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비무 결투
유유암으로 오르는 길은 무거웠다.
길가에 세워놓은 돌벽.
오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마치 어제 본 것만 같다.
유유암에 가까워질수록 사부 진양진인에 대한 그리움이 강해졌다.
척.
이휘연은 걸음을 멈추었다.
따뜻한 햇볕이 드는 마루 기둥 옆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노도인의 모습.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다.
이휘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사…… 부님.”
“허허, 죽을 때가 되니 헛소리가 들리는구나. 유운의 목소리가 들리다니.”
노도인이은 눈을 뜨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미하게 보이는 사람의 인영.
“거기 누구요?”
“사부님, 유운입니다.”
기둥에 기대고 있던 노도인이 몸을 움찔거렸다.
“누구라…… 했더냐? 방금 유운이라 했느냐?”
노도인의 몸이 휘청거렸다.
휘익.
이휘연은 얼른 진양진인을 부축했다.
노도인은 이휘연의 체온을 느꼈다.
“어허…… 유운이 맞구나. 우리 유운이…… 왔구나.”
“사부님.”
이휘연은 가냘픈 진양진인을 품에 그러안았다.
* * *
스윽.
진양진인은 네 명의 청년에게 절을 받았다.
“사부님, 처음 뵙겠습니다.”
“허허허, 그대가 후개인 모양이구나.”
시력이 많이 나빠진 그였지만 제자의 동료들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네는 팽유도라는 청년이구만.”
“네, 어르신.”
“여기는 성철각이고…… 마지막으로 자네는 당무독이겠구먼.”
진양진인은 한 명씩 손을 잡으며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개방에서 지낸 오 년 동안의 일들을 나누니, 서로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콜록…… 콜록…….”
기침이 심했지만 진양진인의 입가에서 미소가 연신 떠나지 않았다.
중간중간 웃음을 짓고 있는 유운이라니.
‘후후, 이들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그의 제자는 무당파에서 가지지 못했던 동료의 정을 개방에서 느끼고 있었다.
툭툭.
진양진인은 이휘연의 손을 맞잡고 두드려 주었다.
“잘됐구나. 정말…….”
죽음을 앞둔 지금,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걱정만이 남아 있었다.
세상에 홀로 남을 제자.
근데 이제는 걱정이 사라졌다.
“유운아, 눕고 싶구나.”
이휘연은 조심스럽게 그를 침상에 눕혔다.
“편안하구나.”
“…….”
진양진인의 손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내가 오늘까지 숨이 멎지 않고 있었던 이유가 너를 마지막으로 보고 가려던 것이었구나.”
“사부님.”
이휘연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유운아. 무당을 여전히 미워하느냐?”
“……모든 것을 잊었습니다.”
“허허, 괜찮으니라. 미운 것도 정이 있기 때문이 아니더냐. 하지만 장문인, 진무 사형은 파문을 시키겠다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너를 지켜준 분이시다. 무당을 미워하지 말았으면 한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니…… 됐구나.”
진양진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후…… 개…….”
남하림이 그의 곁에 앉았다.
스윽.
진양진인은 힘들게 손을 들어 올렸다.
남하림은 차가워지는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후개…… 함께해 주어 고맙네. 그리고 이 녀석과도…… 항상 곁에 함께해 주면 고맙겠네.”
“걱정 마세요. 휘연 형님은 당연히 저희들과 같이 있을 겁니다. 사부님께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 고맙네. 후개를 믿고…… 편안한 마음으로 가겠네.”
“……네. 편히 쉬세요.”
남하림은 그의 손을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진양진인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진양진인의 등선.
한동안, 작게 흐느끼는 소리만이 유유암의 빈 공간을 채웠다.
* * *
유유암에 올라온 지 사흘이 지났다.
이휘연은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유유암의 마당에 앉아서 보냈다.
“하림 형, 휘연 형은 괜찮을까?”
며칠 동안 혼자 있는 이휘연의 모습을 보며 시무룩해진 팽유도가 물었다.
“괜찮아. 이곳에서 지냈던 그분과의 정을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있는 거야.”
