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살각, 공격하다
달각. 달각.
언제 죽을지도 모를 누런 황소 한 마리.
수레를 이끄는 노인 또한 늙은 황소와 십수 년을 함께했다.
“이보게들, 여기가 하장촌일세.”
수레가 힘겹게 멈추었다.
“처음 타는데 재미있었어요.”
신소소는 아래로 내려서며 밝게 웃었다.
“노인장, 고맙습니다. 약소하지만 사례금입니다.”
“아니, 됐네. 어차피 오는 길이었네. 돈은 자네들이 더 필요할 것 같네만…….”
수레에 태워준 네 명.
옷 상태는 깨끗하지만 복장만 보면 영락없는 거지들이다.
‘허허, 세월이 예전과 달리 많이 변한 탓이겠지. 거지들도 변하는구나.’
“그래도 사람에게는 정이 있지 않습니까?”
남하림은 받지 않겠다는 노인의 말은 상관없다는 듯, 그의 허리춤 안으로 빠르게 뭔가를 넣어두었다.
“허허, 이 사람들이…….”
“그만 갑니다. 장수하십시오.”
노인은 한마디 툭 던지고 사라지는 일행의 뒷모습을 보았다.
‘젊음이 좋긴 좋구먼. 빨리도 걷는 것이…….’
허허 웃던 노인은 문득 허리춤을 뒤졌다.
“한 푼 넣었으면 다행이겠구먼.”
스윽-
허리춤을 당겨 호주머니를 확인했다.
번쩍!
‘이게……?’
노인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허리춤을 열고 닫기를 반복했다.
번쩍거리고 누런 것이, 그 빛이 틀림없었다.
‘아이고…… 재신께서 내려오셨는데 몰라뵈었구나.’
꾸벅.
노인은 남하림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큰절을 했다.
* * *
신소소는 살각이 자신을 죽이려 든다는 말을 듣고는 생각이 많아졌다.
그녀의 느낌은 대부분 정확했다.
살각에서 원하는 사람은 이 거지 놀이 하는 친구들이 아니라 자신이다.
엉뚱한 짓을 하는 바람에 여러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된 셈이다.
‘어휴, 내가 미쳤지…….’
툭툭.
남하림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뭘 골똘히 생각하냐?”
“아무것도 안 해요.”
“그래? 기분 좀 풀어주려고 했는데.”
“어떻게요?”
“근사한 곳에 가서…… 아 참, 넌 아직 애구나.”
신소소는 능글거리는 웃음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아, 진짜. 내가 이래서 아무나 안 좋아하는 거라고요. 후개이신 단화걸 남하림 님께서는 얼마나 고상하신 분이신지 모르죠?”
“후개가 고상하다고? 누가 그래? 만나보지도 못했으면서.”
“꼭 똥인지 아닌지 찍어봐야 알아요? 우리 같은 여인들은 느낌으로 안 봐도 알아요. 무림의 협의를 위해 싸우는 분이시잖아요.”
“그렇군.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고상한 척을 해야 하는군.”
남하림은 팔짱을 끼며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뒤에서 걷던 당무독과 성철각은 억지로 먼 곳을 바라보며 웃음이 나오는 것을 꾹 참았다.
‘부장이 은근히 즐기는 것 같아.’
* * *
하장촌을 향해 빠르게 움직이는 신려세가 호위대에게, 세가에서 보낸 전서가 날아들었다.
살각에서 공녀의 목숨을 노린다는 내용.
‘개방에서 아가씨를 보호하고 있다니 일단은 다행이군.’
다만, 전서에는 후개가 보호하고 있다는 말이 적혀 있지 않았다.
병주학은 호위대를 이끌고 하장촌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밤을 새워 움직이면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다. 모두들 피곤하겠지만 아가씨의 신변을 먼저 확보한다.”
“넵, 알겠습니다.”
호위대들도 상황의 심각성을 알았는지 내력을 끌어 올렸다.
그때였다.
핏! 핏! 핏! 핏!
전방에서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암기들이 쏟아졌다.
“적이다!”
병주학은 검을 휘두르며 암기들을 쳐냈다.
“악!”
암기를 막아내지 못한 수하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쓰러졌다.
‘독을……!’
병주학은 퍼렇게 변하는 수하의 상처를 보면서 소리쳤다.
“독이 묻어 있다! 조심해라!”
파아앗-
병주학은 암기가 날아온 방향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흑색 두건을 쓴 무리들.
흑색 두건에 붉은색의 살(殺)이 또렷히 보였다.
중원에 이런 놈들이 모여 있는 곳은 단 한 곳뿐.
‘살각이다.’
번쩍.
병주학은 살각의 살수들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살수가 모습을 드러낸 이상 큰 위험은 없다.
“이놈들, 끝이다!”
병주학이 내리친 검기들이 살수들을 향해 날아갔다.
스걱-
한꺼번에 세 명의 살수들이 검기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곧바로 떨어져 있는 살수들을 공격할 때!
슈우우욱-
옆에서 강한 살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물러나지 않으면 당한다.’
