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백리희
용두방주 오종은 특외부로 함께 가겠다는 위한소와 영충을 두고 직접 백리희를 안내했다.
‘그 녀석 성격에 쉽게 받아들이지 않겠지?’
오종은 특외부에서 무슨 일이 있어날지 훤히 보였다.
괜히 영충까지 함께 갔다가는 시끄러울 게 틀림없었다.
걸화당과 달리 주작남지에 들어서자 개방 거지들 특유의 냄새가 주위에서 스며왔다.
나란히 걷던 오종은 살짝 백리희의 표정을 살폈다.
‘오호, 일반인에겐 냄새가 심할 듯한데…… 인상 한 번 쓰지 않는군.’
백리희.
중원십미라는 명성보다 백리희가 중원무림에서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스물셋의 나이로 백리세가 부가주의 신분을 꿰찼기 때문.
이들은 꽤나 긴 시간 동안 안쪽으로 걸어갔다.
“개방은 넓네요.”
“그렇지요. 본 방의 제자들이 많다 보니 지내는 땅도 넓은 편이지요.”
“그들의 거처는 아직 멀었나요?”
“특외부는 주작남지 맨 안쪽에 있다 보니 더 멉니다. 저기 꺾어지는 부분을 지나면 보일 것이외다.”
“아…… 그러네요.”
그녀는 걸화당에서 주작남지까지 걸어오면서 여러 건물들을 지나쳤다.
백리세가의 건물들과 다르게 딱 봐도 대충 지어놓은 듯했다.
개방도의 주거지인 주작남지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특외부라 하여 특별한 건물일 리도 없었다.
하지만 백리희는 곧 자신이 완전히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백리 부가주, 앞에 보이는 건물이 특외부이외다.”
백리희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삼 층으로 된 건물로 화려하면서도 중후한 멋이 느껴졌다.
중원에서도 이보다 멋진 건물은 찾기 힘들 정도였다.
‘어떻게…… 개방에 이런 건물이 있다니…….’
그녀의 시선이 건물의 지붕 아래로 향했다.
눈에 띄는 특이한 장식품.
검은색의 장미가 빛을 반짝이며 달려 있었다.
‘십대장인 명장 전전이 지으신 건물이다.’
개방에서 명장 전승에 이어 전전의 건축물까지 마주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삼 층 건물로 들어서는 출입문 입구 위엔 현판이 걸려 있었다.
‘특외부’라는 세 글자.
‘……허.’
간단하고 깨끗한 필치인 듯 보이나 글자 획수의 끝마다 호연지기가 보이는 듯했다.
오종은 넋을 놓고 현판을 바라보는 백리희를 보고는, 일전 하림에게 들은 대로 글씨의 주인을 알려주었다.
“저건 류운정 선생의 글이라고 하더군요.”
“류…… 운정?!”
당대의 명필이자 대학사인 류운정은 유림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문인이었다.
“그 녀석이 한 장 부탁해서 받아왔다고 하는데…… 맞는지 모르겠소이다. 허허.”
“…….”
‘여긴 대체…… 어떻게 된 곳이지?’
“들어가시지요.”
백리희는 특외부로 올라선 오종을 따라 바로 붙어 섰다.
스으으윽-
오종이 문손잡이를 잡고 안으로 밀었다.
* * *
‘아…… 하…….’
백리희는 문 앞에서 더 들어가지 않고 자연스럽게 멈춰 섰다.
‘여기가…… 개방이라고?’
우선 지금까지와 달리 실내에서 흐르는 향긋한 국화 향에 숨을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주위를 살폈다.
건물과 달리 화려하진 않지만, 단순한 멋이 느껴지는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명장 전승의 각인이 찍혀 있었다.
황금을 준다고 해도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이 개방 땅 깊숙한 곳에 가득했다.
“방주님, 오셨습니까?”
팽유도는 홀로 일 층 공휴실에서 쉬고 있었다.
“혼자 있느냐? 다들 어디에 있지?”
