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단서를 잡다
남하림은 청봉표국을 나온 후 마을로 들어섰다.
웅성웅성.
마을 사람들은 처음 보는 남하림의 특이한 복장에, 지나치며 한 번씩 꼭 눈길을 돌렸다.
몰래몰래 쳐다보는 주위의 시선은 이미 익숙했다.
남하림은 신경 쓰지 않고 시장 사이를 구경하듯 걸었다.
‘흐음, 냄새 좋네.’
상점 앞으로 길게 늘어선 음식들이 발길을 잡으며 유혹하고 있었다.
다다다-!
그때,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헉, 들켰다.’
남하림은 그들이 누군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단화걸님……! 단화걸니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
‘……그냥 가버릴까?’
못 들은 척하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인들이 웅성거리며 하림을 쳐다보고 있다.
도망가기에는 이미 기회를 놓쳤다.
‘으으으.’
남하림은 결국 뒤돌아섰다.
환하게 웃는 한 무리의 사람들.
이들의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맞구나! 멀리서 보는데 단화걸님인 줄 단번에 알아봤습니다!”
“단화걸님, 반갑습니다!”
땟자국인지 모를 시커먼 얼굴.
몇 년 동안 감지 않았는지 떡이 되어버린 머리카락.
누렇다 못해 검게 물든 옷.
깔맞춤인 듯 검게 물든 손톱.
이건 전형적인 다리 밑 거지였다.
‘평소보다 심하잖아……? 그래도 개방인데…….’
하얀색이었던 이결 매듭은 표주박과 함께 시커먼 걸레처럼 허리에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이건 완전 최고 중의 최고, 상거지 중의 상거지다.’
나이는 아무리 많아야 서른을 넘지 않은 것 같았다.
“누구죠?”
착!
상거지가 몸을 똑바로 하며 고개를 숙였다.
“예!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습니다. 청봉분타의 부분타주 도랑이라 합니다.”
“그렇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단화걸님께서 청봉으로 오시는 줄 알고 미리 마중을 나갔는데 길이 엇갈린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까지야.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되고.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단화걸님을 모시겠습니다.”
“엥? 어딜?”
“당연히 본 방의 영웅이신 단화걸님께서 오셨으니, 분타에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난…… 거처가 따로 있어요.”
“아닙니다. 단화걸님께서 멀리 청봉까지 직접 발걸음 하셨는데 어찌 따로 지내시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분타에 많은 동료들이 단화걸님께서 오시는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남하림은 반짝이는 도랑의 눈동자를 보면서 거절을 할 수 없었다.
‘이건 피곤한 유형인데…….’
온몸을 바쳐 충성하는 인물.
물러서지 않는 전형적인 외골수.
하림은 도랑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분타에 가지 않는다면 저택까지 따라올 판.
“……그렇게 하죠. 앞장서세요.”
“넵.”
도랑은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러고는 즐거운 듯 돌아서며 함께 온 개방 거지 동고륜에게 지시했다.
“얼른 가서 단화걸님께서 도착하기 전까지 분타를 한 번 더 깨끗하게 청소해라.”
“알겠습니다, 부분타주님.”
* * *
청봉분타는 마을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을에서 가장 좋은 곳에 분타가 세워져 있는 셈이다.
‘이거 예상 밖인걸? 땅값만 해도 어마어마하겠어. 근데 여길 정리한다고?’
남하림은 의심스러운 부분이 일어났다.
외조당 부당주이자 특외부의 특호 우창에게 듣기로, 중복이 되는 지역이라 조만간 정리가 들어갈 분타라 했었다.
‘이 문제는 나중에 한 번 알아봐야겠어.’
가느다란 나무로 세워진 울타리.
대지 한가운데 목조로 지어진 건물이 덜렁 하나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분타에 들어서는 정문 또한 대나무로 만들어진 문이었다.
“좋아 보이네요.”
남하림은 문 옆에 협의문이라고 적힌 나무판자를 보았다.