파앗-!
뒤로 몸을 날린 병주학이 거대한 강기를 막아냈다.
채애애애앵-!
‘욱.’
검을 타고 몸에 전해지는 충격.
손에서 검을 떨어뜨릴 정도의 강한 힘이었다.
‘어떤 놈이지?’
바닥에 내려선 병주학은 팔을 옆으로 뻗으며 조익형의 자세를 취했다.
척척.
양손에 두꺼운 부월도를 든 흑색 두건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살…… 각주인가?”
“제법이군. 본인을 단번에 알아보다니. 신려세가의 파령사신(破靈死神)도 만만치 않군.”
“살각에서 왜 우리를 공격하는 거지?”
“살수가 이유가 있겠는가? 누가 죽여 달라고 하면 죽이는 사람이거늘. 그대는 운이 좋군. 살인 대상이 아니니 살려는 주지. 하지만 바로 물러나지 않는다면 본인의 부월도에 목이 잘리게 될 거야.”
“살각주, 자신이 대단하다고 믿는 모양인데, 본 호위대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큭큭, 오히려 충분하지 않을까? 내가 보기엔 그대가 살각을 너무 무시하는 것 같군.”
“…….”
스스스슥-
주위에서 수백 명의 살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통의 살수와는 다를걸세. 살각의 힘이 어떠한지 보여줘도 되겠나.”
휙!
살각주의 명이 떨어졌다.
팟팟팟.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던 살수들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졌다.
“호위대는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크큭, 안 움직이면 후회할 텐데.”
휘리리릭-
퍼어어엉!
호위대를 향해 날아온 독탄이 머리 위에서 터졌다.
바람을 타고 독 가루가 흩어졌다.
“크윽, 숨을 멈추고 벗어나라!”
“킥킥, 움직이지 말라더니 바로 움직이는군.”
병주학은 살각주의 비웃음을 들으면서 인상을 썼다.
‘독을 쓰는 놈들을 상대로 방어만 하면 당한다. 먼저 공격을 하는 게 최선이다.’
“숨을 멈추고 저놈들을 죽여라!”
휘이익-
병주학은 살각주의 목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어딜 가느냐? 목을 내놔라!”
살수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네놈들이 본인의 검을 막을 수 있다고 보느냐?”
스걱-
번쩍.
파령검이 움직일 때마다 살수들의 목이 잘려 나갔다.
‘과연 대단하군. 하지만 오늘 여기에서 죽는 건 네놈이지.’
휘릭-
살각주가 부월도를 역으로 잡았다.
그러고는 바닥을 쓸듯 몸을 한 바퀴 회전하며 도강을 쏟아냈다.
슈우우우강-
도강은 막강한 위력을 지녔지만, 내력의 손실이 많아 함부로 펼치기엔 다소 위험 부담이 컸다.
슈우우우욱-
하지만 살각주는 연이어 도강을 쏟아냈다.
병주학의 눈이 커졌다.
양쪽에서 교차되며 날아오는 부월도강!
병주학 또한 전력을 다해 파령검에 내력을 실었다.
콰아아앙!
쾅아아아앙-!
도강 대 검강의 대결.
찌지지직.
부월도를 막아낸 파령검의 검신이 부러졌다.
“하아아앗!”
병주학은 삼류무인들처럼 기합을 지르며 양손으로 잡은 파령검을 앞으로 힘겹게 밀어냈다.
퍼어어엉!
부월도와 파령검이 떨어지며 강한 파열음이 터졌다.
주루루루룩-
결국 병주학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밀려 나갔다.
펄럭.
찢겨 나간 상의.
욱신.
가슴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부러…… 졌다.’
도강의 충격에 의한 중상이었다.
“큭큭, 부상을 당한 모양이군.”
휘이잉- 휘이잉-
부월도가 살각주의 손에서 빙빙 회전했다.
수많은 이의 피를 머금은 도가 병주학의 목숨을 끊기 위해 천천히 다가섰다.
“꼼짝도 못 하고 빌빌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안타깝소이다. 그만 보내주겠소.”
타앗!
살각주는 양손을 옆으로 뻗은 후 병주학을 향해 마지막 참격을 날렸다.
슈우우우우웅-!
병주학의 두 눈동자로, 바람을 가르며 좌우에서 날아오는 부월도가 보였다.
휘익-
스걱.
병주학의 목이 날카로운 도기에 그대로 잘려 나갔다.
척.
되돌아온 부월도를 잡은 살각주가 소리쳤다.
“한 놈도 빠짐없이 모두 죽여라!”
“존명.”
대주를 잃은 호위대를 향해 달려드는 살수들.
스윽.
살각주는 천천히 부월도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크크, 이젠 그년을 잡으러 가볼까?”
* * *
하장촌에 들어선 다음 날, 이휘연과 팽유도가 합류했다.
“형, 지금쯤이면 도착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오늘까지 오지 않는다면 중간에 잘못됐을 가능성이 크다. 움직일 준비를 하는 게 좋겠어.”
“알겠어요.”
