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결정을 내리다
휙.
“대주님!”
호질은 곁으로 다가서며 옥병을 마신 악구정을 다급하게 불렀다.
‘…….’
악구정은 눈을 뜨며 호들갑을 떠는 호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뭐지? 분명 단전이 굳고 혈맥이 찢어진다고 했거늘…….’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손에 든 옥병을 살폈다.
조금 남아 있는 액을 조심스럽게 맛보았다.
‘달면서도 몸에 힘이 나는 것 같아.’
무엇을 복용했는지 모르지만 독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이게 무엇입니까? 독이 아닌 듯합니다.”
“이런, 무독이 잘못 줬나 봅니다. 취구액이라고 몸에 좋은 거였네요.”
악구정은 싱긋 웃고 있는 당무독을 보았다.
잘못 줄 리 없었다.
“왜……?”
“이유야 간단합니다. 당신은 산동악가를 위해 목숨을 걸었으니까요. 단지 그것뿐입니다.”
“그럼…… 산동악가를 도와주는 것입니까?”
“반은 맞고, 반은 아닌 것 같군요.”
남하림의 대답은 애매모호(曖昧模糊)했다.
“산동악가는 하지 말았어야 할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해림장과 청봉표국 사건입니까?”
“네, 맞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분명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악구정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악가의 일원으로서 그들에게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용서를 빌려면 당사자가 책임을 지면 됩니다.”
‘당사자라면…… 가주이거늘.’
“그가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겠다면 대주께서 지게 하실 수 있습니까?”
악구정은 고개를 들어 남하림과 시선을 마주쳤다.
“후개, 가주를 밀어내야 한다면 이 사람이 앞장서겠습니다. 하지만 장로전의 허가를 받아낼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명분이 있다면요?”
“장로전에서 가주의 직위를 폐위시킬 수 있지요. 하지만 가주가 반박하고 힘으로 찍어누를 수 있습니다.”
“가주를 따르는 세력이 많은가 보군요.”
“살기대와 묵창대, 그리고 친위대까지 가주를 따를 겁니다.”
“그들을 상대할 수 인물은 없습니까?”
“신창이 있습니다만…… 그가 도움을 줄지 모르겠군요. 신창을 따르는 본 가의 무인들은 많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그를 설득해서 함께 오십시오. 그때 장로전에서 원하는 명분을 드리도록 하죠.”
단호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
‘……아…….’
악구정은 순간 그에게서 일대종사의 위엄을 보았다.
* * *
햇빛에 의해 더욱더 푸른빛을 띠는 청의무복.
왼쪽 가슴에 새겨진 맹(盟)의 글자에 자부심을 가진 두 명의 사내가 산동악가 정문에 멈춰 섰다.
정문위사 오패는 긴장했다.
‘무림맹이다.’
푸른빛의 무림맹 복장을 보면서 떨리지 않는 무림인은 없었다.
정문으로 다가오는 그들의 신위는 당당했다.
“어서 오십시오.”
“우린 무림맹에서 왔다. 난 방림이라 하고, 이분은 무림맹 감찰당 제일감찰조장이신 구현 님이시다.”
‘헉…….’
오패는 무림맹의 감찰당에서 나왔다는 말에 오줌을 지릴 뻔했다.
“악가에 후개가 있다고 들었다. 맞는가?”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안내를 하라.”
“저어…… 가주님께 먼저…….”
“후개를 만나고 난 뒤 가주를 만날 것이다.”
“아, 알…… 겠습니다.”
오패는 옆에 선 동료 위사에게 얼른 신호를 보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귀인전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귀인전으로 향한 지 반각의 시간이 흐른 후.
“이곳이 귀인전입니다.”
“수고했다. 그만 돌아가도 된다.”
“아닙니다.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구현과 방림은 고개를 숙인 오패를 지나 귀인전에 들어섰다.
덜컹!
방림은 그대로 문을 열었다.
“누구요?”
공휴실에서 젊은 거지가 간이 침상에 누운 채로 고개를 내밀었다.
‘허.’
방림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림맹에서 왔다.”
휙.
팽유도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모두 나와봐요! 무림맹에서 사람이 나왔어요!”
“…….”
‘이놈들인가?’
걸협오성에 대한 소문은 그도 익히 들은 적이 있었다.
거지들이 하나둘씩 어기적거리며 나왔다.
물론 익히 보았던 개방의 복장과는 전혀 달랐다.
베 중에서도 제법 귀한 모시로 만든 복장이었으니까.
‘겉모습은 좀 다를지언정 행동은 역시 개방의 거지들이야. 안 되겠군. 기강을 먼저 잡아야겠어.’
“뭣들 하고 있나? 빨리 나오지 못할까?”
“허허, 이게 누군가? 뒤에 명류검이 아닌가?”
끼익-
그때, 방에서 나온 만통자가 방림 뒤에 서 있던 구현을 보며 알은척을 했다.
