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동거를 시작하다
우르르르-
콰아아앙.
강룡십팔장 감운뇌벽(監雲雷霹)의 초식이 연무장의 중앙에 떨어졌다.
휘익.
일장로 장두철은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멋지겠지?’
그는 턱을 비스듬히 치켜 올린 모습으로 떨어져 있는 남하림을 보며 씨익 웃었다.
“어떠냐? 오 성 정도의 내력으로 펼쳤는데도 엄청난 위력이지 않으냐? 크하하하.”
“우와, 솔직히 대단해요. 지금까지 많은 무공을 견식했지만 사부님이 펼치신 강룡십팔장보다 강한 위력은 보지 못했어요. 멋져요.”
남하림은 엄지를 치켜세우며 격양된 표정을 지었다.
‘…….’
뭔가 아부가 많이 섞인 목소리였지만 기분은 좋았다.
“정식으로 배워볼 테냐?”
“좋긴 한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어요.”
“왜? 왜 안 된다는 거지?”
강룡십팔장을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 기연이라 할 수 있었다.
더구나 가르쳐 주겠다고 애원을 하고 있었다.
장두철은 안타까웠다.
하림은 강룡십팔장을 익히기에 강한 완벽한 조건을 타고났다.
무공을 가르치기 전에 남천상국에서 무공을 익혔다고 해서 내력을 살폈다.
특이하게도 내공의 무공이 아닌 외공을 익힌 몸이었다.
다행히도 내공심법을 익히지 않았기에 단전은 깨끗하게 보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완벽한 게 있었다. 어쩌면 천운이 장두철에게 이어진 게 아닌가 싶었다.
외공을 수련한 남하림의 신체는 단단했다.
처음에는 금강불괴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어릴 적 외공을 익히기 전부터 몸이 단단했다고 한다. 그 후 다섯 살이 되면서 무공을 처음 배웠다고 했다.
남하림을 가르친 사부.
하림은 그가 얼마나 유명한 무림의 고수인진 알지 못했다.
그냥 아버지가 모시고 온 뒤 개방에 오기 전까지 십 년 동안 꾸준히 수련했을 뿐.
천강신인(天鋼身人) 상무우.
장두철은 설마 하림에게서 그의 이름을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또한 자신처럼 중원십기의 일인이었다.
그야말로 외강의 절대고수.
이십 년 전 은거에 들어섰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가 어떤 연유로 하림의 무공 사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에게 외공을 익힌 하림의 모든 조건은 강룡십팔장을 익히기에 완벽했다.
순간적으로 큰 힘을 쏟아내야만 하는 강룡십팔장을 연이어 펼치기 위해선 많은 내력과 더불어 강한 신체가 요구됐다.
장두철도 개방의 다른 거지들과 비교해 신체가 뛰어났지만, 강룡십팔장을 극성으로 삼 초식 이상 펼치기엔 무리였다.
‘이놈은…… 걸왕의 뒤를 이을 수 있건만.’
장두철은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잖아요. 개방의 비전을 익힌다면 완전 코 꿰이는 건데.”
“개방의 제자가 싫은 것이냐?”
“싫은 게 아니에요. 그냥 저하고는 안 맞는 것뿐이에요.”
“그건…… 네가 아직 어려서 모르는 것인데, 세상일은 맞고 안 맞고 따지는 게 아니란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이것이라면 싫어도 가야 하고, 좋아도 가야 하는 것이지.”
“사부님 말씀대로라면 제가 가야 할 길은 개방의 거지라는 거네요.”
“그렇지, 그렇지. 본 방에 오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
“네가 상 사부에게 무공을 익히게 된 것도 본 방에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보면 되느니라.”
‘어휴, 괜히 말했어.’
사부 상무우의 이름을 듣고 난 뒤 더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사부님, 그냥 간단한 것들만 배우면 안 될까요? 개방의 비전을 함부로 알려주면 안 되잖아요.”
“허허, 당연히 함부로 알려주면 안 되지. 근데 넌 내 하나밖에 없는 제자가 아니더냐. 당연히 익혀야지.”
