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백리세가에 들어서다
면산(綿山).
산서성 태원현에 위치한 산으로, 수없이 높은 절벽이 유명한 곳.
백리세가의 정문에는 주요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부가주 백리희와 금관당주 백리천기 뒤로, 각 당의 인물들이 자리를 잡았다.
백리천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허허, 묵이가 자신 있다고 했거늘.”
“숙부님, 상대는 무림맹의 청두사검 서문호진입니다.”
백리희가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맹에 압박을 주기 위해 백리묵을 보내자는 의견에 반대했지만, 금관당주 백리천기는 백리희의 의견을 무시했다.
“멍청한 놈. 초월군을 끌고 갔으면 한번 붙기라도 해야지. 쯔쯔, 이리 간이 작아서야…….”
백리천기는 투덜거리며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휴우…….’
초월군장 백리묵은 백리세가로 돌아오는 길에 거의 말이 없었다.
무림맹의 기세를 꺾고자 초월군을 이끌고 갔지만, 오히려 일이 악화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저어…… 군장님, 정문에…….”
백리묵이 고개를 들었다.
‘부가주와 금관당주께서……!’
어떻게 고개를 들어야 할지 가슴이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백리세가의 인물들 또한 초월군을 발견했다.
하지만 무림맹의 무인들은 백리희의 시선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이…… 다.’
초월군의 맨 뒤에서 다가오는 다섯 명의 인물들.
그녀의 시야에 한 명의 사내가 점점 커지며, 시선이 고정되었다.
‘남하림.’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음은 알고 있었지만,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뛰었다.
백리천기는 푸른 두건을 쓴 서문호진에게 바로 다가갔다.
스윽.
척.
“어서 오시게. 백리천기라 하네.”
“금관당주이시군요. 서문호진이외다.”
두 사람은 짧게 포권을 하며 서로를 주시했다.
“먼 길을 오셨소이다. 힘들지 않으셨소이까?”
“오는 길에 쉬엄쉬엄 구경하느라 지루하지 않게 잘 왔소이다.”
“다행이구려.”
‘이자가 정말 이갑대주밖에 안 된다고?’
백리천기는 그 짧은 순간 상대의 무력 수준을 파악했다.
서문호진도 마찬가지.
상대방의 실력을 가늠한 두 사람은 웃음을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고맙소이다. 아, 참. 소개를 할 사람이 있소이다.”
서문호진은 뒤를 가리켰다.
“저 청년이 개방의 후개이외다.”
‘후개.’
개방의 후개가 남하림으로 정해졌다는 소식은 이미 무림에서 유명했다.
‘인생…….’
당사자인 남하림은 포기할 건 포기하기로 했다.
“천중 형님께서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군.”
“백리세가에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근데 자네가 본 가에는 무슨 일인가?”
백리천기는 은근히 남하림을 아랫사람 대하듯 행동했다.
“첫 대면에 예의를 갖추는 게 좋겠습니다.”
이휘연이 나섰다.
‘이 녀석이 한심걸이군.’
말 한마디에 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웠다.
“자네는 무당파 출신이라고 알고 있네. 나도 무당파 쪽과는 친분이 있지.”
“……지금 협박을 하는 것이오?”
팟!
순간 이휘연의 기가 쏟아져 나왔다.
움찔.
‘욱-’
백리천기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밀려났다.
“난 무당과 상관이 없소. 개방의 제자일 뿐이오.”
‘뭐…… 이런 놈이 있어?’
이휘연의 기세에 백리천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스르르-
“숙부님, 이분들은 제가 따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부가주가? ……알겠다.”
백리희가 살짝 앞을 막아서자, 백리천기는 얼른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두근.
백리희는 남하림을 향해 돌아섰다.
“남 대협, 무례했다면 사과드립니다.”
“백리 소저가 사과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의미 없는 말에는 신경 쓰지 않으니까.”
피식.
백리천기의 굳어진 얼굴을 보며 서문호진은 미소를 지었다.
