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명성을 얻다
각산 현령은 현의 안과 밖에 우글우글 모여든 사람들을 보았다.
‘허참……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아침 일찍 각산의 대유지 온상이 갑자기 찾아왔다.
그는 무림인이라는 놈들이 논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둑을 완전히 박살 내서 주변이 몽땅 물에 잠겼다며 노발대발 화를 냈다.
‘으으, 무림인과 엮이기는 싫은데…….’
관과 무림은 상호불가침으로 관여하지 않는 것이 보통.
하지만 온상의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각산현을 위해 돈을 많이 내는 대유지였으니까.
상대는 최근 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한 명인 후개.
‘쳇. 개방이면 거지잖아. 후개가 뭐라고?’
그런데 막상 가보니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둑을 무너뜨리지 않았다면, 논 일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수해를 입었을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었던 것.
각산 현령은 걸협오성과 후개가 어떤 인물들인지 알게 되자 바로 태도를 바꿨다.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웠다.
현령은 매우 정중하게 후개를 모셨다.
“현으로 모시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어제 일로 본의 아니게 시끄럽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후개님의 도움에 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건졌다고 들었습니다. 각산현의 현령으로서 정말 감사합니다.”
“협의를 따르는 개방의 제자로서, 백성들의 어려움이 있다면 당연히 도와야 했습니다.”
수많은 마을 주민들의 시선의 집중됐다.
겸손한 남하림의 대답은 모여든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역시 후개님이시다…….”
“이런 분을 누가 잘못했다고 현에 꼬불친 거야?”
“크으, 후개님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 아깝지 않구먼.”
주민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온상은 안절부절못했다.
“어느 분이 온상이신지?”
스…… 윽.
온상은 주위 눈치를 보며 파들파들 손을 들었다.
“제가…… 온상입니다.”
“그렇습니까? 어젯밤엔 너무 급해서 둑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큰 손해를 입혀 죄송하군요.”
“아…… 아, 아닙니다. 마을 사람들이…… 무사했다니 다행이지요. 제가 사정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척.
남하림은 그를 향해 포권을 했다.
“그렇게 말씀을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한눈에 척 봐도 대인의 성품을 지니셨습니다.”
“아, 하하, 아이고, 아닙니다. 그까짓 논이 사람의 목숨보다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온상은 대화를 하면서 얼굴이 환해졌다.
무서운 무림인은 아닌 것 같았다.
“저 때문에 괜히 손해를 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괘, 괜찮습니다. 물이 빠지면…….”
“제가 안 괜찮습니다. 혹시 작년에 논 수확량은 얼마나 됩니까?”
“음…… 작년에는 대풍이라 황금으로 천 냥 정도였습니다.”
“알겠습니다. 혹시 붓과 종이를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현령은 얼른 수하를 시켜 준비를 했다.
슥슥슥.
종이 위에 글이 적혀 내려갔다.
탁!
남하림이 붓을 내려놓았다.
“됐소. 여기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호북상국에 가면 황금 천 냥을 줄 것이오.”
“……!”
온상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어, 혹시 보상금이 너무 적은 것이오?”
“아아, 아닙니다. 그게, 올해는 작년과 다르게 대풍이 아니라서, 오히려 너무 많은 듯하군요…….”
“아항, 만족한다는 말이군요. 그럼 이번 일은 해결이 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현령은 단번에 황금 일천 냥을 내어놓는 후개를 보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남하림이 다시 말했다.
“보상금은 일단 정리가 되었고. 논에 물이 빠지면 완전히 수확을 못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네, 맞습니다. 수확량은 많이 떨어지겠지만 조금은 거둘 수 있습니다. 제가 수확을 마치게 되면 호북상국에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올해 수확된 쌀들은 물에 잠긴 여기 마을 주민들에게 모두 나눠주세요. 그것이면 만족합니다.”
“후, 후개님……!”
와아아아아-!