“제 말은 그게 아니고요. 전 십 년 뒤에 집으로 돌아갈 텐데 강룡십팔장을 익힌다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게 분명해요.”
“그 문제 때문에 익히기 싫다는 것이냐?”
“…….”
남하림은 답답했다.
‘하아, 어째 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시는지 모르겠네.’
그냥 싫다는 말을 하기 싫어 돌려서 말하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하림아, 그 문제라면 내가 전적으로 책임질 수 있다. 넌 그냥 아무 일 없이 무공을 익히면 될 뿐이니라.”
사부 장두철과는 이야기의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포기란 말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도 한 고집 하는데, 사부는 서너 배로 고집을 하시니…….’
솔직히 강룡십팔장의 무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무공은 좀 멋진 것도 같고, 배워놓으면 한두 번 써먹을 일도 있을 것 같기는 했다.
“혹시…… 치사하게 제가 무공을 익혔다고 해서 못 돌아가게 잡는 것은 아니겠죠?”
“본 방은 그 정도로 치사하게 약속을 어기지는 않지. 그냥 깔끔하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주겠다.”
“음…….”
장두철은 고민하는 남하림의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반쯤 넘어왔어. 크크크, 이놈아, 네가 강룡십팔장을 배운 이상, 네가 어디에 간들 개방의 제자라는 딱지가 죽은 뒤에도 따라붙을 것이다!’
“뭐어…… 네가 원한다면 인장도 찍어줄 수 있다.”
“됐어요. 전 그렇게 계약서를 남발하지는 않아요.”
“허허허, 그러신가?”
남하림은 결국 계약서까지 찍어주겠다는 장두철을 믿기로 했다.
“좋아요. 사부님께 무공을 배우겠어요.”
남하림의 승낙이 떨어지자 장두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덥석.
그는 단번에 남하림을 껴안았다.
“욱……!”
하림은 얼른 숨을 참으며 장두철에서 퍼져 나오는 나른한 냄새를 막았다.
떨어지기 위해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풀려나올 때까지 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장두철이 스스로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하림이었다.
‘빨리 떨어져 주세요! 으아아아!’
* * *
샤샤샤샤-
어둠 사이에서 바람 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타앗.
난고현 황안촌장의 집 내원 안뜰에 세 명의 사내들이 내려섰다.
이마에 긴 상처의 검상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사내는 손짓으로 다른 두 명의 사내들에게 각각 방향을 지시했다.
#NAME?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두 명의 사내는 유랑(游廊)을 따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불이 꺼져 있는 건물로 다가섰다.
스릉.
동료 사내들에게 명을 내린 그는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허리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고요함을 깨웠다.
그러고는 본채 안으로 들어섰다.
‘훗. 세상모르고 자고 있군.’
방문 너머로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는 문을 열고 침상 위 촌장 내외를 보았다.
‘찝찝하지만 우리도 먹고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했다.
살인 청부의 대상이 무인이 아닌 게 걸렸지만 일을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잘됐군.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을 수 있어서.’
푹.
그는 단칼에 촌장 부부의 목과 심장을 찔렀다.
“커어억.”
짧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뜬 촌장은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사내가 내원으로 나왔다. 두 명의 동료 사내들도 일을 마무리를 한 후 밖으로 나왔다.
“끝났나?”
“눈에 보이는 놈들은 정리를 다 했소이다.”
“그럼, 여기를 완전히 마무리하도록.”
“알겠수다.”
그들은 각 채로 다니면서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화르르.
일각이 지나자 촌장의 집은 화염에 잠기기 시작했다.
밤하늘을 치솟는 불꽃은 멀리 개봉으로 퍼져 나갔다.
“후후후, 우리의 존재를 아는 놈은 없겠지?”
“대형, 한 명도 빠짐없이 죽였습니다. 우리 얼굴을 본 자는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둘째 사내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만약 완전히 죽지 않았다고 해도 화염에 싸인 집에선 살아남을 수 없었다.
