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새로운 친구
와작와작!
와구와구.
동련장으로 안내받은 청봉분타 개방 거지들은 한 상 가득 차려놓은 음식들을 전투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남하림은 독상을 받으면서 물끄러미 쳐다보던 번손, 번영과 시선을 마주했다.
“두 분은 식사하지 않으십니까?”
“우린 괜찮소이다.”
“그런가요? 그럼 식사 끝날 때까지 밖에 나가 계시죠. 뻘쭘하게 쳐다보고 있으니 밥이 잘 넘어가지 않네요.”
“아…… 알겠소이다.”
번손과 번영은 엉거주춤 일어나 동련장 밖으로 나갔다.
‘망할 놈…….’
번영은 손이 부들거렸다.
‘야살문 이놈들.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렇게 자신 있다고 하더니만!’
번영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떻게 됐는지 확인을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아도 야살문에 빠르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조만간 그들에게서 연락이 올 것입니다.”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겠군.”
그렇게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온 지 이각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덜컹!
동련장의 문이 열리며 식사를 마친 개방 거지들이 하나둘씩 빠져나왔다.
“어억, 잘 먹었다!”
“하하하, 그러게. 단화걸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야말로 맛집이 틀림없어.”
거지들은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배를 두드렸다.
‘맛집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배부르면 빨리 사라져라!’
번손과 번영은 마지막으로 나오는 남하림과 도랑을 보았다.
한시라도 빨리 눈앞에서 이들이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남하림은 국주 번손의 손을 덥석 잡았다.
“국주님. 우리 식구들이 잘 먹었다고 하더군요.”
“……입맛이 맞아 다행이외다.”
“후후, 거지 입맛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냥 배부르면 되는 거죠.”
“허허…… 다른 건 필요 없으신지…….”
“오늘은 잘 먹고 갑니다.”
남하림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번손을 지나쳤다.
‘밥만 처먹고 그냥 간다고?’
옆에서 보고 있던 번영은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떼거지로 몰려와 사람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더니, 사흘치 밥만 몽땅 축내고는 그냥 나가고 있다.
‘이것들이 장난치나?’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개방 거지들을 향한 욕지거리가 목구멍 끝까지 밀려왔다.
‘에라이…… 거지 같은 놈들.’
번영은 속이 끓어올랐지만 겨우 참아냈다.
그런 번영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하림은 우르르 모여 있는 분타원들에게 다가가 인사치레까지 시켰다.
“돌아가기 전에 맛있게 식사를 준비해 주신 청봉표국 국주께 감사의 인사를 하도록.”
“국주, 잘 먹고 갑니다.”
“다음에도 한 번 더 부탁합시다.”
“하하하! 우리들이 너무 지저분하게 먹어서 다음에는 안 될 것 같은데?”
“무슨 말인가. 이 정도면 나름 준수하고 깔끔하게 먹었지!”
개방의 거지들은 번손에게 한마디씩 던진 뒤 어슬렁어슬렁 표국을 나섰다.
남하림도 그들을 따라 나가다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번손과 번영을 돌아보며 깜빡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이상한 녀석이 찾아와서 잠을 못 자게 하더군요. 몇 대 패서 잡아놓았는데 누가 시켰는지 말문을 열지 않더이다.”
‘야살문……! 놈들이 실패했군.’
“나는 생전에 그런 일이 처음이라…… 얼마나 놀랐는지 두 분은 상상도 못 할 테지요. 밥이 맛있어서 살짝 귀띔해 주는 겁니다. 혹시나 두 분도 잠자리를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말입니다. 넓은 중원 무림에 살수가 그놈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요? 후후후.”
실소를 지으면서 말하는 남하림의 모습에, 번손과 번영은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설마 우리가 보낸 걸 알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번영은 찝찝한 표정으로 표표히 사라지는 남하림을 바라보았다.
도랑은 밖으로 먼저 나와 단화걸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화걸님, 아마 저 두 사람은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머리가 꽤나 아플 것입니다.”
“죽어야 할 사람이 살아 있으니 심란하겠죠. 그만 가요. 오늘 밤엔 재미있는 일이 생기겠네.”
* * *
휘이이잉-
을씨년스러운 바람 소리가 지붕을 타고 지나갔다.
번영은 눈을 번쩍 떴다.
‘쥐새끼군.’
지붕 위를 타고 지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설마…… 그 거지 새끼가 말한 대로……?’
불현듯 살수가 찾아갈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던 남하림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스윽.
번영은 침대 옆에 세워져 있는 검을 잡았다.
꿀꺽.
단숨에 발검하기 위해 호흡을 멈추고, 검을 천천히 가슴 앞으로 당겼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파아앗.
지붕 위에서, 창문에서, 그리고 방문이 열리며 복면을 한 살수들이 동시에 뛰어 들어왔다.
살수들은 침상 위 번영을 향해 동시에 검을 찔렀다.
채애애앵!