순간 각산현의 주위 안팎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후개님 만세!”
“후개님, 고맙습니다!”
* * *
대협객.
진정한 무림인의 표본.
후개 남하림과 걸협오성의 명성은 중원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그 소문은 멀리 개방까지 들어갔다.
방주 오종이 아침부터 찾아온 일장로 장두철과 차를 마시면서 나누는 대화 또한 걸협오성이었다.
“크하하핫!”
오종은 기분이 좋았다.
“방주, 요즘 난 너무너무 즐겁다네.”
“저도 그렇습니다. 그 아이들 때문에 하루하루가 기다려지는 것은 처음입니다.”
“허허허, 나도 그렇다네.”
탁!
장두철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음…… 차 맛도 달콤하구만.”
“마음이 즐거워서 그런 듯합니다.”
“클클클, 아 참, 각 문파에서 공문이 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하하. 이제 너도나도 개방에 제자를 보내겠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오 년 전에 보냈던 곳에서 이제야 은을 갚겠다며 연락이 왔습니다.”
“미친놈들, 우릴 개호구로 알고 있는 모양일세.”
“일장로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약간 순화해서 전했습니다.”
“크, 잘했네. 역시 방주께서 일을 잘하시는군. 그런 놈들은 욕을 한 바가지로 퍼 줘도 괜찮지. 크하하하!”
“후후후.”
오종은 기쁘면서도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었다.
“일장로님. 한 가지 염려가 되는 게 있습니다.”
“혹시 구천신품 때문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이 아닙니다. 그 아이들에게 계속해서 구천신품과 부딪히고 있지 않습니까.”
“무림의 소문에 의하면, 구천신품의 주인은 따로 있다고 했었지.”
“그 말씀은…… 후개가 구천신품의 주인이라는 말씀입니까?”
“그건 아직 모르네. 지켜봐야겠지.”
“알겠습니다.”
“앞으로 그 아이들을 위해 우리도 많이 뛰어야 할 게야.”
“최선을 다해 지키겠습니다. 절대로 다치지 않도록 말입니다.”
오종은 다짐했다.
후개와 걸협오성을 위한 일이라면.
개방은 어떤 일이라도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 * *
‘흠…… 각산에서 정주로 향하는 길 중 이곳이 가장 빠른 길이지.’
객잔에서 가장 높은 곳 창가에 앉은 중년인.
그의 의자 옆에는 길게 뻗은 창이 세워져 있었다.
‘거지 새끼가 감히 나를 가지고 놀았어.’
소융에게 구천신품의 행방에 대해 들은 순간부터,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꽈악!
왼손으로 악성창을 잡았다.
만나게 되는 순간, 둘 중 한 명은 죽어야 끝날 것이었다.
곽순의 눈빛이 빛났다.
“주군. 그들입니다.”
휙!
악군악은 창가를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만났군. 망할 거지 놈……!’
스윽-
강렬한 기척.
남하림과 이휘연은 동시에 객잔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눈에 익은 얼굴이 창가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대 악 가주군.”
“앗, 정말이네요.”
팽유도도 그를 보았다.
“저자가 왜 여기 있냐?”
“무독, 표정을 보니 나를 만나러 온 것 같아.”
“설마…… 그것 때문에?”
“엄청 화가 난 표정으로 봐선 구천신품의 행방을 알아차린 것 같네. 무림맹 군사가 일부러 알리지는 않았을 테고. 보아하니 그곳에도 간자가 숨어 있군.”
“아하.”
남하림은 얼굴을 바로 했다.
창가에서 악군악의 모습이 사라졌다.
마을의 광장으로 들어서자,
쿠우웅!
바닥을 내리찍는 강한 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우우우웅-
악성창에서 들려오는 공명에 일반 사람들은 허겁지겁 마을 광장을 벗어났다.
악군악이 악귀 나찰과 같은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작정한 것 같은데요?”
“유도 말이 맞아.”
남하림은 그의 앞으로 계속 걸었다.
