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뜻밖의 죽음
동평의 초입을 향해 빠르게 움직이는 무리들.
그들 위로 하북소가의 깃발이 펄럭거렸고,
선두에선 하북소가 절대고수 이인이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휘이이잉-
우우우우우-
멀리서 강한 기가 바람에 섞여 날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후후후, 산동악가인가. 동평으로 들어오는 것을 반기지 않는 모양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싸움을 건다면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지. 다만 우리의 주목적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소후인과 소이권이 진영을 멈추었다.
“준비하게.”
“알겠습니다.”
소이권은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적검건위! 청검곤위!”
두두두두-
소이권의 명에 적검단은 건(乾)으로, 청검단은 곤(坤)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음양연진(陰陽連陣).
훈련이 잘된 군세가 빠르게 진영을 갖추었다.
두두두두-
땅을 통해 전해져 오는 진동.
소후인은 점점 가까워지는 산동악가 무리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 * *
팽팽한 긴장감에 싸인 산동악가.
하지만 오직 한 곳만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덜컹!
열린 문으로 성철각이 허리를 낮추며 들어섰다.
빠삭!
입안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이거…… 다들 먹어봐.”
성철각이 한입 가득 오물거리면서 들고 온 쟁반을 내려놓았다.
“철각 형, 뭐야?”
“주방에 가서 누룽지 얻어왔어. 맛있어.”
“앗싸! 안 그래도 입이 심심했는데…….”
네 명은 동시에 성철각 앞으로 모이며 누룽지를 하나씩 들었다.
빠삭.
우두둑-
한 입씩 누룽지를 베어 먹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만통자는 심각한 상황에서 누룽지에 정신이 팔려 있는 상황이 웃겼다.
‘거 잘도 먹네…….’
“노인장도 하나 드릴까요?”
“됐다. 이빨이 시원찮아서 필요 없다.”
“알겠어요. 나중에 안 남겨두었다고 투덜대기 없기예요.”
빠드득.
만통자는 누룽지를 들고 맛있게 먹는 남하림이 그냥 철없이 노는 아이 같아 보였다.
“잠깐만.”
“금방 마음이 바뀌셨어요? 드릴까요?”
“아니, 그게 아니네. 혹시 지금 밖에 난리가 난 걸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하북소가에서 쳐들어왔다면서요?”
“아네?”
“모를 리 없잖아요.”
“아는 놈들이 이렇게 한가하게 방구석에 박혀서 맛도 없는 누룽지 타령을 하고 있냐?”
남하림은 다시 누룽지 한 입을 깨물었다.
“이거 생각보다 맛있어요. 철각이 오면서 살짝 꿀을 발라 왔거든요. 이빨이 안 좋다고 하시니 아쉽네요.”
“크윽…… 이 녀석아,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만통자는 남하림을 흘겨보면서도 잠깐 꿀을 바른 누룽지가 얼마나 맛있나 조금 궁금했다.
“후후후,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빠삭!
우두둑.
누룽지가 맛있게 부서지는 소리가 귀에서 울렸다.
“정말 피 터지게 싸울지도 모르는데…… 가만히 구경만 할 생각이냐?”
남하림은 입에 누룽지를 문 채 만통자를 보았다.
“동네 애들 싸움도 아니고, 산동악가와 하북소가의 결전에 참견할 정도로 간이 붓지는 않았어요.”
“…….”
“만통자님도 가만히 지켜보기나 하세요. 지금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게 없을 겁니다. 괜히 나섰다가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요.”
‘음…… 아무 생각도 없는 줄 알았는데…….’
남하림의 말대로 괜히 나섰다가 좋을 것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사방에서 계속 빠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하나 먹어봐야겠다.”
휘익.
만통자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접시에서 마지막 누룽지 하나가 사라졌다.
남하림의 손에 들려 있는 누룽지.
“…….”
“…….”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스윽-
……빠사사삭.
