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23화 (24/328)

23. 천살성

‘후후후. 걸협오성이라……!’

방주 오종은 기분이 좋았다.

황안촌 사건을 해결한 다섯 명의 어린 제자들.

덕분에 개방의 명성이 한층 높이 무림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보게, 방주. 오랜만에 본 방에서도 제대로 된 후기지수가 나왔어.”

“네. 맞습니다. 중원에 알려지기를, 검을 사용하는 걸협검성, 반도를 펼친 걸협도성, 독을 자유자재로 쓰는 걸협독성, 바람조차 가르는 걸협권각성, 강룡십팔장의 걸협룡성이라며 소문이 아주 자자합니다. 하하하!”

방주 오종은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일장로님, 물실호기(勿失好機)가 아니겠습니까?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합니다.”

“음, 확실히 기회이긴 하지. 내 생각에는 지금처럼 그들 다섯 명이 함께 움직이고 함께 지내도록 하는 게 좋겠네.”

“흠, 너무 그들끼리 지내는 것보단 본 방의 제자들과도 친하게 지내야지 않겠습니까?”

“방주의 말이 맞네. 물론 기존의 제자들과 친하게 지내면 좋지. 하나 억지로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서로 동화되도록 지켜보는 게 좋겠어.”

“하하, 그렇게 된다면 가장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후후후, 내가 듣기로 연안분타에서도 걸협오성 칭찬이 자자하다더군.”

“맞습니다. 개방의 의협을 중원에 널리 알렸다면서 좋아했습니다.”

“맞네, 맞아. 그런 식으로 하다 보면 본 방의 제자들도 그 아이들을 동료로 받아들일 거야.”

오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약간 빠른 감이 있지만, 이번 일을 완벽하게 처리한 것으로 봐서 무력단보다는 외조당에 더 적합한 것 같네.”

“일장로님의 말씀은 그 아이들을 외조당에 넣자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아니네. 기존의 외조당보다는 특외부를 따로 만들어두는 게 좋을 듯해.”

“특외부라면……?”

“특별 외조당 부서. 어때, 내 작명 실력이 마음에 들지 않나?”

“좋긴 합니다만…… 다섯 명만으로 조직을 만든다는 게 간단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크하하, 당장 임무를 맡아서 중원으로 나가라는 게 아닐세. 그들에게도 소속감을 줘야 개방도라는 자부심을 가질 게 아닌가.”

“하림, 그놈은 남천상국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지 않습니까?”

“허허, 방주는 잘 모르는 모양이구만. 내가 보기에 살짝 넘어왔다니깐? 제 입으로 지가 걸협오성이라고 한 놈이지 않나!”

‘음…….’

장두철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그럼 특외부를 어떻게 굴릴 생각이십니까?”

“특외부 책임자는 애들 다섯 명 중 한 명이 맡아야겠지. 그리고 장로들 중 누군가 한 명이 특외부의 특별호법을 맡으면 되고.”

“일장로님께서……?”

“내가 이 나이에 무슨 고생 할 일이 있는감?”

“그럼……?”

“외조백단주 우창이 있지 않나. 겸임으로 특외부 특별호법을 맡기면 좋을 것 같지 않아? 앞으로 외조당과도 협력을 해야 하니 딱 좋지 않겠나.”

“일장로님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당장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고맙네.”

오종과 장두철은 바로 그 자리에서 특외부를 새롭게 창설하기로 결정 내렸다.

“이번엔 운 좋게 사건이 해결되었지만, 앞으로 쭈욱 특외부에서 활동하려면 무공을 더 수련해야겠지.”

“맞습니다. 아직 개방의 무공을 제대로 익힌 녀석이 없습니다.”

“그놈들이 본 방의 무공을 펼칠 수 있도록 당분간 내가 무공 수련을 직접 맡겠네.”

“일장로님께서 직접 가르치시겠다는 뜻입니까?”

“머리가 좋은 놈들이라 금방 한두 개 정도는 배울 것 같더군.”

“그렇긴 하지만 일장로님께서 다섯 명이나…… 힘드시지 않겠습니까?”

