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끝
악민과 악구정은 장로전에 들어선 뒤 곧장 일장로 악교를 만났다.
잠시 후.
악교는 장로회의를 소집했다.
아홉 명의 장로들이 하나둘씩 장로전으로 모여들었다.
이장로 악종은 굳은 얼굴로 상좌에 앉아 장로들을 기다리는 악교를 보았다.
‘무슨 일로 회의를 소집하는지 모르겠군.’
구천신품조차 관심을 보이지 않던 일장로 악교가 뜬금없이 회의를 소집하다니.
그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홉 명의 장로들이 모두 모이자 악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수습에 바쁜 와중에도 모여주어서 고맙소이다.”
“아니외다. 대장로께서 부르시는데 아무리 바쁜 일을 하더라도 모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장로께서 너그럽게 이해를 해주시는군. 모두 자리에 앉도록 합시다.”
사장로 악무전은 자리에 앉으면서 장로가 아닌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대장로, 장로회의에 신창과 윤우창이 함께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여러분을 모은 이유를 설명하려 했소이다.”
악교는 가슴에 넣어 두었던 서신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서신을 든 채 잠시 망설이던 그는,
“이장로부터 돌려보게나.”
바로 옆에 앉은 악종에게 먼저 건네주었다.
별생각 없이 서신을 건네받은 악종의 표정은 이내 심각하게 굳어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장로가 왜 장로회의를 소집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차례대로 서신을 돌아가면서 읽은 장로들이 모두 같은 표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물론 장로들 중 가주 악군악에게 호의적인 인물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팔장로 악대후.
하지만, 그조차도 이번 일은 봐줄 수 없는 심각한 사안이었다.
“대장로, 이 내용이 사실이옵니까?”
“팔장로. 본인도 거짓이면 좋겠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실일세. 최근 하북소가와 본 가에서 일어난 일들의 원인이 모두 들어맞지 않은가.”
팔장로 악대후는 가슴이 철렁거렸다.
“……이것을 어디에서 구했습니까?”
“신창과 윤우창이 구해온 것이네. 하북소가에서 이 서신을 훔치기 위해 군사와 가주의 특위를 간자로 보냈다고 하더군.”
“증거가 있습니까?”
“이것을 훔친 특위를 구하러 온 놈들을 잡았네.”
“……우리가 모르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 모양이구려.”
장로들은 이제야 일련의 일들이 이해가 되었다.
대장로 악교는 결단을 내렸다.
“현재 본 가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모든 발단은 가주의 탐욕. 그렇기에 본인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오늘 이 자리에서 가주의 폐위를 권하는 바이외다.”
장로들은 모두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하시지요. 전 찬성입니다.”
오장로 악동이 먼저 자신의 뜻을 밝혔다.
“대장로님, 저 또한 찬성이지만…… 가주가 쉽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습니다.”
이장로 악종은 가주의 친위 세력들이 걱정되었다.
이미 산동악가는 분열된 상태다.
세가를 수습하기 위해 얼마나 걸릴지도 불투명한데, 혈겁까지 일어난다면?
“가주의 세력에는 살기대와 묵창대, 그리고 혼천대가 있습니다. 게다가 가주전에는 비밀 호위들로 구성된 친위대가 존재합니다.”
스윽.
“제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악구정은 앞으로 나섰다.
“장로전에 오기 전 신창과 함께 창교당에 다녀왔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함께 뜻을 같이하기로 했습니다. 신창이 전면에 나선다면 많은 본 가의 무인들이 우리를 지지할 것입니다.”
‘음…… 신창이라면…… 가능할지도…….’
장로들은 신창 악민을 보았다.
그가 나서준다면 충분히 가주의 반발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대장로님, 그렇게 하시지요.”
“모두 동의하는 바이오?”
악교의 뜻에 장로들은 무언으로 결정을 내렸다.
“이장로께서 가주 폐위에 대한 진행을 맡아 주시겠소?”
“알겠습니다.”
* * *
산동악가가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장로전에서부터 가주 폐위가 결정이 되었다는 소식이 퍼져 나갔다.
“장로전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습니다!”
살기대주 악강은 흥분하여 소리쳤다.
‘훗, 나를 폐위한다고?’
악군악은 피식 웃었다.
악민과 악구정이 전방에 나섰지만, 누구의 짓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거지 새끼가 뒤통수를 제대로 치는군.’
남하림의 입김이 없었다면 악구정도, 악민도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멍청한 놈들. 거지 새끼 말만 믿고 함부로 날뛰다니…….’
하지만 그는 전혀 몰랐다.
두 사람이 오직 남하림의 말만 믿고 장로전을 움직였을 것이라 확신했을 뿐.
‘잘됐어. 이번 기회에 장로전까지 몰아낸다면 무림에서 한 소리를 듣더라도 악가에서 나의 위치는 굳건히 지킬 수 있다.’
타악.
악군악은 결심이 섰다.
앞에 앉은 세 명의 인물.
살기대주 악강.
