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서문호진
척.
오종의 앞으로 다섯 명이 일렬로 섰다.
“당당한 모습을 보면 마음이 놓이긴 하는데. 무림에 내보자고 하니 살짝 걱정이 되는구나.”
“걱정 마세요. 소리 없이 가서 없는 듯 지켜보다가 오겠습니다.”
“허허허, 첫째도 몸조심. 둘째도 몸조심이다.”
오종의 인사가 끝이 나자 주요 인물들 또한 한 명씩 앞으로 나왔다.
“흐음…….”
영충은 인상을 쓰면서 남하림의 앞에 섰다.
“너희들이 만나야 할 인물이 누구인지 알고 있지?”
“주룡군의 이갑대주 서문호진이라고 하던데요.”
“맞다. 청두사검. 그의 별호이지.”
“아항, 겁나네요.”
“그렇다. 만나보면 알겠지만 생긴 모습도 아주 날카롭지. 괜히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그의 심기를 조심해라. 그리고…… 아니, 됐다.”
영충은 그에 대해서 더 말을 이어려다 그만두었다.
‘쩝, 만나보면 알겠지.’
“고맙습니다. 역시 추개님의 속마음은 저희들을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흥, 네놈 때문에 본 방에 좋지 않는 인식이 생길까 싶어 걱정이 될 뿐이다.”
“넵, 최대한 조심할게요.”
영충은 귀찮은 듯 고개를 돌리며 이휘연 앞에 섰다.
‘그나마 이 녀석이 제일 나은 놈이지.’
냉철하면서도 규율에 벗어나지 않으며, 절제된 행동을 했다.
무공도 남하림과 비등했다.
그가 보기엔 아무리 찾아봐도 이휘연보다 뛰어난 인물이 없었다.
‘이런 녀석이라면 규율당주에 적합하지.’
“휘연, 저놈을 잘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영충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지나 나머지 한 명씩 인사를 마쳤다.
반각 뒤.
보고를 마친 다섯 명이 협의문을 나섰다.
오종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후후후, 또다시 새로운 바람이 불겠지?”
“그렇겠지요. 한 번씩 나갈 때마다 큰일을 치고 오지 않습니까.”
“휴우, 전 차라리 아무 일도 없이 조용히 오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서문호진, 그 인간이 우리를 얼마나 무시하는지 알지 않습니까.”
“후후후. 우리가 아니고 자네에게 아니었나? 하긴 서문세가 놈들이 까칠한 성격이긴 해.”
오종도 인정하는 바였다.
“근데 추개, 자네도 알지 않는가. 저 녀석도 꼴통일세. 가만히 당하지는 않을 거야. 하하하!”
영충은 얌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방주님, 제가 어찌 그걸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더 걱정입니다. 백리세가에 가기도 전에 사달이 나지 않을까 싶어서요…….’
* * *
무림맹의 인물들은 광오했다.
천하유일맹(天下有一盟).
당연했다.
무림암흑기를 몰아내었던 주축 세력.
은하검인 유극지를 따르는 친위 세력을 중심으로 새롭게 무림맹을 조직했기 때문이다.
강호 무림은 구천마성 이전의 무림맹을 구 무림맹이라 불렀다.
암흑기가 끝난 후, 구천마성에 의해 뿔뿔이 흩어졌던 구파와 십대세가, 오대검파 등 많은 중소군파의 정파들이 그를 무림맹주로 추대했다.
은하검인 유극지는 예전의 무림맹주와 달랐다.
그는 정파의 대문파인 구대문파와 십대세가의 간섭을 무시했다.
이유는 단 하나.
무림맹주 은하검인 유극지는 강했다.
* * *
두두두-
주룡군기가 펄럭이며 대지를 진동시켰다.
구천(九天)이라는 아홉 개의 조직 체계를 가진 무림맹.
그중 가장 강한 힘을 지닌 육천(六天)은 여덟 개의 강력한 군으로 이루어진 조직이었다.
‘백리세가…… 미치지 않고서야 무림맹의 명을 무시할 순 없는 일이거늘.’
