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청봉표국에 들어서다
후다다닥.
국주 번손에게 전언을 전했던 표사 손도가 다급히 달려왔다.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없는 무림의 영웅인 단화걸을 정문에서 마냥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단화걸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국주님께 말씀드렸더니 걸협오성 단화걸께서 오셨단 말에 기꺼이 시간을 낸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국주원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부탁합니다.”
남하림은 표국의 내원을 지나 안쪽에 위치한 국주원으로 들어섰다.
“단화걸님을 모셔왔습니다.”
“모시게.”
드륵.
손도가 공손히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청봉표국의 국주 번손이 자리에서 일어선 채 남하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아들이며 청봉표국의 총표두인 번정도 함께 자리했다.
‘소문대로 특이하군.’
남하림의 첫인상은 거의 대부분 비슷했다.
스윽.
국주 번손이 반갑게 남하림을 맞이했다.
“개방의 영웅께서 먼 곳에 찾아와주셔서 영광이외다.”
“국주를 뵙습니다.”
남하림도 답례를 하면서 번손을 살폈다.
백색의 눈썹 끝이 옆으로 길게 뻗은 채 내려와 있었다.
오래된 그의 과거를 듣고, 청봉표국으로 오면서 예상했던 모습은 아니었다.
‘십장혈에 속했던 인물이랬지.’
번손이 십장혈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는 아직 모른다.
‘흐응, 무림인 같진 않군.’
십장혈의 무인이었다고 했지만, 육십에 가까운 번손은 무공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남하림이 번손을 살피는 동안, 번손 또한 남하림에 대해 살피는 중이었다.
내력과는 다른 기운과 신형에서 자연스럽게 흐르는 기운.
남하림은 아직까지 자연스럽게 기운을 다스릴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약관의 나이에 이 정도의 위압감을 뿜어내다니.’
번손은 단화걸의 거지 모습에 한 번 놀라고, 그 기운에 또 한 번 놀랐다.
중원에 떠도는 단화걸의 소문이 오히려 과소평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단화걸께서는 앉으시지요.”
“감사합니다.”
번손은 앞에 앉은 남하림을 보면서 멀리 청봉까지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개방에 계신 분이 어인 일로 본 표국까지 찾아왔는지 물어봐도 되겠소이까?”
“아마 국주께서도 대충 눈치는 채셨겠지만, 얼마 전에 일어났던 표행 사건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사건이라면…… 임장으로 가던 표행을 말하는 것이군요.”
“맞습니다. 그 사건에 대해 알고 싶어서 왔다고 할 수 있죠.”
“그 일은 본 표국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안타깝지만 이미 정리가 된 사건이외다. 저희 표국에 의뢰했던 해림장에도 이미 합당한 배상을 했소.”
“벌써 말입니까? 어떻게 배상했다는 것인지요?”
“표행에서 빼앗겼던 물량을 금전적으로 환산한 후 정확히 계산에 맞게 보냈습니다.”
“대단하시군요. 상당히 많은 자금이 들었을 텐데.”
“단화걸께서도 잘 아시지 않소이까? 표국의 생명은 돈이 아니라 신용이지요. 돈은 어떻게라도 마련해 줄 수 있지만 신용은 빌릴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말이외다.”
“맞는 말입니다. 신용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지요.”
하지만 잃어버린 물건을 갚는 것은 일차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청봉표국에서 잘못한 것이 아니라면, 표행을 습격한 범인을 잡아 피해액을 보상받아야 하는 것이 순서일 터.
“의뢰인에게 먼저 배상을 해주셨다니 좋은 일이군요. 표국협에 배상보장을 들었다고 해도 빠른 일 처리가 아닙니까. 당연한 일인데도 보통은 의뢰인들에게 완벽히 배상하지 않는 경우가 많던데 말입니다.”
“아니외다. 본 표국은 양심이 없지 않으니까.”
“그럼 배상도 끝났겠다, 사건 경위를 자체 조사 중이겠군요. 어디까지 진행하셨습니까?
“사실 이번 사건은 아직 따로 조사를 시작하지 않았소이다. 다른 표행들이 급해서 먼저 마치고 난 뒤 조용해지면 천천히 살펴볼 계획이외다.”
“음? 국주님, 방금 제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요? 배상보장금을 받으려면 표국협에 가장 먼저 사건 경위를 알려야 하지 않습니까? 정말로 무슨 일이 급한지 아실 텐데 이해가 어렵군요. 표국을 하던 도중 물건들을 잃어버렸는데…… 이보다 중요하고 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건…….”