“후후후, 힘들 게 뭣이 있겠는가. 그놈들이 알아서 다 잘하는데. 그러고 보면 똑똑한 놈들인데 왜 본 방으로 왔는지 이해가 안 되더군.”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 문파나 세가에서 실수를 한 듯합니다.”

오종도 스스로 반성했다.

자신 또한 당장 눈앞에 보이는 약점만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실망했었다.

그 아이들의 진면목은 절대로 낮지 않았다.

장두철은 살짝 걱정 아닌 걱정이 생겼다.

“설마 지금 애들을 돌려달라고 하진 않겠지?”

“안 됩니다. 절대로 보낼 수 없습니다.”

오종은 굳은 표정으로 정색했다.

“암, 당연하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놈들을 보낼 순 없지. 우리가 어떻게 키운 놈들인데…….”

장두철과 오종은 걸협오성을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 굳게 다짐했다.

* * *

“남하림. 오늘도 밖에 나가는 모양이지?”

“잠시 볼일이 있어서요.”

“볼일? 사고 치려는 건 아니겠지?”

“뭐 제가 날마다 사고만 치는 줄 아시나.”

“어…… 니가 밖에 나가면 겁이 나. 무슨 일이 또 터질지 몰라서.”

“크흠, 그래도 개방에 피해 안 오게 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그게 되는 게 더 신기하다.”

“…….”

“여하튼 잘 갔다 와.”

“네네, 문 잘 지키고 계세요.”

‘허 참.’

협의문을 지키던 위걸 강단구는 밖으로 나가는 남하림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남하림의 말에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고도 잘 치고, 말본새에 싸가지도 없고, 존장에 대해 예라곤 전혀 모르는 놈인데…… 왜 이뻐 보이는지 모르겠어. 귀여운 놈. 후후후.”

협의문을 지나 밖으로 나온 하림 일행은 곧장 개봉의 시장을 통해 와청가(瓦靑家)로 향했다.

스윽.

뒤에서 걷던 이휘연이 서너 걸음 빠르게 나오며 남하림 곁에 섰다.

“협의문에서부터 누군가 따라오는 것 같다.”

“좋은 사람은 아닌 모양이죠?”

“아마도.”

남하림은 와청가로 가기 전에 방향을 틀었다.

“형, 어디 가요?”

“누가 우릴 미행한다네.”

팽유도의 안색이 바로 변했다.

개봉에서 자신들을 쫓는다는 것은 결코 좋은 뜻이 아니었다.

당무독이 뒤를 따르면서 물었다.

“개방으로 돌아가는 건 어때?”

“보아하니 딱 우릴 노린 것 같은데. 어차피 그자와 만나야 한다면 뒤로 미룰 필요 없지. 무슨 이유로 따라오는지 알아야겠어.”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주위에 사람들이 적어졌다.

얼마간 걸었을까.

하림 일행은 인적이 드문 장소에 도착했다.

“이제 나타나겠지.”

남하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르르륵.

협의문에서부터 미행하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숙항은 굳은 표정이었다.

“대단하군. 미행하는 줄 알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여기로 온 배짱 하나만큼은 인정해 주마.”

“초면이신 분이 우리하고 무슨 원한이 있는 모양입니다?”

“네놈이 남하림이란 녀석이군.”

숙항은 단번에 남하림을 알아보았다.

“어떻게 알았죠?”

“개봉에서 걸협오성은 유명하지 않나? 검을 들고 있는 녀석이 자칭 검성이고, 등에 반도를 멨으니 도성, 가방을 메고 있는 독성, 길쭉한 녀석은 권각성, 그럼 마지막 남은 네놈이 용성이겠지.”

“우리가 진짜로 유명해지긴 했나 보군요. 생판 모르는 사람도 단번에 알아보다니.”

남하림은 괜히 기분이 좋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큰일이라고 여겼다.

‘이거 참, 이런 식이면 정말로 거지 생활을 그만두지 못하는데…….’

스르르릉-

숙항은 허리에 찬 검을 들어 천천히 검신을 밖으로 뽑았다.

