.”
“저…… 그게…….”
팽유도는 단칼에 자르는 남하림의 말에 당황한 구대경을 보며 물었다.
“구 당주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스윽.
구대경 대신에 젊은 사내가 나섰다.
“본인은 칠천(七天)의 상관주라 하오.”
“잠시만.”
남하림이 그의 말을 막았다.
“유도야, 칠천이 뭐 하는 곳이냐?
“쉽게 말하면 무림맹에서 제법 뛰어난 인재들을 따로 모아 수련시키는 곳이에요.”
“아, 있는 집 자식들이 모여 있는 곳이구만.”
휙!
남하림은 숟가락을 들어 상관주에게 건넸다.
“식사는 했습니까?”
“……아직 못했소.”
“그럼 같이 하겠소이까?”
“이것 때문에 온 게 아니오.”
“이게 아니면 무슨 일로 왔습니까?”
“명망 높은 걸협오성과 비무를 하여 우정을 쌓고 싶어 왔소이다.”
“그래요?”
“…….”
남하림은 한입 가득 밥을 넣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밥 다 먹을 때까지만 밖에서 조용히 기다리시오. 시끄러워서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모르겠으니깐.”
“아, 알겠소이다.”
상관주와 구대경은 얼른 밖으로 나갔다.
“하림 형, 비무는 왜?”
“딱 보니 각 나오잖아. 우리를 살짝 밟아주면 이름이 뜨니까. 어째 생각하는 것들이 전부 유치한지 모르겠다. 남이 잘되는 건 보기 싫다는 게지.”
“와, 우리가 뜨긴 했나 봐.”
“나는 좋아. 저번에 무당파에서 하던 것처럼 붙는 거 아냐? 그때 재미있었는데…….”
성철각은 한 명씩 비무를 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밥 먹고 나갈랬더니. 또 늦어지겠네.”
“괜찮아요. 배가 부르면 운동 삼아 움직이는 것도 좋잖아요.”
“그럼…… 이번에는 색다르게 해볼까?”
“어떻게?”
“한 명씩 싸우는 것보다 더 웅장하고 강렬한 충격 요법으로. 다섯 놈보다 더 많은 놈들을 한꺼번에 바닥에 눕혀주는 거지.”
“오우, 좋은데요.”
“흐흐, 아주 재미있을 거야. 그럼 일단…… 마저 먹자.”
다섯 명은 다시 숟가락을 들고 열심히 움직였다.
* * *
하림 일행이 영화당 앞뜰에 모인 이십여 명의 젊은 사내들을 마주했다.
척.
칠(七)이 크게 적힌 흑의무복을 입은 사내가 포권을 했다.
육중한 신체이지만 간결한 동작에 힘이 느껴졌다.
“본인은 황보장곤이라 하오. 그대들이 걸협오성이오?”
“맞습니다. 남하림이라 합니다.”
“중원에 떠도는 걸협오성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소.”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몰라도 소문이란 항상 과장된 게 많지요.”
황보장곤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사실 걸협오성의 위명은 자랑을 해도 남을 만했다.
“상당히 겸손하군요.”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라서…… 무림이라는 게 한 사람만 거쳐도 소문이 서너 배 부풀어 오르더군요.”
‘음…….’
황보장곤은 상대방이 저자세로 나오자 당황했다.
싸움도 서로 부딪쳐야 시작하는 법.
어느 정도 받아쳐야 도전할 만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었다.
“칠천에서 나왔다고 들었는데, 급히 우리들을 찾으신 이유가 뭡니까?”
“무인으로서 걸협오성의 명성을 확인해 보고자 왔소이다.”
“명성이야 무림맹에 계시는 여러분들이 중원에 더 높지 않겠습니까.”
“…….”
[애를 갖고 노네, 갖고 놀아.]
[하림 형은 놀리는 걸 너무 좋아해.]
환하게 웃는 남하림을 보면서 황보장곤은 고민에 빠졌다.
분명 비무를 하기 위해 왔건만, 이러다 조용히 물러나야 할 것 같았다.
“흠, 흠흠, 우리는 앞으로 무림을 이끌어갈 세대가 아니오. 그런 의미로 후기지수들끼리 우정을 위한 비무를 하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찾아왔소이다. 후개께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시오?”
“아, 그게, 우정을 쌓는 것은 좋지만, 위험하게 서로 도검을 들고 싸우는 것은 마음에 영 들지 않아서 말입니다. 얼마 전에도 무당파에서 비무를 한 적이 있었는데,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원치 않는 부상도 생기고…….”
“아, 하하하! 그런 것 때문이라면 상관없소.”
황보장곤의 뒤에서 젊은 사내가 나섰다.
척.
“적금소라 하오.”
“아, 혹시 화산파 출신이 아니신지?”
그의 신형에서 매화의 기가 느껴졌다.
“어떻게 아시었소?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나?”
“그냥 찍어봤습니다. 제대로 동냥하려면 찍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해서.”
“하하하, 후개라 다르긴 하군요. 그리고 무림인이 비무를 하다가 다치기도 하는 법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괜찮지만…… 아아, 이왕 비무할 거면 각 파의 어른들을 모셔놓고 하는 건 어떻겠소? 저번에도 괜히 우리들끼리 하다가 혼쭐이 났거든. 혹시나 일어날 큰 사고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싶소이다.”
“음…… 알겠소. 한번 상의를 해본 뒤 연락을 드리겠소.”
“그렇게 하시지요.”
황보장곤은 일행과 함께 영화당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반 시진 뒤.
무림맹에 때아닌 비무 대회를 알리는 소식이 나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