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한 곳을 지적하다
주룩.
이마와 등에 땀이 비가 내리듯 흘러내렸다.
한심걸 이휘연.
걸협오성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인물이 그란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개방의 거지가 무서우면 얼마나 무섭겠는가?
감식동은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다.
어차피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와 직접 마주치게 되자, 일각도 지나지 않아 저절로 주마등이 스쳐 지나갔다.
‘하필이면 이자가 왜 우리 산채에 나타나는 거야!’
감식동은 눈물이 찔끔 났다.
“한심걸님과 도천걸님을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소인은 감식동이라 합니다.”
“감 채주, 우린 서로 바쁜 사람들이잖아? 잘 듣고 사실대로 대답하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조용히 물러가 주지.”
“소인이 어떻게 두 분을 앞에 두고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저희들에게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봐, 이렇게 대화를 나누면 얼마나 좋아. 여기 오기 전 왕천 마적단에선 교양 있게 대화만 했는데.”
“죄, 죄송합니다. 수하 놈들이 고인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됐어. 이미 지나간 일이고. 그럼 묻겠다.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 청봉표국에서 표행 도중 누군가에 표물을 빼앗겼다고 하더군.”
‘헉!’
설마 그 일에 대해 질문을 할 줄 몰랐다.
휘이이익! 휘익!
감식동은 필사적으로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아닙니다! 저흰 절대로 아닙니다!”
“무슨 질문을 할 줄 알고 아니라는 거야?”
“그게…….”
그는 말을 잠시 머뭇거렸다.
스윽-
그러자 검을 잡은 이휘연의 손이 움직였다.
“한쪽 손이 잘려야 말이 잘 나오겠군.”
냉랭한 한기가 몰아쳐 왔다.
‘뭐 이렇게 성격이 급해!’
감식동은 잘리기 전에 재빨리 말을 꺼냈다.
“사, 사실! 청봉표국을 우리가 덮치려고 계획을 세웠던 것은 맞습니다!”
“산적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니깐. 이해해.”
“계획상으로 그들이 장연곡을 빠져나와 상산까지 들어왔을 때 덮치려고 했습니다…….”
“장연곡이 아니고?”
“거긴 대인원으로 기습을 할 장소가 아닙니다.”
“그렇군. 그래서?”
“여하튼 저희들은 청봉표국의 움직임을 계속해서 염탐하던 중이었습니다.”
“제법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군.”
“그게…… 요즘 산적질도 무작정 덤벼들었다가는 한 방에 가는 수가 많아서…… 그런데 수하 놈이 그들을 염탐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놈이 어둠 속에서 십여 명 정도가 장연곡으로 움직이는 것을 봤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누구지?”
“어둡고 멀리서 지켜봤기에 정확히 정체까지는 알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흐음, 못 봤다니 어쩔 수 없네. 계속해 봐.”
“네. 궁금해진 수하 놈이 최대한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는데, 서로 싸우고 죽일 줄 예상한 것과 달리, 장연곡으로 들어갔던 십여 명이 표두와 표사들을 너무 쉽게 제압했다고 했습니다. 수하 놈이 말하길 겨우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고요.”
“정확한가?”
“아니, 그건…… 그냥 멀리서 보기에 그랬다는 것이라…… 소인이 함부로 장담할 순 없습니다…….”
“좋아.”
상산으로 오기 전 들렀던 마적단에선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중요한 단서를 하나 찾게 되자 팽유도는 기분이 좋아졌다.
스르르릉.
이휘연의 검이 빠져나왔다.
“방금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도 말했나?”
싸늘한 기운이 밀려왔다.
이휘연의 눈빛에 감식동은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 아닙니다! 정확한 것도 아니고…… 괜히 함부로 말했다가 큰일 날지도 몰라서 혼자 알고 있었습니다.”
“다행이군. 입이 무거워야 오래 사는 법이지.”
‘으으, 소름 끼치게 차갑군.’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몸이 굳어질 듯했다.
