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난 거지가 아니야
난 거지가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거지인 놈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난 정말로 거지가 아니었다. 우리 아버지는 중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다.
아, 망할.
원래대로라면 최고급 여우 모피에 삼 시 세끼 산해진미를 먹으며 깃털보다 가벼운 거위 털로 만든 침상에 자고 있어야 했다.
망할 놈의 세상.
내가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기에 하늘에서 이런 시련과 고충을 내리는지 모르겠다.
큰일을 하려는 사람에게 하늘에서 시련과 고충을 내린다고 하지만, 개뿔 난 영웅이 되고픈 생각이 전혀 없다.
왜냐고?
죽을 때까지 충분히 먹고살 만하니깐.
그러나 딱 십 년만 고생하라는 아버지의 꼬임에 빠졌다.
무슨 꼬임이냐고?
세상에 아들에게 사기 치는 아버지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내 나이 열다섯.
꽃보다 아름다운 시절 옆 동네 추설과 사랑을 시작해도 모자랄 판에 거지 소굴로 잡혀 왔다.
장사꾼에게는 금보다 중요한 건 신용이라 했다.
삼십 년 전, 할아버지 밑에서 아버지가 표국의 일을 배울 때였다.
맨손으로 가문을 일으키신 할아버지는 무식할 정도로 강하게 자식들을 키웠고, 아버지 또한 실전으로 일을 배웠다.
그렇게 험지를 굴러가며 표국행을 하던 아버지는 마적들과 딱 마주쳤다.
순식간에 죽을 고비에 빠진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개방의 거지였다.
그날, 아버지는 구해준 개방 거지에게 은혜를 갚겠다는 약속을 했다.
* * *
향기가 짙게 스며든 방.
백색의 대리석으로 만든 탁자와 청자에 꽂힌 붉은색의 장미.
칠단목으로 만든 의자의 방석은 부드러운 범털로 덮여 있었다.
아들을 찾아온 아버지는 술을 한잔 마시고 왔는지 숨을 쉴 때마다 술 냄새가 풍겨 나왔다.
“아…… 괴로워서 한 잔 마셨다.”
“…….”
아들은 아버지가 술을 왜 마셨는지 묻지 않았다. 남하림은 긴장했다. 아버지는 절대로 괴로울 사람이 아니다.
장사도 잘되고,
아름답고 지적인 부인 두 분에,
자식들도 사고치지 않고 늘 평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덥석.
그는 아들 남하림의 손을 꼭 잡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아들. 왜 괴로운지 물어보지 않지?”
“휴우…… 왜 괴롭습니까?”
“아들은 혹시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예전 표국 당시 마적 놈들과 거의 백 대 일로 싸우다가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고…….”
‘무슨 백 대 일…….’
열 살 때 할아버지께 그 사건에 대해 우연히 들어 알고 있었다.
벌벌 떨다가 아랫도리에 실례했다는 극비까지 함께였다.
어쨌든 그날 이후 할아버지는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으니, 다시는 자식들이 밖에서 맞고 들어오지 않게 최고의 무공을 익힐 수 있도록 밀어줬다.
“그때 우연히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지. 그런데 생명의 은인이 요즘 너무 힘들다고 하더구나.”
탁.
그는 자신의 가슴을 쳤다.
“이 애비가 누구냐. 신용 하나로 먹고사는 장사꾼이 아니더냐. 어찌 은인의 어려움을 듣고도 거절할 수 있을꼬.”
“그럼 기부하면 되죠. 아버지 돈 많잖아요.”
“아들아…… 나도 차라리 그러고 싶다. 흑흑흑.”
“…….”
고개를 숙이며 우는 듯한 목소리.
거짓 울음이다.
스윽.
아버지는 측은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은인이 필요한 게 돈이 아니란다.”
“아니…… 개방 거지라면서요. 돈을 주면 해결되잖아요.”
“허허, 돈이 아니란다.”
“그럼 뭔데요? 몸이 아픈가요? 창고에 좋은 재료들 많아요. 오백 년 된 삼도 있던데.”
흠칫.
아버지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아들은 그걸 어떻게…… 알지?”
“그거요? 창고장 아저씨가 몸에 좋은 게 있다고 하기에 몇 뿌리 먹었어요.”
“아들…… 그건……!”
“아버지 드실 것도 한 뿌리 놓아두었어요. 근데 별로 몸에 좋은 줄 모르겠던데요. 뭐…… 오줌이 좀 멀리 나가는 듯하지만요.”
“한 뿌리만……?”
“네. 설마…… 그게 아까워서 그런 시선으로 저를 쳐다보시는 겁니까?”
“아니아니, 잘 먹었다!”
아버지는 손이 부들거렸다. 최근 들어 밤에 잠자리가 영 부실하다는 기분이 들어 구해놓았던 물건들이었다.
