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쥐를 잡다
산동악가 가주전은 악가대전을 지난 북쪽 방향에 위치했다.
착.
두 명의 정문 위사가 악가대전 문 앞에 도착한 남하림을 막아섰다.
“멈추십시오.”
“가주님을 뵈러 가는 길이오.”
“죄송합니다. 현재 비상시국이라서 가주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도 상황이 좋지 않는 것을 아는데,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만나고자 하는 것이오.”
“죄송합니다. 묵창대주께서 악가대전으로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흐음, 그렇게까지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
괜히 무리하게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남하림은 악가대전의 정문 앞에서 깔끔하게 돌아섰다.
‘휴우…….’
답답한 마음에 악가대전의 문을 열고 나오던 악구정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후개?’
그때 정문위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인물이 보였다.
아무리 멀리 있다고 한들 특이한 겉모습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후개가 여기에 왜?’
의아해하며 그를 바라보던 악구정은 순간 만통자의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잠시 후, 마음이 내키진 않았지만 악구정의 발걸음은 정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 * *
두 사람이 가주전에 들어섰다.
‘숨소리 하나 안 들리는군.’
산동악가의 분위기가 어떠한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가주전으로 들어선 악구정을 보았는지 호위무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호위장 곽순은 인사를 하면서 그의 뒤로 함께 온 남하림을 슬쩍 살폈다.
그의 입장에서는 결코 고운 시선은 아니었다.
“가주님은 어떻게 하고 계시는가?”
“홀로 계십니다. 당분간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으시다 하셨습니다.”
‘홀로라…….’
악구정은 그의 심정을 알 듯했다.
가장 믿었던 군사와 특위의 죽음에 충격을 받지 않는 게 이상했다.
“후개, 오늘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나중에 다시 오는 게 어떻겠소이까?”
남하림은 물러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물어보았다.
“가주께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한마디만 전해주십시오.”
“…….”
곽순은 잠시 망설였다.
가주 악군악에게는 하북소가 못지않게 개방 또한 골칫거리였다.
“가주께서 만나기 싫다면 돌아가지요.”
“알겠소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우선 보고를 하는 게 좋겠어.’
곽순은 짧게 고개를 숙인 후 가주전으로 들어섰다.
* * *
‘십 년이다. 십 년간 턱밑에 쥐새끼가 숨어 있었다.’
십 년.
초주가 산동악가의 특위로 지내온 기간이다.
거기다 등민의 추천을 받은 이가 아니던가.
‘군사의 죽음까지도…… 분명 소융, 그자의 계획이었던가?’
악군악은 소융에게 완벽하게 당했음을 인정했다.
십 년을 넘은 치밀했던 계획.
‘그놈은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있었어. 구천신품이 아니라 자신의 약점을 지우려고 했던 거야.’
그 긴 세월 동안 소융은 항의 한 번 한 적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구천신품을 주지 않으면 중원 무림에 사실을 알리겠다며 협박해 왔다.
그날의 사건이 모두 밝혀지면 산동악가와 하북소가 모두에게 치명적이었는데도 말이다.
‘탐욕에 미쳤다고 생각했거늘…….’
“소융은 구천신품을 위해서라면 동귀어진이라도 불사하려는 듯합니다.”
“군사, 좋은 방법이 없겠나?”
“구천신품을 그에게 주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압박해올 것입니다.”
“이보게, 군사.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진실이 알려진다면 누가 더 치명적인 손실을 받는지 모르는가?”
“가주님, 그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구천신품을 주는 척하는 것입니다.”
“주는 척?”
“그렇습니다. 이번 기회에 귀찮은 청봉표국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아쉽지만 해림장은 희생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음…… 구천신품만 지킬 수 있다면…….”
하지만 군사의 뜻을 따른 것이 패착이었다.
‘멍청한 짓을 했어.’
뜻하지 않게 개방까지 이 일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결국 구천신품뿐 아니라 소융의 목줄을 쥐고 있던 약점까지 사라진 상황.
