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연 네비게이션 110화
“크하하! 약해빠진 황실의 개들이여!! 이 나를 막을 자가 어떻게 단 하나가 없느냔 말이다!!”
사내의 그런 광오한 외침에도 창을 든 채 대치 중인 병사들 중에서 뛰쳐나오는 이들은 단 하나도 없었다.
사내의 말에 분하여 뛰쳐나가려 하는 이들이 있기는 했으나 주변에 있는 이들이 만류했다.
자신들에게 저런 소리를 하는 이의 검에 맺혀 있는 푸른 강기 때문이었다.
바로 검사지경에 이른 화경의 고수였기에 일반 병사들인 그들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었다.
저 정도 수준의 무사를 막으려면 최소 천인장급의 고수가 필요했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백인장급의 인물들밖에 없었기에 병사들은 얼굴을 굳히고 자신들이 들고 있는 방패를 높이 들어 올리면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런 병사들의 모습에 광오한 말을 던진 남자, 십이혈천 중 육천대의 단주를 맡고 있는 혈무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계속 그렇게 거북이처럼 움츠려 있어라!! 내가 곧 네놈들의 목을 따고 네놈들의 피로 목욕할 것이다!!”
“크으으윽!!! 버텨!!”
쾅! 쾅! 쾅!
검강이 맺힌 검이 병사들이 들고 있는 방패에 부딪힐 때마다 폭음을 일으켰고, 병사들의 발이 한 걸음 두 걸음 밀려났다.
그런 병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혈무진은 광소를 내뱉었다.
“흐하하하!! 뭐가 역대 최강의 황제란 말인가!! 이토록 더없이 약하건…… 커헉!!”
그렇게 광소를 내뱉던 혈무진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혈무진은 그렇게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르고, 입가에 미소를 단 채로 죽었다.
그리고 바닥에서 구르는 혈무진의 머리를 보면서 혈무진의 머리를 날린 검은 무복의 사내, 태천이 입을 열었다.
“너보다 강한 놈 많으니까 죽어서는 까불지 말고 공손하게 살아라.”
그리고 그런 태천의 말에 여태까지 힘겹게 방패를 들고 막아서던 병사들과 그런 그들을 지휘하면서 땀을 뻘뻘 흘리던 십인장과 백인장들마저도 벙찐 얼굴로 태천을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
“아? 이런, 저는 무림맹의 부맹주를 맡고 있는 강태천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소개를 하면서 태천은 씨익 웃어 보였다.
* * *
태천의 등장과 그런 태천을 따르는 호섬의 등장으로 인해 밀리기만 하던 전장의 분위기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천인장이 없는 구역은 혈교의 단주급 인물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밀렸지만 태천과 호섬의 등장으로 인해 단주급들이 죽어 나가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병사들이 오와 열을 맞춰서 나머지 혈교 무리들의 숨통을 끊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단주들의 압도적인 무위를 믿고 활개를 치던 혈교의 나머지 무리들은 자신들의 단주들이 목이 허공을 나는 순간부터 사기가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사기가 바닥을 치는 혈교의 무리들을 황군은 무척이나 손쉽게 처리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만들어준 태천과 호섬의 이름을 연호하면서 황군은 방어뿐만이 아니라 조금씩 전진하면서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혈교는 달려들기는커녕 주춤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혈교가 슬금슬금 몸을 빼자 그 모습에 고무된 황군이 함성을 내지르면서 도망치는 혈교의 무리를 공격했다.
그런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는 태천에게 마경석이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태천 님.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진압했습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저희는 동맹 아닙니까? 그리고 아직 제대로 된 싸움은 시작되지도 않았습니다.”
“예? 그게 대체 무슨…….”
끄아아아악!!!
태천의 말에 마경석이 의아해하면서 말의 진의를 파악하고 있을 때,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비명 소리의 주인은 혈교의 무리가 아니라 그들을 추격하던 황군의 진영에서 들려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
“드디어 나타났네.”
“부맹주님께서는 무슨 일이신지 아십니까?”
“뭐긴 뭡니까…… 대가리들의 등장이죠.”
태천의 말처럼 황군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핏빛 무복을 입은 3명의 노인들이 있었다.
육천과 칠천 그리고 팔천이었다.
그리고 살육을 벌이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태천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현경 초입이 셋이라…… 아마 저들이 그 소문이 자자한 십이혈천의 일원들인가? 해볼 만하겠는데?’
* * *
“쯧, 이런 일에 우리가 나서게 될 줄이야…….”
“뭐 어쩔 수 없지 않나? 저쪽에 우리만큼 뛰어난 고수가 있으니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지.”