“만통자님께서 함께 계셨습니까?”
구현이 놀란 듯 앞으로 나오며 인사를 했다.
방림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클클클, 자네가 산동악가에 올 줄 몰랐구먼. 꿀잠을 잘 자고 있었건만…….”
방림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만통자님께서 계신 줄 몰랐습니다.”
“아니네. 그렇지 않아도 일어날 생각이었어.”
방림과 구현은 각자 방에서 나온 다섯 명과 마주 섰다.
그중 남하림이 누구인지는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그대가 후개인가?”
“맞습니다. 남하림이라 합니다.”
“반갑네. 군자협에게 그대에 대해서 들었어.”
“편안하게 앉아서 이야기하죠.”
구현은 맞은편에 앉은 남하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특이하다고 하더니…… 용모는 개방 제자로 있기에는 아까울 정도군.’
“후개, 무림맹에 산동악가를 제소했다고 들었네.”
“맞습니다. 제가 태안지부를 통해서 제소했습니다.”
“대충 어떠한 내용인지는 들었네. 산동악가에서 그대를 죽이려고 한 이유가 구천신품과 연관이 있다고 한 것이 맞는가?”
“그렇습니다.”
구현은 남하림의 곁에 앉은 만통자를 바라보았다.
끄덕.
“그렇구먼. 구천신품이라…… 그러고 보니 그대는 구천신품과 연관이 많군.”
그 또한 백리세가와 있었던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무슨 복인지 모르겠습니다.”
“후개,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보게.”
남하림은 청봉표국의 표행에서부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반각 동안 오직 남하림의 목소리만이 귀인전에 울릴 뿐이었다.
구현은 설명을 모두 들은 뒤 확인차 물었다.
“악 가주가 구천신품을 훔쳐간 것을 한때 십장혈의 무인이었던 청봉표국주가 봤다는 거군. 악 가주는 청봉표국주밖에 몰랐던 구천신품의 존재를 하북소가에서 우연히 알게 된 후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줬다고 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군. 하북소가에서 굳이 표행을 습격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가만히 있어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그건 모르죠. 일단 준 뒤 몰래 빼앗을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요.”
“음…… 그렇긴 하지.”
사건의 전말을 모두 들었지만, 무림맹이 움직이기에는 후개의 증언밖에 명분이랄 것이 없었다.
“후개, 그대의 말을 신빙할 수 있는 증거가 있어야 하네.”
“당연히 증거는 있습니다.”
남하림은 가슴 안에서 붉은 천으로 싸여 있는 서신들을 꺼내놓았다.
“읽어보세요. 청봉표국주가 만일을 위해 숨겨 놓았던 겁니다. 그와 악 가주 사이에서 오고 갔던 서신들이죠.”
“…….”
방림은 앞에 놓인 서신들을 빠르게 살폈다.
그리고 바로 구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이 사실이군. 구천신품을 악 가주가 지니고 있었어.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악가에서 그대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고.”
“맞아요. 그렇게 된 것이죠.”
“나머지는 무림맹에서 알아서 처리하겠네.”
구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통자님, 악 가주를 만나러 갈 것입니다. 함께하시겠습니까?”
“음, 그럴까?”
만통자도 두 사람과 함께하기로 했다.
타악.
남하림은 귀인전을 떠나는 세 사람을 보며 문을 닫았다.
“모두 앉자.”
“하림 형,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남하림은 먼저 이휘연에게 의견을 물었다.
“휘연 형 생각은 어때?”
“둘 다 나쁜 놈들이지. 완전히 썩었어. 근데 우리가 굳이 이들의 잘잘못을 바로 세울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군.”
“맞아요. 그들이 썩었든지 말든지 상관없잖아요.”
“우리가 여기 온 목적대로 하자. 구천신품을 얻었잖아. 나머지는 두 곳에서 알아서 할 일이다. 본 방이 그들의 싸움을 중재할 수도 없다. 그건 무림맹이 할 일이지.”
이휘연의 의견에 나머지 세 사람도 동의했다.
“부장, 나도 휘연 형의 말이 맞는 것 같아.”
“좋아. 그럼 우린 여기서 빠지기로 하자. 다만 악 가주는 스스로 물러나든지, 아니면 물러나게 만들든지, 어쨌든 가주위에서 내려와야겠지.”
* * *
“가주님, 후개를 모시고 왔습니다.”
드륵.
남하림이 안으로 들어섰다.
“후후후.”
악군악의 표정은 밝았다.
“고맙소.”
“무엇을요?”
“무림맹에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더군.”
“아. 난 또 뭐라고. 생각해 보니 굳이 복잡하게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무림맹에서 사람이 도착해 바로 귀인전으로 갔다는 말에 악군악은 긴장했다.
그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본 가를 살려줄 수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무림맹이 오니 똥줄이 타는 모양이군. 하지만 늦었어.’