“오랜만이네요, 악 가주님.”
“아직도 악 가주라고 부르는군. 중원에서 명성이 높은 후개가 먼저 알은척을 해주니 영광이야.”
후개라는 말에 광장 밖이 순간 술렁거렸다.
“내가 왜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알겠지?”
“모르겠습니다.”
“모른다…… 여전히 건방지구나!”
타앗!
휘익.
악군악의 신형이 그대로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후개의 머리를 향해 악성창을 내리쳤다.
남하림은 피하거나 멈추지 않고 그대로 악군악의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뚝.
정확히 남하림의 한 치 앞에서, 악성창이 멈췄다.
“내가 멈출 줄 알고 있었나?”
“그 정도는 기본이지요.”
“크하하하! 기본이라……! 언제부터 나를 무시할 정도로 광오했단 말이더냐?”
“나에게 언제부터란 말은 필요 없어요. 처음부터 그랬으니까.”
스팟!
남하림이 손바닥을 앞으로 뻗었다.
가볍게 흔든 손짓에서 무형의 기가 쏟아져 나갔다.
휘릭!
악군악은 앞으로 들이친 만큼 뒤로 물러났다.
부우우우웅-
머리 위로 악성창을 맹렬히 회전시켰다.
“제대로 해볼까?”
“죽을 때까지입니까? 아니면 승패가 날 때까지입니까?”
“당연히 네놈이 죽을 때까지다!”
타아앗-!
악군악은 악성창을 돌리면서 앞으로 달려들었다.
탐강적성(探江赤星).
악성창이 공중으로 날아오르자 붉은빛이 남하림을 감쌌다.
스스스스-
남하림은 바닥을 스치듯이 옆으로 움직이며 비켜났다.
‘이렇게 쉽게?’
악군악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간단한 움직임으로 악성창의 범위를 벗어났다.
그사이 남하림은 어떻게 싸울까 고민하고 있었다.
‘보는 눈이 많으니까.’
타구봉은 빼려다 그만두었다.
지켜보던 당무독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푸훕, 하여튼 부장도…… 신경을 쓴다니깐.”
악군악은 연이어 두 번의 초식을 펼쳤지만 남하림의 신형을 잡지 못했다.
“후개! 도망만 다닐 것인가?!”
“그렇게 맹렬한 공격을 하는데 어떻게 반격하겠어요.”
“약은 새끼,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은가!”
악군악은 남하림의 움직임에서 무언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노림수.
‘이놈, 무엇이든 쉽게 되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던 공방이 멈추고, 악군악이 찬찬히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공격이 잠시 느슨해진 순간!
‘지금!’
슈우우우우우웅-
남하림은 이 찰나의 시간을 기다렸다.
아직 십단공이 완전하지 않아 완벽하게 내력을 끌어 올리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십단공의 십 성 내력.
강룡십팔장 최고의 무공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악군악과의 사이.
마치 태풍이 불어오는 것처럼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쳤다.
풍(風) 룡(龍) 동(動) 우(雨).
휘이이이이이이이잉-!
‘크으으윽, 대체…… 이놈의…… 능력은……!’
눈썹까지도 뒤로 휘날리는 강한 바람을 휘날렸다.
악군악은 눈을 겨우 뜨며 앞을 보았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아!
‘풍…… 룡……!’
거대한 풍룡이 입을 벌린 채 강력한 풍압을 일으키며 쏟아져 나왔다.
떨리는 두 손으로 악성창을 잡고 앞으로 던졌지만 소용이 없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음.
마을 광장 전체가 흔들렸다.
덜덜덜-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바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광장 중앙에는 옷이 완전히 찢겨 나간 악군악이 쓰러져 있었다.
휙!
곽순은 쓰러진 악군악의 곁으로 다급하게 내려섰다.
“죽지는 않았지만 꽤 오랫동안 요양을 해야 할 거요.”