“으응…….”
남하림은 그가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정리할 때까지 기다릴 것이었다.
또각.
“음? 누가 올라오는 것 같은데…….”
그때, 팽유도가 유유암으로 들어서는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스윽.
한 도인이 고개를 숙이며 들어섰다.
“장문인.”
뜻밖의 인물.
장문인 진무진인은 홀로 앉아 있는 이휘연의 곁으로 다가섰다.
“아직 잊지 못한 모양이구나.”
“어찌 사부님을 잊겠습니까. 영원히 제 가슴에 함께할 것입니다.”
“허허허, 가슴에 품은 것을 보니 잊지 않고 추억을 저장하는 중이구나.”
“그렇습니다.”
진무진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휘연을 살폈다.
현기가 바람을 일으켰다.
‘도복을 입었다면 좋았을 것을…… 아쉽구나.’
남하림은 대청 아래로 내려서며 진무진인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후개, 불편한 것은 없는가?”
“씻는 건 말고는 특별히 불편한 것이 없습니다. 신경을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일세.”
남하림을 살피는 진무진인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변했다.
‘소문이 사실인지 보고 싶군.’
현무진기가 남하림의 신형을 감쌌다.
개방의 걸협오성.
‘허허, 모두 약관이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구나. 특히…… 후개, 이 아이는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군.’
순간 개방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 파에도 능력이 뛰어난 제자들이 많긴 하지만, 이들 다섯 명보다 우위에 섰다고 확신할 수가 없군.’
진무진인은 소문으로 듣던 이휘연의 무공을 직접 견식해 보고 싶었다.
“어려운 부탁을 하나 해도 되겠느냐?”
“무엇인지요?”
“나와 비무를 했으면 한다.”
검선이라 불린 무당파 최고의 무인.
오히려 이휘연의 입장에서는 영광이었다.
“네. 장문인.”
* * *
유유암의 마당은 비무를 하기에 장소가 좁았지만, 두 사람은 연연하지 않았다.
“검은?”
소문에 검을 사용한다고 들었건만 보이지 않았다.
딸깍.
이휘연이 타구봉에서 검을 뽑았다.
진한 묵색의 검신이 타구봉에서 드러났다.
“흐음…… 예사롭지 않는 검이구나.”
“부장의 부탁으로 명장 전기님께서 특별히 만들어주신 검입니다. 제자가 함부로 태극이란 명을 붙여 태극흑검이라 지었습니다.”
“명장 전기의 검이란 말이더냐? 태극이란 명을 사용하기에 충분하구나. 좋은 인연을 지녔도다.”
“개방에서 부장을 만나도록 해주신 장문인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허허. 모든 것에 감사를 표하다니…… 대체 이 아이를 어떻게 변화시킨 것인지 궁금하군.’
진무진인은 슬쩍 웃으며 한쪽 기둥에 비스듬히 기댄 채 구경 자세를 잡은 남하림을 보았다.
“그렇다면 무공은 어떠한지 보고 싶구나.”
무공은 스스로 깨우치고 수련하지 않는다면 발전하지 못하는 것.
이휘연의 의지를 보고 싶었다.
스릉-
진무진인의 현무검이 구름이 지나가는 듯 흘러갔다.
‘태극혜검을……!’
“태극음양(太極陰陽)”
진무진인의 현무검이 음양의 태극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휘연도 태극흑검을 펼쳐 반격했다.
‘오호, 붉은 태극이라…….’
신기한 듯 눈을 반짝이는 진무진인.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붉은빛의 태극이다.
스르르륵-
흑백의 음양과 붉은빛의 음양이 교차하며 더 큰 태극의 음양을 이루었다.
서로의 눈앞을 지나쳐 가는 현무검과 태극흑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흩날리며 마치 검무를 추듯 물러남이, 서로 마주 보는 동경과 같았다.
“연자초수의 초식에 개방의 절기가 녹아들었구나. 열심히 했다.”
“고맙습니다.”
“음양시태청소양(陰陽始太淸少揚). 육신무용(肉身無用). 극의정신(極意情神).”
