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21화 (22/328)

21. 걸협오성

“커어어어억-”

노궁의 목에서 거품이 올라오면서 입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취조를 받기 위해 무릎을 꿇던 순간이었다.

외조당주 왕진항은 재빨리 코를 막으며 숨을 멈췄다.

“독이다. 물러나라!”

후다닥.

노궁을 끌고 오던 외조당개들이 그를 바닥으로 내던지며 물러났다.

“…….”

얼굴이 시퍼렇게 변하는 노궁을 보면서도 어떻게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스윽-

외조당개 문욱은 인상을 쓰며 입에 거품을 넘쳐흐른 노궁을 살폈다.

“죽었습니다.”

“독살인가?”

“그런 모양입니다.”

문욱은 타구봉으로 노궁의 입을 벌리며 살폈다.

“목을 타고 넘어온 것으로 봐서 몸 내부에 중독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 말은 독에 의해 금제를 당했다는 것인가?”

“네, 제때 해독제를 먹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망할…… 악독한 놈들이군.”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가볍게 여기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

포박당한 채 무릎을 꿇고 있던 삼혈사랑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노궁의 죽음.

그의 입을 막은 것은 자신들에게도 보이지 않는 협박임이 틀림없었다.

왕진항은 기분이 나빠졌다.

제대로 취조를 하기도 전에 중요한 단서를 줄 인물이 죽어나갔다.

죽은 시체에서 시선을 돌린 그가 삼혈사랑을 노려보았다.

“삼혈사랑. 네놈들에게 묻겠다. 본인이 묻는 말에 거짓을 고한다면 온몸이 성한 상태로는 이곳에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좋다. 지금부터 네놈들에게 묻겠다. 황안촌장과 그의 식솔들을 모두 죽이고 집을 불태운 게 맞느냐?”

“…….”

삼혈사랑은 서로 눈치를 보며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 번에 말을 하면 서로 좋을 텐데…… 꼭 맞아야 말을 할 모양이군.”

왕진항은 양옆으로 서 있는 외조당 수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우린 취조하는 방식을 잘 몰라서 말이야. 오로지 한 가지 방법만 쓴다네.”

“그게 무슨…….”

“타구취조법이라고, 그냥 말을 할 때까지 패는 거야. 도중에 가끔 죽는 놈도 있지만, 그건 뭐 어쩔 수 없지.”

따악!

왕진항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삼혈사랑 앞으로 나온 타구봉이 바람을 가르며 떨어졌다.

타타타타타-!

“으으으악!”

“아악!”

강박은 온몸을 내려치는 타구봉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보통 취조는 고문을 하더라도 중간중간 쉬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개방의 거지들은 달랐다.

이대로 계속 맞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자…… 암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차라리 고통 없이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멈춰라. 이놈들이 말을 할 모양인가 보군.”

“네…… 소…… 인들…… 이…… 했…… 습니다.”

“후, 그렇군. 당연히 네놈들 짓인 줄 알았다. 그럼 하나 더 묻겠다. 네놈들에게 살인청부를 의뢰한 놈이 누구이지?”

“저…… 기…… 죽은…… 자…… 입니다.”

“허허, 죽은 놈 말고, 제대로 살아 있는 놈을 말해라.”

“저…… 희들은…… 저…… 자에게…… 청부를 의뢰 받았습…… 니다.”

“안 되겠군. 좀 더 맞아야겠어.”

“정…… 말……!”

퍽!

강박의 허리에 타구봉이 떨어졌다.

“크억……! 진…… 짜…… 모르…….”

왕진항은 타구봉을 내리치는 광경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세 명 모두 흠씬 맞으면서도 살인청부를 의뢰한 인물은 모른다고 했다.

‘음…… 정말로 모르는 모양이군.’

그의 시선이 중독되어 죽은 시체에게 향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젠장…….”

개방에서 찾아낸 것은 황안촌장을 죽인 범인이 삼혈사랑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 * *

까아앙!

까아앙!

득출은 대장간에서 받아 온 경첩을 가지고 문을 수리하는 중이었다.

‘……아무도 없지?’

득출은 고개를 돌려 창고 안에 든 물건들을 슬쩍 보았다.

그러고는 창고 밖을 두리번거렸다.

문 밖을 두 명의 표사가 지키고 있었다.

‘지금이다.’

득출은 자연스럽게 가장 가까운 물건 더미에 손을 집어넣었다.

‘됐다.’

손안에 무엇인가 잡혔다.

스윽.

그는 물건을 빠르게 꺼낸 뒤 수리한 경첩 사이에 넣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가슴이 쿵쾅거리며 터져 나갈 듯했다.

‘휴우…….’

손과 발이 덜덜 떨렸다.

일을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득출은 도구들을 작업통에 대충 던져 놓고 창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몇 걸음 내디딜 때였다.

“이봐.”

‘헉……!’

뒤에서 창고를 지키던 표사가 그를 불러 세웠다.

