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11화 (12/328)

11. 네 명의 동료가 생기다

“하아…….”

십 대 중반의 앳된 얼굴을 한 소년이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뱉었다.

오 척의 작은 키와 야윈 몸에 비해, 소년의 등에는 그의 몸집만 한 도(刀)가 메여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팽유도.

열다섯의 나이로 소년에서 청년으로 들어설 단계였지만, 몸이 다른 소년들과 다르게 야윈 탓인지, 나이보다 많이 어려 보였다.

굵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부터서는 혼자 들어가도록 해라.”

“네. 아버지.”

꿀꺽.

팽유도는 침을 삼키며 아버지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잘 살아남겠다고 다짐했다.

멀리 대개방의 정문인 협의문이 보였다.

“소자,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십 년이지만 오늘부로 개방의 제자가 될 터이니, 항상 팽가의 자존심을 잃지 않도록 해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대답을 하는 팽유도의 모습은 안쓰러워 보였다.

팽가에선 조카나 사촌 형제들에게 따돌림을 받으면서 거의 홀로 자란 아들이었다.

하지만 팽민중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팽가의 내부도 무림과 같았다.

약육강식의 세계.

팽민중은 애써 참고자 했던 마음이 마지막에 흔들렸다.

약한 탓에 팽가의 주류에 낄 수 없었던 외동아들은 가문의 사정에 의해 결국 개방으로 밀려났다.

“한번 안아보자.”

팽민중은 마지막으로 아들 팽유도를 껴안았다.

“역시…… 부자 사이는 이래야 되는데…….”

“……!”

그러다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아들과 떨어진 팽민중은 한 손에 큰 짐을 들고 있는 거지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

근데 거지 소년의 모습이 좀 이상했다.

‘거지 복장인데…… 비단으로 만든 옷이군……. 뭐지?’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릿결은 거지에서 나는 냄새라고는 상상치도 못할 만큼 향긋했다.

그는 남하림과 시선을 마주치며 물었다,

“소협은 누군가?”

“음…… 일단은 개방 거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방 거지라…… 요즘 개방은 소협처럼 입고 다니는지 몰랐구려.”

“아닌데요. 정말로 거지처럼 입고 다닙니다. 여기 오는 길에 많이 보지 않으셨어요?”

남하림의 말대로 오는 길엔 무명천으로 대충 기워 만든 옷을 입은 거지들 천지였다.

“그럼…… 소협은 왜 비단옷으로 된 거지 옷을 입고 있지?”

“제가 더러운 것을 싫어해서요. 거지라고 해서 굳이 비단을 입지 말라는 법은 없어요.”

“아하…… 그렇구먼.”

팽민중의 표정에 안도감이 어렸다.

아들을 개방에 보내면서 가장 염려됐던 것이 멀쩡한 사람을 거지로 만든다는 부분이었다.

“소협께 부탁을 하나 드리고 싶소만.”

“싫어요.”

‘…….’

그는 단칼에 거절하는 남하림의 말에 무안해졌다.

“허허, 무슨 부탁인지 말하지도 않았네.”

“무슨 말을 하실지 알고 있으니까요. 전 남의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얼마 전에도 괜히 나서서 곤란해졌거든요.”

곱다고 안아준 아이가 바지에 똥을 싼 모양이라는 옛말이 생각났다.

‘이 녀석. 상당히 웃긴 놈일세?’

똑똑해 보였다. 하나 누가 가르쳤는지 몰라도 어른에 대한 예의는 없어 보였다.

만일 팽가였다면 볼기짝이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소협의 부친이나 사부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는가?”

“왜요? 그분들께 이르시게요?”

‘…….’

이쯤 되자 팽민중은 조금씩 아래에서부터 열이 올라왔다.

“아니, 그냥 소협에 대해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네. 말하기 싫으면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되네.”

“사부님은 개방의 일장로이신 장, 두 자, 철 자를 쓰시는 분이죠.”

“아니, 항걸님께서 소협의 스승이라는 말인가?”

개방 최고의 무인이라면 당연히 항걸 장두철이었다.

‘음, 그분께선 상당한 호인이라고 알고 있는데…… 제자라는 녀석은…….’

