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새로운 문제
붉은 노을이 주작남지 위로 넘어갈 즈음.
남하림의 얼굴은 노을에 물들었는지, 아니면 기분 좋게 마신 술 때문인지 불그스름했다.
그가 휘적휘적 주작남지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협의문의 위걸 소의가 다가왔다.
“저어, 남 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한테?”
“협의문에서 남 부장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백리세가의 부가주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왔다.
“왜?”
“그건…… 저도 모릅니다. 한 번 만나고 싶다고만 했습니다.”
“……귀찮네.”
“그게……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남하림은 만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부장, 그래도 백리세가 부가주인데…… 한번 만나보는 게 좋지 않을까?”
“……진짜 귀찮네.”
남하림은 당무독의 말에 한숨을 쉬었다.
“갔다 올 테니깐 먼저 가서 쉬고 있어.”
“아, 하림 형!”
“왜?”
“어……? 아냐, 그냥 불러봤어.”
팽유도는 그냥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백리희를 어떻게 대할지 뻔히 보였기에 망설인 것이다.
남하림은 혼자 협의문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렇게 노을이 어두워질 쯤, 협의문에 도착했다.
인귀항과 백리희.
두 사람이 협의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남하림을 알아차렸다.
남하림이 백리희를 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원래대로 돌아왔군요.”
“제가 변용한 걸 알고 있었나요?”
“당연히.”
백리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왜 저를 무시하시나요?”
“그것 때문에 나를 보자고 했습니까?”
단호한 목소리가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백리희는 남하림의 눈빛 속에서 거짓이 아닌 진심을 보았다.
‘아…… 아. 알면서도!’
순간 부끄러움과 비참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이 사내에게 난 아무것도 아니었어. 생각지도 않는 이를 나 혼자 생각하고 나 혼자 분했던 거였어.’
그걸 깨달은 순간에, 백리희는 그대로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중원십미라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그녀에게 관심이 없는 이유가 궁금했는지도 몰랐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자신의 말이라면 어떤 것도 들어줄 것 같던 때.
그러던 중 우연히 영중을 만났다.
중원십미인 자신을 무심한 듯 대하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
무공은 모르지만, 세가인을 만난 자리에서도 당당하게 행동하는 모습이 좋았다.
하지만 전부 자신을 속이기 위한 거짓.
백리희는 지금까지도 스스로 자신이 경솔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누군가에게 속았다 생각했을 뿐.
하지만 남하림은 그녀가 지니고 있는 생각을 정확히 읽어냈다.
“아무리 잘난 여인이라도 작정하고 달려드는 사내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 있지요. 하지만 그대는 백리세가의 운명을 책임지는 부가주로서 경솔하게 행동했습니다.”
“저는 속았을 뿐이에요!”
“당신은 그 물건이 어떠한 것인지 세가인들 중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두 눈으로 잘 보세요. 그대가 생각하기에 무림맹이 그냥 있을 것 같아 보입니까?”
“그거야…….”
“아무리 빠졌다고 해도 가문을 책임지는 막중한 부가주라면 어떠한 유혹에도 마지막 선을 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더 웃긴 건…….”
“…….”
“여전히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군요.”
남하림의 말에 백리희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모든 게 그녀의 잘못이 맞았다.
“그놈을 찾으러 다닐 때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이제 그만 가도 괜찮겠지요?”
남하림은 그대로 돌아섰다.
“당신이 그렇게 잘났나요? 다른 사람을 함부로 몰아붙일 정도로?”
“더 이상 볼일 없으실 테니 그냥 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금세 정에 빠지는 것도 아니외다. 다음에는 좋은 사람 만나기를 기원하지요.”
“……!”
백리희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순간 감정이 북받쳤다.
그녀는 일찍부터 한 세가의 부가주가 된 데다 도도한 외모 덕에 누구에게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멈춰요!”
백리희는 손을 뻗어 돌아선 남하림의 팔을 잡았다.
휙.
남하림은 돌아서며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녀의 양쪽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짜악!
백리희는 그대로 손 따귀를 날렸다.
“알고 있어요. 나도 알고 있었다고요. 근데 그것을 인정하면…… 내가 얼마나 비참할까 싶어…….”
휙.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돌아서서 빠르게 사라졌다.
“남 대협, 괜찮소이까?”
“으, 이게 괜찮아 보입니까……?”
“죄송합니다. 부가주께서…… 요즘 여러 가지 일로 많이 힘드셔서…….”
“됐습니다. 그만 가보시오.”
꾸벅.
인귀항은 멀리 사라지는 백리희의 뒤를 쫓아갔다.
“……손이 왜 이리 매워? 젠장, 울어서 한 대 맞아줬다.”
남하림은 뺨을 만지작거리면서 돌아섰다.
‘흐음, 흠.’
이윽고 문 그림자에 슬쩍 가려졌던 협의문 소속 위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입꼬리는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가 있었다.
* * *
터엉!
