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40화 (41/328)

40. 살수를 보내다

스스스스-

바닥을 가볍게 스치는 소리.

흑의 사내가 짙은 어둠을 뚫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곳에…….’

멀리 보이는 낡은 목조 건물.

청봉분타 분타실을 보는 흑의 사내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샤르르르.

그는 몸에서 뿜어지는 기를 최대한 감추며 분타실로 움직였다.

‘훗, 쉽군.’

개방 분타라 하여 긴장했는데, 분타실까지 오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스윽.

흑의 사내가 분타실 손잡이를 잡으며 소리를 나지 않도록 조심히 잡아당겼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앞을 살필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저기 있겠군.’

분타실 끝에 문이 하나 더 있었다.

놈은 분명 그곳에서 자고 있을 터.

흑의 사내가 안쪽 문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찌거득.

‘망했다.’

낡은 나무 바닥이 비명을 질렀다.

흑의 사내는 순간 놀라 온몸이 경직됐다.

“음냐…….”

그때, 분타실 바닥에서 잠꼬대 소리가 들렸다.

‘저건 또 뭐야?’

휙.

거지 하나가 누운 채로 몸을 돌렸다.

‘…….’

흑의 사내는 숨을 멈추고 어둠 속에 누워 있는 거지를 지켜보았다.

거지는 반각 동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자는군.’

슬금.

사내가 발을 다시금 한 발 내디디려 하는 순간.

번쩍!

어둠 속에서 불빛이 터져 나왔다.

“이놈! 도둑고양이가 따로 없구나.”

‘깨어 있었어!’

파앗!

흑의 사내는 자리를 박차며 일어난 거지를 향해 검을 찔러갔다.

도랑이 얼른 타구봉을 잡고 검을 막았다.

까아앙-!

흑의 사내의 검은 막았지만 도랑은 힘에 밀려 벽에 거세게 부딪혔다.

“아악!”

“거지 새끼가 가만히 처잤으면 죽지는 않았겠지.”

“너 같으면 자겠냐?”

도랑은 타구봉을 휘두르며 앞으로 튀어나와 흑의 사내를 공격했다.

까아아앙-!

팟팟팟!

순식간에 십여 초의 공방이 빠르게 지나갔다.

어둠 속에서 타구봉과 검이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날카롭게 움직였다.

‘거지 놈이 좀 강한데?’

생각보다 강하게 반격하는 도랑의 무공에 흑의 사내가 인상을 썼다.

‘할 수 없군. 제대로 해야겠어.’

흑의 사내는 전 내력을 끌어 올렸다.

순간적으로 기운이 변한 흑의 사내를 보며 도랑이 타구봉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거지 새끼……! 마지막이다!”

도랑의 가슴을 향해 전력을 다한 검이 쏟아졌다.

‘허억……!’

도랑이 검을 막아낼 수 있는 방법은 죽음뿐.

도랑이 눈을 질끈 감은 그때,

덜컹!

“어떤 새끼가 잠을 깨워?”

분타주의 침실 문이 열리며 흰색의 물체가 흑의 사내를 향해 날아갔다.

휘릭!

흑의 사내의 검이 목표를 바꿔 머리로 향해 날아오는 물체를 향해 내리쳤다.

퍼어어엉!

‘이건 뭐야?!’

검으로 내리친 흰색 물체.

거위 깃털로 만든 베개가 터지면서 속에 채워져 있던 깃털들이 사방으로 날리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흑의 사내의 시야가 가려졌다.

휙! 휙!

흑의 사내는 다른 한 손으로 깃털 사이를 마구 휘저었지만, 깃털은 더욱더 분분히 휘날리며 여전히 눈앞을 가렸다.

턱!

그때, 휘몰아치는 깃털 속에서 갑자기 손이 뻗어 나오며, 흑의 사내의 멱살을 잡았다.

“이봐. 내 잠을 깨운 책임을 져야겠지?”

‘단화걸?’

눈처럼 흩날리는 깃털 속에서 훤칠한 얼굴이 드러났다.

“당신, 누가 보냈지?”

“이…… 거지 놈이…… 이 손 놓지 못할까?”

그는 소리를 치며 남하림의 허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스윽.

남하림은 한 걸음 옆으로 움직여 흑의 사내의 검을 가뿐히 피했다.

“야밤에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몰래 들어온 것을 보니 나쁜 놈이네.”

퍽!

흑의 사내의 복부를 사정없이 올려쳤다.

“커억!”

남하림의 일격에 흑의 사내가 온몸을 비틀며 바닥을 굴러갔다.

몸속의 모든 장기들이 비틀어지면서 완전히 꼬였다.

“단화걸님! 괜찮으십니까?”

“이 정도는 애들 장난이지. 우선 저 새끼부터 묶어서 던져놔요. 내일 아침에 심문할 테니.”

“넵. 알겠습니다.”

도랑은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엄청난 적을 한 방으로 정리하는 모습이라니.

감동이 태풍처럼 밀려왔다.

“으으으.”