“부끄럽습니다. 이건 제가 쓴 글입니다.”
‘흐음.’
“저어…… 단화걸님, 무엇을 찾으십니까?”
“잠깐만.”
남하림은 바닥에서 주운 나뭇가지로 판자 위에 힘을 주어 줄을 그었다.
글자가 잘못 쓰여 있었다.
“이제 됐어요.”
“역시…… 단화걸님이십니다! 지금까지 단 한 놈도 글자가 틀린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유식한 분은 처음입니다. 존경합니다.”
도랑은 허리까지 숙였다.
“별거 아닙니다. 살다 보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죠 뭐.”
“아닙니다. 정말 유식하십니다.”
과할 정도로 칭찬하는 모습에 남하림은 부담감이 살짝 밀려왔다.
‘천성이 이런가 보군.’
도랑을 따라 정문으로 들어서자 서른 명 정도의 개방 거지들이 줄을 선 채 남하림을 맞이했다.
그러고는 목청이 터질 듯 인사했다.
“단화걸님을 뵙습니다!”
현재 개방도들에게 남하림은 존경의 대상이었다.
최근 중원 무림에 이름을 알린 인물들 중 걸협오성이 최고라는 자부심까지 가지고 있었다.
스윽-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남하림은 부처님 같은 미소를 짓고 그들을 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여깁니다.”
끼이익-
도랑은 얼른 문을 열고 남하림을 분타실로 안내했다.
더러울 거라 여겼던 분타실 내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네요?”
“제가 소문을 꽤 들었습니다. 단화걸님께서는 더러운 것을 싫어하신다고.”
“후후, 개방 제자가 더러운 걸 싫어하면 어떻게 살겠어요. 정확히 말하면, 좋아하지 않는 거죠.”
“……?”
‘싫어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지 않는 거?’
도랑은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아…… 네. 잘 알겠습니다. 여하튼 단화걸님께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셔서 깨끗하게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나쁘지는 않네요.”
“아…… 하하, 나쁘지 않다고 하시니 기분이 좋습니다.”
다만 분타실에 의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의자는 없군요. 모두 바닥에 앉도록 하죠.”
털썩.
‘후우.’
남하림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앞으로 서른 명의 개방 거지들이 바짝 다가앉았다.
청봉표국으로 출발하기 전, 남하림은 청봉분타에 대해 알아보았다.
청봉분타는 해체하기로 결정이 내려진 뒤, 일 년간의 유예 기간을 받은 상태였다.
이제 곧 유예 기간도 끝나, 타당성을 확인하는 작업만 남아 있었다.
“일 년 동안 부분타주가 계속 여기를 지킨 모양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어려움은 따로 없었나요?”
“거지가 따로 어려움이야 있겠습니까만은…….”
도랑은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말은 끝까지 해야지 말이 되는 법이죠.”
“네에. 죄송합니다. 이곳이 사라진다고 하니 슬퍼서 그렇습니다……. 한 번 더 상부에서 재고를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남하림은 도랑의 뒤로 앉아 있는 청봉분타 소속 서른 명을 둘러보았다.
비록 해체된다고 해서 개방에서 쫓겨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강할 것이었다.
“부분타주는 무슨 이유로 이곳이 해체되는지 아세요?”
“위로 하북의 둔현분타와 산동의 주관도 분타가 곁에 있어 굳이 청봉분타의 역할이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군. 내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지만 둔현은 하북분타이고 주관도는 산동분타인데…… 청봉분타도 나름대로 필요할 것 같지 않나요?”
“단화걸님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혹시 누가 결정을 내렸는지 알고 있나요?”
“내정당의 결정이라 들었습니다. 내정당 장로이신 충걸개님께서 적극적으로 추진을 하셨다고…….”
‘충걸개 장로께서?’
“알겠어요.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았으니, 청봉분타 문제는 본 방에 올라가서 해결해야겠군요.”
넙죽.