만통자의 시선에 눈을 멀뚱히 뜨고 누룽지를 한입에 밀어 넣은 뒤 깨뜨리는 남하림의 모습이, 아주아주 느리게 지나갔다.
목청이 터져 나갔다.
“야아! 에에에잉, 이 예의라고는 달나라에 버리고 온 녀석이!”
씩씩-
중원에 나온 지 어언 일 갑자.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다.
휘비적.
남하림은 귓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긁적였다.
그 모습을 본 만통자는 허탈할 지경이었다.
“으윽, 네놈은 진짜로 네 사부가 하던 짓이랑 정말 똑같히 하는구나. 어디서 그런 거만 배워 와가지고. 못된 놈.”
“에이, 겨우 누룽지 하나 가지고 너무 야단치시네요.”
“내가 누룽지 때문에 그런다더냐!”
“이가 안 좋으시다면서요. 괜히 먹다가 이빨 나갈 수 있잖아요. 생각해서 그런 건데…….”
“내 이빨이 나간다고 네놈이 신경 쓸 놈이더냐. 에잉, 고얀 놈…….”
‘아하하, 완전히 삐지셨는데. 하는 수 없군.’
즐겁게 놀린 후엔 바로 달래야 후환이 없다.
사부님을 떠올리고 킥킥 웃은 남하림은 당무독에게 물었다.
“혹시 가지고 있는 것 중 몸에 좋은 게 있어?”
“설삼 한 뿌리 남았어.”
당무독이 가방에서 천 조각에 싼 설삼을 꺼냈다.
남하림은 설삼을 받아 눈을 싹 감고 돌아앉은 만통자에게 내밀었다.
“잘못했어요. 누룽지를 그 정도로 좋아하실 줄은 몰랐죠. 대신에 요거, 괜찮은 설삼인데 이에 안 좋은 누룽지보다 백 배는 좋아요. 제가 노인장이니까 특별히 드리는 겁니다.”
“……설삼?”
귀한 영약 중에서도 영약.
슬쩍 한쪽 눈을 뜨고 설삼을 받은 만통자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특, 특상.’
아무리 못 잡아도 오백 년은 된 놈이다.
“정말이냐? 요것을 내가 가져도 돼?”
만통자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드세요.”
“이 귀한 것은 네 사부에게 줘야 하는 게 아니냐?”
“사부님께는 나중에 챙겨 드리면 돼요.”
“그렇지. 그렇구나. 여하튼 잘 받으마.”
만통자는 설삼을 원래대로 천에 싼 뒤 가슴에 소중하게 넣어두었다.
‘어허허, 뭐, 생각보다 좋은 녀석이구먼.’
* * *
채애애앵!
까아아앙!
동평의 초입에서 거대한 기운이 부딪쳤다.
하북십대무인 소이권과 악가제일신창 악민의 대결은 잔인한 싸움이 아니라, 마치 멋들어진 검무를 추는 듯했다.
이 각도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오십 초를 주고받았다.
검과 창이 크게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고.
두 사람이 동시에 오 장 뒤로 물러났다.
“멸청검이 대단하다 들었는데, 과연 소문대로군.”
“하늘마저 뚫을 수 있다는 극의창도 대단하오.”
“아직 멀었소. 그대의 검을 뚫지 못하거늘.”
“아니오, 분명 뚫었소이다.”
스윽.
소이권은 왼쪽 팔을 들어 겨드랑이 끝에 구멍이 난 부분을 가리켰다.
“만일 물러서지 않았다면 필히 중상을 입었을 것이오.”
“그것을 피한 게 더 대단한 것이지.”
“오늘은 이만 하는 게 어떻겠소? 인사차 나누었으니 다음에는 제대로 붙을 수 있을 것 같군.”
“그렇게 하겠소.”
척.
척.
악민과 소이권은 포권을 하며 물러났다.
오랜만에 만난 적수.