“좋아. 이젠 잔금을 받으러 가볼까.”
세 명의 사내는 불에 타고 있는 촌장의 집에서 떠났다.
꿈틀…….
그리고 화염 속에서 무언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 * *
늦은 시간.
남하림은 집법당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지? 사고 친 건 없는데?’
북방상국과의 일이 있은 후 며칠 동안 조용히 지냈다.
집법당으로 들어서자 사전에 연락을 받았는지 제재 없이 곧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저들은……!’
집법당에 도열해 있는 네 명.
하림도 새롭게 개방에 나타난 그들이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못해 일결을 받은 후 조련관에서 퇴관해 다른 수련관으로 옮기는 바람에,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진 못했다.
“하림 형!”
팽유도가 안으로 들어선 남하림을 보며 반갑게 소리쳤다.
“어, 유도. 잘 지냈어?”
“네. 하림 형도 오셨어요?”
툭툭.
남하림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팽유도는 며칠 못 본 동안 살이 빠져 있었다.
“고생이 많지?”
“…….”
대답을 하지 않는 팽유도를 보면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대략 알 것 같았다.
“밥은 먹을 만했어?”
“저…….”
팽유도는 거짓말을 잘하지 못했다.
“그렇구나. 알겠어.”
남하림은 위한소의 눈치를 보는 팽유도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때 위한소가 돌아보며 인사를 했다.
“법개님. 저를 부르셨어요?”
“편히 쉬어야 하는 시간인데…… 의논할 문제가 있어 불렀다.”
그의 목소리가 왠지 남하림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뭐지?’
남하림도 눈치를 바로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시죠?”
“그게 말이다. 너에게 부탁할 게 있는 것 같구나.”
그가 부탁을 하겠다는 말에 남하림은 몸이 움츠러들었다.
“우선 여기 네 명과 인사를 먼저 하는 게 좋겠다. 유도와는 이미 아는 사이겠지.”
위한소는 먼저 이휘연부터 시작해 당무독과 성철각을 간단히 소개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남하림이 그들과 같은 처지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남하림은 무당파에서 온 이휘연을 보았다.
첫인상은 누가 봐도 차가워 보였다.
‘무당파의 제자라.’
척.
남하림은 손을 뻗어 이휘연에게 내밀었다.
“반가워요. 남하림이라 해요.”
그는 당돌하게 먼저 손을 내민 남하림을 보았다.
‘괴짜 같은 녀석이 있다고 하더니 이 녀석인 모양이군.’
며칠 조련관에서 수업을 받는 동안 먼저 퇴관한 후보생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최근엔 굵직한 사건까지 있었다.
‘얼굴은 귀엽게 생겼군.’
남하림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기는 처음이었다.
스윽.
이휘연은 손을 내밀며 남하림의 손을 잡았다.
“나도 반갑다. 남천상국에서 왔다고.”
“네. 맞아요. 형은 무당파 출신이라면서요?”
“…….”
무당파의 제자였던 이휘연은 형이라는 말에 익숙하지 않았다.
“무당파에서 큰 사고를 친 모양이네요.”
이휘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위한소를 보았다.
하지만 오히려 위한소가 더 당황하며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분을 안 보셔도 돼요. 그냥 제 생각이었어요.”
“…….”
“간단하잖아요. 무당파는 구파 중에서도 최고 아닌가요? 그런 문파에서 여기에 보낼 제 나이 또래 어린 제자가 없을까요? 뻔하잖아요. 나이도 많은 형이 개방에 왔다면 쫓겨난 것인데……. 그래도 파문을 안 당한 걸 보면 둘 중 하나겠죠. 파문당하기에는 약한 사건이거나 파문시키기에 부담을 느끼거나…….”
피식.
이휘연은 피식 웃었다. 한 가지 사실만으로 자신의 처지를 꿰뚫었다.
“음…… 웃으니 별로네요. 형은 무표정이 매력 있어요.”
“웃긴 녀석이군.”
그가 웃었다는 것은 관심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여태까지 누군가 단번에 마음에 든 적은 없었는데, 이 녀석은 흥미로웠다.