번손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타악!
그때, 번정이 한 손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는 아버지를 몰아치는 남하림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거운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번정이 남하림을 노려보았다.
“단화걸. 우리는 그대를 손님으로 모시고자 했는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군. 어떤 일이 더 중요한지 결정하는 것은 본 표국에서 알아서 할 일이오. 쓸데없는 간섭 마시지. 개방이나 그대가 관여할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외다.”
번정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개방이라고 함부로 타인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순 없으니까.
“흐음, 맞습니다. 청봉표국에서 물건을 잃어버리든 태워 버리든 상관할 문제가 아니죠. 근데 이번 사건은 무림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어서 말입니다.”
“무림에 문제가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이오? 표행 물건 속에 이상한 거라도 들어 있었다는 것인가?”
번정은 순간 말을 내뱉은 뒤 흠칫했다.
‘이런.’
“과연 예리하십니다. 개방에서 나선 이유가 그거죠. 총표두가 방금 했던 말처럼, 표행 물건 중 정말로 무림에 파장을 줄 수 있는 물건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 말입니다.”
남하림은 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서 태연한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
“오면서 하남북부표국협에 알아보니, 이번 사건에 대해 벌써 접수를 한 상태더군요. 방금 조사는 천천히 하겠다고 하신 것 같은데.”
“단화걸, 그건……!”
“참 웃기죠. 살펴보니 이번 사건 말고도 다른 사건들도 제법 접수가 되어 있더군요. 배상도 알뜰히 다 받아갔고. 정작 실사는 하나도 안 되어 있는데.”
“그, 그건…… 실사를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번정이 변명을 찾으며 땀을 뻘뻘 흘렸지만, 남하림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건 표국협에 청봉표국 손을 들어준 인물이 있다는 뜻이겠죠.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아니까 변명은 됐습니다. 협회비를 많이 내는 표국은 관례적으로 그렇게 넘어가는 편이기도 하니. 아! 그런데, 하남북부표국협에 가입된 표국 중 하남표국이 있을 겁니다. 알고 계시려나?”
모를 수가 없었다.
하남북부표국협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을 발휘하는 곳이 하남표국이니까.
“그럼 하남표국의 국주가 본인의 외숙부인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표국협 최고 결정권자이신.”
남하림은 생긋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에겐 훌륭한 협박으로 들렸다.
그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을 줄줄이 모아 실사를 재개한다면?
청봉표국은 더 이상 표국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이런…… 총표두의 얼굴이 똥 씹은 표정이네요. 내가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허, 허허, 아니외다. 이번 일에 대해선 이제 본인이 대답을 해드리겠소.”
국주 번손이 아들을 대신해서 얼른 나섰다.
“이번 표행에 대해 물어볼 게 아주 많군요. 국주께서는 사건에 대해 있는 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머지는 본인이 직접 살펴보지요.”
번손은 아들 번정을 흘깃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무엇이 궁금한 것이오?”
“그럼, 질문을 해볼까요?”
남하림의 시선을 마주 보는 번손과 번정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표행 의뢰인이 산동 동평에 있는 해림장이라 들었습니다. 맞는지요?”
“그렇습니다.”
“그들과 평소에도 거래가 있는 편이었나요?”
“음…… 그건…… 모든 표행에 대해선 총관이 관리를 하는 편이라 잘 기억나진 않지만, 한두 번은 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말마다 거짓말이군.’
남하림은 계속 영양가 없는 대화를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런가요? 따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해림장과의 거래는 이번이 처음일 텐데요.”
“…….”
“표국협에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청봉표국은 저번 달까지 해림장과 거래를 한 적이 없더군요. 아니면 표국협 몰래 표행한 사실을 속였다거나? 하긴, 표행을 많이 한다고 보고하면 내야 할 돈이 많긴 하죠. 근데 이게 진짜라면, 꽤나 심각한 일인 줄은 알고 있죠?”
‘제기랄…… 모든 걸 알고 찾아왔어.’
번손은 시종일관 방긋 웃고 있는 남하림의 표정을 보며 겁이 났다.
까딱 말을 잘못했다가는 더 이상 표국 일엔 발도 못 들일 판이다.
“다, 단화걸, 본인이 다른 곳과 헷갈린 모양이외다.”
“아, 그렇다면야. 워낙 많은 곳과 거래를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럼 다시 물어보죠. 표행에서 잃었던 모든 물량들을 해림장에서 의뢰한 게 맞습니까?”
“……맞소이다.”
번손은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눈앞의 거지 청년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눈빛이었으니까.
