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하북소가 내려오다
가주전은 침묵에 잠겼다.
남하림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심해의 깊은 어둠에 잠긴 듯했다.
‘지금이 원래의 모습인가?’
악군악은 숨을 내쉬기가 힘들었다.
‘휴우…….’
치기 어린 개방의 후기지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산동악가주의 한마디는 산동악가 전체의 무게였다.
“후개, 현재 본 가는 구천신품을 가지고 있지 않네. 도둑에게 잃은 것은 구천신품이 아닐세.”
“가주의 말씀대로라면 구천신품은 그 전에 잃었다는 것입니까?”
“그…… 렇네. 하북소가에 보내는 표행에서 누군가 훔쳐갔네.”
악군악의 대답은 만통자에게 충격을 주었다.
“허허, 악 가주. 정녕 구천신품을 숨겨놓고 있었단 말이오?”
“그동안 사정이 있었습니다.”
악군악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가주전에 들어서기 전, 이미 군사 등민과 말을 맞췄다.
“구천신품은 청봉표국의 표행을 덮친 하북소가에서 훔쳐간 것으로 끝까지 합시다.”
“사정이라…… 가주의 사정이 무엇인진 궁금하지 않소. 지금 내가 궁금한 것은 구천신품이 어디에 있는가일세.”
만통자의 두 눈은 노여움과 배신감으로 점철되어 지금까지와 달랐다.
“만통자님,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악군악은 만통자와 남하림을 보면서 오래전 일을 꺼내며 말문을 열었다.
“구천마성이 무너지던 그날, 구천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지 말아야 할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북소가의 두 인물이 하나의 물건을 두고 다투는 장면이었습니다.”
‘이것 봐라. 재밌어지는데?’
악군악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하림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척 가만히 들었다.
“두 명의 인물은 소숭과 소융이었습니다.”
“소융이라면…… 하북소가의 현 가주가 아닌가?”
“맞습니다. 그리고 소숭은 전대 가주의 친자입니다.”
“그 둘이 싸웠다는 말이오?”
“네. 그들은 한 가지 물건을 두고 말다툼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끝내 화를 이기지 못해 검을 들고 싸웠습니다.”
“가주는 보고만 있었는가?”
“아닙니다. 저 또한 말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도저히 말릴 수 없었습니다. 실수였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결국 소융의 검에 소숭이…….”
“허어…… 어떻게 그런 일이…….”
“소융도 죽일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소숭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는지 구천궁을 그대로 떠나 버렸습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이 사실에 대해 아는 사람은 누가 있소이까?”
“그건…… 구천궁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당사자인 세 사람밖에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서로 가지려고 했던 물건이 구천신품이란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본의 아니게 구천신품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근데 최근 하북소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 물건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구천마성에서 구천신품을 몰래 훔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중원 무림에 소문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소?”
“돌려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괜한 오해로 무림의 표적이 될 수 없었으니까요. 만전을 기하기 위해 그들의 뜻대로 표행 속에 구천신품을 넣어 보내주었습니다.”
‘흐음…… 이거 참.’
만통자는 악군악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망설여졌다.
불쑥.
그때, 둘 사이로 남하림이 나섰다.
“가주님 말씀이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렇다면 해림장을 몰살시킨 것과 청봉표국을 지우려고 한 이유는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청봉표국주는 예전 구천마성 직속 문파인 십장혈 출신의 인물이었네.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 본인이 구천신품을 가지고 있는 걸 알고 협박을 했지. 하지만 하북소가에 돌려주게 되면서 협박을 들을 필요는 없다고 여겼소이다.”
“그래서 좋은 관계였던 청봉표국을 친 모양이군요.”
“누가 좋은 관계라고 했는지 모르겠군. 그들의 협박 때문에 좋게 지내야 했을 뿐. 그리고 해림장은 본 가의 소행이 아니네. 본 가가 했다는 증거가 없소.”