“유도야, 볼일 끝난 것 같다.”
“네. 휘연 형.”
이휘연이 먼저 산채의 정문으로 걸어 나갔다.
팽유도는 떠나기 전 감식동을 보았다.
“감 두목, 수고했어. 다음엔 처음부터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하자구. 어질러 놓은 건 미안.”
휘익!
씨익 웃어 보인 팽유도가 얼른 이휘연의 뒤를 따라갔다.
“형, 같이 가!”
휘이이이잉-
산채의 하늘 위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에구구…….”
감식동은 허리를 펴며 몸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 수하들도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 정문에서 보초 선 놈들이 누구지?”
“…….”
“아까 그 거지들 말하는 거 들었지? 나도 조용히 대화를 하고 싶은데…… 좋은 말할 때 나오도록.”
스윽.
수하들 서너 명이 손을 들며 앞으로 쭈뼛쭈뼛 걸어 나왔다.
“야아아아아, 이 새끼들!! 오늘이 네놈들 제삿날이다!!”
부우우웅-!
감식동의 육중한 몸이 하늘을 날아올랐다.
* * *
견성촌 마을 뒤편에 자리 잡은 해림장.
탕탕탕!
당무독과 성철각이 문을 두드렸다.
“뭐지?”
밤늦은 시간이 아니었다.
보통 때라면 문이 열려 있어야 했다.
“무독, 어떻게 하지?”
“이 정도로 두드렸는데 인기척이 없는 것을 보면 이상하지 않아?”
“우리 몰래 넘어가 볼까?”
“좋은 생각인데? 그렇게 하자.”
당무독과 성철각은 해림장의 담을 따라 옆으로 걸었다.
스윽-
두 사람은 적당한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좋겠어.”
성철각이 고개를 끄덕였다.
휘익!
두 사람이 동시에 담을 넘어 해림장 안으로 들어섰다.
“흐음…… 이 냄새는…….”
“피 냄새야.”
“저 안쪽이군.”
당무독이 내원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철각, 조심해.”
“으응.”
당무독은 언제라도 손을 뻗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내원으로 들어서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느낌이 좋지 않은데.’
멈칫.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을 밀던 당무독은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그러고는 뒤에 따라오던 성철각과 시선을 교환했다.
휘익-
파아아앗!
당무독이 손을 떼고 옆으로 물러서는 순간, 뒤에 있던 성철각이 앞으로 나오면서 문을 걷어찼다.
콰아아앙!
문이 그대로 뒤로 날아가며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악!”
털썩.
떨어져 나간 문과 함께 사내가 바닥에 뒹굴었다.
“죽여라!”
그와 동시에 부서진 문 사이로 복면을 한 사내들이 검을 들고 쏟아져 나왔다.
파아아아!
당무독의 양손에서 비검이 제비처럼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퍽! 퍽! 퍽!
복면인들은 순식간에 날아오는 연쌍후의 초식을 막아내지 못했다.
동시에 다섯 명의 복면인들이 뒤로 넘어졌다.
“크크큭.”
당무독은 입술을 다문 채 마치 악당처럼 괴소를 터뜨렸다.
피피피피핏-
수십 개의 작은 독침이 겨우 비검을 피한 복면인들의 앞을 또 한 번 가로막았다.
“으아악!”
“억.”
“컥…….”
짧은 단말마를 끝으로 복면인들의 숨이 멎었다.
파아아앗!
“독……! 독이다!”
그들의 머리 위로 가루가 허옇게 흩날렸다.
당무독은 두 손으로 가루들을 조종하며 복면인들을 향해 날렸다.
부글부글.
복면인들은 갑자기 하나둘 입에서 거품을 물며 바닥에 뒹굴기 시작했다.
복면인들의 수장은 중독 현상을 보이는 수하들을 보고 호흡을 멈추었다.
“커어억……! 저놈을…… 죽여…… 라!”
수장의 명에 당무독을 향해 두 명의 복면인이 좌우로 달려들었다.