팽민중은 혹시 자신이 보지 못한 뛰어난 인재인가 싶어 남하림을 자세히 살폈다.

남하림은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사람을 왜 그렇게 훑어보죠?”

‘이거 참. 당돌한 녀석일세.’

터무니없는 건방진 모습이었지만 한편으론 거침없이 당당하게 보이는 모습이 묘하게 밉지 않았다.

팽가에서 늘 주눅 들어 있던 아들 팽유도와 다른 모습이라 그런지도 몰랐다.

“소협의 나이는 어떻게 되는가?”

당장에라도 화를 낼 것 같던 표정에서 이제 미소를 짓는 팽민중을 보며 남하림은 선선히 대답했다.

“열다섯요.”

“앗. 나도 열다섯이야. 반가워.”

나이가 같다는 말에 팽유도가 반갑게 남하림을 보았다.

“아, 잠깐.”

남하림은 손을 들어 팽유도를 진정시켰다.

“같은 열다섯이라도 다를 수 있다. 난 정월생이야. 넌 몇 월에 태어났지?”

“…….”

팽유도의 생일은 섣달그믐이었다.

거의 한 해나 차이가 났다.

“난 섣달인데…… 그럼…… 형이네?”

“섣달? 당연하지. 나보다 한참 어려.”

“……앞으로 형이라고 부를까요?”

“……형?”

남하림은 입이 실룩거렸다.

삼남이녀 중 막내였던 그는 형이란 말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형이라는 말을 듣자 가슴 어딘가에서 동생을 보살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다.

결국 남하림은 처음으로 그를 형이라고 부른 팽유도를 보며 인심을 쓰기로 했다.

“좋아. 내가 너에게는 특별히 형으로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지. 지금까지 날 형이라고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넌 정말로 특별한 거야. 알겠지?”

“정말요? 고마워요. 형.”

팽유도는 왠지 대단해 보이는 남하림의 말에 즐거워했다.

그 또한 팽가에 많은 사촌 형제들이 있었지만, 그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한 탓인지 마음 놓고 형이라 부르지 못했다.

‘허허, 형이라 부르는 게 대단한 것이라고? 근데 이놈은 뭐가 좋다고 고맙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군.’

팽민중은 아들과 남하림을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남하림과 팽유도의 대화는 이어졌다.

“난 남하림이야. 너 이름이 뭐야?”

“유도. 팽유도예요.”

“팽씨? 하북팽가 출신이야?”

남하림은 두 부자의 등에 도가 있는 것을 보았다.

“어.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팽씨에 무식한 도를 메고 있는데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하, 그렇구나.”

“보아하니 개방에 거지 되려고 온 것 같은데?”

“어…… 맞아요. 근데 거지가 아니고 개방 제자가 되려고 왔어요.”

“개방 제자나 개방 거지나 똑같은 거야. 유도 너도 불쌍한 팔자다. 어쩔 수가 없군. 형이 앞으로 잘 보살펴 줄게. 들어가자.”

팽유도는 어떻게 할지 망설였다.

팽민중은 다급하게 물었다.

“소협, 어디를?”

“어디긴요. 보아하니 하북팽가에서 개방의 은혜에 대한 보답 차원으로 유도를 보냈잖아요. 아닌가요?”

“맞네.”

“제가 법개님께 안내할 테니 그만 돌아가세요.”

팽민중은 어딘가 정신없이 흘러가는 일에 멍해졌다.

“알겠네. 소협, 이 녀석을 잘 부탁하겠네.”

“걱정 마세요. 제가 책임진다고 하면 대풍이처럼 끝까지 살펴주거든요.”

“음……? 그, 렇구만. 근데 대풍이가 누군가?”

“이러다 우리 대풍이 유명해지겠네. 제가 키우던 개인데 팔자 좋게 지내고 있겠죠.”

“…….”

남하림은 더 이상 볼일이 없는지 손에 든 큰 보따리를 팽유도에게 내밀었다.

“들어.”

“이게 뭔데요?”

“내가 요즘 기력이 달려서 보약 좀 지어온 거야. 이런 건 동생이 드는 거야.”