현무검이 바람을 가르며 연이어 초식을 펼쳤다.
파바밧-
태극혜검은 깨달음의 태극검이라.
무당의 검은 부드러움 속에서 강함이다.
하지만 태극혜검은 유(柔)에서 유(流)로 이루어졌다.
태극혜검을 상대로 실제 대련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채애애애앵-!
태극흑검을 마음에 맡긴 이휘연은 현무검을 눈으로 좇지 않고, 오로지 검기(劍氣)를 따라 움직였다.
“만검일검(萬劍一劍) 일검일심(一劍一心) 일심일백(一心一白) 일심일만(一心一萬).”
‘장문인께서…….’
그에게 태극혜검을 일 초식부터 보여주고 있었다.
의검일체(意劍一體)
태양동토(太陽凍土)
춘화무의(春花無意)
무의무식(無意無式)
이휘연의 눈빛이 변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무공을 펼친다.
스윽-
진무진인이 현무검을 아래로 내렸다.
“보았느냐?”
척.
이휘연은 두 손을 모았다.
“보았지만 잊었습니다.”
“허허허!”
진무진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까운지고. 네 녀석을 진작 품었다면 좋았을 것을…….”
태극혜검은 깨우침의 검.
외우는 검이 아니다.
진무진인 또한 완벽하게 펼치지 못한 초극의 무공이었다.
“진양이 세상에 없다고 하지만, 네 마음속에 있듯 나의 마음속에 있다.”
“장문인…….”
“꽃씨가 바람에 날려 천 리를 간다고 해도 뿌리는 항상 그 자리에 있지 않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항상 제 안에 무당이 살아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서 계신 무당을 어찌 잊겠습니까?”
“고맙구나.”
혹시나 무당을 원망하지 않을까 걱정했건만.
유유암을 내려가는 진무진인의 발걸음이 한층 가벼웠다.
* * *
슥슥슥.
팽유도는 넓은 대접 안에 숟가락을 넣어 힘을 주며 비볐다.
그 모습을 보는 네 명의 입에서 군침이 흘러내렸다.
“오우, 맛있겠는데…….”
“자아아알 됐습니다. 나이순대로 한 숟갈씩 갑니다요.”
“휘연 형 먼저.”
“그래도 부장이 먼저 먹어야지.”
“그래? 그럼 나부터!”
휙!
남하림을 시작으로 한 숟갈씩 밥을 퍼며 먹었다.
오구오구.
입안에 가득 음식을 넣은 서로를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끼익.
유유암의 문이 열렸다.
“누가 거지들 아니랄까 봐.”
“그러게 말입니다. 걸협오성이라고 해서 대단한 줄 알았습니다.”
문 앞에 선 다섯 명의 청년 도사들.
순식간에 표정이 굳은 이휘연이 손에 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형, 이거 먹고 해도 괜찮아. 식으면 맛없어.”
“…….”
그는 조용히 남하림이 주는 숟가락을 다시 잡고는 고개를 돌렸다.
“어이, 도사님들. 무슨 볼일인지 모르겠지만 거기 옆에 앉아서 기다리세요. 원래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거든.”
“저놈들이……!”
“유진 사제, 됐다. 곧 정상적으로 먹기 힘들 테니깐. 앞으론 입이 터져서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모를 게다.”
“큭, 네, 알겠습니다.”
무당파의 진산제자 중 가장 강한 다섯 명의 청년 도사.
꼬르륵.
꿀꺽.
하지만 가만히 서서 밥 먹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고역이었다.
스윽-
“잘 먹었다.”
남하림은 숟가락을 아래로 내려놓았다.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있나요?”
“후개.”
유진의 목소리가 커졌다.
“쪼잔하게.”
짐짓 아쉬운 표정의 남하림.
이휘연이 바닥으로 내려섰다.
“유경, 무슨 일이오?”
“허, 이제는 사형이라 부르지도 않는군.”
“내게 사형 대접을 원하는지 몰랐군.”
“훗, 하긴 네놈은 유운이 아니라 이제는 개방 거지겠지.”