‘후후, 이거…… 제대로 한 방 때렸는걸.’
구천신품을 두고 대립하게 될 적이지만 일단은 손님.
서문호진과 무림맹의 무인들은 백리세가 영빈각으로 안내받았다.
반면 걸협오성은 화소정(華笑庭)에서 지내기로 했다.
“불편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을 하셔도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도록 하지요. 바쁘실 텐데 그만 가보시죠.”
“…….”
백리희는 서운했다.
여전히 남하림의 목소리는 사무적이었다.
자신에 대한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엇을 기대하는지.
그녀는 아쉬운 마음을 안고 화소정을 나왔다.
털썩!
성철각이 자리에 앉는 남하림을 보며 말했다.
“잠시 이야기 정도는 나눠도 괜찮았을 텐데…….”
“철각, 그럼 괜히 오해하잖아. 부장처럼 가만히 있는 게 좋아.”
“그런가?”
성철각은 당무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팽유도도 남하림의 옆에 앉았다.
“하림 형, 왜 우릴 여기에 따로 두는 거지?”
“무림맹과 떨어지게 할 생각이겠지. 아니면 특별대우든가.”
남하림은 눈을 감았다.
“우선 최대한 쉬자. 당장 가주를 만나진 않을 거야.”
“알겠어.”
* * *
백리세가 팔당의 수장들과 열 명의 장로들이 하나둘씩 월궁대전을 떠나갔다.
그들은 한 시진의 대회의를 거쳐 결론을 냈다.
무림맹과 싸우는 일이 있더라도 구천신품을 돌려줄 수 없다.
그들은 무림맹에 백리세가의 공식적인 뜻을 밝히며, 중원 무림에서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는 동조자들을 모으기로 했다.
잠시 후, 월궁대전에는 네 사람만이 남았다.
가주 백리천강과 부가주 백리희, 금관당주 백리천기와 백리천중이었다.
“거절한다면 무림맹에서 반발이 심하지 않겠는가?”
“가주 형님, 이미 각오했던 일입니다.”
“천기의 말이 맞습니다. 그대로 밀고 나가야 합니다. 여기에서 물러난다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백리천중과 백리천기는 구천신품을 무림맹에게 건네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무림맹에서 주룡군을 보냈다. 그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무 극단적으로 움직이면 안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백리희가 나섰다.
“그건 네가 할 말이 아닌 것 같구나. 처음부터 사기꾼에게 엮이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게다.”
“……죄송합니다. 제가 모자라서 그런 짓을 벌였어요.”
백리희가 백리천기에게 고개를 숙였다.
“허허, 천기 이 사람아. 이미 지나간 일을 일부러 끄집어낼 것은 없지 않는가. 희를 부가주로 세운 나를 원망하는 모양이지?”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가주 형님을 원망하겠습니까.”
“하아, 이미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무림맹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야.”
“가주 형님. 방금 전 회의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만일 다른 곳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충분히 무림맹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백리천기가 대안을 가진 듯 자신 있게 말했다.
“계속 말해보게.”
“무림맹의 막고자 한다면 그에 맞는 힘을 이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기, 돌리지 말고 그대로 말해라. 어디와 손을 잡자는 뜻인가?”
현재 중원 무림은 중원오대천이라 불리는 다섯 곳의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정파의 무림맹.
사파의 천사회.
마도의 중마련.
용병의 용병림.
마지막으로 상가의 상국협이다.
“용병림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용병림이라……?”
“네, 맞습니다.”
“가주 형님, 그들이라면 무림맹에 충분히 대항할 수 있겠습니다.”
백리천중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백리희는 오히려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용병림에 의뢰한다면 비용이 많이 들지 않겠습니까?”
“부가주, 구천신품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깟 비용이 중요할까?”
스윽-
백리천기는 시선을 돌려 가주 백리천강을 보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백리희의 표정이 더욱 무거워졌다.
‘구천신품이야. 과연 용병이 가만히 있을까?’