도랑은 그대로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흐윽, 단화걸님께서 말씀이라도 해주시니 눈물이 쏟아질 것 같습니다……!”
“개방의 사내는 우는 게 아닙니다.”
“네, 네…… 잘 알겠습니다.”
“도랑, 인사도 했으니, 이제 물러가서 쉬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도랑은 뒤에 앉은 분타원들을 물렸다.
그런데 도랑은 밖에 나가지 않고 남하림의 앞에 앉았다.
“안 피곤해요?”
“전 괜찮습니다. 여기에서 단화걸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으으, 완전 충성파군.’
과한 충성은 피곤을 불러오는 법.
“나가서 쉬어도 정말 괜찮아요.”
“아닙니다. 전 절대로 피곤하지 않습니다. 아니, 단화걸님을 모시는 중에 피곤해서는 안 됩니다. 주무실 때까지 옆에서…….”
벌떡!
도랑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수가! 까먹은 게 있었습니다! 덮고 주무실 이불을 밖에 그대로 널어놓았습니다.”
“아니, 난 여기에서 안…… 잘 건데……!”
하지만 남하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랑은 사라졌다.
“그냥 몰래 가야겠다. 하루도 아니고 며칠 걸릴지도 모르는데.”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하림은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문 앞에 섰다.
덜컹.
그때, 문이 열리면서 시커먼 포대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헉.’
남하림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리고 들어오는 사내를 막아섰다.
“그만! 정지, 정지!”
“네?”
“손에 들고 있는 거 그대로 들고 나가세요.”
“저어…… 깨끗하게 말렸는데…… 킁킁…… 냄새도 안 납니다.”
“고맙긴 한데, 일단 그거 밖에 두고 왔으면 좋겠어요.”
“아, 네…… 알겠습니다.”
휙!
도랑은 바로 포대자루 같은 이불을 그대로 던져놓고 들어왔다.
“그럼 여기에서 주무시지 않고 가시는 것입니까?”
“어? 아니, 어, 그게 아니고, 음, 내가 가르쳐 준 곳에 가서 내 이부자리 들고 왔으면 좋겠어요.”
‘망했다.’
남하림은 결국 저택의 위치를 도랑에게 가르쳐 주었다.
“아, 여기 어딘지 압니다. 제가 얼른 수하를 보내 단화걸님께서 주무실 이부자리를 가지고 오도록 시키겠습니다.”
“그, 잠깐, 이부자리는 꼭 저택 사람이 직접 들고 오도록 하세요.”
“넵. 최대한 빨리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도랑은 또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즐기기까지 하는 듯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통나무 탁자도 들고 왔다.
‘……흑단목인 줄 알았네.’
새까만 통나무 탁자에 놓인 나무 찻잔.
‘…….’
제대로 씻었는진 알 수 없었지만 남하림은 일단 도랑이 따르는 차를 받았다.
“누추한 곳에 모셔서 죄송합니다. 열심히 정리한다고 했는데…….”
“……괜찮아요. 나도 개방도이고…… 최선을 다했잖아요. 물론…… 이왕이면 깨끗한 곳을 원하기는 하지만.”
흐으읍.
남하림은 최대한 입술을 찻잔에 대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살짝 음미했다.
“오……? 좋은데?”
차 맛이 의외로 좋았다.
“혹시나 귀한 분이 오실 때 내놓기 위해 아껴놓았던 용봉녹차입니다.”
“차도에 식견이 있는 모양이네요. 용봉녹차를 지니고 있다니…….”
“제 자랑일지 모르겠지만 제가 차를 다루는 청록원 출신입니다.”
“오, 정말 의외네요. 가장 청결을 유지해야 하는 청록원 출신이 개방 제자로 들어오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지금 생각해도 웃깁니다. 뭘 하고 살까 고민하던 중 개방에서 신입생을 모집한다는 말에 덜컥 이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거지 팔자인가 봅니다.”
“도랑도 내 팔자만큼 기구하군요.”