“해림장은 무림 문파인데 상당히 많은 물량을 표국에 의뢰한 모양이군요. 의뢰 품목을 적어놓은 물표가 있으면 보고 싶습니다만.”
“그, 그게…… 찾아봐야 합니다.”
번손은 또 한 번 말을 더듬거렸다.
“휴우.”
남하림은 팔짱을 끼며 몸을 뒤로 젖혀 등받이에 기댔다.
“청봉표국이 상급이라고 해서 일을 똑바로 처리할 줄 알았는데 영 형편없군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여기 총관은 능력이 부족한 것 같은데요? 물표를 똑바로 정리하지 않는 총관이 대체 어디 있다는 건지. 지금 당장 찾아서 가지고 오세요.”
결국 끓어오르는 분을 참고 있던 번정이 허리에 찬 검을 잡으며 소리쳤다.
“지금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오?! 그대는 지금 내정 간섭을 하는 것이오!”
“이거 참, 당연한 일에 너무 화를 내니 이상한 생각이 드는군요.”
“이상한 생각이라니, 도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거요?”
“표행 물건이 뭔지 알려달라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단지 물량을 파악할 수 있게 물표를 보여달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 줄은 몰랐군요. 나도 만석표국을 가지고 있어서 아는데 말입니다.”
‘만석표국? 지금 만석표국이 자기 것이라고 한 건가?’
청봉표국이 주로 하남 북부에서 표행을 하는 상급 표국이라면 만석표국의 관할지는 하남성 전체로, 하남표국과 더불어 하남이대 특급 표국이었다.
번손과 번정은 말문이 턱 막혔다.
스윽-
남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물표를 가지고 오세요. 표행에 나섰던 표사들과 쟁자수들을 적어놓은 표행인적부도 함께.”
“…….”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동안 표국 구경이나 하고 있죠.”
남하림은 두 사람을 앞에 두고 유유히 국주원을 나갔다.
‘저 새끼가…….’
꾸욱.
번정이 주먹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버지, 가만히 보고만 계실 겁니까?”
“보여줄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남표국이나 만석표국에서 마음먹고 나선다면 우린 당장에라도 표국업을 접어야 할지 모른다. 괜찮다. 우리 것만 봐서는 모를 게야.”
“하지만……! 하…… 알겠습니다. 보여주도록 하겠습니다.”
“휴우…… 그렇게 하자.”
* * *
남하림은 마치 유람 온 듯한 자세로 천천히 표국을 구경 다녔다.
“으차……!”
“허허, 이보게들. 물건을 똑바로 실어야지!”
쟁자수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마차에 물건을 싣고 있었다.
스윽-
마차에 물건을 올려놓던 내당 관리자 편진은 옆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에 화들짝 놀랐다.
“헉! 뭐요?!”
“아, 미안합니다. 많이 놀란 모양이네요.”
“대, 댁은 누구요?”
남하림은 빼꼼 고개를 내밀어 물표를 보았다.
“흠…… 잠시만 봅시다.”
휙!
남하림이 편진의 손에서 두 장의 물표를 빼앗았다.
‘이 자식은 뭐지?’
편진은 황당한 얼굴로 남하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이게, 무슨! 이리 주시오!”
“어허, 잠깐만, 잠깐만.”
편진은 얼른 물표를 다시 빼앗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남하림에 의해 오히려 뒤로 밀려났다.
남하림은 물표를 한번 훑어본 뒤 마차에 실은 물건을 확인했다.
“역시.”
두 장의 물표와 마차에 실은 물건은 하림의 예상대로였다.
물표를 빼앗기고 안절부절못하던 편진은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멀리 표사의 모습이 보였다.
“손 표사! 얼른 와서 이 거지를 내쫓아주게! 이 사람이 일을 방해한다고!”
‘헉! 저분은……!’
손도가 편진과 함께 있는 남하림을 발견했다.
후다다닥!
표사가 빠르게 그쪽으로 달려갔다.
편진은 다급한 표정으로 얼른 남하림을 가리켰다.
“이 사람일세, 이 사람!”
넙죽.
손도가 구십 도로 허리를 숙였다.
“단화걸님, 국주님과의 대화는 잘 끝나셨습니까?”
“대충요.”
편진은 거지를 향해 넙죽 인사하는 손도를 보고 당황했다.
“손 표사, 아니, 이분은 누구신지?”
“개방의 영웅, 걸협오성 단화걸님이십니다.”
“아……? 아……! 단화걸…… 그러고 보니…….”
물표를 빼앗겨 당황하지 않았다면 알아봤을 수도 있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하림 자체가 워낙 눈에 띄었으니까.