스윽.
이휘연과 인사가 끝난 듯하자 당무독이 이어서 손을 내밀었다.
“난 당무독이라고 해. 나이는 열다섯. 반가워.”
“몇 월생이야?”
“삼 월 초야.”
남하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철각. 나도 무독과 나이가 같아. 난 오 월생이야.”
‘흠…….’
당무독과 성철각의 나이가 동갑인 것을 알게 되자 아쉬움이 먼저 들었다.
동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 같았다.
‘끝났군.’
위한소는 서로 인사가 끝내자 남하림을 슥 보았다.
“하림아.”
나근하게 부르는 목소리만으로 부탁할 게 있다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말씀하세요.”
“알겠다. 으음, 너도 이들 네 명처럼 본 방에 온 것이 아니더냐.”
“……말 돌리지 않으셔도 돼요.”
“여기 이들이 너와 함께 생활하면 어떻겠느냐?”
“지금…… 제 거처에서 다섯 명이 지내라는 말이 맞죠?”
“음, 그런 말이지.”
‘…….’
남하림은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한 명씩 시선을 마주했다.
“하긴…….”
네 사람은 말없이 조용히 있었다.
개방에 와서 가장 힘든 점이 자는 것과 먹는 것이었다.
특별한 경우인 남하림과 달리 네 명은 그저 개방에서 주는 대로 입고 먹고 자는 수밖에 없었다.
팽유도의 얼굴은 첫날보다 살이 빠져 정말로 거지처럼 보였다.
남하림은 한때 자신이 형이 되면 어떨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왠지 안쓰러워 보이는 팽유도를 보면서 챙겨줘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동병상련(同病相憐).
‘서로 거지 팔자가 된 것도 인연인데 함께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하지만 개방에 무작정 따르는 것은 안 돼.’
남하림은 인심을 써주는 척하면서 최대한 실속을 얻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옮겨볼까 생각했는데.’
주는 게 있다면 받는 게 있어야 하는 법.
“법개님, 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좋아요.”
“정말이냐?”
“네. 근데, 좁은 곳에서 다섯 명이 지내기엔 비좁지 않을까요?”
“…….”
“제가 혼자 자는 게 습관이라서…… 다섯 명이 쓰기엔 방이 모자라는데.”
“안 되겠다는 말이냐?”
“그건 아니고요. 방을 더 늘리면 안 될까요?”
“방을 어떻게?”
“제가 알아서 할 테니 허락만 해주세요. 주작남지 끝에 한산한 땅이 있는 것 같던데.”
위한소는 남하림이 말한 땅이 어디인지 떠올렸다. 넓은 주작남지 깊숙한 곳에 거처를 마련하려는 개방의 거지는 없었다.
“음…… 약간 습한 곳인데 괜찮겠느냐?”
“괜찮아요. 움막도 아니고, 습기에 강한 재료로 지으면 십 년 정도는 버틸 수 있겠죠.”
“허허, 그곳에 이미 갔다 온 모양이구나. 습지라서 주거지로 삼기에는 힘든 땅이지 않느냐?”
“지금 있는 곳도 좋지만 조용하게 수련하고 싶어서 마땅한 자리가 있는지 살피다가 찾았어요.”
물론 수련이고 뭐고, 넓고 깨끗하고 편안한 거처가 진짜 목적이다.
“새롭게 짓는다면 자금이…….”
“허락만 하신다면 내정당에서 돈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위한소는 좋든 싫든 다섯 사람을 담당해야 했기에 이들 네 명의 거처까지 짓겠다는 남하림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허허, 알겠다. 방주와 내정당에 보고해 두마.”
끽해야 방 서너 칸 정도의 건물을 간단히 지을 것이니,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그럼 거처를 지을 때까지 비좁아도 함께 지낼게요.”
남하림은 앞으로 함께 지낼 네 사람을 보며 말했다.
“그럼 가죠. 따라오세요.”
이휘연을 비롯한 네 사람은 집법당을 먼저 나가는 남하림을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