“각자 방에서 쉬는 중입니다. 하림 형…… 아니, 부장이 백리세가 일을 맡지 않겠다고 하니 잘됐다면서 올라갔습니다.”
팽유도는 오종의 뒤를 따라온 백리희와 인귀항을 보았다.
“백리세가에서 오셨습니까?”
“맞네.”
“잠시 앉으시지요. 제가 방주님께서 오셨다고 알리겠습니다.”
팽유도가 이 층으로 올라가자 오종은 백리희에게 자리를 권했다.
“백리 부가주, 앉으시지요. 올라갔으니 바로 그 녀석이 나올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의자에 앉기 전에 손잡이를 보았다.
명장의 각인은 여기도 있었다.
‘대체 개방 제자가 얼마나 돈이 많은 거야…….’
미묘한 표정으로 의자에 새겨진 각인을 쓸던 백리희는 문득 이 층으로 올라간 청년을 떠올렸다.
신체는 크지 않지만 단단하고 구릿빛의 피부가 강인한 느낌을 주었다.
“방주님, 방금 올라간 그는 누구인가요?”
“걸협오성의 일인으로 팽유도라고 하지요.”
“아, 하북팽가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소이다.”
하북팽가 또한 십대세가이기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방주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쭈어도 될까요?”
“무엇이오?”
“걸협오성은…… 다른 개방의 문도와는 생김새가…… 다른 듯하네요.”
“이미 소문은 났겠지만, 특외부의 부장이 더러운 것을 싫어하는 편이지요. 이들이 그와 같이 지내다 보니 닮아가고 있습니다.”
위층으로 올라간 팽유도는 쉬고 있던 동료들의 방에 들어가 백리세가가 방주와 함께 찾아왔다고 알렸다.
저벅저벅.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는 소리가 울렸다.
“허허, 내려오는 모양이구려.”
오종의 말에 백리희는 계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팽유도가 먼저 모습을 보였고, 뒤를 따라 당무독과 성철각, 그리고 이휘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없어.’
백리희는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협의문에서 잠시 스쳐 지나갔던 사내는 없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이휘연이 인사를 했다.
“방주님, 오셨습니까?”
“그 녀석은?”
“욕조에 있습니다. 지금쯤이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냐?”
오종은 그녀를 보았다.
“씻고 있는 모양이구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하는군요.”
“네. 알겠어요.”
“아 참. 소개를 하는 걸 잊었군.”
오종은 먼저 백리희를 가리켰다.
“여기는 백리세가의 부가주이신 백리희라고 하네. 인사를 하게나.”
‘……이 여인이 백리세가의 부가주군.’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다.
척.
이휘연은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포권을 했다.
그 뒤로 나머지 세 명도 인사를 했다.
그들 사이에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백리희가 다시 자리에 앉기에도 서먹서먹한 분위기였다.
툭툭.
그때 남하림이 계단 손잡이를 가볍게 치며 내려왔다.
“진짜로 올 줄은 몰랐네.”
‘저 녀석은!’
인귀항은 단번에 남하림을 알아보았다.
그는 백리희와 달리 협의문에서 만난 건방진 청년이 걸협오성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방주님께서도 오셨네요.”
“네놈이 여기로 부르지 않았느냐.”
“그렇게 되나요? 죄송해요.”
분명 방주와 일반 제자 사이일 텐데.
‘정말 친하게 보여.’
백리희는 격의 없이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오종과 남하림의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신기하네.’
백리희는 환한 미소를 띠고 있는 남하림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거지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에 기미와 잡티가 전혀 없는 보옥 같은 피부를 지녔다.
굵지도 가늘지도 않는 짙은 눈썹과 맑은 눈동자만으로 여인들의 호감을 받기에 충분했다.
“뭘 그리 뚫어지게 보는 것이오?”
“이놈, 어디서 함부로 말을 하느냐? 본 세가의 부가주이시다. 네놈이 예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스윽.
남하림이 눈을 부릅뜬 인귀항을 보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화를 낼 만한 상황이었다.
“아…… 그런가요? 몰랐네요. 미안합니다.”