순간, 번영이 검을 뽑으며 살수들의 검을 막아내기 위해 원을 돌렸다.
‘욱……! 검이 강하다.’
왼쪽 방향에서 달려드는 살수.
스걱!
살수의 목을 베는 번영의 검에서 강한 사기(邪氣)가 쏟아져 나왔다.
‘어떻게?’
한 걸음 뒤에서 지켜보던 특살자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번영의 기는 보통 사파 무인이 쏟아내는 기가 아니었다.
‘망할…… 그놈이……! 이 정도로 강한 놈인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그가 의심하는 동안에도 수하들이 죽어나가는 소리는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크크크, 야살문. 네놈들이 배신을 하다니…… 그래,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도 좋다. 다만 목숨은 내려놓아야겠지!”
“내가 혼자라면 모를까, 살진단이 모두 왔다. 목숨은 내가 아니라 네놈이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거액의 의뢰비를 받기 위해서는 살진단 전체가 움직여야 했다.
“뻗을 자리를 보고 누우라고 했다.”
번영은 완전히 내력을 개방한 뒤 야살문 살수들을 상대했다.
“커억!”
번영의 검이 펼쳐질 때마다 살수들의 목이 잘렸다.
‘이놈 정체가 뭐야?’
특살자는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번영을 죽여야 한다.
만일 그를 죽일 수 없다면…….
‘내가 죽어야겠지.’
특살자는 마지막 수단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몸에 무리가 생기더라도 번영을 죽여야 했다.
개방에서는 너무 황당하게 당하는 바람에 최후의 방법을 사용할 겨를이 없었다.
그가 수하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삼켜라!”
톡.
특살자가 손안에 든 환단을 깨물었다.
‘으으윽!’
내력을 일시적으로 폭발시키는 폭환내단(爆丸內丹)이 특살자의 단전을 강하게 자극했다.
불끈.
특살자의 전신에 힘이 솟구쳤다.
그뿐만 아니라 나머지 여섯 명의 수하들도 마찬가지.
번영은 갑자기 변한 상대의 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들이…… 설마 동귀어진을 노리는 것은 아니겠지?’
파앗!
타앗!
죽음까지 불사하고 달려드는 살수들의 공격은 지금까지 했던 그 어떤 공격보다 강했다.
콰악!
덥석.
여섯 명의 살수들이 동시에 달려들며 번영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과 발을 잡았다.
“이놈들! 당장 떨어져라!”
“커억……!”
번영이 매섭게 검을 휘둘렀지만, 살수들은 온몸을 던져 살초를 막아냈다.
“죽어라, 이놈!!”
마지막으로 찾아온 완벽한 기회.
특살자는 몸을 날려 번영의 가슴을 향해 검을 뻗었다.
“이 새끼들이……! 내가 쉽게 죽어줄 줄 아느냐?!”
두두두두-
번영의 전신에서 내력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죽음을 무시한 살수들은 그의 몸을 여전히 붙잡고 떨어지지 않았다.
‘이, 이것들이……!’
마지막 남은 힘까지 짜낸 번영이 발버둥 치며 허리를 붙잡고 있던 살수의 목덜미를 쥐었을 때,
“이제 끝이다!”
번영의 두 눈동자에 투영된 특살자의 검이 점점 커져갔다.
파악!
스스슥-
특살자의 검이 번영의 어깨에서 단전까지 가르며 떨어졌다.
번영의 죽음.
즉살이었다.
“…….”
뚝뚝.
바닥으로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특살자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배를 보았다.
번영의 검이 복부에 깊숙이 찔려 있었다.
지혈을 하기 위해 복부를 누르자 손에서 붉은 피가 떨어졌다.
“크윽, 젠장…… 당분간은 못 움직이겠지만…… 그래도 임무는 끝냈군.”
특살자는 살아남은 수하들에게 의지해 힘겹게 밖으로 움직였다.
* * *
남하림은 청봉분타에서 네 명의 동료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청봉표국에서 확인할 내용들은 이미 파악이 끝났다.
다만 아직 의문이 풀리지 않는 것은 산동악가와 청봉표국의 유착관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따뜻한 날씨 아래.
하림은 눈을 감고 걸터앉아 햇볕을 받으며 느긋함을 즐겼다.
후다닥!
멀리서 또 누군가 빠르게 달려오는 소리가 울렸다.
“또 사건이 터진 모양이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무조건 보고를 하도록 시켰더니…….”
“잘하고 있어요. 작은 일이라도 미리 보고해야 큰일로 번지지 않죠.”
그사이 청봉표국의 정황을 살피러 갔던 정욱이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달려왔다.
“헉헉, 단화걸님, 사건이 터졌습니다!”
“누가 죽기라도 했나요?”
“아, 네. 맞습니다. 청봉표국 총표두가 살수들에게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흐음, 그렇군요. 고생이 많았어요.”
스윽-
남하림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가볼까?”
“청봉표국에 갈 생각이십니까?”