도랑이 복부 고통에 움직이지 못하는 흑의 사내를 꽁꽁 묶고 있을 때, 분타실로 개방 거지들이 단체로 우르르 들어왔다.

“부분타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잘 왔다. 단화걸님을 죽이기 위해 찾아온 놈이다. 끌고 가서 죽지 않을 정도만 손을 보도록. 내일 심문을 하시겠다고 한다.”

“알겠습니다!”

우두두두-

네 명의 개방 거지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살수의 팔과 다리를 하나씩 잡고 밖으로 나갔다.

바닥에는 깃털이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

“아까운 베개만 버렸군.”

“어떻게 제가 이것들을 주워서…….”

“됐어요. 베개 하루 없다고 죽는 건 아니니 오늘은 그냥 자죠. 근데…… 도랑 부분타주가 자는 데 지저분하지 않겠어요?”

“아닙니다. 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피곤하실 테니 먼저 들어가서 주무십시오.”

“그럼 그렇게 하죠. 도랑 부분타주도 자도록 하세요.”

남하림이 침실 문을 닫았다.

도랑은 어지럽게 널려 있는 깃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

스윽스윽.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깃털을 주섬주섬 쓸어 모았다.

“괜찮은데.”

푹신.

깃털을 한 곳으로 모아 헝겊에 싸서 모은 뒤 머리를 받치자 훌륭한 베개가 되었다.

‘음…… 이래서 사람들이 거위 털을 찾는군.’

* * *

다음 날 아침.

남하림은 분타실을 나와 심문장이 준비된 장소로 움직였다.

“이름이 뭐라고 하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가 굳은 인물인 모양이군.”

“…….”

도랑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개방 거지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입에 재갈을 물고 있는 흑의 사내를 대령했다.

“흐음…… 그렇군요. 말을 못 하는 거였구나.”

“그게…… 혹시나 심문하기 전에 스스로 자결할까 싶어 입에 재갈을 물렸습니다.”

“잘했습니다. 의자를 저자 앞에 내려놓아 주세요.”

“옛. 알겠습니다.”

타악.

남하림이 흑의 사내의 앞에 앉았다.

“내가 질문을 하면 간단하게 고개로 대답하면 됩니다.”

흑의 사내는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려는 듯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남하림을 보았다.

“지금 죽여줄까?”

‘…….’

하지만 예상과는 다른 첫 질문에 당황한 눈빛이 나왔다.

“어차피 죽을 각오는 하고 왔을 거고, 누가 보냈는지도 알고 있으니 굳이 아침부터 심란하게 할 필요 없잖아.”

슥.

남하림은 통나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모양이에요. 거적에 싸서 한번 개 잡듯 잡아보죠.”

“옛. 알겠습니다.”

도랑은 수하에게 곧바로 명을 내렸다.

후다다닥!

그리고 반각도 지나기 전, 둘둘 말린 거적이 준비되었다.

휘익!

시커먼 냄새가 나는 거적때기가 흑의 사내의 앞에 펼쳐졌다.

“저놈을 말아 넣어라!”

턱!

흑의 사내는 뒤에서 차는 발길질에 거적 위로 쓰러졌다.

‘이, 개거지 놈들이……!’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살아왔더라도, 자결하지 않는 이상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으으으으.”

흑의 사내는 거적이 말리는 순간 자신이 죽을 것을 알았다.

개방 거지들에게 포박당한 순간 죽음은 기정사실이었지만, 막상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자 생존 본능이 저절로 반응했다.

“단화걸님,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흠, 마지막으로 들어보죠.”

스윽.

두 명의 개방 거지가 흑의 사내의 팔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대답할 마음이 생겼나?”

흑의 사내는 고민에 빠졌다.

죽음을 대비해 수많은 고문을 당하고 수련하면서 두려움은 사라졌다고 확신했다.

그런데도…… 더러운 거적에 말려 타구봉에 맞아 죽는 최후는 상상하기 싫었다.

‘좋아, 대답하는 척하면서 기회를 엿봐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

끄덕.

흑의 사내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묻는 말에 생각하지 말고 즉각 반응을 보여야 할 거다. 안 그러면 그냥 말리고 끝나는 거지. 알겠나?”

끄덕.

남하림의 말을 이해했는지 사내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야밤에 몰래 들어온 솜씨를 보니 살수 같은데?”

끄덕.

“살가의 인물인가?”

끄덕.

“잘하네. 살수는 청부의뢰인을 밝히지 않는다고 하니 굳이 물어보진 않겠어요.”

남하림은 그가 입을 열지 않아도 청봉표국에서 의뢰했으리라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살가도 중원에 꽤 많지? 내가 알기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계약금 세 배를 배상한다고 하던데…… 어떤가?”

휘이익.

이번에 흑의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머리로 한 번 써봐.”

스윽. 스윽.

흑의 사내는 머리로 숫자 오(五)를 가리켰다.

“나를 죽이는 청부를 실패했으니까, 당신의 문파는 돌려줄 배상금이 제법 많겠군.”