청색 두건으로 머리를 감싼 중년인.
주룡군 이갑대주 서문호진의 눈빛은 살벌했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자마자 머리카락이 빠져 항상 두건을 두른 탓인지, 무림인들은 그를 가리켜 청두사검(靑頭巳劍)이라 불렀다.
무림팔천의 주 임무는 대외비 활동과 살수와 같은 특별 조직의 운용.
때문에 백리세가와 관련된 외부 임무는 원래 팔천(八天) 소속인 청룡당에서 맡아야 했지만, 무림맹 군사의 명에 의해 군사 조직인 육천 주룡군으로 결정이 났다.
서문호진은 백 명의 주룡군 이갑대를 이끌고 백리세가로 향했다.
‘뜨겁군.’
정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전장의 기운이었다.
무림맹과의 사전 약조에 따르면, 산서성 진성으로 들어서는 태행산 초입에서 그들을 만났어야 했다.
“아직 연락이 없는가?”
만나기로 한 객잔에 먼저 도착했다.
청색 두건의 중년 사내.
서문호진은 서서히 화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갑대 부관 호광은 상관의 성격을 잘 알았다.
“대주님, 아직 시간이 남았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제 시간에 도착할 것입니다.”
“호 부관, 나 또한 지금이 몇 시인지는 안다네. 하지만 무림맹과 함께할 영광을 개똥으로 아는 모양이군. 하루 먼저 도착해서 우리들을 기다려야 하는 게 정상이다.”
‘으으, 이거 제대로 일이 터지겠는데…….’
그의 상관인 서문호진은 유난히 거지들을 싫어했다.
거기에다 냄새에 민감해서 개방의 인물들과는 천성적으로 맞지 않았다.
하지만 개방 인물과 함께 백리세가로 움직이라는 명을 받았다.
“부관, 아직도 안 보이는가?”
“…….”
방금 전에 물어본 지 반각도 지나지 않았어!
호광은 가슴을 졸이면서 주위를 살폈다.
다시 일각의 시간이 지나갔다.
‘앗, 저기!’
멀리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다섯 명의 인물들.
얼핏 보기에 거지 복장처럼 보였다.
“대주님, 개방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거지 놈들이 나에게 한 소리 듣고 싶은 모양이군.”
뭉그적뭉그적.
마치 동네 건달처럼 다가오는 모습에 서문호진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저놈들이…….’
분명 시선이 마주쳤건만 여전히 세월아 네월아 오는 모습이 못마땅했다.
‘미리 손을 좀 봐줘야겠어.’
구파일방이라 하나 정보력이 아니면 무력은 다른 문파들에 비해 무시할 수준이라 단정했다.
개방에 대한 선입견은 무림에서 아직 팽배했다.
“하림 형, 표정들이 별로 안 좋아.”
팽유도는 의자에 앉아 노려보는 서문호진의 눈빛을 살폈다.
“원래 성격이 더럽다고 했잖아. 관상은 속일 수가 없거든.”
“관상…….”
남하림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멀리 앉아 있는 그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시작부터 한바탕 하겠는걸?’
팽유도는 남하림의 뒤에 바짝 붙어 섰다.
마침내 하림 일행이 도착했다.
“유도야,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지?”
“오시(五侍)가 되려면 조금 남았겠어요.”
“제때 도착했네.”
‘알고 있다는 것인가?’
호광은 곧바로 시간을 확인하는 남하림을 보면서 상관의 기분을 빠르게 살폈다.
‘흐음…… 이 녀석들이 걸협오성이라는 개방의 후기지수들이군. 듣던 대로 정말 여타 거지들과는 다른데.’
서문호진은 무림맹에서 떠나오기 전 한저를 만나 걸협오성에 대해 들었다.
“다행히 자네들은 썩은 냄새는 안 나는군. 개방 거지를 만날 때마다 괴로운 기억이 있어서.”
“많이 괴롭긴 하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남하림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라……?’
이렇게 얘기하면 무시당해 발끈하거나 얼굴색이라도 바꾸는 게 보통이었는데?
