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14화 (15/328)

14. 거지 소년을 만나다

‘흐으음.’

실룩.

황안촌장의 집이 불에 탄 현장으로 들어서자 코를 찌르는 연기 냄새가 가득했다.

외조백단의 단원 중 목소리가 큰 악석구가 외쳤다.

“물러서시오! 우린 개방에서 왔소이다!”

한 무리의 거지들을 본 구경꾼들은 다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고개를 빳빳하게 든 거지 무리들.

보통의 거지들이 아니라 개방 소속의 거지들이었다.

“개방의 협객들이시다.”

화재 현장까지 막혀 있던 길이 순식간에 뻥 뚫렸다.

구경꾼들은 화재 현장으로 들어가는 외조백단을 보며 수군거렸다.

“근데…… 저 소년도 거지인가?”

얼핏 보기엔 거지 복장처럼 보이지만, 앞서가는 이들과 달리 깨끗한 모습을 한 소년을 본 구경꾼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멈추시오.”

화재 현장 앞을 지키던 병사가 현장 입구에서 창을 세우며 막아섰다.

척!

우창이 개방의 신패를 내밀었다.

“우린 개방에서 왔소이다.”

“아, 죄송합니다. 개방의 대협이시군요. 안으로 들어가셔도 됩니다.”

“고맙소.”

우창은 대답을 하면서 남하림을 슬쩍 보았다.

화재 현장까지 오는 동안, 위용이 넘치는 개방도의 모습에 많은 백성들이 존경을 표하고 있었다.

“봤지? 본 방이 어떠한지?”

끄덕.

남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거지이지만요.’

일반 백성들의 경외감을 받고 있을진 모르나, 어차피 자신에게는 거지일 뿐이었다.

우창은 당당하게 들어섰다. 곧장 남하림도 외조백단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섰다.

화재 현장은 처참했다.

시꺼멓게 탄 재밖에 보이지 않았다.

코를 마비시키는 화염과 비릿한 냄새가 한꺼번에 진동했다.

‘쩝…….’

우창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먼저 관군에서 나와 정리를 한 듯했다.

바닥 한편에 놓인 시체들이 거적때기에 덮여 있었다.

우창은 시체를 살펴보기 위해 거적때기를 들었다.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군.’

불에 완전히 탄 시신들과 반쯤 탄 시체들이 함께 놓여 있었다.

우창은 인상을 쓰며 한 구씩 살폈다.

남하림도 그의 뒤에 바짝 붙어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우창은 시체들을 훑어본 뒤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음…… 살인자는 세 놈 같군.”

“왜 그렇죠?”

“그건……!”

그러다 갑자기 들려오는 물음에 무의식적으로 대답할 뻔했다.

‘노, 놀래라…… 이놈이 언제 뒤에 왔어?’

우창은 가까이 붙어선 남하림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남하림은 우창의 시선에는 신경 쓰지 않고 시체만을 주시하면서 물었다.

“왜 세 놈의 짓이라는 거죠?”

“잘 들어라. 아, 네놈이 좋아서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니다. 여기 시체의 가슴을 봐라. 길게 잘린 흔적이 보이지? 단칼에 이런 상처를 낼 수 있는 무기는 도(刀)밖에 없다.”

“아하.”

“그리고 이 시체의 심장에는 좁은 상태에서 깊게 찔린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런 상처를 낼 수 있는 무기는…….”

“검이군요.”

‘허어, 제법이군.’

단번에 알아맞혔다.

우창은 바로 옆에 놓인 시체의 허리 부분을 가리켰다.

“이 흔적은 확실하지 않아. 두 경우와 달리 미세하게 시퍼런 흔적이 있어. 이 시체는 아마…… 독에 중독된 것 같다. 다르게 죽은 것으로 봐서 살인자는 최소한 세 놈이라는 결론이 나오지.”

“오…… 대단하네요.”

남하림은 진심으로 좀 감탄했다.

그동안 놀고먹기만 하는 줄 알았던 개방이 새롭게 보였다.

“짜식, 이 정도는 우리 외조당에선 기본이지.”

“멋져요.”

남하림의 표정에서 건성이 아닌 진심이 읽혔다.

우창은 기분이 좋아졌다.

“함부로 만지지 말고 여기 주위를 살펴봐. 이상한 게 있으면 먼저 말하고.”

“알겠어요.”

남하림은 거적때기를 다시 덮기 전에, 남아 있는 다른 시체들을 보았다.

유난히 작은 아이들의 주검도 있었다.

‘어떤 놈들이 저런 아이들까지…….’

남하림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장면이었다.

외조백단 단원들은 불에 탄 현장으로 들어가서 혹시나 단서가 될 만한 게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남하림은 마음의 충격에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화재 현장을 구경하는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어?’