“고맙소이다. 살려주셔서…….”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
곽순은 악군악을 등에 업고 마을 광장에서 사라졌다.
짝짝짝!
멀리서 지켜보던 군중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 * *
스윽-
객잔의 삼 층 창가에서 한 사내가 아래를 한바탕 싸움이 끝난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손에는 작은 나무 상자가 들려 있었다.
황금빛이 나는 돌.
‘저것이 후개의 무공이라. 대단하군. 산동의 호랑이도 상대가 되지 않다니. 하연 소저께서 말씀하신 천괴성의 전인이 후개였어. 연락을 띄워야겠군.’
사내는 마을 광장에서 남하림이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떼지 않았다.
* * *
툭툭.
전서구가 창문을 두드렸다.
백옥 같은 여인의 손이 전서구의 발에 걸린 전서통을 풀었다.
#NAME?
하연은 전서를 곱게 접었다.
‘천괴성이 후개. 예상이 맞았어.’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 소융에게, 언젠가 가장 해가 될 인물.
“당장 위험이 되진 않겠지만…… 결국 그분의 앞날에 걸림돌이 되겠지.”
하연은 전서를 소매에 넣은 뒤 방을 나섰다.
스윽.
그러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절암정(絶巖庭)에 올라섰다.
“후후, 어서 오너라.”
하연은 고개를 짧게 숙였다.
“이 시간에 본인을 찾아온 것을 보니 중요한 일이 생긴 듯하구나.”
“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냐?”
“천괴성을 찾았습니다.”
“누구더냐? 음. 얼굴을 보니 내가 아는 인물인가 보구나.”
“후개였습니다. 후개 남하림이 천괴성의 주인입니다.”
“아, 요즘 이름깨나 높은 친구로군. 천괴성이라면 당연했겠어.”
“어떻게 처리할까요?”
“네 말대로 내 앞길을 막아선다면 당연히 제거해야 하지 않겠느냐?”
“가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럼 그건 하연이가 처리를 하면 될 것이고……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구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
소융의 물음에 하연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런, 아직도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것 같구나.”
“죄송합니다. 소녀는 오직 가주님을 모실 뿐입니다.”
“허허, 그 녀석을 받아준다고 나를 떠나는 게 아니지 않느냐. 오히려 더 가까운 사이가 될 것을…… 혹시 그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
“가주님. 소녀에게는 너무 과분한 분이십니다.”
“그러면 되었다. 너희들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아라.”
“……네.”
하연은 절암정을 내려왔다.
오를 때와 다르게 발걸음이 무거웠다.
십 년 전.
귀신 들린 아이라며 마을 사람들에게 죽을 뻔했던 순간.
천운인지 식량을 구하려고 마을에 들렀던 무인에게 목숨이 구해졌다.
하연은 그때 맹세했다.
“생명의 은인. 죽는 순간까지 가주님을 모시겠습니다.”
경내에 들어선 그녀의 걸음이 멈칫했다.
앞에 서 있는 사내.
“하경, 오라버니…….”
소융의 첫째 아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연모한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버지를 만나고 오는 길이냐?”
“네. 오라버니.”
“……무슨 말씀이 없으시더냐?”
“아니……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아직은 대답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대답이 실망스러울 법했지만, 소하경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구나.”
몇 년 동안 둘 사이는 항상 이와 같았다.
“오라버니, 죄송해요.”
“아니다. 난 언제든지 너를 기다릴 수 있다.”
“…….”
“하나만 물어도 되겠느냐?”
“말씀하세요.”
“아버지를…… 사모하는 것이더냐?”
“가주님은 저의 생명을 거두어주신 분입니다. 다른 뜻은 전혀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알겠다. 그럼, 기다리마. 네 곁에 항상 내가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오라버니…….”
그녀도 소하경을 좋아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알 수 없는 감정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다가갈 수 없었다.
“함께 걸어도 되겠느냐?”
“……네. 고마워요, 오라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