망자검이라 알려진 숙항의 무공은 혈명곡 십대고수에 해당했다.

“네놈들이 죽기 전에 내 소개를 간단하게 하지. 혈명곡의 숙항이라 한다.”

남하림은 그가 이름을 밝혀줘도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무림인 출신의 네 사람은 숙항이란 말에 긴장했다.

“혈명망자검이 그대란 말이오?”

이휘연이 숙항을 보며 되물었다.

“후후후.”

숙항은 점점 웃음 속에 살기가 묻어 나왔다.

“휘연 형, 저자가 꽤 센 사람인가요?”

“강하다.”

“그렇군요. 그럼 얼마 전에 관왕묘에서 싸웠던 그들과 비교하면 어때요?”

쌍사혈괴.

그들 또한 혈명곡의 십대고수였다.

우열을 정확히 가릴 수 없었다.

피식.

남하림은 실소가 나왔다.

“형이 바로 대답을 못 하는 것을 보니 비슷한 모양이네요.”

“…….”

이휘연은 하림의 말에 긴장이 풀어졌다.

그들은 쌍사혈괴와 대등하게 싸웠었다.

‘망할 거지 놈이…….’

숙항은 화가 났다.

하림이 무시할 의도로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무시를 당한 느낌이었다.

“본인을 놀리는 것이더냐? 정녕 죽고 싶은 모양이군.”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죠.”

“좋다. 네놈 스스로 밝힌 걸협오성이란 별호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지 보겠다.”

타앗!

숙항은 한 발을 내디디며 망자검을 가볍게 휘둘렸다.

죽음의 살기가 바닥을 스치며 남하림의 아래에서 밀려왔다.

“멈춰라!”

푹.

이휘연이 검을 아래로 꽂았다.

까아앙!

두 개의 검기가 부딪히며 강한 소리를 냈다.

“역시 검은 무당이군.”

망자검의 살기가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그대로 멈췄다.

숙항은 두 손에 내기를 더 밀어 넣었다.

“욱.”

이휘연의 몸이 흔들거렸다. 내력의 차이였다.

휘청거리는 이휘연의 모습을 보며 숙항이 달려 나오려고 했다.

휘리리릭-

당무독이 재빨리 앞으로 나와 흰색 가루를 뿌렸다.

“윽!”

숙항이 소매로 코를 막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이놈이, 비겁하게 독을 뿌리다니……!”

“하하하, 독 아닌데요? 그냥 백색 가루지요.”

툭툭.

당무독이 손에 든 주머니를 톡톡 치면서 뒤로 물러났다.

마음에 드는 놈이 한 놈도 없었다.

‘이런 망할 놈들이…….’

남하림은 물러난 숙항을 보면서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가 동시에 덤비면 해볼 만해.”

숙항은 떼로 덤비자고 하는 남하림을 보며 인상을 썼다.

“비겁한 녀석이군.”

“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무림인들은 불리하면 비겁하고 유리하면 정당한 건가요?”

“…….”

“목숨 걸고 싸우는 마당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내가 봐줄 테니까 당신도 비겁하게 하세요.”

“와아……! 하림 형 말이 맞네. 난 비겁해도 살고 싶을 것 같아.”

“어린 거지 새끼들이…….”

숙항이 화가 나서 욕을 내뱉었다.

이휘연은 일전 혈명곡에 대해 들었던 정보를 떠올렸다.

“보아하니 혈명곡이 북방상국과 속각을 거래한 모양이군. 쌍사혈괴와 당신이 나선 걸 보면.”

“휘연 형. 그게 무슨 말이야?”

“혈명곡에서 생산하는 혈장단(血臟丹)에 필요한 재료 중 하나가 속각이다.”

“아하, 그래서 중간에 방해한 놈들을 죽이려고 왔다는 말이네요.”

“두 곳 중 한 곳이겠지. 북방상국 아니면 혈명곡.”

“정황이 뻔하네요. 그럼 시간도 늦었는데 빨리 끝내고 가요. 집 지을 재료는 제대로 골라야 해요. 시간 없다고 대충 고르면 나중에 후회한다니까요.”