그때 한구석에 숨어 있는 열 살 정도의 아이가 보였다.

시커멓게 때가 묻은 거지 소년처럼 보였지만, 겁에 질린 채 당장에라도 울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억지로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남하림은 천천히 일어나 딴짓을 하는 척 움직였다.

스윽-

그리고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가면서 크게 돌아섰다.

‘아직 눈치 못 챘어.’

남하림은 화재 현장을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멍하니 앞을 보는 거지 소년을 주시했다.

그러고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거지 소년의 뒤로 걸어갔다.

입가에 미소를 띠며 거지 소년의 뒤로 다가선 남하림은 그가 놀라지 않도록 양손으로 살짝 안았다.

“괜찮아. 가만히 있어.”

“누, 누…… 구…….”

거지 소년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을 안은 남하림을 올려다보았다.

“이 녀석이, 여기서 뭐 하냐? 밥 먹으러 가야지?”

“……어, 어……!”

놀라 발버둥 치려던 거지 소년은 안심시키려는 듯 다정한 남하림의 품에 점차 얌전해졌다.

남하림은 얌전해진 거지 소년을 양팔로 부드럽게 안아 올려 현장에서 빠져나왔다.

화재 현장에 있던 사람들 중, 남하림과 거지 소년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 * *

남하림과 거지 소년은 화재 현장에서 멀어졌다.

덜덜덜.

추워서 몸을 떠는 것인지 아니면 두려움에 떠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남하림이 거지 소년의 손을 잡으며 안심시켰다.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길을 지나가니 좌우로 음식 냄새가 풍겨왔다.

꼬르륵.

거지 소년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만두 먹을까?”

남하림은 거지 소년을 데리고 만두 가게 앞에 섰다.

“어서 옵…….”

만두 가게 주인이 힘차게 인사하려다 앞에 선 두 명의 거지 소년을 보았다.

‘거지?’

만두 가게 주인의 시선이 남하림의 아래위를 여러 번 훑었다.

스윽-

“진짜 거지처럼 쳐다보지 마세요.”

“…….”

남하림이 은전 한 닢을 내밀었다.

“열 개만 주세요.”

“어…… 어…… 알겠습…… 니다.”

가게 주인은 얼른 봉지에 만두를 담았다.

“가자.”

남하림은 한 손엔 봉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론 거지 소년의 손을 잡고서 다시 걸었다.

그러고는 길을 지나면서 조용한 곳을 살폈다.

‘저기가 좋겠다.’

남하림은 다정하게 거지 소년의 손을 잡으며 편안한 장소를 찾았다.

‘크음, 내가 여기에 알아서 찾아올 줄은…….’

다리 밑.

거지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장소.

누가 봐도 거지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장소였다.

거지 행색의 두 사람이 다리 밑으로 가는 모습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잠시만 여기에 앉아서 쉬자.”

남하림은 만두를 꺼내 거지 소년에게 주었다.

“배가 고픈 것 같은데 천천히 먹어.”

“네…… 에.”

거지 소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입안에서 맴돌았다.

조금씩 만두를 베어 먹던 거지 소년은 먹는 것을 멈추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흑…… 흐으윽, 흐윽…….”

남하림은 그저 가만히 지켜보았다.

거지 소년은 반각을 그대로 울고 나서야 울음을 그쳤다.

“……흑, 고맙습니다.”

“고맙긴. 일단 천천히 먹어. 아직 많이 있다.”

거지 소년은 단번에 네 개째의 만두를 쉬지 않고 먹었다.

“더 줄까?”

“아니…… 이제 괜찮아요.”

남하림과 거지 소년은 쪼그리고 앉아 다리 밑으로 흐르는 개천을 보았다.

“이름은 뭐야?”

“동진부라고 해요.”

거지 소년 동진부는 배가 부른지 처음과는 달리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저어…… 개방에서 온 게 맞아요?”

“개방을 알아?”

“네. 당연하잖아요.”

“후후후, 녀석. 근데 왜?”

“아니…… 그냥요.”

남하림은 동진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선뜻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남하림은 재촉하지 않았다.

“조금 이따가 난 돌아가야 하는데 진부 집이 어디야?”

“…….”

동진부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

남하림은 팔을 뻗어 소년을 바로 끌어당겼다.

“나하고 같이 갈래?”

“……개방에요?”

“아니. 개방은 거지들만 가는 곳이야. 진부는 거지가 아니잖아.”

“네, 전 거지가 아니에요.”

“후후, 그럴 줄 알았다.”

옷과 얼굴이 더러울 뿐 동진부의 모습은 거지가 아니었다.

우선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

“내가 아는 집이 있으니 함께 가자. 걱정 안 해도 돼.”

“네…….”