묵창대주 악경.
혼천대주 악도진.
그리고 호위장 곽순을 보았다.
‘이 정도면 본 가의 전력 중 절반에 해당한다.’
악군악은 충분히 자신 있었다.
“악강, 모두 악가대전에 집합시켜라. 그리고 개방의 거지 놈들을 잡아와라.”
“알겠습니다.”
“후개라고 한들 타 문의 내정에 간섭한 놈들이다. 필히 개방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악강의 입고리가 비틀리며 치켜 올라갔다.
‘크크큭, 잘됐군.’
청봉표국에서 끝내지 못한 일을 마무리 지을 좋은 기회였다.
척.
악강이 악군악을 향해 포권했다.
“그놈을 잡아오겠습니다.”
* * *
귀인전은 마치 딴 세상처럼 평화로웠다.
‘한가롭게 지내는 네놈들은 언제 봐도 대단하다.’
만통자는 바닥에 점통을 내려놓았다.
산동악가의 앞날이 걱정인지라 점을 보는 중이었다.
챠르르르-
점통을 움직이는 소리에 남하림이 옆으로 다가섰다.
“노인장, 지금 점 보시는 중인가요?”
“…….”
“어떻게 보는 건가요?”
휙.
만통자는 고개를 돌려 가까이 다가온 남하림을 째려보았다.
“이 녀석아. 정신 사납다. 떨어져라.”
“그러지 말고 저도 가르쳐 주세요. 제가 머리가 좋아서 웬만하면 빨리 배워요.”
“이건 머리가 좋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많은 경륜과 공부로 거쳐야 된단 말이다.”
“흠…… 아, 혹시 제가 배우면 노인장 밥줄이 끊어질까 봐 그러세요? 아니면…… 사기……?”
딱!
만통자가 점통 뚜껑으로 남하림의 머리를 때렸다.
“아얏!”
“내가 사기꾼이냐?”
“제가 보기엔 지금까지 맞는 게 하나도 없었는데…… 요.”
“어휴, 됐다. 내가 네놈 앞에서 뭔 짓을 하는 건지.”
만통자는 점통을 다시 닫았다.
“엇, 점 안 봐요? 궁금한데…….”
“사기나 치는 사람에게 뭘 기대하느냐? 할 일 없으면 그냥 자라.”
벌떡!
만통자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는 남하림을 보며 움찔했다.
“어이고! 뭐냐?”
“밖에 누가 찾아왔어요.”
두두두두-
“크큭, 그날의 마무리를 지어주지.”
살기대주 악강이 스무 명의 살기대원과 함께 귀인전으로 달렸다.
귀인전이 나타나자 홍투구 속의 눈에서 살기가 쏟아졌다.
‘저놈들이……!’
귀인전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다섯 명을 발견한 악강이 말을 멈췄다.
남하림은 그들을 보며 소리쳤다.
“무슨 일로 왔습니까?”
“가주께서 네놈들을 잡아오라더군.”
“이유가 뭔가요?”
“그건 네놈들이 잘 알고 있을 텐데.”
“싫다면?”
“하, 우리가 알아서 끌고 가면 되니 걱정 안 해도 된다. 살기대는 저놈들을 잡아라!”
“마음대로 하세요.”
남하림이 옆으로 손을 뻗자 당무독이 손바닥에 광침구를 얹어 주었다.
휙!
남하림은 달려오는 살기대원들을 향해 광침구를 던졌다.
‘헉! 저저, 저런 미친놈이……!’
귀인전 안에서 밖을 구경하던 만통자는 하림이 광침구를 던지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번쩍!
콰아아앙!
파파파파파팟!
광침구가 터지면서 달려오던 살기대원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이…… 이노오오오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휙!
휙!
남하림은 남은 두 개의 광침구도 살기대원들을 향해 던졌다.
“피하라!”
번쩍!
버버버번쩍!
연속으로 터진 두 번의 폭음.
살기대원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악강의 분노는 하늘을 치솟을 정도였다.
타타타탁!
분기를 참지 못한 악강이 장창을 들고 남하림을 향해 달렸다.
“휘연 형, 나머지 부탁해요.”
“조심해라.”
악강은 싸움을 단번에 끝내기 위해 극성의 악무창강을 펼쳤다.
남하림의 무공은 청봉표국에서 이미 다 파악한 상황.
슈우우욱-
하림의 머리 위로 붉은 장창의 기가 떨어졌다.
쿠아아아아앙!
남하림은 물러서지 않고 무룡파천을 펼쳤다.
‘어…… 어……?’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남하림의 기에 악강의 장창이 뒤로 날아갈 뻔했다.
찌릿.
장창을 잡은 손이 덜덜 저려왔다.
‘이렇게 강했나?’
청봉표국에서 만났을 때의 느낌이 아니었다.
단기간에 실력이 향상되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것.
“죽어라.”
길게 끌 필요가 없었다.
악강은 모든 내력을 올리며 악무창강 최후의 초식 창빙한천(槍氷寒天)을 뻗었다.
