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연 네비게이션 138화
태천의 명령을 한 뒤로 세간에는 무림맹의 맹주가 혈교주에게 1대1 대결을 신청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대결 장소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황무지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혈교주가 그 대결에 응한다는 소문도 함께 돌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위치와 날짜까지 함께 말이다.
“그래서 다음 주에 저번에 말했던 그 황무지에서 보자 했다는 말입니까?”
“예, 맹주님. 그러면 저희도 다시 소문을 낼까요?”
“그렇게 하세요. 승낙하겠다고.”
“알겠습니다.”
그 말에 태천의 앞에 서 있던 사내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방을 나섰다.
사내가 소문을 퍼뜨리러 사라지자 태천은 책상에 턱을 괴고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했다.
“일주일이라…….”
* * *
무림맹 측과 혈교 측에서 뿌리는 소문을 가장한 서신들은 계속해서 뿌려졌고, 그 결과 마지막에 결정된 사항은 그 누구도 대동하지 않은 채 올 것.
기한은 일주일. 다른 곳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에서 결전을 치를 것.
이렇게 세 가지였다.
그리고 결전 당일 태천은 앞서 말한 대로 아무도 대동하지 않은 채로 황무지 위에 서 있었다.
“네가 대적자라군.”
그리고 마찬가지로 태천의 반대편에서는 핏빛 장포를 걸치고 있는 미남자, 혈백린이 서 있었다.
물론 부하들은 대동하지 않고 혼자였다.
“대적자라는 게 정확히는 뭔지 모르겠지만 너, 그리고 네 뒤에 있는 ‘그분’이라는 놈을 쳐 죽여버릴 거라는 것 맞다.”
“흐…… 흐하하하하!! 그분을 죽여? 네가? 그래 나를 이겨 나머지 반쪽을 얻고 그분과 대등한 위치에 오를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분은 이미 그 자리에 오른 지 수백 년은 더 된 괴물이다. 그런 그분을 갓 그 자리에 오른 네가 상대하겠다고? 멍청한!”
광소와 함께 입을 연 혈백린의 말에도 태천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대꾸했다.
“어쩌라고. 내가 원하니까 하는 거다. 내가 뒤지든 말든 니가 뭔 상관이야? 어차피 넌 여기서 죽는다.”
“오만하군. 마찬가지로 생사경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애송이가 감히……!”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겠지만…… 안 대어 봐도 알 것 같은데?”
계속해서 신경을 긁는 태천의 말에 혈백린의 잘생긴 얼굴에 실금이 갔다.
“망할 애송이 같으니! 오랜만에 나와 같은 경지의 인물을 보아 얘기나 한번 나누어 보려고 했건만…….”
“미안한데 나는 짐승 새끼랑 대화를 나누는 취미가 없어서 말이야. 덤빌 거면 빨리 덤벼.”
“이이익……! 망할 놈이!!”
그 말이 결정타였는지 혈백린은 자신의 피를 잔뜩 머금은 검을 빼 들고 태천에게 달려들었고, 그런 혈백린의 모습에 태천은 당황하기는커녕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천마검과 화룡도를 빼 들었다.
그리고…….
콰아앙!
주변의 지리 자체를 바꾸어 버릴 인외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콰직…….
“크으윽…… 그건…… 그건 대체 무엇이냐!! 그 괴물은 대체!”
“괴물? 우리 귀여운 탐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탐한테 사과해라.”
혈백린은 자신의 오른팔이 검은 용의 입안에서 으적으적 씹히는 모습에 얼이 빠진 모습으로 괴물이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태천과 영혼으로 묶여 있는 탐은 태천의 경지에 맞게 성장했고, 지금은 용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의 모습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즉, 혈백린은 애초에 시작부터 2대1로 싸웠던 것이다.
싸움의 중간중간 그림자 혹은 태천의 손에서 튀어나와 공격을 해대는 탐 때문에 혈백린은 주위의 지리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분전을 했지만 결국 탐의 공격에 의해 오른팔을 잃었고, 검을 쓰는 검사가 오른팔을 잃었다면 곧 패배나 다름없었다.
“이러면 애초에 1대1이 아니…….”
“어쩌라고.”
“……?!”
“애초에 지킬 마음도 없었는데 고맙다.”