가주 악군악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이거 참…… 증거가 없다고 바로 발뺌을 하겠다?’
“하하하!”
남하림은 배를 잡으며 웃기 시작했다.
악군악은 두 눈에 힘을 주며 남하림을 노려보았다.
뚝.
갑자기 남하림의 웃음이 멈췄다.
“가주님, 제가 설마 무턱대고 우기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당당한 남하림의 태도에, 악군악은 순간 그가 뭔가 다른 증거가 있는지 의심이 들었다.
“허, 후개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소이다. 물건은 하북소가에서 표행을 기습한 뒤 빼앗아 갔으니 진심으로 찾고 싶다면 우리가 아니라 하북소가에 가시오.”
남하림은 더는 묻지 않았다.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가주의 표정을 읽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구려. 후개는 본 가를 떠날 생각은 없소이까?”
“아직은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죠. 산동악가에서 한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면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등민이 헛웃음을 뱉었다.
“후개, 그대는 본 가를 여전히 믿지 못하는 것 같소이다.”
“믿음을 주지 않았으니까. 여하튼 다른 일 때문에 바쁘신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남하림이 가주전을 나서자 조용히 지켜보던 다른 네 명도 함께 밖을 나섰다.
만통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보게, 군사. 저들의 말처럼 거짓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네.”
“만통자님,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은 하북소가입니다.”
“알겠네. 나도 그만 물러가겠네.”
가주전을 나서는 만통자의 얼굴엔 어둠이 가득했다.
* * *
저벅저벅.
중년인이 돌계단을 따라 올라섰다
절벽 끝에 세워진 정자.
정자로 다가서자 고요하고 고즈넉한 광경이 펼쳐졌다.
‘좋군.’
눈앞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
아래에는 기암괴석 사이로 푸른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정자에 앉아 서책을 읽는 인물.
하북소가의 가주 소융은 시선을 돌려 허리를 숙인 중년인을 내려다보았다.
내당의 수장이자 정인당의 당주를 겸임한 소묵이었다.
“아우님은 올라오시게.”
소융은 보던 책을 덮었다.
정자로 올라선 소묵은 소융의 앞에 앉았다.
“무슨 책을 보는 중이셨습니까?”
“별거 아니네. 묵자를 읽던 중이었지.”
“무슨 내용이신지요?”
“으음…… 겸애라는 의미 없는 내용이더군. 후후후, 묵자를 지은 성인은 한마디로 거지 같다고 할까. 평생을 한 가지 옷으로 지냈다고 하네.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한 분이셨지. 아우님도 알지 않는가. 싸움에 있어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사실을.”
“가주님의 말씀을 들으니 썩 좋은 책은 아닌 듯합니다.”
“하하, 나도 그리 생각하는 바일세. 그래, 무슨 일로 힘들게 애검각(愛劍閣)까지 왔는가?”
“산동악가에 보냈던 일이 실패한 것 같습니다.”
“일영, 그 아이가 직접 움직였다면 실패하지 않았을 텐데…… 중간에 무엇이 잘못된 모양이군.”
“계획은 완벽했고 실천 또한 완벽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패했다?”
“그렇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이거 참. 당황스럽지 않은가. 완벽하게 끝이 났거늘 실패를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하고 있는가?”
“산동악가에 군사인 등민이 있지 않습니까.”
소융은 한 손으로 수염을 쓸어 내렸다.
“등 군사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는 아니야. 아우님도 알지 않은가?”
“사람이란 혹시 모르는 일입니다.”
“후후후, 아우님 말이 맞을 수도 있겠지.”
휘익.
소융은 방금 전까지 읽던 서책을 들어 애검각 아래 절벽으로 던졌다.
“아우님, 첫 번째 방법이 실패했다면 두 번째 방법으로 넘어가야겠군.”
“가주님께서 명을 내리신다면 곧바로 산동악가를 압박할 것입니다.”