‘이놈이 그걸 언제 알아채서 중간에 낼름 먹어버리다니…… 나쁜 놈. 고얀 놈.’
“여하튼 은인께서는 몸이 아픈 것도 아니다.”
“아버지, 사내답게 시원하게 이야기하세요.”
“알겠다. 사람이 없다는구나.”
“사람요? 밖에 널린 게 거지들 아닌가요?”
“아들이 잘 몰라서 하는 말인데, 그런 거지와 개방의 거지는 다르다.”
“잠깐.”
남하림은 대화를 멈추었다.
느낌이 싸하다.
먹이를 노리는 차가운 눈빛이 사방 주위에 도사리는 듯했다.
“설마…… 저보고 거지가 되라는 말은 아니시죠? 정말로 그런 말이라면 전 집 나갑니다. 제몫을 가지고요!”
“이놈아, 여기에 네 몫이 어디 있어? 전부 내 것이지.”
“아니, 어떻게 아버지 것입니까?”
“허어, 이놈이 내 재산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구만?”
“분명 제몫이라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열 살 생일날 할아버지께서 제 명의로 주신 땅과 점포들, 그리고 한 달 전 열다섯 생일 때에도 집안의 여러 표국 중 만석표국을 저에게 주셨어요!”
“그건 아버님께서 말로만 주신다고 했던 거다.”
“허어, 분명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혹시 몰라서 사람을 시켜 모든 명의를 이전시켜 놓았습니다. 괜한 트집을 잡을지 몰라서요. 큰일 날 뻔했네요. 눈 뜨고 코 베일 뻔했습니다.”
“…….”
‘용의주도한 놈.’
세 명의 아들놈과 두 놈의 딸.
막내인 이놈이 자신을 가장 많이 닮은 장사꾼 기질을 보였다.
“빠르구나, 허허.”
그의 목소리에 아쉬움과 함께 살짝 대견함이 묻어났다.
“근데 아들.”
“말씀하세요.”
“정말로 명의 이전을 했어?”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확인해 드릴까요?”
“…….”
“왜요? 제가 서자라서 재산을 가로챈 것처럼 보이세요?”
“섭섭하구나. 이 아비가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죄송합니다. 인정합니다.”
“고맙다.”
남하림은 바로 사과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었다.
“이유나 알고 싶어요. 항상 제게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다른 집안과 비교해서 우리 가문은 아들이 세 명밖에 없지 않으냐.
근데…… 네 큰형은 가문을 이어야 하고, 둘째 형은 관에 출사(出仕)를 했다. 셋째와 넷째 누나는 여자의 몸으로 거지가 되면 네 마음이 편하겠느냐? 조만간 시집도 가야지.”
다섯 명의 자식 중 남은 아들은 자신밖에 없었다.
“아버지 말씀은 엎어 치든 메치든 제가 가야 한다는 거군요.”
“물론 그것도 있지만 이번 일을 부탁할 아들은 너밖에 없다고 본다. 성격도 얼마나 좋으냐. 남이 무슨 말을 하든지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이다. 그곳에 가서 딱 십 년만 수고해라. 그때 속 시원하게 돌아오면 된다.”
“아…… 하아.”
한숨이 나왔다.
“이 아비의 신조가 무엇이냐? 티끌만큼 받았으면 태산처럼 갚는다는 것이 아니더냐.”
“그건 아버지의 신조이지 않습니까? 왜 꽃다운 막내아들에게 강요를 하십니까?”
남하림이 한껏 울망울망하게 아버지를 쳐다봤다.
‘하는 수 없군. 최후의 방법을.’
휙.
아버지는 품 안에서 단검을 꺼냈다.
“은혜를 갚지 못한다면 어찌 진정한 사내라 할 수 있을꼬. 죽음으로 은인에게 용서를 비는 수밖에…….”
“…….”
세상에, 아들 앞에서 죽음으로 협박을 한다.
남하림은 어이가 없었다.
“아버지, 그건 칠보단검이지 않습니까?”
“어엉. 맞다. 그게 어때서?”
손에 든 칠보단검.
일곱 가지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단검으로 날카로운 날이 없는 장식용이었다.
“날도 없는 검으로 가슴을 찌르면 아파서 죽겠는데요?”
“…….”
탁.
칠보단검이 탁자에 던져졌다.
“에잉, 치사하고 불효자 같은 놈아. 애비가 중원에서 은혜도 모르는 사람으로 낙인찍혀서 좋겠다. 우리 장사는 신용으로 먹고사는데 망했구나. 누구 때문에 네가 아는 많은 사람이 정말로 거지가 될 팔자가 되다니…….”
남하림은 망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머리를 내저으며 물었다.
“궁금해서 묻는데요. 왜 개방에서 사람이 필요하다고 합니까? 돈으로 사면 되잖아요.”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라 개방의 제자가 될 뛰어난 재목이 필요한 거다.”