“이런 젠장…….”
빙그레 웃고 있는 태천의 모습에 혈백린은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지금 와서 깨달아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이미 검은 용의 형태를 한 탐이 아가리를 벌린 채 날아오고 있었다.
콰직! 으적으적!
그리고 이내 탐의 아가리 안으로 빨려 들어가다시피 들어간 혈백린은 어느새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탐에게 먹힌 혈백린의 음과 양의 힘 중에서 나머지 반쪽의 힘이 태천의 몸속으로 흘러들어왔다.
“흐읍…….”
음과 양의 기운이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고통에도 태천은 신음을 꾹 참으면서 음양의 합일을 이루기 위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정신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약 일주일이 됐을 무렵 감겨 있던 태천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하아아…….”
오랜 시간 정신을 집중을 한 탓에 몰려오는 피로감도 피로감이지만 눈을 감기 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주위의 모습에 태천은 얼이 빠진 상태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건…….”
그리고 손을 펴자 손 위로 모인 자연의 기운들이 하나로 뭉쳐져 무언가로 변했다.
-끼잉…….
토끼였다.
“토끼?”
자신의 손안에서 탄생한 생명에 태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했다.
생사경을 넘어 자연경의 경지에 도달한 태천은 그제야 자연경의 경지가 어떠한 경지인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창조의 경지…….”
바로 창조였다.
생사경은 자연의 기운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경지였다면 자연경은 바로 그 기운들을 이용해서 생명체를 창조하는 가히 신에 가까운 경지였다.
하지만 자연경에 오른 것에 기뻐할 틈도 없이 저 멀리서 느껴지는 사악하고 음습한 기운에 태천은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오는구나.”
그렇게 태천이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혈백린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가 다른 핏빛 장포를 입은 사내가 하늘에서 뚜벅뚜벅 걸어서 내려왔다.
이내 사내의 발이 땅에 닿자 사내의 입이 열렸다.
“네가 대적자구나. 어리석은 아이야.”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들 부르더라고. 그래서 넌 누구냐.”
“나는 혈마다. 오래전부터 나는 존재해 왔다. 수많은 선인들이 나를 천살성이라고 부르며 나를 죽이려 했지만 모두 내 손에 죽었다. 그런 이들을 죽이다 보니 나는 어느 순간부터 결을 볼 수 있었으며 자연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고 나아가서 그 기운들로 생명들을 창조해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내가 신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니더군. 그리고 내 도전을 받은 신이 언젠가 나의 대적자가 나타나 나를 처리한다고 하더군. 그때까지 나는 세계의 인과율에 얽혀서 제대로 된 생활조차 하지 못하고 나와 비슷한 격을 가진 이들만을 찾아가 싸움을 걸었다. 길고 긴 시간이었다. 오늘 나는 너를 죽이고 너의 몸에 깃든 신의 파편을 흡수해 다시 한번 신에게 도전할 것이다.”
자신을 혈마라고 말하는 사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핏빛 기운이 유형화되어 사내의 주위에서 넘실거렸다.
자연경에 오른 태천조차도 압박감을 느낄 정도로 강대한 힘이었지만 그런 힘 앞에서도 태천은 겁먹지 않고 언제나 자신과 함께한 천마검과 화룡도를 꺼내 들었다.
“긴말 할 필요 있어? 덤벼. 오늘 둘 중 하나만 살아서 나가는 거야.”
“원래부터 그리 할 생각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세계의 운명을 결정할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그래서 이제 떠날 생각이냐?”
“어, 이제 떠나야지. 그리고 너도 내가 여기에 더 있으면 불편할 것 아니야.”
“……큼큼, 그것도 그렇다만. 이곳에 꽤 정이 들었을 텐데?”
“그것도 그렇지만 이제 나와 예전부터 연을 맺었던 이들은 아무도 없는걸.”
“그래, 알겠다. 네 원래 세상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열어주마.”
그 말과 함께 백색 깃털의 날개를 한 미남자.
자칭 신이라고 태천이 별명 붙인 사내가 손을 휘젓자 투명한 공간에 일렁이는 게이트가 생겨났다.
그 게이트 앞에 이제는 신이라고도 불러도 될 정도의 힘을 가진 태천이 게이트의 앞에 섰다.