동진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

한편, 화재 현장을 조사하던 우창은 고개를 돌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남하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 녀석이……? 설마 도망간 건 아니겠지? 혹시 그놈 어디 갔는지 본 사람 없어?”

외조백단 단원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 볼 뿐, 남하림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 * *

끼이익-

어둠을 깨우는 소리.

벽을 뚫고 만든 동굴 창고로 두 명의 사내가 들어갔다.

‘으음.’

순간 코를 마비시킬 정도의 냄새가 동굴에 진동했다.

앞선 중년 사내가 횃불을 앞으로 내밀었다.

한편에 쌓아놓은 물건 더미에서 강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뒤에 따르던 사내의 입꼬리가 위로 말렸다.

“크크크, 언제 맡아도 좋은 향기군.”

사내가 물건 안으로 손을 넣었다.

진득한 느낌.

그러고는 손가락 끝에 묻어 나오는 진액을 혀로 핥았다.

부르르-

사내는 몸을 떨었다. 강한 맛에 온몸이 짜릿했다.

“올해도 좋군. 요 정도면 최상의 등급이야. 부촌장, 준비한다고 고생했어.”

“고맙습니다.”

“다음에는 이보다 세 배 정도의 양을 준비할 수 있겠지?”

“…….”

“허허, 자네를 위해서 거추장스러운 것을 치워주지 않았나?”

“저어…… 숙항 님. 세 배까지는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무슨 걱정이 있지? 자네를 막을 만한 사람은 없을 텐데.”

“그게…… 항상 개방의 거지들이 관리하고 있어 그들의 눈을 피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개방이란 말이 나오자 숙항은 바로 인상을 썼다.

“개방 거지 놈들이 문제군. 그놈들에 대해선 상부에 보고를 할 테니, 여하튼 자네는 무조건 세 배의 양을 조달해야 한다. 만일 준비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겠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좋아. 자네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다네.”

“…….”

숙항의 말은 협박이었다.

촌장의 집이 불에 탄 것처럼 얼마든지 자신도 죽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부촌장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소인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세 배의 양을 마련하겠습니다.”

“훗, 알겠네. 부촌장, 그대로 상부에 보고하도록 하지.”

* * *

어둠이 짙어진 밤길.

협의문으로 걸어가던 남하림은 그때까지도 개방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었다.

이윽고, 협의문에서 누군가 어둠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남하림을 보며 소리쳤다.

“저기 옵니다!”

우르르르.

한 무리의 개방 거지들이 몰려들었다.

그들 중 가장 먼저 달려온 얼굴은 우창이었다.

“이 자식이……! 어디서 놀다가 오는 길이야?!”

반갑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 목소리였다.

타아앙!

위한소는 앞에 놓인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제정신인가?”

그의 앞에 고개를 숙인 두 사람.

외조백단주 우창과 남하림이었다.

“아무리 임시로 차출할 수 있다고 해도 겨우 일결이 된 지 며칠도 안 된 녀석을 사건 현장에 데리고 갈 수 있단 말인가?”

“법개님,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일장로께서 지금 난리도 아닐세. 그리고 녀석을 데리고 갔으면 똑바로 책임질 것이지, 어디 갔는지도 모른다는 말에 외조당에 당장 찾아가겠다는 그분을 겨우 말렸네.”

“…….”

개방 최고 어른인 일장로의 성정이 어떠한지 한동안 잊고 있었다.

방주조차 방주령이 아니고서는 어찌할 수 없는 존재였다.

“저어, 법개님.”

남하림이 멋쩍은 표정으로 위한소를 불렀다.

“할 말이 있느냐?”

“우 단주님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몰래 나간 건데…… 괜한 사람 잡는 게 아닌가요?”

“물론 네가 잘못했지. 엄청 많이. 그런데 우 단주는 중간에 너를 책임지지 못했다는 게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제가 몰래 나갔는걸요. 우 단주님이 저만 보시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 사부께 가서 제가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겠어요.”

“……허?”

위한소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는 하림의 모습에 속으로 놀랐다.

‘이 녀석, 또 다른 모습인데?’

지금까진 어른에 대한 공경심이라곤 눈곱만큼도 볼 수 없었다.

어쩌면 개방에서 사부를 모시면서 공경심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책임감을 보이는 모습이 좋았다.

딱 여기에서 끝이 났다면.

“우 단주님은 걱정 마세요. 제가 몰래 사라진 게 잘못이라면 책임을 질게요. 난 또 그냥 돌아가면 되는 줄 알았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이런 건 안 가르쳐 준 개방이 잘못했네요?”

“…….”

잘 나가다 뜬금없이 이야기가 이상해졌다.

남하림은 말을 이었다.

“난 교육을 못 받아서 그런 거라고요. 이건 분명 개방 책임인 것 같아요.”

위한소와 우창은 동시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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