남하림은 동병상련의 심정이 들면서 조금 더 친밀해진 느낌이 들었다.
“단화걸님께서 청봉으로 올라오신 이유가 청봉표국에서 표행 중 습격당한 사건 때문이십니까?”
“맞아요. 그 사건을 조사하러 왔죠. 혹시 그날 있었던 사건에 대해 아는 게 있어요?”
“죄송합니다. 그들이 기습을 받았다고 한 지역은 분타 관할지가 아니어서 저희들도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만을 들었습니다.”
“그렇군. 그들이 당한 그곳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고인 모양이죠?”
“아닙니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마적이나 산적들이 움직일 수 있는 지역이 아닙니다.”
“왜 그렇지?”
“가보시면 알겠지만 마적들이나 산적들이 한꺼번에 움직일 수 없는 지형입니다. 청봉표국의 표두와 표사 정도라면 목숨을 걸고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기습을 했다고 하던데요?”
“기습도 한꺼번에 달려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단숨에 표국을 상대할 만한 고강의 무공을 지녔거나…… 하지만 산적 놈이나 마적 놈들이 그 정도 무공을 지녔을 리가 없습니다.”
“흠, 도랑의 말이 맞네요. 마적이나 산적이라면 한꺼번에 몰려들어야 성공할 수 있었겠지요.”
남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청봉표국을 기습하여 표물을 훔쳐간 곳은 표두와 표사들을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무공을 지닌 세력이어야 했다.
‘근처에 이들을 제압할 수 있는 세력은…….’
딱 한 곳.
산동성의 맹주 산동악가였다.
* * *
번쩍!
휘이익-
팽유도와 이휘연이 산적들 사이에서 반도와 검을 휘둘렀다.
“으악!”
“커억……”
비명과 숨이 끊어지는 소리가 산채를 울렸다.
‘저들이…… 정말로 개방의 거지들이라고?’
산적 두목 감식동은 믿기지 않았다.
이각 전.
산채 울타리 아래로 찾아온 두 명의 거지.
그들은 산채 주인. 즉 자신을 만나고 싶다고 전해왔다.
‘그때 만나줬어야 했는데…….’
거지처럼 보인다는 수하의 보고에 산채까지 동냥하러 올라온 미친 거지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죽지 않을 정도로 패서 돌려보내라고 말을 한 게 실수였다.
실수의 대가는 참혹했다.
정문을 부수며 들어선 그들은 보통 거지가 아니었다.
무공을 펼칠 수 있는 거지.
개방의 거지가 확실했다.
‘헉……!’
검을 든 거지와 눈이 마주쳤다.
온몸을 짓누르는 살기에 숨이 저절로 멈출 정도였다.
‘더 이상 싸우면 전멸이다.’
감식동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어라!”
산적들은 잠시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두목이…….’
어느새 바닥에 부복을 한 감식동을 보면서, 수하들 또한 손에 든 무기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팽유도와 이휘연의 도검이 멈췄다.
팽유도가 산적 두목 감식동의 앞으로 걸어가 쪼그리고 앉았다.
“진작 평화롭게 대화를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죄송합니다! 소인의 눈이 멀어 고인을 보지 못했습니다!”
“미리 말을 하자면, 우린 싸우고자 여기에 온 것은 아니야.”
“아…… 네. 잘 알겠습니다. 헉!”
감식동은 팽유도를 올려다보려다 뒤에 서 있는 이휘연을 보고 숨이 막혔다.
살기에 의한 붉은 눈동자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흠, 일단 우리가 누군지부터 알려줘야겠지. 우린 개방의 제자로, 난 팽유도라 하고, 저분은 이휘연 형님이시다.”
‘걸협오성……!’
산에 산다고 해서 중원의 소식을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개방의 영웅이라 소문난 걸협오성에 대해선 이미 귀가 아플 정도로 들었다.
팽유도와 이휘연.
도천걸과 한심걸이 눈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