그리고 게이트의 앞에 선 태천 혈마와의 결투 이후를 생각했다.
혈마와의 결투는 자연경에 오른 태천과 그의 격을 이어받은 탐, 이렇게 2대1의 싸움으로 몇 주간의 싸움이 이어졌다.
결국 2대1의 싸움에 밀린 혈마는 태천과 탐의 앞에 무릎을 꿇었고 태천은 혈마의 모든 기운을 흡수한 결과 불노불사의 신이 되었다.
물론 세계를 창조하고 그런 신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 뒤로 태천은 혈교를 해체시키고 혈교로 인해 들끓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 자연경의 힘으로 곡식들을 빠르게 자라게 하고 소나 돼지와 같은 생물들의 성장 속도를 빠르게 해, 빠르게 민심을 잡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작업이 끝나고 난 뒤에는 호섬과 철현 그리고 천동과 함께 숲으로 들어갔다.
물론 유화도 함께 말이다.
산에 들어간 태천은 산 전체에 진법을 설치했다.
그 누구도 들어올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진법을 말이다.
처음 산에 들어갔을 때에는 호섬을 위로해 주는 데에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
그 덕택에 호섬은 빠르게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고, 그때부터가 그들의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태천은 유화와 혼인을 올렸고, 호섬과 철현 그리고 천동은 끝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무의 끝을 보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무에만 열중했다.
그 덕택에 호섬과 철현은 태천의 도움까지 받으면서 현경의 극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고 그 뒤 산에서 내려갔다.
호섬은 자신의 집인 하북철가로 돌아가 가주가 된 뒤, 이제는 은퇴한 검황 때문에 부진하고 있는 남궁세가를 제치고 무림제일가로 거듭났다.
철현은 자신의 아버지인 풍신의 제자를 키우라는 말에 전 무림을 뒤져 자신의 후계자가 될 아이를 발견하고 그 아이만을 집중적으로 수련시키면서 풍신문이라는 일인전승문파를 만들었다.
일인전승문파답지 않게 풍신문은 크게 이름을 떨쳤다.
구파에 속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 돌 정도로 말이다.
둘이 하산하고도 한참을 태천과 같이 지내던 천동은 태천의 도움으로 인해 생사경에 오를 수 있었고, 태천에게 힘을 헛된 곳에 쓰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맺은 뒤 앞선 둘과 마찬가지로 하산을 하고 무당파로 돌아가 장문인이 되어 개파조사인 장삼봉 진인처럼 무당파를 키우는 데에 전념했다.
그런 천동의 노력 덕택인지 무당파는 천동이 장문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구파일방의 수좌를 차지했다.
마지막으로 무림에 평화를 가지고 온 태천 자신은 유화와 결혼한 후, 아들 하나, 딸 하나를 슬하에 뒀으며 그 둘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었다.
여자인 딸에게는 북해빙궁의 무공을, 남자인 아들에게 태양궁의 무공을 말이다.
태천의 무신지체를 이어받지는 못했지만 뛰어난 근골과 태천의 영약 보따리 덕분에 뛰어난 성취를 얻은 둘은 성인이 되자 산에서 내려가 자신들만의 가정을 꾸려서 중년이 될 때쯤 산으로 돌아와 태천과 유화를 기쁘게 했다.
태천의 아내인 유화는 산속에서 태천과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자연경에 도달한 태천인만큼 유화는 죽을 때까지 젊은 적의 미모를 유지했고 일평생 싸우는 일 한 번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신혼의 분위기를 유지했다.
하지만 결국 사람은 사람.
생사경에 오른 천동조차도 세월을 막진 못했다.
물론 천동은 우화등선을 하여 선계로 향다.
생사경의 벽을 뚫지 못한 호섬과 철현은 꽤 오래 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죽음을 피하지는 못했고, 옆에서 자연의 기운을 주입해 준 유화조차도 결국은 태천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랬기에 태천은 자신의 손자, 손녀까지 본 뒤에야 무림에 대한 미련을 털어버리고 신에게 향한 것이다.
그리고 신은 약속한 것처럼 흔쾌히 게이트를 열어주었고 말이다.
게이트 앞에서 지난 과거를 추억하던 태천은 이내 게이트에 몸을 던졌다.
“안녕. 무림.”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