용병들이 비록 돈에 움직인다고 하나, 욕심이 없진 않을 터.
“금관당주의 의견이 좋겠네. 그들이라면 충분히 막아줄 수 있겠어.”
용병림 의뢰.
백리천강 또한 무림맹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여겼다.
* * *
해가 면산 뒤로 넘어가고, 백리세가는 어둠 속에 잠겼다.
스륵-
백리희는 밖으로 나와 쌀쌀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가슴이 무거우면서도 시렸다.
‘왜…….’
백리세가는 이미 자신의 손에서 멀어졌다.
구천신품을 다시 찾아왔지만, 이미 세가의 분위기는 예전과 달라진 상황.
‘물러나야 하는데.’
그녀는 두려웠다.
세가를 떠나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예전에는 하루하루가 즐거운 나날들이었는데.
가문을 이끌 수 있다는 자신감도 충만했다.
근데 어느 날,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모든 것이 내가 바보라서 벌어진 일이야.’
멈칫.
순간, 백리희의 발걸음이 굳어졌다.
정문 위에 걸린 작은 현판.
화소정(華笑庭)이 보이자, 그녀의 얼굴에 당황한 흔적이 지나갔다.
‘내가 왜?’
열린 문 안으로 화소정의 건물이 보였다.
백리희는 누가 보기라도 하듯 다급히 돌아섰다.
하지만 화소정을 떠나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늪을 지나는 듯 무거웠다.
“……하림 형, 그냥 가네?”
“잘못 왔겠지.”
화소정 창 너머로, 남하림과 팽유도가 사라지는 백리희의 뒷모습을 좇았다.
“왜 왔을까요?”
“내가 저 사람 생각을 어떻게 알겠어? 그만 들어가자.”
“그렇긴 해.”
팽유도가 먼저 몸을 돌렸다.
남하림은 걸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휴, 죽을상이군.’
백리희의 얼굴에는 예전의 도도한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 * *
무림맹과 백리세가의 담판을 짓기 위한 최후의 장소는 월궁대전이 아닌 수월전이었다.
수월전 주위로 호월위의 무인들이 내력을 뿜으며 손님들을 둘러쌌다.
백리세가 측에서 나온 네 명.
백리천중과 백리천강, 그리고 백리천기와 백리희였다.
반대편 무림맹에서는 서문호진과 호광, 그리고 남하림이 함께했다.
그들은 삼 장의 긴 탁자를 두고 서로 마주 앉았다.
“처음이자 마지막 회의이기를 바라오.”
서문호진은 앉은 채로 포권을 했다.
“본 가도 마찬가지외다.”
“잘됐군요. 서로 원하는 뜻이 같으니 쉽게 끝날 것 같소. 하하핫.”
서문호진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본인이 먼저 이 문제에 대해서 알릴 사항이 있소.”
‘이자가 무슨 꿍꿍이지?’
백리세가 인물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켰다.
“산동악가의 일을 들었을 것이라 생각하오.”
모를 리 없었다.
다름 아닌 구천신품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니까.
백리세가 쪽에서도 무림맹에서 어떻게 나올지 바짝 촉을 세웠다.
산동악가의 구천신품은 여전히 행방불명된 상태.
“그냥 말하겠소이다. 구천신품은 여기 후개가 찾아서 무림맹에 맡겼소.”
‘뭣이!’
‘후개가!’
네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후개에 집중되었다.
“전부 의아한 표정들이군. 당연한 일이지 않소이까?”
“…….”
백리세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 아니다.
“후개,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무림맹에 맡겼지요.”
남하림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허어…… 저런 미친놈이…….’
백리천기는 믿기지 않았다.
‘그 구천신품을? 무림맹에 그냥 넘겼단 말인가? 멍청하긴!’
서문호진은 백리세가의 네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후개가 산동악가에서 찾아온 구천신품을 왜 무림맹에 맡겼겠소이까?”
“청두사검. 지금 그대가 말하는 진위는 본 가도 구천신품을 무림맹에 넘기라는 뜻이오?”