“아…… 예예…….”

등에서 땀이 주룩 흘렸다.

“똑바로 고쳤어?”

“예에, 이제 똑바로 닫힐 것입니다.”

“그래? 수고했어.”

꾸벅.

득출은 얼른 허리를 직각으로 굽혔다.

“네, 수고하십시오.”

돌아선 그는 그제서야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죽…… 는 줄 알았네.’

어둠이 내릴 무렵.

배독표국에서 한 무리가 밖으로 나왔다.

잡일꾼들 동료가 손을 가볍게 꺾으면서 물었다.

“득출이, 오늘 한잔 어떤가?”

“미안하네. 동생 몸이 안 좋아서 오늘은 안 되겠어.”

“그래? 크크크, 강 표두가 한잔하라고 몇 푼 쥐여 주던데…… 한입 덜었구만.”

“많이 마시게나. 난 그만 가보겠네.”

득출은 동료들과 대충 인사를 한 후 집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끼이익.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스윽-

그 순간, 문 옆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엄마야!’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리자, 낮에 만났던 남하림과 어려 보이는 네 명의 거지들이 보였다.

“제 동료들이에요.”

“아이고, 간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예예…….”

득출은 손을 내밀고 있는 남하림을 보며 허리춤에 손을 깊숙이 넣었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남하림은 받은 물건을 당무독에게 건넸다.

스슥.

당무독은 헝겊을 풀어 안에 든 물건을 확인했다.

끄덕.

자신들이 찾던 물건이 맞았다.

“수고했어요. 그럼 이거 받으시고.”

“……?”

금 덩어리가 아니고 한 장의 종이였다.

“조용할 때 이걸 가지고 개봉에 가면, 지붕 색이 푸른색으로 된 집이 있을 거예요. 거기에 가서 양삼이란 사람을 찾아 보여주면 돼요.”

“아…… 네,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요건 나중에 동생들 맛있는 거나 사 주시고요.”

남하림은 그에게 은전 두 닢을 더 얹어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득출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푹 숙였다가 폈다.

하지만 앞에 있어야 할 다섯 명의 어린 거지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 어디 갔지?’

* * *

“됐어.”

남하림은 만족했다.

황안촌에서 몰래 반출된 속각이 배독표국에 운송된 사실만으로도, 북방상국에서 거래를 한다는 증거가 충분했다.

“하림, 이제 계획은?”

“배독표국에 쳐들어가야지. 공식적으로 세상에 이 사실을 알리면 돼.”

“우리끼리?”

성철각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표국의 표두와 표사도 무인들이었다.

“철각의 말이 맞아. 우리끼리는 힘들어.”

이휘연도 한마디 나섰다.

“형, 굳이 나설 사람도 많은데 우리끼리 갈 필요는 없어요.”

“누구를 말하는 거냐?”

“주위에 널린 게 본 방 제자들, 개방 거지잖아요.”

“아하, 맞네요. 하림 형, 근데 여긴 처음인데 어디에서……?”

“유도야, 어디긴 어디겠어. 거지들이 있는 곳이.”

“어어…….”

“네가 무독과 같이 이걸 가지고 가서 거지들을 찾은 뒤 사실대로 가르쳐 주고 전부 끌고 와. 우린 표국을 지켜보고 있을게.”

“아, 알겠어요. 최대한 빨리 올게요!”

당무독과 팽유도는 연안촌을 향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형, 우리도 가요.”

“알겠다.”

* * *

야숙.

바닥 위에 깔아놓은 비단천 위로 누운 남하림은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휘연 형, 내가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뭘?”

남하림 옆으로 이휘연과 성철각도 나란히 누워 있었다.

“우리 완전 거지 같잖아.”

“…….”

“따뜻한 집 놔두고 밖에 누워 있잖아. 십오 년 사는 동안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하긴…… 넌 그럴 수도 있겠군. 난 무당산에 있을 때 가끔 지금처럼 누워서 밤하늘을 많이 봤지.”

“좋았어?”

“아니. 혼자 누워서 보니 서글프고 재미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나쁘지 않군.”

“음…… 뭐…… 나도 나쁘다는 건 아니야. 같이 별을 보니 좋아. 근데 하늘에 별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네.”

세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휘연이 상체를 일으켰다.

“형, 왜 그래?”

“사람들이 오고 있어.”

두두두두-

남하림도 어둠 속에서 한 무리들이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무독하고 유도도 같이 있어요.”

당무독과 팽유도는 연안분타의 개방도를 찾아 몽땅 끌고 배독표국으로 왔다.

남하림이 그들 앞으로 다가섰다.

“하림 형!”

팽유도는 앞으로 나온 세 사람 중 남하림을 보며 소리쳤다.

연안분타주 삼강혼은 아직까지 완전히 믿음이 가지 않았다.