“내가 누군지 잘 알고 있으니 다행이야.”
유경이 이휘연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짝!
다섯 도사들의 시선이 남하림에게 돌아갔다.
“무슨 일로 올라온 거요?”
“개방의 걸협오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견식하고자 왔다.”
“아……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닌 놈들이 이름깨나 알리니 배가 아프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맞소?”
“…….”
“바로 대답을 안 하는 것을 보니 맞는가 보네. 어째 이런 건 매번 틀리지도 않아.”
“저들은 예전부터 그랬지.”
이휘연의 비웃음을 들은 유경의 인상이 구겨졌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우리와 싸우는 것이오?”
“그렇다. 다섯 명이니 일대일로 붙어보는 게 어떻겠는가?”
“아싸, 비무! 형, 좋아요. 난 무조건 일 번이야.”
팽유도가 단번에 소리쳤다.
“나도 찬성.”
“괜찮네.”
연이어 성철각과 당무독도 찬성했다.
“휘연 형은?”
이휘연은 미소를 띠었다.
“모두 찬성하네요.”
“좋다. 나가자.”
“잠깐만, 이런 건 확실히 해야죠. 유도야, 종이와 붓을 꺼내라.”
유경은 뭔 꿍꿍이속인가 싶어 남하림을 지켜보았다.
슥슥.
빈 종이가 금방 먹으로 채워졌다.
“여기에 찍죠.”
‘이건…… 합의서?’
“나중에 서로 딴소리하면 안 되잖아요. 안 그래요?”
“……알겠다.”
쿠욱.
합의서에 빨간 인장이 찍혔다.
“됐어요.”
유유암 밖으로 나서자 꽤 넓은 공터가 펼쳐졌다.
중앙으로 먼저 나온 두 사람은 팽유도와 유명 도사.
“도천걸, 하북팽가라 했나? 그곳은 항상 무당의 검을 이기지 못했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파앗!
팽유도의 등에서 묵흑반도가 타원의 도기(刀氣)를 뿌리며 떨어졌다.
휙!
유명은 뒤로 제운종을 펼치며 묵흑반도를 피했다.
콰아아앙!
묵흑반도가 떨어진 바닥이 움푹 파였다.
‘고작 반도에서 나온 위력이……!’
정상적인 도가 아닌 반도일 뿐인데!
“유명, 정신을 차려라!”
“넷! 알겠습니다.”
유경의 호통 소리에 유명이 얼른 검을 고쳐 잡았다.
핏! 핏! 핏!
일곱 개의 별이 떠오른다.
유명이 검을 펼치자 팽유도를 향해 솟아오른 빛이 퍼져 나갔다.
번쩍.
검이 그린 일곱 개의 별이 폭발하며, 동시에 팽유도를 향해 일곱 방향으로 검기가 떨어졌다.
‘무당칠성검법이군.’
유(柔)하면서도 변화가 무쌍한 무당의 검법.
팽유도가 내력을 끌어 올리며 소리쳤다.
“한꺼번에 부숴주마!”
서지막도(徐地莫刀)의 초식과 회선장법의 산진(散進) 구결을 합쳐진다.
부우우우웅-
투투투투투.
허공을 가르는 묵흑반도.
투기를 실은 도강이 커지면서 아공간으로 빨아들이듯, 일곱 개의 별을 단번에 몰아쳤다.
‘칠성이……!’
허무하게 떨어지는 별.
유명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멍청한 놈, 어딜 보는 것이냐!”
유경이 또다시 소리쳤지만, 심혈을 기울인 공격이 무너져 넋이 나간 그에겐 들리지 않았다.
슈우우욱-
사선으로 세워진 묵흑반도가 단번에 기를 폭발시켰다.
타앗!
번쩍.
벼락이 떨어졌다.
도기가 터져 나가며 유명을 가슴을 강타했다.
“커어어억……!”
데구르르르-
유명 도사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굴러갔다.
“유, 유명…….”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팽유도가 유경을 가리키며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끝났죠?”
‘제기랄…….’
완벽한 패배가 선언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