팽유도가 특외부 문을 닫고 들어왔다.
당무독과 성철각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반겨주었다.
“어, 왔어? 수련관에 가서 어땠어?”
“예전 생각 나더라고요. 질문도 받고 수련생과 몇 번 대련도 하고 왔어요.”
“수고했어. 쉬도록 해.”
팽유도는 자리에 앉으면서 보이지 않는 이들을 찾았다.
“하림 형과 휘연 형은 어디 갔어요?”
“특호께서 불러서 외조당에 갔어. 근데 왜?”
“히히, 그게…….”
팽유도가 말하다 말고 헤헤 웃었다.
“아, 뭐냐? 말해봐.”
당무독과 성철각은 궁금증이 솟구쳤다.
“어제 하림 형이 협의문에 백리 부가주를 만나러 갔잖아요. 거기서 어떤 일이 생겼는데, 그게…….”
팽유도가 협의문에서 일어난 일을 두 사람에게 설명했다.
당무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원. 진짜 아슬아슬하게 대하더라. 난 한 대 맞을 줄 알았다.”
“부가주가 너무하지. 부장이 뭘 잘못했다고.”
“하아, 철각. 당연히 부장이 잘못한 건 없지. 네가 잘 모르나 본데, 원래 진정한 남자는 잘못까지도 다 받아줄 수 있는 남자라고.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모르겠는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아?”
“후후, 인생의 경험이지.”
“야, 넌 나하고 나이도 같잖아.”
“나이가 같다고 해서 경험이 같은 건 아니야. 주위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 것도 전부 경험이지. 하하하!”
“그, 그런가……? 무독도 똑똑하구나.”
“이제 알았냐?”
타악!
당무독이 성철각의 어깨 위에 팔을 걸치며 한마디 했다.
“나중에 형님이 천천히 가르쳐 줄게.”
“으응…… 고마워. 넌 진짜 좋은 형제야.”
* * *
남하림과 이휘연이 청룡동지에 들어섰다.
“휘연 형, 별로 느낌이 안 좋아요. 외조당주가 이 시국에 우릴 부르는 건 좋지 않잖아요.”
“하긴 평소라면 부당주가 찾아왔겠지.”
특별호법 우창은 일 년 전 외조당 부당주의 직위에 올라섰다.
드륵.
외조당 안으로 남하림과 이휘연이 들어섰다.
“어서 오게.”
“왔어?”
외조당주 주걸 왕진항과 부당주 우창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일단 앉게. 뭘 그리 급하나.”
두 사람이 그들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왕진항이 서류 한 장을 남하림에게 건네주었다.
“청봉에서 올라온 전서라네.”
청봉은 하남과 산동, 그리고 하북의 세 개 성과 맞붙어 있는 지역으로 하남성 윗부분에 위치했다.
“심각한 일인가요?”
남하림이 전서를 읽었지만 별다른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NAME?
표국의 업무에 관해 잘 알고 있는 남하림에겐 대수롭지 않은 소식이었다.
“전서 내용은 별게 없어. 근데 얼마 전, 걸비천하에서 한 가지 정보를 입수한 게 있네.”
“그게 뭔가요?”
“청봉표국을 통해 표행을 맡긴 곳이 산동 하택현 견성에 있는 해림장이 아니라는 소문이다.”
“그럼 어디에서 의뢰를 한 거죠?”
“산동악가.”
“이상하네요. 왜 직접 의뢰하지 않았지?”
“그건 알 수 없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보고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남하림은 느낌이 싸해졌다.
누가 봐도 이상한 모양새였다.
산동악가는 산동 태안현 동평에 위치해 있었다.
“근데 공식적으론 해림장에서 의뢰한 물건이 중간에 약탈당했다는 거네요?”
“맞다. 임장으로 가는 도중 물건을 모두 약탈당한 모양이더군.”
“임장이라면……?”
“표행 도착지가 하북 한단현에 있는 하북소가 지부다.”
남하림과 이휘연은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수상하긴 하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나서기로 한 거지.”
“수상한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본 방이 나설 이유가 있나요?”
“청봉표국 표행에서 목숨을 잃은 표사들 중 하나가 본 방 걸비천하 소속의 제자였다.”
“아…… 그가 정보를 보내왔군요.”
“맞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낸 전서였다.”
“안타깝네요. 음…… 근데 개방 제자가 표국에 왜 잠입한 거죠?”
“나도 궁금해서 삼 장로께 여쭈어봤네. 청봉표국이 하남, 산동, 하북 세 지역의 정보를 얻기에 가장 용의하다고 하더군.”
“표사로도 잠입하는 모양이군요.”
“후후후, 걸비천하 소속이니깐. 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방대한 조직이지.”
“생각 이상인데요. 거적때기만 걸치고 돌아다니는 건 줄 알았는데.”
본 방의 제자가 죽었다면 충분히 개방에서 나설 이유였다.