당무독도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어라? 이건…….’
멈칫.
“모두 호흡을 멈춰!”
당무독은 얼른 가방 안에서 환단을 꺼내 하나씩 나눠주었다.
“살각 놈들이야. 미산공독을 뿌렸어. 이것들이 감히 내 앞에서……!”
꿀꺽.
남하림이 먼저 해독제를 입에 넣었다.
“여기서 나가야겠다. 일반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겠어.”
치이익-
당무독은 흰색 가루를 탁자에 올린 뒤 태웠다.
“이 정도면 공기 중에 독기를 태울 수 있을 거야.”
“잘했어.”
휘익.
남하림은 이 층으로 올라가 문이 닫힌 방 너머로 말했다.
“가야겠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신소소가 나왔다.
“누가 죽었냐?”
“…….”
“그럼 울긴 왜 울어.”
“우는 것도 맘대로 못해요?”
“가자.”
“본가에서 왔어요?”
“아니, 이상한 놈들.”
“…….”
“살각이다.”
신소소는 급한 상황을 알아차렸다.
남하림을 따라 급히 밑으로 내려오자 네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먼저 먹어. 해독제야.”
그녀는 당무독이 준 환단을 받아 입에 넣었다.
강한 쓴맛에 이마가 찡그려졌다.
“혹시 모르니 최대한 호흡은 짧게. 알겠지?”
“알겠어요.”
팽유도가 앞장서서 객잔을 나섰다.
곧바로 마을에서 벗어난 일행이 사람들이 없는 장소로 움직였다.
샷샷샷!
바람을 따라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제법 많은데요?”
“큰 건수가 있지 않고선 이 정도 살수 조직이 움직이지 않아.”
“일단 이놈들을 잡은 뒤 물어볼까?”
“일급살수 놈들과 싸우는 건 처음인데…… 재밌겠어요.”
‘뭐야.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신소소가 놀란 눈으로 걸협오성을 쳐다보았다.
대화에서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섯 명밖에 안 되는 인원.
상대는 백 명이 넘는 살수 조직이다.
‘대체 이 사람들 정체가 뭐야?’
* * *
‘어떻게 된 놈들이지? 분명 중독되어야 하는데.’
신려세가의 공녀를 쫓던 살각주 독정은 미간을 찡그렸다.
미량의 독분이라도 마셨다면 중독이 되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움직이는 속도를 봐선 내력에 전혀 이상이 없어 보였다.
스걱-
‘뭐지?’
뒤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살기.
하지만 금방 다시 사라졌다.
‘아닌가?’
의구심이 든 순간, 다시 그의 뒤에서 살기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누군가 뒤에 있다!’
그는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뒤에 따라오는 살기의 정체를 찾아야 하는가.
아니면 계속 목표를 따라가야 하는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뒤에서 다가오는 살기는 점점 강해졌다.
스걱-
“커억!”
털썩.
이제 비명 소리까지 들렸다.
“모두 멈춰라!”
뒤를 뺏긴 채 무작정 앞으로 향할 순 없는 법.
독정은 바로 쫓아오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당황했나 보군.”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인물.
태극흑검을 비스듬히 내린 이휘연이었다.
그를 보는 독정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거지 새끼가…… 언제 뒤로 갔지?’
“죽여라!”
스스스슥-
순식간에 열 명의 살수들이 달려들었다.
십자 진형으로 뻗어지는 검.
완벽한 합공에서 뻗어 나오는 살기가 상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옭아맸다.
하지만 그들은 상대가 누군지 몰랐다.
이휘연에겐 어떠한 살기도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이 정도 살기면 꽤 훌륭해.”
파앗!
이휘연은 한마디를 뱉으며 붉은 태극 문양을 만들었다.
스르륵-
연자초수의 몸짓에 태극의 붉은빛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스극.
스극.
살수들은 언제 검기가 자신의 목을 지나쳤는지 알지 못했다.
“커억.”
쿠우웅!
굳어진 살수들의 몸이 쓰러졌다.
핏핏핏.
붉은빛을 뿌리는 태극흑검은 멈추지 않고 하나의 동작처럼 끊임없이 이어졌다.
태극검의 지검귀원의 초식이 흔들린다.
음양은 사라지고 팔괘가 생기듯.
여덟 방향으로 시린 검기가 뻗어나갔다.
“아아악-!”
이휘연에게 달려들었던 살수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단말마를 지르며 쓰러졌다.
‘태…… 극…… 문양……?’
독정의 손에 땀이 축축이 배었다.
무당파의 무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짙은 살기.
열 명의 수하들이 호흡 한 번에 죽음을 당했다.
척!
독정은 부월도를 양손에 고쳐 잡았다.
“모두 저놈을 죽여라!”
수십 명의 살수들이 이휘연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순 없다.”
“누가 혼자라는 거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독정의 몸이 움찔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거지 복장.
깔끔하게 흘러내린 장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네놈들은……!”
“대충 누군지 눈치챘지?”
‘개방…… 의……!’
독정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까닥.
“그럼 살수 놈들을 정리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