“…….”

남하림의 걱정은 살인의 목표가 된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지낼 집을 짓는 데 필요한 자재를 고르는 일이 제일 중요했다.

‘특이한 녀석이야. ……이 녀석들 모두 그렇긴 하지만.’

이휘연은 이런 남하림이 마음에 들었다.

“알았어. 빨리 끝내고 가자. 뒤로 물러나 있어.”

“네놈 혼자서 본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군.”

이휘연은 지금 자신 옆에 있는 동료들이라면 예전과는 다를 것이라 확신했다.

스르르르-

이휘연은 그동안 누르고 있던 기를 완전히 개방하여 끌어올렸다.

이휘연의 눈동자가 점점 붉어지기 시작하면서 주위로 핏빛의 기가 솟구쳤다.

변한 이휘연의 모습에 숙항의 눈이 커졌다.

‘헉…… 설마……? 천살의 전인…….’

천살성의 기운을 타고 태어난 자.

무림은 그에 의해 피로 물들 것이다.

덜덜-

숙항의 몸이 떨렸다.

망자검 또한 강한 살기를 띤 검이었지만, 천살성의 살성 앞에서는 조족지혈(鳥足之血)이었다.

스팟!

이휘연은 그대로 숙항과 부딪혔다.

“당신, 사람 잘못 건드린 것 같군.”

“……크윽!”

“자신의 일이 아니면 나서지 말았어야 했다.”

팟.

숙항은 뒤로 내동댕이쳐졌다. 허리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커억, 언제?’

그는 이휘연의 검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분명 무당파의 태극검이었지만, 살성이 짙은 검은 태극검이 아니었다.

우우우웅-

세상을 덮을 살기를 지닌 붉은 태극문양이 선명하게 비치며 숙항을 향해 쏟아졌다.

‘……!’

숙항은 질끈 눈을 감았다. 도저히 막을 자신이 없었다.

“휘연 형이 이겼어요. 그만해요.”

뚝.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이휘연의 검이 숙항의 목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남하림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숙항을 불렀다.

“이봐요. 그만 눈 뜨세요.”

숙항은 천천히 눈을 뜨며 검을 거두는 이휘연의 모습을 보았다.

“아저씨가 진 것 같은데요.”

“왜…… 칼을 멈췄지……?”

“내가 마음이 착해서요. 바쁘기도 하고. 살려줄 테니 가세요.”

“내 목숨이 하찮게 보이는 모양이군.”

“이 아저씨 말을 섭섭하게 하시네. 하찮게 여겼다면 가만히 있었겠죠.”

“…….”

“가기 싫으면 여기 있든지요. 우리가 먼저 갈게요. 좀 바빠서.”

남하림은 더 이상 그에 대한 신경을 껐다.

“하림 형, 같이 가자!”

남하림이 멍하니 서 있는 숙항을 옆으로 지나치자 그 뒤로 팽유도가 빠르게 따라붙었다.

“다들 뭐 해. 휘연 형, 빨리 가자.”

“어…… 그래.”

이휘연은 검집에 검을 넣은 뒤 남하림의 뒤를 따랐다.

남하림은 바로 따라오는 이휘연을 돌아보았다.

붉어진 눈동자는 아직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휘연 형, 아까 진짜 멋있더라. 나 태어나서 형보다 멋진 사람 본 적이 없어.”

피식.

이휘연은 짧게 웃음이 났다.

천살성의 기운을 멋지다고 들은 적은 처음이었다.

무당파의 모든 이들이 자신을 괴물처럼, 살인자처럼 바라보았다.

“하림 형 말이 맞아. 진짜 분위기 장난 아니더라. 저 사람 완전 쫄아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던데.”

“그러게. 형하고 같이 다니면 겁날 게 없겠어.”

“나도…….”

이휘연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신을 그대로 보며 환한 웃음을 짓는 네 명의 동료들.

무당산을 떠날 때 사부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연아……. 네 모습을 그대로 좋아해 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지 모르지 않느냐.”

‘사부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여기에 그런 녀석들이 네 명씩이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