“어떤가? 특외부에서 맡아 처리할 수 있겠나? 방주께서도 자네들이 맡겠다고 한다면 그대로 진행해도 좋다고 하셨네.”
남하림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한 번 더 이휘연을 보았다.
“휘연 형, 어떻게 할까?”
“우린 부장의 결정에 따를 뿐이다.”
“알겠어.”
남하림은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 외조당에서 자신들을 찾았다는 것은 이미 개방에서 나서기로 했다는 의미였다.
“이 일은 특외부에서 맡도록 하죠.”
“하하, 잘 결정했어.”
우창은 한시름 놓은 듯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그럼 상세한 상황은 정리해서 부당주에게 줄 테니 돌아가도 좋네.”
“그렇게 하죠.”
일각 뒤.
외조당에 불려갔던 남하림과 이휘연이 특외부로 돌아왔다.
남하림은 기다리고 있던 세 사람에게 짧게 설명했다.
“난 당연히 찬성!”
먼저 팽유도가 손을 번쩍 들었다. 중원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에도 빠질 수 없었다.
이어서 성철각이 한마디 했다.
“난 부장이 하자는 대로 할게.”
두 사람이 찬성하자 당무독도 당연하게 손을 들었다.
“재미있을 것 같아. 나도 찬성.”
차르르-
곧바로 팽유도가 무림대사전을 펼쳤다.
펼쳐진 쪽에는 청봉표국에 대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NAME?
오 년 전 하남 청봉에 자리 잡은 상급 표국.
국주 번손. 현재 나이 사십삼 세.
표두를 더한 표사의 인원수는 일백 명.
“오 년 만이라…….”
남하림은 청봉표국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상가(商家)가 아니라 표국으로 오 년 만에 상급으로 올라선다는 것은 큰 업체가 도움을 주지 않는 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청봉표국은 산동악가에서 운영하는 곳이겠어.”
“산동악가라…… 이거 뭔가 느낌이 오는 것 같은데…….”
당무독의 생각도 마찬가지.
“정황상 산동악가에서 몰래 하북소가에 물건을 주려고 했다는 거잖아. 안 그래?”
“그런 것 같아.”
성철각도 이해가 되었는지 한마디 했다.
“그 물건이 중간에 없어졌다는 거구나.”
“하림 형, 과연…… 우연일까?”
“우연을 가장했을 수도 있지. 일단 가서 조사를 해보자. 표행이 습격당한 지역 근처에 산적질이나 마적질하는 애들이 있을 거야. 조사해 봐.”
“응! 알겠어.”
팽유도의 눈이 반짝거렸다.
벌떡.
남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양삼을 만나서 청봉표국에 대해 새로운 정보가 있는지 물어보고 올게. 그동안 언제라도 갈 수 있도록 준비해.”
“알겠어. 다녀와.”
* * *
스윽.
동진부가 두 손으로 차를 내밀었다.
“차를 준비했습니다.”
“고마워.”
남하림을 차를 받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어느덧 아이의 얼굴에 어둠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요즘 공부를 하고 있다고?”
“네! 총관님께서 상가의 일을 하고 싶다면 우선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이 맞네. 양 총관도 너처럼 어릴 때 열심히 공부했어. 사람이 기초가 똑바로 되어 있어야 뭐든 제대로 할 수 있는 거야. 나처럼.”
“네, 맞아요. 총관님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분이 바로 우리 공자님이라고 자랑하셨습니다. 문(文)으로 세상에 나섰다면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으뜸이 될 분이시고, 무(武)로 나섰다면 천만대군(千萬大軍)의 대장군(大將軍)이 될 분이시라고요.”
“훗, 정말이냐? 근데 내가 들어도 좀 과대평가한 것 같다.”
스으으-
그때, 문이 가볍게 열리며 양삼이 들어섰다.
“하하, 아닙니다. 공자님께서는 마음만 먹으신다면 세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가? 흠, 양 총관 말대로 세상을 가져볼까?”
“세상을 가지고 싶다면 공자님께서는 앞만 보고 가시면 됩니다. 소인은 그저 뒤에서 편히 가시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뭐, 그래. 지금은 별로 생각 없지만 혹시나 생각이 바뀌면 말할게. 그때 부탁해.”
“후후후, 알겠습니다. 항상 공자님 곁에 있을 테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스윽.
양삼이 공손하게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청봉표국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남하림은 두루마리를 펴서 읽어보았다.
“어라, 이게 뭐야?”
“네. 국주가 재미있는 인물입니다. 하남 북부 표국협에서 술기운에 우연히 예전 신분을 하남표국에 언급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외숙부가 계시는? 흐음, 십장혈(十場血) 소속이라…….”
“십장혈은 멸문된 구천마성 직속 문파 중 한 곳입니다.”
“……하아, 왜 갈수록 일이 커지는 느낌이 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남하림의 표정.
하지만 반대로, 양삼은 그를 보면서 몰래 미소를 지었다.
‘공자님, 영웅의 앞은 항상 고난과 어려움이 뒤따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