아껴놓고 싶은 마음이 드는 무공의 적수였다.
두 사람의 결전이 끝나자 팽팽하던 두 진영은 조용해졌다.
사전에 상대방의 기를 꺾기 위한 싸움은 대등하게 끝이 났다.
저벅저벅.
스윽.
이윽고 두 사람이 중앙으로 나왔다.
산동악가의 악군악과 신소검 소후인.
두 사람의 대화는 길지 못했다.
짧은 대화 속 처음부터 어긋났기 때문.
구천신품의 행방.
산동악가는 하북소가가, 하북소가는 산동악가가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에 시작된 대화는 불신만이 가득했다.
둘 중 한 곳도 구천신품을 포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
말이 통하지 않으면 결국은 힘.
무력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악군악은 건너편 하북소가 진영을 바라보았다.
악가의 코앞에 적검단과 청검단 무인들이 가득했다.
하북소가에서 하북십대무인의 두 인물까지 동평으로 보낸 이유는 역시-
“하북소가가 원하는 것이 이것인가?”
“잘못 알고 있군요. 본 가가 아니라 산동악가에서 원하는 것이 싸움이지 않소?”
“우리가 원했다고? 역시 이것도 말이 통하지 않는군. 결론은 힘으로 내릴 수밖에 없겠지.”
“악 가주의 말에 동의하는 바이오. 본 가의 가주님께서 그대에게 분명히 전해달라고 했소. 전쟁이 시작될지 모른다고.”
“그렇다면 서로가 원하는 것일 수도 있겠군.”
“잘됐습니다. 이 부분만은 서로 의견이 같으니 말이외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내력을 다해 상대방을 내리눌렀다.
“기한은 일주일이오. 그 안에 우리가 원한 물건을 주지 않는다면 중원 무림에 그대의 악행을 알린 뒤 힘으로 가지고 갈 것이외다.”
“일주일이라…… 소 단주, 그대의 가주에게 똑바로 전하게. 중원에 모든 사실이 알려진다면 누가 더 피해를 보게 될지.”
악군악과 소후인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상대방의 약점.
‘가주님께서도 이자에게 약점을 잡히셨단 말인가?’
하지만…….
소융이라면 약점이 잡혔으면서도 산동악가의 심기를 건드리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에게 가주 소융은 믿음, 그 자체니까.
“그건 악 가주께서 알아서 할 일이오. 난 그분의 명을 전하고 행동할 뿐. 기한은 일주일이오.”
휙.
소후인은 돌아서서 하북소가의 진영으로 걸었다.
‘저놈이…… 무슨 자신감이지?’
그가 가지고 있는 수 또한 치명적이다.
그런데 저런 자신감이라니?
악군악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정신이 산만해지며 진정이 되지 않았다.
산동악가 진영으로 돌아온 그는 곧바로 살기대주 악강에게 명을 내렸다.
“악강, 이곳을 맡아라. 잠시 본 가에 다녀오겠다.”
“알겠습니다. 하북소가 놈들은 한 발자국도 동평 땅에 들어서지 못하도록 막겠습니다.”
* * *
휙.
산동악가에 도착한 악군악은 빠르게 말에서 내렸다.
“가주님을 뵙습…….”
호위들이 인사를 했지만 그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다다-
악군악은 빠른 걸음으로 곧장 가주전을 향했다.
‘군사는 어디에 있지?’
평소라면 군사인 등민이 바로 나타나야 할 터.
악군악은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가주전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느냐?!”
휙! 휙!
비밀 호위들과 함께 호위장 곽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가주전 안에 있어야 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지?”
“군사께서 말씀하시길, 저희도 동평에 갈지 모르니 준비를 해두라 하셨습니다.”
악군악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군사는 어디에 있느냐?”
“군사께서는 방금 전 가주전을 나섰습니다.”
“방금 전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여기에 있었다는 말인가?’