“산동 아래에 누가 내려가 있다고 했는가?”
“적검단과 청검단이 대기 중입니다.”
“후인 아우와 이권 아우가 어려운 걸음을 하는군.”
그 두 명이라면 산동악가에 압박을 가하는 데는 충분할 터.
“두 아우들에게 산동악가에 가거든 본인의 말을 악 가주에게 전해달라고 하게.”
“무엇입니까?”
“전쟁이 시작될 것 같다고.”
소융은 미소를 지었다.
“가주님, 그럼 구천신품은 포기하시는 것입니까?”
“구천신품이라…….”
어느 날, 그는 극비에 싸여 있던 인물에게서 악군악의 수중에 구천신품이 있다는을 알게 되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도 산동악가의 눈치를 봤을 테지.’
소융은 처음부터 구천신품에는 욕심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약점을 지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함이다.
‘그가 이번 일을 잘 처리해 준다면…… 구천신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거늘.’
* * *
느그적, 느그적.
‘쩝. 생긴 건 전혀 아닌데…… 행동은 영락없이 개방의 거지로군.’
귀인전에서 삼 일 동안 할 일 없이 드러누운 다섯 명을 지켜보면서 만통자가 내린 결론이다.
“후개, 할 일 없으면 그만 돌아가는 게 어떠냐?”
스윽.
남하림은 누운 채로 고개만을 까닥 움직이며 돌렸다.
“으음, 할 일이 없다뇨? 구천신품을 찾아야죠.”
“허허, 나 역시도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완고하게 하북소가에서 훔쳐갔다고 하지 않는가.”
“그건 가주가 하는 말이잖아요. 그리고 아직 무림맹에서도 오지 않았어요.”
“엥? 무림맹? 그럼 지금까지 여기에 죽치고 있었던 게 무림맹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말이냐?”
“당연하죠. 무림맹에 제소를 했으니 당연히 결과를 봐야 하잖아요. 노인장은 제가 할 일 없이 제소했다고 생각하셨어요?”
“아니…… 그냥 하는 줄 알았지…….”
“세상에 그냥 하는 게 어디 있어요. 후개를 죽이려고 했는데 그냥 입만 싹 닫고 끝나는 건 아니죠.”
“…….”
만통자는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저, 저 무서운 놈.’
씩 웃으며 뒹굴거리던 남하림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자.”
우루루루-
“얏호!”
팽유도의 환호와 동시에 누워 있던 네 명 모두 몸을 일으켰다.
“뜬금없이 어딜 가는 게냐?”
“밥 때가 됐잖아요.”
“허어…… 산동악가를 무림맹에 제소까지 한 놈이 밥은 꼬박꼬박 얻어먹는군.”
“음, 이런 말이 있어요. 살기 위해서 먹느냐, 아니면 먹기 위해서 사느냐.”
“그게 이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냐?”
“결론은 어차피 먹는다는 거죠. 노인장은 배가 부른 모양이신데, 그럼 우리끼리 갑니다!”
벌떡!
만통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녀석아! 내가 언제 안 먹는다고 했더냐?”
우르르 귀인전에서 나가던 하림 일행은 빠르게 달려가는 산동악가의 인물들을 보았다.
“하림 형,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인데요?”
“누가 쳐들어왔겠지.”
남하림은 대충 말을 던졌다.
“정말요? 그럼 우리 밥은 어떻게 해요?”
“글쎄다. 그래도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있을 거야.”
‘허어, 이놈들은 난리가 났다는데도 오로지 밥걱정을 하고 있군.’
만통자는 뒤를 따라가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밥은 나중에 먹어도 되지만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죠. 식사는 지금 안 하면 굶지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나중에도 알 수 있어요. 내 일도 아닌데 굳이 나설 일도 아니고. 노인장은 궁금하면 다녀오세요.”