‘욱……!’
살기와 함께 빙한기가 밀려왔다.
남하림은 두 발을 마보 자세로 취하며 자신도 모르게 바닥을 두세 번 문질렀다.
금강수체를 통한 기가 단전을 감싸면서 증폭되었다.
‘아…… 하. 이거였어.’
취구단에 의해 단전의 내력이 높아지면서, 금강수체에서 흘러나오는 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남하림은 온몸에 솟구치는 힘을 쏟아내고 싶었다.
“강룡파세(降龍破世)”
우두두두두-!
장창을 휘두르고 달려오는 악강의 앞으로 바닥이 뒤짚혀 솟구쳤다.
콰콰콰콰!
악강이 펼친 두 기운은 강룡십팔장의 기에 부서지며 사라졌다.
퍼어어엉!
악강의 가슴에 일장이 쏟아지고, 십여 장 뒤로 몸뚱이가 날아갔다.
“커어억!”
털썩.
악강은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떨어졌다.
‘좋았어.’
남하림은 주먹을 꽉 쥐고 환하게 웃었다.
덜컹!
만통자가 놀라 밖으로 나왔다.
‘살기대가…… 이렇게 허무하게 깨지는가…… 청봉표국에서 일어났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란 것은 악강이 남하림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저…… 싸가지라고는 하나라도 없는 녀석이…….’
자신감이 넘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팽유도가 반도를 등에 넣으며 남하림에게 다가갔다.
“하림 형, 그들이 움직이는 모양인데요.”
“우선 저들을 내력을 거둔 뒤 묶어.”
“네, 알겠어요.”
만통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후개, 이들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창수대주에게 맡겨야죠.”
“그렇군.”
만통자는 악가대전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같이 가볼 테냐?”
“그러죠.”
* * *
‘악민.’
악가대전으로 당당히 들어서는 인물.
혼천대에 정문을 막도록 명을 내렸지만, 일부 무인들이 반발하며 악민의 뒤로 합류했다.
게다가 묵창대의 많은 무인들도 악경을 따르지 않고 악민의 편으로 돌아섰다.
점점 악민을 따르는 세력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산동악가의 무인들은 소문을 통해 어떠한 일들이 발생했는지 거의 모두 알게 되었다.
악군악의 앞을 막아선 악경과 악도진이 모여드는 반대편을 보았다.
스윽.
악민과 악구정의 곁으로 이장로 악종이 나왔다.
착.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두루마리를 펴서 읽기 시작했다.
가주 악군악은 들어라.
그대는 모년 모월 대산동악가의 영광을 위해 가주로 추대가 되었으나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산동악가의 위신과 명예를 무시했도다. 이로 인해 중원 무림에 산동악가의 위명이 떨어지며 수많은 무림인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되었으니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그대의 죄는 수없이 많기에 나열하기도 어렵다.
이로써 장로회의에서 만장일치에 가주직에서 폐위하도록 결정을 내렸으니 받아들이기 바란다.
“크, 크큭, 크하하하하!”
미친 듯이 웃던 악군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장로,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것이오!”
“악군악. 아직도 죄를 인정하지 못하는군.”
스윽-
악종은 서신을 꺼내 악군악이 잘 볼 수 있도록 내밀었다.
‘……저, 저것을 어떻게……?’
악군악의 얼굴이 굳어졌다.
잃어버렸던 서신.
하북소가에서 훔쳐갔다고 생각했던 그 서신이 악종에게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
악종은 형편없이 인상을 구긴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악군악, 서로 험한 꼴을 보지 않는 게 좋겠네.”
악군악은 애처롭게 보는 악경과 악도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악강이 진 것인가……?’
그리고 멀리, 악가대전의 정문에서 만통자와 남하림이 들어서고 있었다.
휘이이익-
창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와 악군악의 얼굴을 스치며 뒤쪽 벽에 꽂혔다.
“악군악. 끝까지 악가의 가주답지 못하겠는가?”
악민의 호통 소리가 악군악의 귀를 때렸다.
“산동악가를 위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추악한 모습을 보이기 전에 내려와라.”
악민의 눈빛.
악군악은 그의 눈빛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끝이다.’
이미 끝난 싸움.
악군악은 정문에 비스듬히 기대고 선 남하림을 보았다.
‘처음부터 저놈이 가지고 있었어. 일부러 나에게 물어봤던 거야.’
남하림도 멀리서 자신을 보는 악군악의 시선을 느꼈다.
“그러게 진작 모든 것을 내려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사람이 욕심이 많으면 생각도 많아지는 법이죠”
“무슨 말이냐?”
만통자가 옆에 선 남하림을 보았다.
“그냥…… 혼자서 한 말이에요. 그럼 전 그만 가볼게요. 이제 끝난 것 같으니까.”
그렇게 남하림이 악가에서 돌아서는 순간, 옆에서 그를 지켜보던 두 사람과 마주쳤다.
무림맹에서 나온 이들.
“어, 두 분 아직 안 가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