“근데…… 이분께서 무슨 잘못을 하신 것인지요?”
“아, 아닐세. 그냥…….”
편진은 말을 하면서 남하림의 눈치를 보았다.
“여기 있어요.”
편진은 얼떨결에 물표를 받아 들었다.
“……네, 고맙습니다.”
“청봉표국은 항상 이런 식으로 물품을 작성하는 모양이지요?”
“그게…… 총관께서…….”
“하긴 아랫사람은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겠지. 안 그런가요?”
“죄, 죄송합니다.”
‘음……? 무슨 일이지?’
허리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편진을 보던 손도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남하림은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그 뒤를 손도가 따랐다.
“저어…… 단화걸님, 혹 본 국에서 잘못한 게 있습니까?”
“사기를 아주 많이 치고 있더군요.”
“……?!”
손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무공을 익힌 뒤 표사가 되어 처음으로 표국 생활을 시작한 곳이 청봉표국.
그로서는 상당한 애착을 지닌 곳이었다.
근데 단화걸에게 좋지 않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무거워질 수밖에.
“그대가 신경 쓸 일은 아닙니다. 표사로서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면 문제없어요.”
“……알겠습니다.”
다다다다-
그때, 국주원에서 한 사람이 남하림을 찾으며 달려왔다.
“국주님께서 물표를 찾으셨다고 합니다!”
“잘됐군요.”
* * *
남하림은 다시 국주원에 들어섰다.
“마침 총관이 정리를 하고 있었다고 하더이다.”
스윽-
번손은 준비한 물표와 표행인적부를 남하림에게 보여주었다.
“진작 주지.”
‘이 자식이…….’
번손의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오든 말든, 남하림은 물표와 표행인적부를 받고 한 장씩 살폈다.
“이것을 봐서는 특별히 문제가 될 건 없군요. 해림장에서 가지고 있는 물표와 비교하기 전까지는.”
번손과 번정의 눈빛이 흔들거렸다.
“설마 우리를 믿지 못한다는 말이오?”
“화내는 걸 보니 뭔가 찔리는 게 있습니까?”
“화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소! 우릴 사기꾼 취급하는데 누군들 화가 나지 않겠소이까!”
“알겠습니다. 그럼 해림장과 청봉표국의 물표를 정확히 확인해서 내가 잘못 알았다면 깔끔히 사죄를 하죠.”
“…….”
대답이 없는 두 사람.
남하림은 물표와 표행인적부를 번정에게 돌려주었다.
“자아, 여기 가져가세요.”
“……왜 다시 주는 것이오? 확인한다고 하지 않았소? 설마 해림장의 물표와 일치할까 봐 겁이 나는 것이오?”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전부 외웠으니 필요 없어서 주는 겁니다.”
‘뭐라고……?’
그 짧은 시간에 두 장의 서류를 몽땅 외웠단 말인가?
번손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사이, 남하림이 물었다.
“표행을 습격한 놈들이 누군지 짐작 가는 곳은 있습니까?”
“크흠…… 당시 표행을 갔던 표사들과 쟁자수들의 말에 따르면, 복면을 한 인물들이라 했소이다. 산적이나 마적일 수도 있고…… 여하튼 순식간에 모두 제압한 뒤 물건들을 훔쳐 달아났다고 하더군요.”
“허, 대단한 놈들이네. 서너 명밖에 죽이지 않고 제압하다니. 아, 그날 표두 세 명과 서른 명의 표사가 표행을 했다고 적혀 있더군요. 이 정도라면 웬만한 마적들이나 산적들과 겨루어도 밀리지 않을 전력일 텐데.”
“그건…… 그날 표행 책임자였던 봉 표두의 빌리면 어둠 속에서 갑자기 기습을 당해 자신뿐만 아니라 표사와 쟁자수 모두가 일어나기도 전에 사로잡혔다고 하더이다.”
“그 말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당했다는 내용 같은데. 맞나요?”
“맞소.”
“하하, 돌겠네. 지금 당신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남하림은 번손과 번정을 빤히 바라봤다.
더 이상 대화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들은 여전히 사실을 제대로 말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지만 이들은 그중에서도 너무 뻔뻔했다.
“한마디만 하고 가죠. 당신들이 무엇을 숨기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래가진 못할 겁니다.”
휙!
남하림의 뒤로 차가운 바람이 일어났다.
번정은 밖으로 나간 남하림을 핏발이 선 눈으로 노려보았다.
‘단화걸…… 얼마나 대단한지 두고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