“그렇소.”
“완전 도둑놈 심보이지 않소이까!”
“누가 도둑놈인지 모르겠소이다. 구천신품이 마치 백리세가의 물건인 것처럼 말하는군요.”
“청두사검, 본 가의 물건이 아니라면 무림맹의 것이란 말인가?”
“크하하핫!”
서문호진은 대소를 터뜨렸다.
“당연하지 않소이까? 구천마성을 무너뜨린 맹주님이 당연히 주인이 되어야 하거늘! 구천마성이 겁나 쥐구멍에서 숨어 지내다가, 끝날 무렵 고개를 쳐들고 나타나서 물건을 훔쳐 달아난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니외다!”
“청두사검! 말을 너무 함부로 하고 있소!”
백리천기의 눈에 살기가 번뜩거렸다.
“금관당주는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게.”
“가주님, 방금 이자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본 가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어허, 천기. 가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는가?”
백리천중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젠장!’
백리천기는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한발 물러났다.
“청두사검, 그것이 무림맹의 뜻인가?”
“그렇소이다. 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무림을 어지럽게 하는 구천신품을 거두어들이라 하셨습니다.”
“만일 본 가에서 구천신품을 돌려줄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소이까?”
서문호진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백리세가는 무림맹에서 제외시킬 것이며, 곧바로 무력으로 구천신품을 획득할 것이외다. 그 과정에서 백리세가의 존폐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을 것이오.”
“맹주가 아닌 군사의 뜻이오?”
“구천신품에 관한 모든 일은 군사에게 위임되었소이다. 군사의 뜻이 맹주님의 뜻이오.”
“군사 제갈령이 진정 그렇게 말했소이까?”
“본인이 거짓을 말한다고 보시오? 무림맹에 확인을 해도 좋소이다.”
백리천중과 백리천강은 가슴이 무거웠다.
제갈세가와 백리세가는 예로부터 친분이 깊어 유대감이 높았다.
제갈세가마저 그들의 편이 아니라면……!
“다른 문파에서는 군사의 뜻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외다.”
“착각하는 게 아니오? 어느 문파에서 백리세가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 보는 게요?”
“…….”
백리천중에게 일갈한 서문호진은 한 장의 종이를 꺼내 그들 앞에 내려놓았다.
백리희가 그가 내민 종이를 펴 보았다.
‘명부…… 본 가를 무림맹에서 퇴출시킬 수 있다는 서명이 담긴……!’
손이 떨려왔다.
백리희는 백리천강을 보며 말했다.
“아버지. 이건 최후통첩입니다.”
구천신품은 무림의 탐욕을 상징하는 물건.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남도 가질 수 없다.
종이 위로 가문들의 서명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허어…….’
숨이 막히는 듯한 압박감.
백리희뿐 아니라 백리천중도 마찬가지였다.
“서문호진. 이것이 무림맹의 뜻이라면 본 가는 무림맹에서 탈퇴하겠다! 오직 무림맹이 중원 무림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버려라!”
백리천기가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남하림은 그가 생떼를 쓰는 아이처럼 느껴졌다.
“하, 그게 대체 뭐라고 세가를 버리려고 하는지…… 무림맹에 맞서는 걸 보니 백리세가에서도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군요.”
“……!”
“무림맹과 비견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가 있겠습니까?”
“중원오대천이다.”
서문호진이 짧게 대답했다.
“그렇죠? 백리세가가 아무리 막 나간다고 해도 사파와 마도는 아닐 테고. 상국은 돈 되는 일 아니면 잘 나서지 않을 테니 결국 한 곳밖에 없겠군요.”
서문호진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훗, 용병림이군. 제법 머리는 굴렸어. 그들을 이용해서 무림맹을 이길 생각을 하다니 놀랍소이다.”
백리천기는 서문호진의 말엔 신경 쓰지 않았다.
‘저…… 놈이…….’
파앗!
남하림을 향해 백리천기의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