청봉표국과 해림장을 포함한 모든 사건의 원흉은 산동악가, 자신이었다.
으드득.
‘절대로 나 혼자 당할 순 없다. 절대로…….’
아직 절망할 단계는 아니다.
‘그놈만 잡는다면 소융, 네놈의 목을 딸 것이다.’
똑똑.
그때, 문밖에서 곽순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주님, 개방의 후개가 만나 뵙기를 청합니다.”
‘후개? 그 녀석이 왜?’
악군악은 잠시 망설였다.
‘싫으신 것인가?’
가주실에서 바로 소리가 들리지 않자, 곽순은 물러가려고 했다.
“죄송합니다. 돌려보내겠습니다.”
“……아니다. 데리고 오너라.”
* * *
또르르.
서로 마주 앉은 두 사람.
옆에서 악구정이 차를 따르는 동안 악군악과 남하림은 조용히 쳐다보기만 했다.
“드시게.”
악군악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부드러운 말이 나올 리 없다.
남하림은 찻잔을 들기 전 악구정을 보고 말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가주님과 독대하고 싶습니다.”
악구정은 만통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편안하게 이야기하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밖에 있겠소이다.”
“감사합니다.”
드륵.
악구정이 문을 열고서 가주실 밖으로 나갔다.
‘나와 독대라……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군.’
침울했던 악군악이 눈빛이 다시 예리하게 변하며, 속셈을 꿰뚫어 보겠다는 듯 남하림을 노려보았다.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
“가주님,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이젠 사실대로 터놓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됐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굳이 제 입으로 들으셔야 할까요?”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군사와 특위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하북소가와 가주님과의 관계 말입니다.”
꿈틀.
하북소가가 언급되자 악군악은 무의식적으로 미세한 반응을 보였다.
“허, 후개께서도 개방 제자 아니랄까 봐 냄새를 잘 맡고 다니는 것 같구려. 하지만 잘못 짚었소.”
“글쎄요. 아무리 생각해도 구천신품만 가지고는 이런 짓을 할 리 없습니다. 툭 까놓고 이야기하는 게 어떻습니까?”
‘징그러운 녀석.’
싱긋 웃으며 약 올리는 것이 악군악의 성질을 살살 긁었지만, 한편으론 저놈이 무슨 말을 더 할지 궁금했다.
“본인이 하북소가와 일이 있다 한들, 이를 알려준다고 해서 내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 오히려 꼬투리를 잡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혹시 압니까? 도움이 될지.”
“하북소가와의 일 때문에 독대를 원했는가?”
“그렇다고 봐야죠. 보아하니 가주님은 악가의 몇몇 분과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지 않더군요.”
“하, 대단하이. 그새 그런 것까지 알아낸 모양이구려.”
“거지다 보니 눈치만 늘어납니다.”
“말은 청산유수(靑山流水)로군.”
하북소가와 자신과의 일.
이 일은 오직 군사였던 등민과 자신만의 비밀이었다.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말씀하시죠.”
“어디까지 알고 있나?”
“구천궁에서 하북소가의 한 인물을 만났던 일까지 모두.”
‘내가 소숭을 죽인 것까지 알고 있군.’
파앗!
악군악의 신형에서 살기가 뻗쳐 나왔다.
“좀 참으시죠. 내가 지닌 패를 꺼내라고 해서 보여줬지 않습니까?”
‘이놈…….’
그는 남하림을 차갑게 내려 보다 천천히 살기를 거두었다.
“산동악가에 싸우러 오지 않았나?”
“흠, 그렇다고 봐야죠.”
짐짓 고민하는 듯한 남하림의 대답에 악군악의 눈매가 얇아졌다.
“싸우는 이유는, 청봉표국과 해림장 때문에?”
“물론 그 문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두 곳을 들먹이는 걸 보니 잘못을 인정하는 모양입니다?”
“무림에서 인정하고, 하지 않고는 의미가 없다. 강자존의 세계에 힘이 없으면 도태될 뿐이지.”