“개방은 구파일방이라 하지 않았나요? 무림인이라면 서로 들어가려고 할 텐데요?”
“그게…… 요즘 애들이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이 많아서 개방에…… 잘…… 안 들어간다는구나.”
탁!
남하림은 탁자를 쳤다.
“봐요! 무림 놈들도 안 가는 그곳에 장사꾼의 아들을 내보낸다고요? 더구나 전 무림인도 아니라고요.”
“아들은 무림인이 아니더라도 싸움 잘하잖아. 아버님께서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얼마나 신경을 쓰셨는지, 웬만큼 맞아도 끄떡없잖느냐.”
‘귀신같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지?’
“아. 몰라요.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왜 멀쩡한 아들을 거지로 만들려고 하십니까. 너무하십니다!”
“에잇.”
그는 날카로움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칠보단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아들도 맘대로 못하면서 어찌 세상을 경영할 수 있을까? 세상 더러울 꼴을 안 보려면 그냥 죽는 수밖에…….”
아버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자신의 굵은 목을 향해 칠보단검을 찔러갔다.
‘아, 진짜…….’
또 당해줄 수밖에 없다.
“아!! 알겠어요. 제가 가면 되잖아요!”
“정, 정말이냐? 지이이이인짜?”
“…….”
아버지는 얼른 칠보단검을 내던지고 하림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하하하, 내 그럴 줄 알았다. 역시 너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결론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가 가야겠죠. 대신 제가 원하는 것은 무조건 해주셔야 합니다!”
“고맙다. 당연히 해주고말고.”
“그럼 제가 촉안의 땅을 달라면 주실 수 있나요?”
“……촉안을?”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촉안은 남천상국으로 들어서는 서쪽 길목으로, 상권이 중요한 곳이었다.
“원하는 것을 준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
촉안이라.
아버지는 순간 망설였다.
……하지만 어차피 세 아들 중 한 놈에게 줄 땅.
“좋다. 주마. 단, 개방에 다녀오면.”
“으으 진짜……! 알겠어요! 그럼 약조를 한 장 써주셔야 해요.”
“오냐, 내가 고맙다.”
아버지는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을 하며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겉으로 울고는 있으나 속은 웃고 있을 게 분명했다.
간다고 허락을 했지만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
“좋습니다. 가긴 가는데, 정말로 적성이 안 맞아 도중에 그만두고 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들아.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더구나. 넌 잘할 수 있다.”
“만일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놈 하는 것을 보니 갔다가 당장 도망 올 기세인데…….’
“허허허. 네가 그럴 일이 있겠느냐. 장사꾼의 자식은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다. 이 아버지는 멋진 아들을 믿는다.”
“아버지가 언제 저를 믿으셨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허허,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느냐! 아들에게만 하는 말인데, 내 자식 놈 중에서 너를 가장 믿고 있단다.”
“……여하튼 제가 스스로 나오지만 않는다면 문제가 없겠네요?”
“잠깐. 아들, 말이 이상하다? 사고를 쳐서 쫓겨 나오겠다는 말이냐? 난 그런 건 인정 못 한다.”
“알겠습니다. 근데 사고도 안 치는데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사고를 안 친다면야 그때는 어쩔 수 없겠지.”
그는 하는 수 없이 인정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빨리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빨리……?’
* * *
정문이 소란스러웠다.
덥석.
힌 여인이 연한 분홍 소맷자락을 휘날리며 남하림의 목을 감쌌다.
“어떡해! 우리 귀염둥이가!”
“아, 됐어. 그만 떨어져.”
“거기 가서 예쁜 누나가 많이 생각나더라도 울지 말고 서신 자주 해. 알았지?”
“아, 진짜. 떨어지라니깐. 숨 막힌단 말이야!”
“야, 하림이가 숨 막힌다고 하잖아. 비켜.”
이번에는 푸른빛이 나는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는 여인과 머리에 유생건을 쓴 청년이 다가왔다.
“더 예쁜 누나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알았지? 시간 되면 꼭 찾아갈게.”
남하림은 차라리 집을 떠나는 게 좋은 결정이 아닌가 싶었다.
“네가 가겠다고 나서서 고맙다. 아무도 갈 사람이 없었다면 내가 가려고 했는데…….”
“가겠다고 한 적 없거든. 지금이라도 둘째 형이 갈래?”
“…….”
남하림은 구시렁거리며 마차 창 너머로 어쩐지 마음의 짐이 사라진 듯 가뿐해 보이는 형제들을 노려봤다.
그러고선 억울함을 담아 큰 소리로 말했다.
“에이씨! 내가 개방 가서 거지꼴이 되나 두고 보라고!”
탁.
마차가 터덜터덜 개방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