“아…… 네! 알겠어요.”

팽유도는 보약을 싼 보따리를 들었다.

“가자. 따라와.”

“네, 형.”

팽유도는 앞서가는 남하림의 뒤를 쫄쫄 따랐다.

협의문으로 사라지는 남하림과 팽유도를 보면서 팽민중은 왠지 걱정이 두 겹, 세 겹으로 쌓이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 * *

위한소는 문을 열고 찾아온 남하림과 낯선 소년을 보았다.

“하림아, 뒤에 누구냐?”

“잠깐만요.”

남하림은 팽유도를 앞으로 나오게 했다.

“뭐 해? 니 소개를 해야지.”

“아. 네에! 알겠어요.”

팽유도는 손에 든 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크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하북팽가에서 온 팽유도라 합니다.”

“…….”

인사를 하는 도중 등에 메고 있던 도가 머리 위로 떨어질 것 같았다.

하북팽가의 자손들은 유전적으로 근골이 강대한 편에 속했다.

‘역시…… 약속을 지키기는 했지만…….’

위한소는 이미 받아놓은 팽유도의 신상서를 재차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 선 작은 소년은 팽가의 가주 팽한의 사촌인 팽민중의 외동아들이라 적혀 있었다.

정보에 의하면 팽유도는 하북팽가에서도 존재감이 거의 없는 정도였다.

‘허허, 이런 녀석을 보낼 것이라면 차라리 보내질 말든지.’

팽가는 같은 하북성에 위치한 지역이었기에, 개방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완전히 거절하지 못한 듯했다.

“본 방에 온 이유를 알고 있느냐?”

“네. 아버지께 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개방에서 십 년 동안 지내다가 돌아오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씀은?”

“없었습니다. 그냥 개방에 가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위한소는 답답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온 팽유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등에 멘 도(刀)를 보니 도법을 수련한 모양이구나. 어떠한 도법을 익혔는지 말해줄 수 있느냐?”

“도문십도(刀門十刀)를 익혔습니다.”

“도문십도라면 팽가의 자손들이 익힌다는 기본 도법이 아니더냐?

“맞습니다.”

“허…… 혹시 다른 무공은 배운 게 없느냐? 뭐, 그런 거 있지 않느냐?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나 벽력신공(霹靂身功) 같은 무공.”

“죄송합니다. 제가 미숙해서 세가의 절기들을 익히지 못했습니다.”

‘하긴…… 그런 무공을 익혔다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겠지.’

그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더는 볼 게 없었다.

“알겠다. 여기서 조금 쉬고 있어라. 다른 세 명도 조만간 도착할 것 같으니 함께 방주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야겠다.”

“네, 알겠습니다.”

남하림은 바닥에 놓인 짐 보따리를 들었다.

“법개님, 전 볼일이 끝났으니 가겠습니다.”

“그래, 알겠다. 근데…… 손에 든 건 무엇이냐?”

“이거요?”

남하림은 짐 보따리를 살짝 들었다.

“제가 요즘 몸이 허해서 보약을 지어왔어요.”

“보약을?”

“네. 아침에 일어날 때 기운이 없더라고요.”

‘이놈이 늙은 사람을 앞에 두고……이상하게 몸이 좋아지는 듯한 냄새가 나더라니.’

“허허, 이런…… 나하고 똑같구나. 요즘 나이가 들다 보니 밥맛도 없고, 자주 이마에 식은땀도 많이 흐르고…….”

위한소는 말을 하면서 슬쩍 남하림의 눈치를 살폈다.

“그건 법개님이 운동을 안 하셔서 그런 거예요. 조금만 규칙적으로 움직이면 나아요.”

“이놈아, 그럼 너도 같은 증상이 아니냐?”

“그건 아니죠. 전 한참 클 나이라서 그래요. 게다가 하루에 한 끼밖에 안 먹어서 영양실조에 걸리겠어요.”

“허허, 말이라도 똑바로 해야지. 하루 한 끼를 먹는다고 하지만 고기에다가 해산물까지 푸짐하게 먹지 않았느냐?”

“저어…… 혹시 요걸 탐내시는 건가요?”