“간단합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물러나세요.”
“……!”
“책임을 지는 것으로 물러난다면, 무림맹에선 그들이 알고 있는 내용 외에는 더 깊이 알지 못하겠죠. 악가에 큰 피해는 없을 겁니다.”
남하림은 망설이는 악군악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악군악에게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선의였다.
다만 그가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방법은 없다.
“후개, 굳이 내가 물러나야 하는 것인가?”
“하북소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소숭이 나를 죽이고자 해서 정당방위였다고 한다면?”
“생각을 많이 하신 모양입니다. 내가 가진 패를 보고 난 그때보다 상황이 변한 것 같죠?”
“나도 살아야 하니까.”
“……하, 좋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무림맹이 온 이상, 나는 그만두겠습니다.”
“돌아갈 생각인가 보군. 잘 생각했네. 어수선한 상황이라 잘 챙겨주지도 못했군. 담에 다시 오면 신경을 많이 써주지.”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후후후.”
구천신품은 이미 사라졌고, 청부 서신이 없으니 소숭을 죽였다는 증거도 없다.
악군악은 억지로라도 끌고 갈 생각이었다.
남하림은 일어섰다.
“좋은 결과를 바랐는데…… 아쉽군요.”
* * *
악구정은 귀인전에서 나온 뒤 바쁘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악민을 만나기 위해 산동악가를 나섰다.
반 시진 뒤.
악구정은 신창 악민과 함께 산동악가에 들어선 뒤, 곧장 남하림을 만나러 귀인전으로 향했다.
‘놀랍군.’
걸협오성이란 불린 개방의 다섯 명과 직접 마주 선 악민은 적지 않는 충격을 받았다.
하나같이 모자람이 없었다.
‘십 년 이내에 무림은 개방의 세상이 되겠군.’
악민은 확신했다.
악민에게 그들의 겉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신창을 뵙습니다.”
“후후, 중원 최고의 후기지수를 만나게 돼서 기분이 좋군.”
악구정에 의해 마지못해 온 그였지만 다섯 명을 만나자 그런 마음은 사라졌다.
“한 가지 묻고 싶네.”
“말씀하시지요.”
“후개는 본 가의 일에 직접 관여하려는 것인가?”
“아닙니다. 제가 어찌 악가에 일에 참견을 할 수 있겠습니까?”
“믿겠네. 창수대주에게 말한 것은 무엇인가?”
“방금 가주를 만나고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스스로 물러나기를 바랐지요. 그런데…… 안 바뀌더군요.”
“그런 인물이다. 오래전부터 뒤로 딴짓을 해왔지.”
악민은 가주 악군악에 대해 잘 알았다.
남하림은 두 사람에게 물었다.
“이번 사건의 원인이 무엇이라 보십니까?”
“구천신품 때문이 아닌가?”
“하북소가와 전쟁을 할 정도로 구천신품이 대단한가요? 정확히 어떤 물건에 구천마제의 유지가 남아 있는지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건…….”
스윽.
남하림은 두 사람 앞으로 한 장의 서신을 내밀었다.
“보십시오.”
“…….”
악민은 서신을 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구천신품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북소가와 악군악이 죽일 듯 싸운 이유.
“이런 비사가 숨어 있을 줄은 몰랐군.”
악군악을 폐위시킬 수 있는 명분은 충분했다.
남하림은 서신을 어떻게 얻었는지 두 사람에게 모두 설명했다.
“고맙소이다. 큰 은혜를 얻은 듯하오.”
만일 이것이 하북소가의 손에 들어갔다면?
산동악가는 그들에게 계속 끌려 다녔을 것이다.
스윽.
남하림은 상체를 뒤로 물렀다.
“이제 모든 것은 제 손에서 떠났습니다. 나머지는 두 분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재차 감사의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악구정은 막막했던 가슴이 시원하게 뚫린 듯했다.
“…….”
만통자는 악민과 악구정이 물러날 때까지 모든 과정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하림이 무림맹에게 알려준 내용은 전체 그림 중에서도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약은 녀석들. 구천신품을 강력하게 원하는 무림맹을 이용해서 하북소가에 압박을 할 생각이었어.’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아직 한 가지 궁금한 게 남아 있었다.
‘이 녀석은 알고 있을 것 같아.’
“후개,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대답을 해주면 좋겠네.”
“뭔가요?”
“이제 하북소가와 산동악가의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겠어.”
“그런데요?”
“그럼 구천신품은 누가 가지고 있지?”
“하북소가요. 그들이 훔쳐갔잖아요.”
“…….”
“안 믿기세요?”
“어. 네놈을 만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어떤 녀석인지 아주 잘 알 것 같으니까.”
툭.
만통자는 손가락으로 남하림의 가슴을 건드렸다.
“이 안에 능구렁이가 백 마리, 아니, 천 마리, 만 마리가 들어 있지 않느냐?”
“하하, 설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