휘릭-
퍽!
그러나 그들은 곧 옆에서 날아오는 소리에 시선을 돌려야 했다.
“아아악!”
철썩. 차악-!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앞에 불이 번쩍이며 몸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어딜 공격하고 있어?”
성철각의 각법에 두 명의 복면인이 순식간에 나가떨어졌다.
“휘유, 들어가자.”
“알았어.”
대충 내원 입구를 정리해 버린 성철각과 당무독이 안으로 움직였다.
눈에 들어온 것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수많은 시체들.
목숨을 잃은 이들은 해림장의 사람들이었다.
어린아이들과 여인들까지.
모두가 피를 토하며 죽어 있었다.
‘이런 죽일 놈들…….’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온 당무독이 복면인을 향해 소리쳤다.
“네놈들은 누구냐?!”
“…….”
복면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원으로 들어선 두 명의 인물.
거지 복장이 틀림없다.
하지만 보통 거지들은 아니었다.
“개방의 제자들이냐?”
“철각, 일단 이 새끼들을 모조리 때려잡아야겠어.”
“응. 알았어.”
흐느적. 흐느적.
성철각은 몸을 좌우로 흔들거리며 복면인들을 향해 다가섰다.
움직임은 조금 느리지만 긴 보폭 때문인지 단숨에 거리가 좁혀졌다.
“이놈. 멈춰라!”
복면인은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성철각의 가슴을 향해 검을 찔렀다.
하지만 수많은 검도 성철각의 움직임을 잡지 못했다.
“아니…… 난 안 멈춰.”
부우우웅-!
성철각의 환보걸선각이 펼쳐지며 수많은 환영들이 만들어졌다.
짜아아악!
철썩!
둔탁한 소리가 아닌, 경쾌할 정도로 맑은 소리가 내원을 울렸다.
피이이잉!
핑. 피잉!
세 명의 복면인이 한순간에 다리가 풀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피피피피핏!
쓰러진 복면인들에게는 수십 개의 독침이 쏟아졌다.
“악……!”
“으으으윽-”
복면인들은 몸을 뒹굴며 바닥을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독에 중독된 온몸이 점점 퍼렇게 변해갔다.
보통의 개방 거지는 독을 사용하지 않는다.
‘크으…… 저놈들은 설마…….’
“걸…… 협…… 오성?”
자신들을 상대하는 두 명의 거지는 독광걸과 천장걸이 틀림없었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수하들이 바닥에 뒹굴며 중독된 채 정신을 잃었다.
‘엄청난…… 놈들이다.’
한 놈은 독을 사방으로 뿌리고, 한 놈은 그 사이로 움직이면서 수하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후퇴해야 한다. 모두 두려워하고 있어.’
다른 것은 몰라도 당무독이 뿌려대는 독가루 때문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오늘은…… 기회가 아니군.’
복면인은 둥근 물체를 꺼내어 앞으로 던졌다.
파아앙!
흰색 연기가 앞을 가렸다.
휘이이익-!
십여 명의 복면인들이 빠르게 해림장을 빠져나갔다.
“무독, 어떻게 하지? 잡으러 갈까?”
“됐어. 이놈들 복면이나 벗겨보자.”
성철각이 가장 가까이 있는 복면을 잡아당겼다.
수욱.
거품을 물고 죽은 사내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 생각해 보니 어차피 모르는 얼굴이잖아? 몸을 뒤져봐. 우리가 아는 게 나오는지 보자.”
“알았어.”
당무독과 성철각은 복면인들의 품을 뒤져 소지품이 있는지 자세히 살폈다.
“아무것도 없어.”
“이쪽도 없어. 이놈들 제대로 작정하고 온 것 같군.”
휙. 휙.
복면인들의 시체들을 모두 조사했지만 신분을 알 수 있는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이놈들은 누구길래 해림장을 몰살시켰지?”
“안에 한번 들어가 보자.”