남하림의 시선이 짐 보따리를 가리켰다.

“아이고, 너는 나를 그런 치사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더냐?”

“그래요? 알겠어요. 그냥 달라고 하면 드리려고 했는데…….”

“어허, 이 녀석이.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내가 언제 필요 없다고 했느냐? 주면 고맙게 받겠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위한소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짐 보따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부님과 방주님, 그리고 법개님께 드리려고 따로 주문해 놨어요. 특별히 세 분께 드릴 보약은 조금 오래된 하수오도 몇 뿌리 같이 넣어달라고 했어요.”

“허허허, 정말이냐? 몸에 좋다는 그 하수오를? 하기야 거지는 튼튼한 몸이 재산이 아니더냐.”

위한소의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했다.

“그럼 전 갈게요.”

“오냐, 오냐…… 어서 가거라. 허허허.”

* * *

오종은 굳은 인상을 펴지 않았다.

대실소망(大失所望)이라 했던가.

“허허.”

그저 웃음만이 나올 뿐이었다.

“방주님.”

“이보게, 법개. 그래도 혹시나 했네.”

“…….”

“그냥 도로 보낼까?”

“그건 큰 실례를 범하는 행동이라 생각됩니다.”

“그렇겠지? 우리가 욕 듣겠지?”

“네, 그렇습니다.”

“젠장…….”

오종은 개방에 들어온 특별생 네 명을 다시 떠올렸다.

“그래도 무당에서는 제법 신경을 쓴 모양이지 않나?”

“방주님, 차라리 다른 세 곳에서 보낸 녀석들이 더 좋습니다. 유운, 아니, 이휘연은 무당파 후기지수 중에서도 강한 무공을 지녔다고 알려졌지만, 불행히도 하극상을 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하극상을?”

“네. 제대로 파악은 아직 안 됐지만 이대제자인 현자배 도사와 싸우다가 신체에 손상을 입힌 듯합니다.”

“허어…… 어째 하나들 문제가 있는 놈들밖에 없는지.”

오종은 실망감이 들었다.

무당파에서 온 이휘연뿐 아니라 사천당문에서 보낸 당무독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오성이 뛰어났지만 독성을 지닌 재료들을 직접 만질 수 없는 피부였다.

독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미세한 양을 조절해야 하는데, 거친 장갑을 끼면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천당문에서는 이런 녀석을 개방으로 보낸 것이다.

“그러면, 환영각에서 보낸 성철각은 괜찮지 않나?”

오종의 물음에 위한소의 대답은 찬물을 끼얹는 듯했다.

“환영각의 무공은 빠른 움직임으로 환영을 만들어내면서 공격을 펼칩니다. 한데…… 그 녀석은 장신에다가 특히 다리가 길어 빠른 움직임을 필요로 하는 무공을 펼칠 수 없습니다.”

“그럼…… 환영각의 무공을 펼치기에 무리라는 뜻이군.”

“그런 듯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알지 못한 뛰어난 점이 있지 않겠는가.”

오종은 지푸라기라도 있으면 잡고 싶었다.

“없을 듯합니다.”

“허허, 이 사람아. 어찌 그리 쉽게 단념을 하는가. 남천상국에서 온 하림이를 보게. 처음에는 얼마나 골 때리는 녀석이었나. 물론 지금도 천방지축 망아지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몇 달 만에 본 방에 도움을 줄 정도로 쓸 만해지지 않았는가. 아마 그들 네 명도 우리가 찾지 못한 좋은 장점들이 있을 것일세. 자네가 잘 이끌어서 찾아보게나.”

“방주님…… 자신이 없습니다.”

“자네까지 이러면 어찌하나. 내가 알고 있는 법개 위한소는 세상에 겁이 없는 사람이네. 어서 기운을 내고, 각 문파에서 그 아이들을 본 방에 잘못 보냈다는 후회가 들도록 잘 만들어보세나.”

오종은 희망의 끝을 아직 놓고 싶지 않았다.

“아이고……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그들을 맡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본 방에서 이들을 키울 수 있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네.”

위한소는 그의 손을 잡는 오종을 보면서 어깨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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