‘…….’
남하림의 빠른 사과에 오히려 인귀항이 당황했다.
“음, 모두 서 있으실 건가요? 자리에 앉죠.”
* * *
남하림이 다관을 들었다.
또르르르.
찻잔을 채우는 맑은 소리가 울렸다.
“부가주님, 한 잔 드셔 보세요.”
“고맙습니다.”
백리희는 찻잔 속에서 빛나는 청화를 보았다.
‘이건…… 명장 전결님의 도기…….’
하루에만 벌써 세 명의 명장이 만든 물건들을 보았다.
“식으면 향이 떨어집니다.”
“아…… 네.”
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적시며 차를 마셨다. 그동안의 긴장이 사라지는 듯했다.
“좋은 차네요.”
“한 잔 더 드릴까요?”
“고마워요.”
‘부가주께서…….’
인귀항은 평소와 다르게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서는 그녀의 모습에 놀랐다.
그녀는 차가 마음에 드는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종은 어느 정도 분위기가 좋아진 것을 보며 말을 꺼냈다.
“하림아, 백리 부가주께서 사람을 찾는다고 하더구나.”
스윽.
오종은 탁자 위에 한 장의 초상화를 내려다 놓았다.
다섯 명이 동시에 탁자 위에 놓인 초상화를 보았다.
“잘생겼는데……?”
당무독이 첫 느낌을 그대로 말했다.
“음…… 그렇긴 하군.”
남하림도 동의했다.
하지만 이내 한마디를 더 거들었다.
“근데 관상이 별로 안 좋아. 딱 여자나 사기 치고 다니는 놈이구만.”
“부장, 정말요? 관상 볼 줄 아세요?”
“장사를 배우려면 관상학도 배워야 해. 이놈이 사기를 칠 만한 놈인지 아닌지 알아야 하거든.”
“역시 부장은 대단하네. 근데…… 어딜 봐야 사기 치는 관상인지 알아요?”
“눈꼬리와 입꼬리가 거의 비슷하게 올라가잖아. 이건 전형적인 사기꾼 관상이야. 거기다 잘생긴 놈이다? 그럼 여자들 등치는 놈들밖에 없지.”
남하림은 몸을 뒤로 빼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
백리희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것을 본 사람은 바로 앞에 마주 앉은 남하림뿐이었다.
“일단 초상화를 복사해서 중원에 나간 분타에 돌릴 테니 네가 백리 부가주 곁에서 도움을 줬으면 한다.”
“방주님, 이 건은 거절할게요.”
“허허. 왜 그러느냐? 무슨 이유라도 있는 모양이지?”
“느낌이 좋지 않아요.”
남하림은 대답을 하면서 백리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분명 그대는 협의문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사과하면 부탁을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니죠. 부탁을 하라고 했지, 들어준다고는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그런데 부가주께선 아직 사과도 하지 않았군요.”
“…….”
백리희는 예상과 다른 남하림의 말에 당황했다.
“이놈. 감히 부가주님을 희롱하는 것이냐?”
인귀항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는 백리희도 가만히 있었다.
“이봐. 조용히 하지.”
싸늘한 기를 담은 날카로운 목소리.
이휘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인귀항을 올려다보았다.
‘이…… 놈은…….’
인귀항이 순간 흠칫거렸다.
자신에게 쏟아진 기는 살기가 분명했다.
“여기는 당신이 떠들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손님이면 손님답게 있다가 나가. 부장이 싫다면 싫은 거야.”
‘대체 이놈들은…….’
인귀항은 방주 오종을 보았다. 분명 그도 살기를 느꼈을 것인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대주님, 한 번만 더 나선다면 세가에 돌아가서 문책을 하겠어요.”
“죄…… 죄송합니다. 그만…… 제가 흥분을 했습니다.”
“됐어요. 잠시 밖에 나가 계세요.”
“부가주님…….”
“대주님.”
“알겠습니다.”
인귀항은 그녀의 명에 따라 밖으로 나갔다.
“대협께 큰 실례를 했습니다.”