주인이 없는 방에 오랫동안 있을 이유가 없다.
“어디로 간다고 하더냐?”
“군사전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당장 군사전에 가서 내가 찾는다고 전하라.”
“넵. 알겠습니다.”
다급한 일임을 깨달은 곽순이 가주전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쿵. 쿵.
가주실로 향하는 악군악의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
문손잡이를 잡았다.
좋지 않는 느낌이 강하게 밀려왔다.
문손잡이에 묻은 작은 붉은색 흔적.
‘젠…… 장.’
혈흔이 틀림없다.
콰앙!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세게 열어젖혔다.
코를 자극하는 혈향이 방 안에 가득했다.
피를 흘리며 바닥에 죽어 있는 특위 네 명의 시체.
‘초주가 없다.’
특위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군사의 추천에 의해 특위가 된 인물이었다.
‘아직까지 식지 않았어.’
악군악은 피를 만져본 뒤 바로 일어났다.
휙.
그러고는 벽에 걸려 있는 산수화 앞으로 다가서서,
스윽.
산수화를 잡고 천천히 뒤가 보이도록 돌렸다.
‘……없다.’
부르르-
악군악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타악!
악군악이 벽에 걸려 있는 표구를 잡아당겨 단번에 뜯어냈다.
“아아아악!”
그러고는 괴성을 지르며 산수화를 두 손으로 갈기갈기 찢었다.
쫘아악!
쫘아악!
방바닥으로 찢긴 산수화 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휘청.
그는 힘없이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났다.
‘병신같이…… 천하의 병신이 나구나.’
하북소가에 당했다.
소숭을 살인 청부한 소융의 친서가 사라진 이상, 그를 죽인 뒤 구천신품을 빼앗았다는 사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끝났어. 난…… 끝이다.’
무림에 알려지게 되면 산동악가는 끝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한다 말인가.’
자신 때문에 천하에 비웃음을 당할 산동악가를 생각할수록 숨이 막혔다.
타타타타!
군사전에 갔던 호위장 곽순이 다급히 달려오다 문 앞에서 멈칫거렸다.
특위의 시체들 사이로 피가 흥건했다.
“가…… 주님.”
“군사는 어떻게 되었지?”
“저어…… 군사께서…….”
곽순은 잠시 말을 하다가 머뭇거렸다.
“군사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겼다는 것인가?”
“군사께서도 살수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군사까지?’
등민을 죽이고 사라진 범인은 특위 초주일 것이다.
악군악은 분을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가주님, 범인은 아직 세가에서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그가 서릿발 같은 명을 내렸다.
“뭣들 하느냐? 지금 당장 한 놈도 본 가를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라!”
“존명!”
곽순은 빠르게 물러났다.
‘하북소가…… 네놈들을 죽어도 용서하지 않으리라.’
* * *
가주전과 군사전에서 발생한 사건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귀인전까지 흘러들었다.
“무슨 일이지?”
“그러게. 신나게 싸울 것 같더니 가주전에서 특위와 군사가 갑자기 왜 죽어? 알 수가 없군.”
흐음.
남하림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림 형, 어디 가려고?”
“모르면 물어야지. 군사가 죽은 이유랑 하북소가와 무슨 일이 있는지 말이야. 궁금해서 물어봐야겠어.”
“가주가 이야기를 해줄까?”
“아니면 말고. 혹시 모르잖아.”
“우리도 같이 갈까?”
“군사가 죽어서 심란할 텐데, 혼자 가는 게 좋겠어.”
“알겠어.”
“아 참. 그분은 아직도 점괘 보고 있어?”
“그런 모양인가 봐.”
‘맞는 것도 없던데 왜 자꾸 점괘를 치시는지 모르겠네.’
남하림이 귀인전 밖으로 나오자 주위 분위기는 이미 초상집이었다.
‘흠, 하북소가에서 제대로 한 방을 먹인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