“아무리 강자존이라 해도, 협과 의를 어기면서 약한 이들을 핍박하는 게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군요. 무림의 모든 문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면 대체 정파와 사파를 나눈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따끔한 한마디에 악군악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산동악가에 찾아온 목적은 구천신품 때문이었죠.”
“하하하! 후개, 결국 네놈도 구천신품에 관심이 있으니 본 가에 온 것이 아닌가?”
“자신의 잣대로만 상대를 판단하면 큰일 납니다.”
남하림이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악군악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대의 말을 믿을 수 없다. 또한 청봉표국과 해림장 일로 본 가를 제재할 방안은 없지. 중원 무림에 알려도 마찬가지다. 이게 바로 현실이라는 것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면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구천신품 때문에 그런 짓을 했다고 하면, 중원 무림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온갖 곳에서 온갖 목적을 가지고 몰려들겠죠. 신나게.”
‘으으윽…….’
“무림맹에 제소도 당했겠다, 직접 이야기해 보십시오. 그들이 제재를 할 순 없다 해도, 산동악가가 예전처럼 산동성의 패자로 존경받을 수 있을진 모르겠군요.”
“누차 말하지만, 증거는? 우리에게 있다는 증거가 있나?”
“하하, 증거가 정말 없을까요?”
악군악과 남하림의 사이에서 기가 팽팽하게 이어졌다.
“크큭, 후개. 독대를 원한 이유가 내 속을 뒤집어놓으려는 생각이었다면 성공했네.”
“그렇습니까?”
벌컥.
남하림은 찻잔을 비웠다.
“하북소가와 어떻게 엮였든, 지금 밝혀진 사건만으로도 가주께선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악군악은 목이 타는지 찻잔을 들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차.
방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건만.
‘이것이 나의 운명인가.’
하지만, 그래도 미지근한 온기가 남아 있다면…….
“그대가 아는 하북소가와 본인의 관계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라는 건가요?”
“원한다면 모든 사실을 말해줄 수 있지. 그 대신 나에게 무엇을 줄 텐가?”
“뜻밖이네요. 이 판에서 요구를 할 줄은.”
“똑똑한 그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도 있군.”
“뭐, 나도 사람인지라. 음…… 무엇을 해줄까요? 만일 죽게 되시면 악가는 살려 드리죠.”
“…….”
싱긋 웃는 남하림의 얼굴.
악군악은 그 모습에 결국 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순간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정말 웃기는 놈이구나. 악가를 살려주겠다고?’
악군악은 남하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직 곤마(困馬)에 빠진 건 아니다.
묘수가 있을 것이다.
어딘가 실낱같은 희망이 있을 것이다.
“잠시만 시간을 주게.”
“그렇게 하죠.”
남하림은 한 발 물러났다.
‘하, 살고자 발버둥 치면 칠수록 늪을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걸 모르는군.’
* * *
‘젠장…… 이게 무슨 꼴인지.’
귀인전 건물 아래에 숨어 있는 사내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네 명의 특위와 등민을 죽인 후 귀인전으로 숨어들었다.
‘젠장. 갑자기 찾아올 줄은…….’
갑자기 불쑥 찾아온 악군악에 의해 도망칠 기회를 놓쳤다.
산동악가의 무인들이 두 눈을 부릅뜨며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간 바람에, 결국 그는 급한 대로 먼저 귀인전 아래로 숨어들었다.
다행히 군사전을 나서면서 등민이 기르던 전서구를 띄워 보냈다.
툭툭.
허리춤을 만지자,
‘드디어 찾았어.’
묵직한 느낌이 났다.
이것을 빼낸 동시에 당장 소각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다급한 상황에서 진짜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시간조차 없었다.
‘나를 데리러 올 것이다.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된다.’
덜컹.
귀인전의 문이 열렸다.
‘개방 놈들.’
뽀득.
나무 바닥을 누르는 발소리가 건물 아래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숨소리조차 죽인 그가 주위를 살폈다.
‘한심걸이군.’