“호오? 잘 아는군. 거지가 거지 냄새가 싫다고 하는 말은 처음 듣는데 자네들이 걸협오성인가? 요즘 강호 무림에 한참 이름 꽤나 날리더구먼.”
“청두사검께서도 본 방에서 유명하신 모양이더군요. 많이 들었습니다.”
“허? 크하하하!”
서문호진은 대소를 터뜨렸다.
“누가 내 이야기를 많이 했던 모양이군.”
서문호진은 기분이 풀렸는지 한 명씩 살피다, 팽유도와 당무독에게 반갑게 알은척을 했다.
“자네들은 하북팽가와 사천당문이라 들었다. 앞으로 잘 지내보세. 같은 세가 출신들끼리.”
“죄송하지만 전 하북팽가가 아니라 개방의 제자입니다.”
“저도 굳이 당문에 돌아갈 마음은 없습니다.”
팽유도와 당무독의 대답에 서문호진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제법인걸. 하기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무림맹의 사람이지만.”
아직 통성명을 나누지 못했다.
“이름이나 알고 지낼까?”
“대충 서로 알고 있으니 인사나 드리지요.”
“간결해서 좋군. 생각과 점점 달라지는걸.”
“청두사검께서도 예상과는 다르시군요.”
“거 다행이구만.”
* * *
‘거지들이 먹는 음식이 맞나?’
서문호진은 믿기지 않았다.
걸협오성이 따로 식사를 하겠다고 하자, 서문호진은 흔쾌히 그리하자고 했다.
가져온 자금도 빠듯했으니까.
그런데 건너편에 앉아 식사를 하는 다섯 명의 식탁에는 객잔에서 가장 비싼 요리들이 가득했다.
‘……?’
자신들의 식탁에도 제법 값비싼 음식들이 있었건만.
상대적으로 너무 초라해 보였다.
“대주님, 드시지요.”
“에이…….”
서문호진은 고개를 돌리며 음식을 입에 넣었다.
와작와작.
그는 입을 움직이면서도 시선은 건너편에서 떼지 않았다.
덜컹.
그때 객루의 문이 열리면서 연분홍빛 백의 무복을 입은 십여 명의 무인들이 들어섰다.
어깨 부위에 새긴 문양.
신월의 월첨 끝에 검 모양이 눈에 띄었다.
‘백리세가군.’
서문호진은 입안에사 음식을 씹는 채로 그들을 보았다.
초월군장 백리묵은 객루 안을 살폈다.
‘저기군.’
서문호진과 시선이 마주쳤다.
사전에 무림맹에서 어떤 인물이 오는지 이미 파악한 상태.
백리묵은 한 발씩 내디디며 서문호진의 앞으로 다가섰다.
“무림맹에서 오셨소?”
타악!
서문호진은 손에 든 젓가락을 식탁을 강하게 내려놓았다.
“맞습니다만.”
“무슨 이유로 왔는지 물어봐도 되겠소?”
“지금 싸우고자 하는 것 같은데. 바로 그 이유라고 한다면?”
서문호진의 살기에 푸른 두건이 흔들렸다.
“난 단지 이유를 물어봤을 뿐이오.”
“순서가 틀렸지 않소.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혀야 하지 않나?”
백리묵의 온몸을 압박감이 둘러쌌다.
‘큭, 무림맹이 이 정도로 강했다는 것인가?’
주룡군의 수장도 아닌 그저 이갑대의 대주가 아니었던가?
“……본인은 백리세가의 초월군 수장을 맡은 백리묵이오.”
“수첨월검(秀尖月劍)이 그대군. 내가 누군지 알고 왔겠지만 난 서문호진이다.”
긴장 속에서 인사를 끝낸 두 사람.
“통성명을 했으니 본론을 이야기해 줘야 하나? 무림에 해가 되는 구천신품이 백리세가에 있으니 조용히 받아 갔으면 하는데.”
객루에는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호무림에서 제법 칼밥을 먹고 사는 인물들이 이미 많은 상황.
‘구천신품이 역시 백리세가에?’
무림에 떠도는 수많은 소문들.
