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7화 (8/328)

7. 사제지간을 맺다

“선선하네.”

어제와 같은 시간.

남하림이 현무북지에 들어섰다.

‘저 녀석이.’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남하림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형개 중향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일장로 장두철에 의해 규율당은 한바탕 전쟁이 일어난 듯 소란스러웠다.

‘저걸 그냥.’

당장에라도 손을 대고 싶었지만 그의 뒤에는 개방의 문도라면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다.

장로전으로 걸어가는 남하림의 걸음걸이는 느릿했다.

‘망할 놈이…… 일부러 저러고 움직이는군.’

남하림은 규율당의 모든 형개들에게 완전히 찍혀 버렸다.

장로전까지 남은 거리는 십여 장 정도.

‘설마?’

느긋하게 걸어가던 남하림은 장로전 앞에 서 있는 희미한 그림자를 보았다.

그 또한 남하림을 보았는지 천둥이 울리는 듯한 소리를 쳤다.

새벽하늘이 흔들거렸다.

“이놈! 빨리 뛰어오지 않고 뭘 하느냐?!”

‘왜 밖에 나와서 기다리고 계시는 거야?’

타타타-

남하림은 몸을 바쁘게 움직였다. 누가 봐도 빨리 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 속도는 걷는 속도에 비해 미세하게 빠를 뿐, 처음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장두철이 모를 리 없었다.

“허얼. 저 녀석…… 정말 재미있는 놈이구나.”

그도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인물은 아닌 듯했다.

휙.

장두철은 남하림이 앞에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도착하자 타구봉을 들었다.

석 자 정도의 길이.

검은 죽봉으로 만든 타구봉이었다.

딱!

“아야!”

“이 녀석아. 너무 티가 나잖아. 잘 봐. 그럴 때는 이렇게 하는 거야.”

장두철은 상체와 하체를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전혀 제자리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남하림의 눈에도 신기했다.

“와아! 정말 잘하시네요.”

“클클클, 괜찮지?”

“멋진데요? 한 번 더 보여주세요.”

“그래?”

남하림의 부탁에 기분이 좋아진 그는 한 번 더 짧게 시범을 보였다.

‘음…….’

유심히 장두철의 모습을 보던 남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멈칫.

‘이 녀석이!’

남하림의 얼굴에 뭔가를 알아차린 듯한 표정이 그려졌다.

“아하, 이제 알겠어요. 어떻게 움직이는지.”

“…….”

장두철은 처음으로 진지하게 표정이 변했다.

“뭘 알았다는 거냐?”

“거지 할아버지가 했던 움직임요.”

“……한번 해볼 테냐?”

“똑같지는 않겠지만 한번 해볼게요.”

남하림은 몸을 흔들며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상체와 하체를 동시에 상반된 방향으로 움직였다.

‘헉.’

비전 신법인 취영화류신보(醉影花流身步)의 도화지류(渡華止流) 초식.

비록 짧게 변초했지만 그걸 한 번 만에 따라 했다.

‘이놈이…… 말로만 듣던 무천의 재질을 가진 놈이란 말인가?’

무천의 재질이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 무재는 확실했다.

와락.

장두철은 손에 든 흑죽타구봉을 던져 버리고 남하림을 껴안았다.

“이놈아…… 어디서 이런 놈이 내 앞에 나타났는고!”

“으악! 왜 이러세요! 쪼오오옴 그만……!”

“안 된다. 죽어도 안 된다. 네놈은 무조건 내 거다. 암…… 내가 가질 테다! 크하하하핫!”

쪽쪽쪽.

장두철은 남하림의 볼을 향해 입을 맞추었다.

“아아아악! 사람 살려! 거지 할아버지가 미쳤다! 사람 살려……!”

“으하하하하!”

남하림의 비명과 장두철의 대소는 장로전의 새벽을 깨우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 * *

장휴정(長休庭).

장로전의 유일한 쉼터로 개방 장로들이 식사를 한 후 편안하게 잠을 자는 용도로 사용되는 곳이다.