장원실로 들어가는 동안 비린내는 더욱더 심해졌다.
‘욱.’
당무독과 성철각은 코를 막으며 인상을 썼다.
계단 하나하나에 해림장 소속으로 보이는 인물들의 시체가 가득했다.
덜컹.
당무독이 장원실 문을 열었다.
“이런…….”
“불이 났어.”
장원실에 속한 집무실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죽은 시체들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
휘익!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이 빠르게 좌우를 살폈다.
“무독! 저기!”
중년인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복장을 보니 해림장의 장주가 분명했다.
“흐으…….”
그는 아직 미미하게 숨이 붙어 있었다.
“무독, 숨이……!”
“일단 업고 나가자.”
“응.”
성철각은 재빨리 중년인을 업고 불길을 피해 밖으로 나왔다.
털썩.
밖으로 나온 이들은 장주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당무독이 빠르게 그의 맥을 잡았다.
‘숨이 겨우 붙어 있어. 살릴 수는 없겠군. 그래도 어쩌면 잠시 정신을 차릴 수는 있을지도.’
그러고는 가방에서 작은 독환을 꺼내 장주의 입안에 넣었다.
“커억!”
중년인이 갑자기 기침을 하며 가슴을 짓누르던 핏덩어리를 토해냈다.
정신을 차린 장주가 자신의 곁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으으응…… 누구……?”
“개방 제자입니다.”
“개…… 방…….”
“네. 그렇습니다.”
“다…… 르…… 사…… 아…… 라…… 믄…….”
“안타깝지만 모두 죽었습니다. 해림장을 이렇게 만든 범인이 누구인지 압니까?
짧은 순간에도 장주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마지막으로 힘을 내며 성철각의 손을 잡았다.
“아…… 가…… 르…… 에…… 서어.”
털썩.
장주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성철각의 손을 잡은 그의 손에서도 마지막 힘이 빠져나갔다.
“철각…… 방금 장주가 뭐라고 했지?”
“악가.”
“맞지? 분명 악가라고 했지?”
“응.”
당무독과 성철각이 사전에 알아본 바, 해림장은 산동악가 아래 있는 세력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해림장을 다급하게 지워야 할 만큼 산동악가에 불리한 일이 있는 모양이야.”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
해림장은 왜 산동악가의 물건을 표행에 실었을까.
화르르-
장원실에서 불길이 점점 거세게 번져 나갔다.
“어떻게 하지?”
“일단 돌아가야지.”
“응. 그러자.”
당무독과 성철각은 아쉬운 표정으로 해림장 밖으로 나왔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성철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산동악가에서 이럴 줄은 몰랐어!”
“아직 정확한 건 아니야. 그들의 소행이라는 증거는 없잖아.”
“죽은 장주가…….”
“우린 정확한 증거를 찾아야 해. 부장이 말했잖아. 추정은 의미가 없다고.”
“어…… 맞아…….”
“나도 요즘 겁이 나. 백리세가와 산동악가. 무림에서 고명하신 가문들 밑이 이렇게 더러울 줄은 몰랐어.”
“무독, 당가는 아닐 거야.”
“아니, 그것도 장담 못 해. 아, 진짜! 만일 당가에서 정말로 더러운 욕심에 벌인 일이 있다면…… 내 손으로 필히 끝을 내줄 거야!”
“나도. 나도 무독 생각처럼 할 거야.”
청봉으로 돌아가야 하는 당무독과 성철각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 * *
그들이 떠난 반각 후.
스윽.
해림장 앞으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방에서 벌써 눈치를?’
복면인은 갑자기 나타난 당무독과 성철각을 보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들이 눈치챘다면 제법 귀찮을 수 있겠어. 상부에 이 일을 빨리 보고해야겠군.’
뚝.
복면인은 잠시 멈춰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보았다.
‘천장걸과 독광걸…… 걸협오성에 대한 소문이 거품만은 아니었군. 개방에서 엄청난 괴물들을 만들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