작은 틈으로 귀인전 밖을 엿보자, 이휘연이 팽유도와 몸 풀기 비무를 준비하고 있었다.
탕! 탕! 탕!
은신술에 뛰어난 특위였지만 갑자기 귀인전 안에서 튀어나오는 발소리에 귀가 울렸다.
탕!
움찔.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다.
‘큰…… 일 날 뻔…….’
부우우우웅-
팟팟팟!
챙! 챙챙!
“형, 간다아아아아!”
이어서 가벼운 움직임과 함께 도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건물 아래에서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소리만으로도 그들의 실력을 유추할 수 있었다.
‘후기지수치고는 제법이군.’
이휘연과 팽유도는 제법 긴 시간 동안 비무를 계속했다.
‘대충 해라.’
반 시진 동안 긴장한 상태로 있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이윽고 점차 움직이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휘연 형, 고마워요.”
“아니다. 요즘 도가 강맹해졌어.”
“형 덕분이죠.”
팽유도는 활짝 웃고는 문을 향해 섰다.
“몸도 풀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쥐새끼가 맞다면 잡아야겠지.”
천살성이 지닌 특유의 기감 능력.
초주의 불행은 귀인전에 이휘연이 있는 줄 몰랐다는 것이다.
탕탕탕!
팽유도는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며 문 앞에 섰다.
“무독 형! 철각 형! 잠깐 나와봐요!”
당무독과 성철각이 문을 열고 나왔다.
“왜? 무슨 일 있어?”
“무독 형, 여기 밑에 쥐새끼가 있는 것 같아요.”
“쥐?”
당무독은 단번에 이해했다.
정말로 쥐가 있다면 자신을 부를 이유가 없다.
“그래? 형아한테 그럴 때 쓰는 좋은 약이 있지.”
당무독은 독가방에서 작은 병을 꺼내 벌어진 틈 사이로 툭툭 불어넣었다.
“무독 형, 그게 뭔가요?”
“일명 광견독! 조금이라도 코로 들이마시게 되면 이각 정도 온몸이 비틀리면서 맛이 가.”
“오, 이런 건 어디서 보고 만들어요?”
“어디서 본 건 아니고, 심심해서 한번 만들어본 거야.”
“형은 진짜 천재예요.”
“하하하하, 고맙다.”
당무독의 웃음소리.
하지만 아래 숨어 있던 초주에게는 지옥에서 잡아당기는 사망곡처럼 들렸다.
‘욱……!’
호흡을 막았지만 이미 코로 들어간 독분은 점점 혈맥을 타고 흐르면서 초주의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아…… 악!”
결국 그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면서 귀인전 밖으로 나왔다.
무섭게 꿈틀거리는 손이 당무독을 가리키며 달려들었다.
“크…… 으…… 해도…… 옥…….”
그의 말은 끝나지 못했다.
철썩!
성철각의 걸선각이 초주의 목에 그대로 닿았다.
뚝!
평소라면 정신을 잃는 정도의 힘이었지만, 광견독에 전신이 비틀어진 탓인지 목이 부러졌다.
즉사.
성철각도 그가 죽을 줄은 몰랐다.
“엇, 죽었네. 살살 찼는데…….”
팽유도는 쓰러진 초주의 앞에 앉았다.
“근데 이자는 누구지?”
“이런 곳에 숨어 있는 쥐새끼라면 산동악가에서 쫓는 놈이 아닐까? 유도야, 몸을 뒤져봐.”
슥슥슥.
팽유도가 늘어진 초주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허리춤 안에서 소중하게 싸여 있는 봉투를 찾았다.
“이런 게 있고. 흠, 딱히 돈이 되는 건 없네.”
“일단 이자를 숨겨야겠다. 다른 사람들 오기 전에.”
팽유도와 성철각은 시체를 귀인전 바닥에 밀어 넣은 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주위를 정리했다.
십년지계.
긴 세월 동안 공을 들여 세웠던 하북소가의 계획은 한순간에 틀어졌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허무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