황안촌 사건에 대해서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당무독과 팽유도가 황안촌에서 몰래 반출된 속각이 배독표국으로 운송됐다는 말을 전했다.

삼강혼은 앞으로 나온 남하림을 천천히 살폈다.

특이한 복장에, 얼굴에선 거지 티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항걸님의 제자라고 들었다.”

“네, 맞아요.”

“배독표국에 이게 있다는 것이 확실한 정보냐?”

“확실해요.”

그도 본 방에 이상한 놈이 입방했다는 소문은 들었다.

‘흠…… 그 녀석이 이 녀석이군.’

“만일 네놈의 말이 거짓이라면 본 방이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자신이 없다면 빠지세요.”

“뭣이?”

“제가 믿음이 안 간다면 그냥 빠지셔도 된다고요. 제가 듣기로 개방도는 협의를 위해서라면 앞뒤 물불 안 가린다고 했는데…… 아닌 모양인가 봐요. 이것저것 따지는 걸 보면.”

삼강혼은 헛웃음이 나왔다.

“헛. 이놈, 소문대로 골 때리는 놈이군. 나보고 자신이 없으면 빠지라고?”

“네, 맞아요.”

“내가 빠지면 어떻게 하려고? 네놈들끼리 쳐들어간다는 말은 아니겠지?”

“왜? 못할 것 같아요? 우린 진정한 개방의 협을 지닌 걸협오성(乞俠五星)이라고요.”

“걸협오성?”

“맞아요. 멋지죠?”

척.

남하림은 하늘 위를 가리켰다.

“저기 보이시죠?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처럼 우린 거지들 사이에서 빛나는 별이에요.”

“…….”

삼강혼은 웃음이 튀어나오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툭.

당무독은 성철각의 옆구리를 살짝 건드렸다.

“야, 걸협오성이 뭐야?”

“어…… 나도 몰라.”

남하림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휘연 형, 우리끼리 가야겠어.”

“알겠다.”

휙.

두 사람 곁으로 팽유도가 빠르게 붙었다.

“형, 나도 걸협오성인데 당연히 함께 가야지!”

삼강혼은 잠시 움직이지 않고 다섯 명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남하림이 배독표국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멈춰라!”

배독표국의 정문을 지키던 위사가 가슴을 내밀며 소리쳤다.

‘뭐야? 거지들이잖아.’

첫 인상은 그냥 거지였다.

그런데 자세히 볼수록 뭔가 이상했다.

“동냥질을 하려면 날이 밝을 때 와야지. 썩 물러가라!”

“배독표국의 국주를 만나러 왔어요.”

남하림은 위사의 눈을 보며 똑바로 이야기했다.

“뭣이? 방금 네놈이 국주라고 했나?”

“맞아요. 바로 들었어요.”

“허어? 이놈이 정신이 나간 놈이 틀림없군. 야밤에 동냥을 왔을 때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맞고 쫓겨나기 전에 썩 꺼지지 못할까?”

“휴우, 살면서 요즘처럼 미쳤다는 말을 많이 들은 적도 없을 거야. 진짜 미치는 게 어떤 건지 보여줄까요?”

“쯧쯧, 어린놈이 정신줄을 완전히 놓았구만.”

위사는 남하림을 밀치기 위해 손을 앞으로 뻗었다.

퍽!

하지만 그 전에 남하림의 주먹이 그의 배를 가격했다.

“우욱-”

위사의 허리가 앞으로 굽어졌다.

순간 야식으로 먹었던 오리고기를 토할 뻔했다.

“이놈의 거지 새끼가!”

동료가 당하자 그 옆에 있던 위사가 남하림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성철각의 발이 빨리 회전했다.

피이이잉-

부드럽게 내리찍는 각법의 위력은 찰졌다.

위사를 정리한 남하림이 정문을 가리켰다.

“유도야, 한 번 내리쳐 봐.”

“으응! 알았어요.”

팽유도는 등에 멘 반도를 뽑은 뒤 표국 정문을 향해 도법을 펼쳤다.

콰아아앙!

문이 흔들거리며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했다.

퍼어엉!

때를 맞춰 남하림이 한 발을 내디디며 일권을 날렸다.

콰아아아앙!

문이 형체도 없이 나가떨어졌다.

“하하! 가자.”

삼강혼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입을 턱 벌리고 배독표국으로 들어가는 다섯 명을 보았다.

“아이고, 저 미친놈들…….”

정말로 안에 들어갈 줄은 몰랐다.

“분타주님, 우린…… 어쩌죠?”

“하아, 난리 났군. 뭣들 하느냐? 저놈들을 따라 들어간다.”

“옛, 알겠습니다.”

연안분타 소속의 개방 거지들도 오랜만에 신이 난 표정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거 참, 저놈들도…….’

그동안 그들도 심심했던 모양이다.

물론 자신도 마찬가지.

삼강혼도 곧이어 신형을 옮기며 배독표국으로 향했다.

개방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걸협오성의 전설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