“…….”

끄덕.

청부 목표가 살아 있다는 것을 의뢰자가 안다면, 그의 문파에서는 협의한 대로 다섯 배 배상을 해야 했다.

남하림은 흑의 사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목에 얼마를 걸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놈이 건 돈에 열 배를 더 주겠습니다. 내 청부를 받아들인다면 그놈에게 배상도 안 줘도 되고, 일석이조 같은데.”

흑의 사내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누가 죽든지 상관없었다.

둘 중 하나만 죽이면 될 뿐.

끄덕끄덕.

흑의 사내가 격하게 반응했다.

‘후후후.’

남하림은 그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도랑, 재갈을 풀어주세요.”

“알겠습니다.”

입에서 재갈이 풀리자 흑의 사내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아아아아-”

“그럼 우리 성의 있게 대화를 해볼까요? 이름은?”

“특살자.”

“소속은?”

“야살문(夜殺門)이오.”

“처음 들어보는데 제법 큰 곳은 아닌가 봐요.”

“미안하게 됐구려. 좀 더 열심히 청부를 받아서 노력하겠소.”

“그놈이 내 목에 건 돈이 얼만가요?”

“황금 열 냥이었소.”

“방금…… 황금 열 냥이라고 했어요?”

“그렇소.”

“아, 그 새끼…… 내 몸값에 황금 열 냥밖에 안 걸었다고? 은근히 열받네.”

황금 열 냥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최소한 중소문파의 문주급이나 대문파 당주급 정도에 측정되는 금액이다.

“부분타주님, 종이하고 붓 좀 부탁드려요.”

휙!

남하림의 명이 떨어지자 도랑은 분타실로 달렸다.

잠시 후.

종이 위에 붓이 빠르게 휘날렸다.

하림은 왼손 엄지에 붓을 칠한 뒤 종이에 찍었다.

“자, 여기 받아요.”

특살자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종이를 받았다.

‘황금 일백 냥…….’

정말로 자신들에게 황금 일백 냥을 주겠다는 글이었다.

특살자의 눈이 커졌다.

“지금은 가지고 있는 돈이 없으니 우선 이걸 받아요. 내가 누군진 알고 있죠?”

“알고 있소이다.”

“수령인은 야살문 문주로 해놓았어요. 그가 남천상국의 지부 아무 곳이나 가서 보여주면 돈을 지급할 겁니다. 단 금액의 반은 완벽하게 일 처리가 끝나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알겠소이다.”

“그럼, 계약은 성립된 걸로?”

“네. 당장 문주께 가서 보고를 드리겠소.”

“아, 잠깐, 잠깐.”

“무슨 문제라도……?”

“갈 때 가더라도 구두가 아닌 서면 계약서는 쓰고 가야지 않겠어요?”

다시 이각 후.

남하림은 청봉분타를 나서는 특살자를 향해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특살자는 마지막에 허리를 크게 숙인 뒤 모습이 사라졌다.

“이제 가볼까?”

“앗, 어디를 가십니까?”

“부분타주도 같이 갈래요? 청봉표국에 가서 얼굴을 보여주면 얼마나 놀랄지 구경해 보고 싶어서.”

“오호라, 넵. 제가 앞장을 서겠습니다.”

* * *

바글바글.

어제와 달리 하림은 청봉분타 전 인원을 끌고 청봉표국 입구에 섰다.

‘헉……!’

손도는 팔자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거지 무리들을 보았다.

‘개방…… 에서 왜?’

개방 분타에서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오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손도의 동료인 경위 표사 종하상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왜…… 저자들이 떼거지로 몰려오지?”

“나도 몰라.”

허둥대던 손도는 다가오는 남하림을 맞기 위해 얼른 정문 밖으로 나갔다.

“단화걸님, 어서 오십시오.”

“어젠 잘 잤습니까?”

“네…… 푹…… 잤습니다만…….”

남하림의 뒤에 늘어선 서른 명 정도의 개방 거지들을 보는 손도의 시선이 흔들거렸다.

“저어…… 무슨 일로…… 개방의 영웅호협들께서 이렇게 많이 본 표국에 들르셨는지요?”

“하하하! 거지들이 한 번에 몰려다니는데 무슨 일이겠습니까. 오랜만에 청봉표국 밥이나 축내러 온 거죠. 거하지는 않아도 되니 한 상 차렸으면 좋겠다고 국주께 전해주시겠어요?”

“아…… 네네…….”

손도는 머뭇거리면서 종하상을 안으로 보냈다.

“단화걸님, 우선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아니. 그 전에 여기 부분타주가 한바탕 놀고 가고 싶다고 하니, 구경이나 하시죠.”

하림의 말이 끝나자, 서른여 명의 거지들이 허리에서 물건을 한 가지씩 끄집어 들고 힘차게 두드렸다.

따다당당!

둥둥두우웅!

그야말로 난장판 속에서, 목청을 가다듬은 도랑이 길게 소리를 뽑기 시작했다.

“얼씨구나……! 조오오오타아아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