백리희는 의자에서 일어나 남하림의 앞으로 다가섰다.
“소녀의 사과를 받아주세요.”
스으윽.
그러고는 공손하게 절을 했다.
‘흐음.’
남하림의 얼굴에서 곤란한 표정이 나왔다가 사라졌다.
세상에서 가장 도도하게 보이는 여자가 절을 하며 사과를 했다.
그녀는 그대로 멈춘 듯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시죠.”
“사과를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어요. 사과는 받아주죠.”
스윽.
그녀는 미소를 띠며 몸을 일으켰다.
“대협께서는 소녀의 부탁을 들어주시는 것인가요?”
“굳이 내가 아니어도 본 방에서 사람을 찾아주겠죠. 그만 가세요.”
“……으음.”
백리희는 살짝 화가 났다.
“소녀는 다른 분보다 대협께서 이 일을 맡아주신다면 고맙겠어요. 부탁드립니다.”
“미안하네요.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
남하림은 시선을 돌렸다.
“방주님, 이분을 데리고 가세요. 어차피 사람 찾는 건 제가 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 알겠다.”
오종은 충분히 만족했다.
개방은 백리세가에서 사람을 찾아달라 부탁하는 전언을 거절할 수 없었다.
백리세가의 위세도 물론 이유였지만, 십대세가와는 좋은 우대관계를 지녀야 했다.
굳이 걸협오성에게 데리고 온 것은 백리세가에 개방의 후기지수를 보여주기 위함도 있었다.
‘이 정도면 개방을 무시할 수 없겠지.’
“백리 부가주. 그만 가시지요. 본 방에서 뛰어난 제자를 붙여주겠소이다.”
“방주님, 아니에요. 다른 분들은 필요 없어요. 대협께서 허락을 하실 때까지 여기에 있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모든 시선이 모였다.
남하림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고집이 있네.’
“그러시든지요. 근데 밖에 있는 호위께서 가만히 있을지 모르겠네.”
“그런 걱정은 마세요.”
“마음대로 하시든지…… 요.”
남하림은 그녀에게 신경을 끊기로 했다.
“방주님, 제가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알겠다.”
오종은 남하림의 뜻에 따라 별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알아서 처리하리라 믿고 있었다.
저벅저벅.
남하림과 오종은 나란히 주작남지를 가로 걸었다.
오종이 남하림의 옆모습을 보았다.
남천상국주가 찾아 왔을 때 그를 따라 돌아갈 수 있었지만 남하림은 개방에 남아 주었다.
오종은 어느새 불쑥 자신만큼 자란 남하림이 대견스러웠다.
“정말로 맡을 생각이 없느냐?”
“방주님, 수상하잖아요.”
“그렇긴 하지? 백리세가라 하지만 단순히 사람 찾는 일을 본 방에 부탁하려 하진 않았을 게야.”
“네. 저도 그렇게 봤습니다.”
“찾는 자가 단순한 놈이라면 하오문에 의뢰했을 게다. 우리에게 부탁하러 온 걸 보면 단순한 놈이 아니라는 거지. 아니면…….”
“하오문에 알리면 소문이 날지 모르니 본 방을 이용하는 것이겠지요.”
“후후후, 맞다.”
오종도 모르는 척했을 뿐 그들의 뜻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별수 없이 이번 일은 네가 맡아야겠다. 본 방에서 가장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는 곳이 네놈들밖에 더 있겠느냐?”
“후…… 알겠습니다. 근데 영 느낌이 좋지는 않아요.”
“항상 조심해야 한다. 위험하면 물러나도 괜찮다.”
“그건 걱정 마세요. 제가 위험한 일을 얼마나 싫어하는데요.”
탁탁.
오종이 남하림의 어깨를 두드렸다.
“녀석…… 여기에서 돌아가거라. 그만 나와도 된다. 나중에 보자.”
“네, 살펴가세요.”
남하림은 사라지는 오종을 뒤로한 채 돌아섰다.
특외부에 있을 백리희가 떠올랐다.
“어휴…… 제대로 걸린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