장두철은 내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흐흐흐흐.’

남하림을 보는 그의 두 눈에는 금방이라도 꿀이 떨어질 듯했다.

슥슥.

‘진짜 더러워서 못 살겠네.’

남하림은 연신 얼굴을 닦아내고 있었다.

“이 녀석아. 인상 좀 펴라.”

“아직도 냄새가 나잖아요. 얼마나 침을 발랐으면…….”

“허허허, 그래, 미안하구나. 내가 기분이 좋아서 그만 흥분을 했다.”

“오늘은 그만 갈래요. 빨리 씻고 싶어요.”

“알았다. 빨리 보내줄 테니 조금만 더 이야기하다가 가면 안 되겠느냐?”

“좋아요. 이각만 있으면 되죠?”

“이각은 너무 짧은데?”

“아니! 이각요! 이것도 겨우 참을 수 있는 시간이라고요.”

“그래, 오늘은 내가 양보하마.”

장두철은 크게 인심을 쓰는 표정을 지었다.

‘후후후. 오늘만 날이겠냐? 많은 날이 있지.’

남하림은 갑자기 말없이 자신을 보며 씨익 웃는 장두철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자꾸 왜 보면서 웃으세요?”

“하하하, 그거야 네가 좋으니깐 웃는 게 아니냐.”

“부탁 하나 드려도 돼요?”

“뭔데?”

“저를 좋아하지 않으시면 어떨까요?”

“크크크, 싫다!”

“제가 왜 좋으세요? 말도 잘 안 듣는 편이고 더러운 것도 결벽적으로 싫어하는데. 거지가 되기에 부족하잖아요. 전 여기에 맞지 않는 사람이에요.”

남하림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개방의 사람들이라면 싫어하는 게 맞았다.

“후후후. 그거야 네가 재미있는 놈이니깐. 원래 거지도 함부로 되는 게 아니지. 거지 팔자를 타고나야 하거든.”

“혹시 제가 거지 팔자를 타고났다는 말은 아니겠죠?”

“크크크, 넌 거지 팔자가 아니라 상팔자지. 그리고 난 네놈같이 막나가는 놈이 좋더라.”

“할아버지, 혹시 성격이상자는 아니시겠죠?”

“크하하하, 역시. 내 말이 맞다니깐. 세상에 너처럼 막나가는 말을 하는 놈도 없을 거다. 나도 왕년엔 구공무적(口功無敵)이라고 한 소리 들었는데 네놈도 보통이 아니구나. 아암. 개방의 거지라면 무공도 무공이지만 말발도 최고가 되어야지.”

남하림은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에겐 어떤 말을 하더라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남하림은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망했어. 거지 늪에 빠진 것 같아.’

한편 장두철은 남하림과 다르게 꿈을 꾸기 시작했다.

무천의 자질은 하늘이 내린 존재였다. 무림에 개방의 힘을 다시금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물론 개방의 힘은 여전히 다른 대문파들보다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 문파를 대표하는 무인의 존재 유무의 차이는 너무나 컸다.

오십 년 동안 개방에서는 특출한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중원 무림에 대한 발언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중원십기(中原十奇) 중 일인이라 하나, 무공으로 천하십무인(天下十武人)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이놈을 잘 키운다면…….’

개방의 이름으로 천하십무인을 배출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지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었다.

“하림아, 하림아.”

장두철은 최대한 다정스럽게 하림을 불렀다.

‘뭐야.’

남하림은 즉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혹시 뭐 잘못 드셨어요? 갑자기 왜 그러세요?”

“너…… 내 제자 하면 안 될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제자라고요? 그냥 무공만 배우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맞지. 처음에는 그럭저럭 쓸 만한 무공을 가르쳐 주려고 했거든.”

“그런데요?”

“이왕 가르쳐 주는 거, 네놈같이 엄청난 사내라면 한번 배워볼 만한 무공을 가르치고 싶어서 그런다.”

“음……… 그러니깐. 거지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는 엄청난 무공을 배우려면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잖아요.”