만통자는 주변이 소란스럽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앞서가는 다섯 명을 보았다.
“에잉, 궁금하지만 저 녀석 말도 일리는 있어. 내가 나선다고 들을 놈들도 아니고.”
근데…… 왜 이리 처량한 느낌이 들지?
* * *
[급보]
하북소가 두 개의 무력단.
동평으로 움직임.
꾸욱.
손에 힘을 주며 전서를 꽉 쥐었다.
악군악은 빠드득 이를 갈았다.
“소융, 개자식이…….”
전쟁을 원하는 쪽은 하북소가가 아니라 산동악가, 자신이었다.
“군사,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하지?”
등민도 그들이 공격을 해올 경우는 예상하지 못했다.
“가주님, 제가 보기에 두 가지 이유인 듯합니다.”
“두 가지?”
“네. 첫째는 본 가에 침입했던 인물들을 구하기 위한 것이고, 두 번째는 무림에 구천신품이 자신들에게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그렇군. 죽일 놈! 누구 덕분에 하북소가의 주인이 되었거늘, 소융, 이 개 같은 놈이…… 본인에게 소숭을 죽여 달라던 살인청부의 증거가 여직 남아 있는데!”
“가주님, 차라리 이번 기회에 그 증거로 무림맹에 제소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무림맹에?”
악군악은 잠시 망설였다.
군사 등민의 의견도 나쁘지는 않았다.
“아닐세. 지금은 아니야. 그 방법은 우리가 불리해질 때 마지막 협상을 위해 남겨두어야겠지. 그놈도 나처럼 스스로 자폭할 생각은 없을 테니.”
“잘 알겠습니다. 근데 가주님. 긴급한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미리 대비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절대로 일어나지 않겠지만, 혹시나 가주님의 신상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길 시 무림맹에 가고자 해도…….”
“…….”
악군악은 곰곰이 생각했다.
‘음…… 그렇지. 내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겠지. 그놈은 무조건 나를 잡으려고 할 것이다.’
누군가 자신을 대신할 한 명이 필요했다.
스윽.
그는 손짓으로 등민을 가까이 불렀다.
[잘 듣게. 그 물건은 저기 표구 안에 숨겨져 있네.]
등민은 고개를 돌려 벽에 걸려 있는 산수화를 보았다.
끄덕.
고개를 움직이는 등민의 눈동자가 빛났다.
악군악은 돌아선 등민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군사, 하북소가에서 온다면 상대를 해줘야 하지 않겠나?”
“맞습니다. 이번 일은 결단코 넘어가선 안 될 일입니다. 그들이 동평에 한 발자국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타악!
악군악은 악성창을 바닥에 내리쳤다.
“이번에는 본인이 직접 그놈들을 상대하겠다.”
“혼천대와 살기대에서 상대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가주님께서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군사, 아니네. 이번 기회에 본 가의 힘이 어떠한지 보여줘야지.”
“가주님의 생각이 그러하시다면 악민 님과 함께 가심이 좋을 듯합니다.”
“악민을?”
악군악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이름이 나온 자체만으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악가제일신창(岳家第一神槍) 악민.
그는 항상 악군악을 무시했다.
“능력이 안 되는 놈을 가주위에 세웠으니 악가는 망하겠구나.”
악군악에게 그는 눈엣가시.
만일 다른 인물 같았으면 벌써 내쳤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신창은 그야말로 무림의 일절.
악군악은 어쩔 수 없이 악민을 산동악가 본전이 아닌, 동평 마을 밖에 따로 살도록 만들었다.
“가주님, 하북소가에서 나올 인물들은 멸청검과 신소검입니다.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무인들입니다.”
“……크흠.”
멸청검 소이권과 신소검 소후인.
두 무인은 하북소가는 물론, 하북십대무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이들이었다.
“알겠네. 악민에게 연락을 띄우도록 하지.”
‘그 녀석만은 부르고 싶지 않았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