“못 갈 곳은 아니니까. 아는 사람이 죽었다는데 가서 조문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거긴…….”
“괜찮아요. 내가 죽인 것도 아니고. 난 단지 날 죽이라고 의뢰한 인물을 찾아가 달라 청부했을 뿐이에요. 그 인물이 진짜 청봉표국 총표두였는지 우리는 모르잖아요?”
남하림의 말에 도랑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럼…… 제가 단화걸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엔 혼자 갔다 오죠.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서.”
개방 분타를 나온 남하림은 곧장 청봉표국으로 향했다.
“…….”
뚝.
여상히 걸어가던 하림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자신을 부르는 기운.
‘그자군.’
남하림은 작은 상점들 사이로 생긴 좁은 틈으로 들어갔다.
틈 사이로 빠져나오자 꽤 널찍한 공터가 나왔다.
“흐음, 다쳤네요.”
공터에 덩그러니 서 있는 나무 아래 그자가 앉아 있었다.
“보는 바와 같이.”
“미안하네요. 나 때문에 다친 것 같아서.”
“상관없소. 그대 때문이 아니라 이건 살수의 운명이오.”
“아, 그냥 해본 말이니 너무 진지하게 안 받아들여도 됩니다.”
“그럴 줄 알았소.”
남하림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계약은 끝난 걸로 아는데.”
“그렇지. 더 이상 만날 일은 없소. 내가 청부를 받아 그대를 죽이러 가거나, 아니면 그대에게 청부를 받으러 가지 않는 이상.”
“그럼, 왜 날 불렀죠?”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겨 불렀소.”
“궁금한 거?”
“죽은 그놈의 무공이 강한 줄 알고 있었소?”
“그게 문제가 되나? 살수가 상대 무공도 일일이 따진다는 건 몰랐군요.”
남하림이 당당하게 답했다.
피식.
특살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뱉었다.
휙-
그러고는 남하림의 가슴에 단검을 겨누었다.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오.”
“당신 직업은 살수가 아니오? 내가 왜 그 많은 돈을 준다고 했는지 전혀 의심하지 않은 모양이네.”
“…….”
번영의 무공이 강할 거라는 예상을 했다는 뜻이다.
“만약 당신이 그를 죽이지 못할 거라 여겼으면 제안도 하지 않았을 거요.”
타악!
특살자가 단검을 옆으로 던졌다.
“단화걸, 당신 엄청난 사람이군. 이상한 모습으로 사람들 눈을 돌리고 모든 사람들을 속이는 걸 보면. 그렇지 않소?”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고맙고. 이제 다른 볼일은 없소?”
“없소. 아…… 그러고 보니 그자의 무공은 한동안 무림에서 사라졌던 사파의 무공 같던데.”
“십장혈이겠지.”
대충 툭 던지는 남하림의 말투에 특살자는 말문이 막혔다.
“알고 있었소? 그의 정체를?”
“얼마 전에.”
“이거…… 참…… 정체를 알았다면 귀띔이라도 해줘야 할 게 아니오?”
“확실한 부분이 아니었으니까. 사내들이 술 한잔 들어가면 뻥도 칠 수 있는 거 아니겠소? 당신 덕에 확실해진 거지.”
“허어…… 내가 큰일을 했군.”
척.
특살자가 손을 내밀었다.
“그럼, 정보값이나 주든지.”
“살수가 돈을 너무 밝히면 빨리 죽는 법인데.”
“누가 한 말이오? 처음 듣는데?”
“내가 한 말입니다. 뭐, 연락 방법이나 하나 남겨주시오. 혹시 모르니까.”
“푸하하, 당신은 전혀 정파의 인물 같지 않군.”
“정파는 개뿔.”
백리세가를 보며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정사마의 개념은 문파가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남하림은 이번 사건으로 청봉표국의 전신이 십장혈임을 확신했다.
앞으로 자신이 찾아야 할 것은 산동악가와 십장혈의 연결 고리.
“그만 가보겠소. 국주에게 고인의 명복을 빌어줘야 하니까.”
“당신도 지독한 사람이오. 그자가 죽게 만든 인물이 당신이거늘. 직접 찾아가다니 다른 곳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난 성인군자가 아닙니다. 그자가 나를 먼저 죽이려고 했고, 난 그가 한 짓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지.”
“……훗, 당신 말이 맞소.”
“그럼 상처가 빨리 낫길 바랍니다.”
남하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왔던 방향으로 돌아갔다.
스윽.
특살자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웃음이 나왔다.
“후후후, 단화걸…… 친구가 되면 한없이 든든하지만 적으로 삼는다면 참담한 상황을 맞이하겠군. 문주께 보고해 끈을 만들어둘 필요가 있겠어.”
그는 목표가 있었다.
바로 야살문을 살종의 후예로 만드는 것.
남하림을 만나자 가슴을 뛰게 만드는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그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군.’
휙!
특살자의 신형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