워낙 거짓이 많으니 누군가 확인을 해주지 않는 이상 반신반의할 뿐.
그런데 구천신품에 대한 소문의 진실을 무림맹이 인정했다.
객루 한복판에서.
자연히 주변인들의 청각이 예민해졌다.
객잔에서 구천신품에 대해 말을 꺼낼 줄 몰랐던 백리묵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 이유를 묻고자 객잔에 온 것이 아니었나?”
“무림맹에서 본 가에 찾아온다고 하기에 이유도 알 겸, 마중을 나온 것이오.”
“훗…… 객잔 밖을 포위한 수백 명의 당신 수하들은 할 일이 없었던 모양이군.”
서문호진은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백리세가의 의도는 알겠소. 하지만 첫째, 겁주려고 한 짓 같은데 이 정도의 무력으로는 너무 시시하오. 둘째, 백리세가는 내가 누군지 너무 몰랐군.”
백리묵의 등에 땀이 흘러내렸다.
‘서문호진 이자와 무림맹을 너무 얕잡아 봤다.’
이십 년의 시간은 무림인들은 망각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구천마성을 지웠던 세력이 어디였던가.
바로 무림맹이 아니던가.
“다른 뜻은 없었소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우린 아직 식사를 안 했으니 여기에서 기다리든지 밖에서 기다리든지 알아서 하시오.”
서문호진은 다시 젓가락을 들어 천천히 한 입 먹었다.
“맛있군.”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슨 맛인지,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음식이었건만.
쩝쩝.
갑자기 입맛이 싹 돌았다.
타악!
“하, 잘 먹었다.”
한편 건너편에서 이 광경을 팽유도가 물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구경하면서 먹으니깐 입맛이 더 도는 것 같아.”
남하림의 목소리가 백리묵의 신경을 거슬렀다.
‘저놈들은…….’
모시로 된 거지 복장.
남하림이 입은 모시는 최고급 세모시의 일종으로 저 멀리 해동에서 수입한 물건이었다.
특히 안감은 부드러운 거위 털로 마무리.
“걸협오성?”
무림맹과 함께 개방의 제자들도 올 거라는 전언이 있었다.
백리묵은 자연스레 걸협오성을 떠올렸다.
“우리가 유명하긴 한가 보군요. 단번에 알아보시는 걸 보니.”
백리묵은 다섯 명 중 남하림을 단번에 찾았다.
워낙 각자가 개성이 넘쳤기에 처음 보는 사람도 걸협오성의 특징만 알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네놈이 후개군.”
‘또 후개…….’
거참, 중원에 얼마나 소문이 빨리 퍼져 나가는지.
‘당했어. 설마 이렇게 될 줄은 예상 못했는데.’
걸협오성 단화걸이 개방의 후개가 되었다!
남하림은 모르는 사실.
오종은 걸협오성이 산동악가로 떠난 사이, 중원에 퍼져 있는 모든 개방의 제자들을 통해 남하림이 후개가 되었다는 사실을 널리 소문냈다.
“개방에서 본 가에 구천신품을 돌려준 것이 아쉬운 모양이군. 그래서 무림맹과 함께 온 것인가? 둘 다 가지지 못하게 하려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남하림은 어이가 없었다.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인가? 왜 대답을 하지 않지?”
“왜 밥 잘 먹고 있는 사람을 건드리십니까? 이건 동쪽에서 뺨 맞고 서쪽에서 화풀이하는 겁니까?”
“……?!”
“백리세가는 오히려 우리에게 절을 해도 모자랄 상황일 텐데요. 힘들게 구천신품을 찾아줬는데도 이상한 오해나 하고 있다니.”
남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서문호진과 백리묵을 번갈아 보면서 명확하게 뜻을 밝혔다.
“분명히 말합니다. 이번 일은 무림맹과 백리세가의 일. 무림맹에서 무슨 의도로 동행을 요청했는지 모르겠지만, 구천신품에 대해서는 두 곳에서 알아서 하십시오.”
남하림의 말이 끝나자 다른 걸협오성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윽.
슥.
그리고 조용히 밖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