“하하하, 맞다. 하나를 알려주면 둘을 아는구나.”

“싫어요.”

남하림은 단칼에 거절했다.

“아니, 왜? 무슨 무공인지는 물어본 뒤 거절하면 안 되냐?”

“관심 없어요. 언제 나갈지도 모르는데 그걸 익힌다고 굳이 제자가 되면 진짜로 거지가 되는 거잖아요. 안 해요, 절대로.”

“아, 큼, 크흠, 잠깐만.”

장두철은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남하림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렇게 안 하겠다고 단정 짓지 말고, 우리 차분히 대화를 해보자.”

“말씀하세요.”

“개방의 제자가 왜 되기 싫은 것이냐?”

“전 더러운 거 싫어해요.”

“그럼 여긴 왜 왔느냐? 처음부터 안 오면 될 것을?”

“그건, 아버지께서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지켜야 한다면서…… 보낸 거잖아요. 제가 오고 싶어서 왔겠어요?”

“당연히 은원을 잊는다면 그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짐승이지.”

“꼭 저보고 하시는 말씀인 것 같네요.”

“하하하, 아니다. 여하튼, 네놈이 십 년을 여기에서 지내야 한다면 이왕 편하게 지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제가 거지 할아버지 제자가 되면 편하게 지낼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당연히. 누가 본인의 제자를 함부로 건드릴 수 있단 말이더냐. 방주도 나를 못 건드린다.”

남하림은 방금 그의 말에 솔깃했다.

‘요 녀석. 조금 넘어온 것 같은데…….’

장두철은 기세를 몰아 더 밀어붙이기로 했다.

“딱 십 년만 내 제자 해라. 그다음에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남천상국에 가고 싶으면 가도 좋다. 물론 여기에 남으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정말요? 거짓말 아니죠?”

“나를 못 믿는 거냐?”

“당연하죠. 어떻게 사람을 믿어요. 뒷간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른 게 사람인데…… 우리 합의서 인장 찍죠?”

“크하하하, 좋다. 얼마든지 찍어주마.”

“아…… 그리고 그 안에 몇 가지 더 추가하면 안 될까요?”

“그래? 나도 한 가지 넣으면 안 되겠느냐?”

“좋아요. 그렇게 해요.”

잠시 후.

두 사람은 합의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중재 합의서]

모월 모일 개방 일장로 항걸 장두철과 무결제자 남하림은 아래와 같은 사항에 대해 합의를 이룬 것으로 본다.

하나. 남하림은 일장로 장두철을 사부로 모신다. 단 제자 기간은 십 년이다.

하나. 십 년의 사제지간 동안 충실히 제자의 본분을 다한다.

하나. 사부라고 해서 부당한 명을 내릴 수 없다.

하나. 방주와의 계약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 혹시 모를 파문을 당할 시 합의서는 무효하다.

위 합의서의 유효 기한은 십 년이며 기한 동안 당사자들이 하나라도 합의 조항을 어길 시 무효로 처리한다.

“이 정도면 됐어요. 찍으세요.”

“음…… 나쁘지는 않는 것 같군. 마지막 조항이 마음에 안 들지만 말이다.”

“그럼 빼죠.”

“아니, 됐다. 누가 감히 내 제자를 파문시킬 수 있단 말이냐. 상관없다.”

장두철은 두 장의 합의서에 인장을 찍었다.

“크하하하!”

그는 합의서를 들고 대소를 터뜨렸다.

“드디어 네놈이 내 제자가 되는구나.”

‘…….’

히죽 웃는 장두철의 표정.

남하림은 괜히 그의 제자가 된다고 했나 후회가 살짝 밀려왔다.

“하림아.”

“네. 거지 할아버지.”

“이놈이…… 이게 뭐지?”

장두철은 합의서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 시간부터서는 내가 네놈의 사부다. 알겠느냐?”

“아…… 알겠어요. 사부.”

딱!

그의 흑죽타구봉이 짧게 남하림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사부님이라고 해야지. 다시!”

“사아아아아부님.”

“크크크크. 오냐, 제자야. 가서 물이나 한 잔 떠오너라.”

남하림도 손에 합의서를 흔들었다.

“뭔데?”

“여기에 부당한 명을 내릴 수 없다고 적혀 있잖아요.”

“아니, 사부가 제자에게 물 한 잔 떠오라고 하는 게 뭣이 부당한 명이냐?”

“저에게는 부당해요.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지위를 이용한 명령이잖아요.”

“허허, 여기 봐라. 두 번째 조항. 충실히 제자의 본분을 다한다, 라고 적혀 있지 않느냐?”

“그건 그거고, 이건 부당해요.”

“허어-”

“그리고 사아아아부님은 지금 목마르지 않으시잖아요.”

“아니. 목말라.”

“거짓말하지 마세요.”

따악!

흑죽타구봉이 남하림의 머리에 다시 떨어졌다.

“아야! 봐요. 말로 안 되니 민망해서 때리는 거잖아요!”

‘이 녀석, 피곤한 제자일세.’

“거참 제자님, 물이나 한 그릇 떠오면 안 되겠소이까?”

“직접 떠서 드세요. 그만 가볼게요!”

벌떡.

머리를 감싸 쥐던 남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느냐?”

“이각이 지났어요. 오전 수업 받으러 가야 하잖아요. 내일 뵐게요.”

“아이고, 그래. 알겠다. 내일 보자. 아니, 나중에 찾아가마.”

“음……  알겠어요. 근데 사부님이라고 해서 수업 시간에 함부로 찾아오시면 안 돼요.”

장두철은 빠른 속도로 장휴정을 내려가는 남하림의 뒷모습을 보았다.

‘후후후, 당분간 알아서 하도록 지켜봐야겠군.’

개방에 정이 들도록 해야 하니 당분간 가만히 두기로 했다.

씨익.

장두철은 또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손에는 합의서 한 장이 들려 있었다.

“히히히, 십 년이라…… 충분해. 저놈이라면 중원을 흔들고도 남을 시간이지.”

흔들흔들.

장두철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방주에게 가서 자랑을 해야겠구만. 방주도 은근히 녀석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야.”

휘익-

장두철의 신형이 장휴정에서 사라졌다.

* * *

끼익.

“오 방주 있는가?”

장두철은 용두방 안으로 들어서며 용두방주를 불렀다.

오종은 문밖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일장로께서……?’

개방에서 자신을 오 방주로 부르는 인물은 장두철 외에는 없었다.

드륵.

오종은 환하게 들어오는 그를 보았다.

“일장로님, 좋은 일이 계신 듯하십니다.”

“하하하! 당연히 좋은 일이 있지.”

차악.

장두철은 손에 든 종이 한 장을 오종이 잘 볼 수 있도록 내밀었다.

“이게 보이나?”

‘합의서?’

오종은 합의서를 자세히 읽었다.

남하림과 일장로 장두철의 합의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림을 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까?”

“하하하, 그렇게 되었네. 미안하네. 내가 먼저 낚아챘구만.”

‘아…… 한발 늦었군.’

오종도 뛰어난 무재로 보이는 남하림을 제자로 받아들일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십 년 뒤에 돌아갈 거라는 녀석을 억지로 제자로 받아들이는 건 부담스러웠기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었다.

근데 일장로 장두철은 고민 없이 제자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근데…… 일장로님께서 제자로 삼을 정도면 더 특별한 게 있는가 봅니다.”

“후후후, 특별한 것이라. 그냥 하는 짓이 귀엽잖아.”

‘……그게 귀엽던가.’

오종은 장두철에 대해서 떠올렸다. 그는 개방 최고의 기인이자 강룡십팔장의 전승자였다.

그가 제자를 받는다는 의미는 개방의 비전인 강룡십팔장을 전수하겠다는 뜻이었다.

“일장로님. 하림에게 강룡십팔장을 전수할 생각이십니까?”

“당연히 그러려고 제자로 받아들였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

오종은 어떻게 현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뭐가 더 있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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