“큿…… 마음에 안 드는군. 이번에 황궁에 들어오면서 망할 뇌기를 막는데 돈이 얼마나 들었는데 저렇게 허무하게들 뒤져버리다니!!!”
“그렇게 마음 상해하지 말게 팔천. 어차피 저기서 날뛰던 그자는 우리보다 고수다. 느껴지는 기운만 보아도 그러하지 않나? 어차피 우리가 나서는 것은 기정사실이었어.”
“……후우, 그래서 이길 자신은 있나?”
“우리가 지더라도 오늘 이곳에는 ‘그분’이 계신다. 우리는 질지언정 혈교의 패배는 없다.”
육천의 말에 돈이 많이 들었다며 투덜대던 칠천과 잔챙이를 상대한다면서 팔천의 얼굴에 서려 있던 짜증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면서 육천이 피식 웃고는 다시 검을 휘두르면서 살육을 계속했다.
“그러니 일단 이 잔챙이들이나 마저 처리하도록 하지. 그래야 한시바삐 저기 달려오고 있는 저자와 싸울 게 아닌가?”
“……?!”
육천의 말에 칠천과 팔천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검은 무언가였다.
그 모습에 칠천과 팔천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필연적으로 느낀 것이었다.
저자가 이곳에 도착하면 이런 잔챙이까지 상대할 여력이 없음을 말이다.
그리고 검은 무언가의 속도가 점점 줄어들면서 육천 등의 앞에서 우뚝 멈춰섰고, 그와 함께 무차별하게 살육을 벌이던 육천들의 손들도 우뚝 멈췄다.
그 상태로 기묘한 대치가 이어질 때, 먼저 입을 연 쪽은 육천 쪽이었다.
“너는 누구지?”
“나? 큭큭큭…… 그쪽에 아직 내 소식이 안 들어갔나?”
“네 소식……?”
“왜 내가 혈인이라는 작자를 반쯤 죽여서 보냈는데? 소식이 잘 안 들어갔나 봐?”
검은 무언가, 아니, 태천이 한 약간의 거짓말을 가미한 말에 육천들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혈인님?’
‘태양궁?’
‘정체 모를 젊은 무인.’
혈인이라는 말에 저절로 태양궁이 떠올랐고, 그 태양궁을 침공한 혈인 부상을 입은 채 돌아왔다는 소문은 혈교에 빠르게 퍼졌기에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문을 들은 그들은 무척이나 놀랐다.
‘그분’과 같이 혈교의 세 기둥이라고 불리는 혈인의 부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부상 때문에 세 기둥 중 하나인 혈인은 치료를 위해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저 녀석이 바로 그 정체 모를 젊은 무인이라고?’
‘세 기둥 중 하나를 잠시간 폐관에 들게 한……?’
태천의 말에 육천들은 수적 우위에서 나오던 약간의 자만심이 쏙 들어갔다.
그리고 들고 있던 검을 태천에게 겨누면서 입을 열었다.
“……네가 태양궁에서 우리 교의 발걸음을 저지한 그놈이냐?”
“뭐야 알고 있었네. 맞아.”
물론 막은 것 맞는데 혈인 그자를 족친 건 내가 아니라 화연이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뻥카가 잘 먹힌 것 같기도 하고.
태천이 혈교의 세 기둥 중 하나인 혈인의 발걸음을 막은 것도 모자라 부상까지 입혔다는 사실에 육천들의 동요하는 모습에 살짝 미소 지으면서 태천은 양손에 각각 들고 있던 천마검과 화룡검을 냅다 그들에게 던졌다.
“으헉……?!”
갑자기 자신의 무기를 던지자 그들은 기겁을 하면서 자신들의 무기를 치켜들고 날아오는 무기를 쳐냈다. 하지만…….
후웅!
“크윽!!”
튕겨냈던 검과 도가 허공을 선회하더니 다시 쏘아지는 모습에 검과 도를 받아냈던 칠천과 팔천의 얼굴에는 당혹이 서렸다.
이기어검은 자신들도 현경이기에 사용할 수 있었다.
태천처럼 저렇게 자유자재로 다루지도 못하지만 애초에 그들은 하나의 검과 도만으로 이기어검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태천은 두 자루를 자유자재로 다뤘다.
그런 태천이 부리는 이기어검은 정말 사람을 상대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교묘하고 날카로웠다.
태천의 검과 도에 밀리는 칠천과 팔천을 돕기 위해 공격을 당하지 않은 육천이 나서려고 했지만…….
“어딜 가? 넌 나랑 싸워야지!!”
“큭! 이 나이도 어린 애송이 자식이!!”
“무림에 나이로 따지는 게 어딨어! 무림은 실력순 몰라?”
콰앙!!
그 말과 함께 태천은 주먹을 육천은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크아악!!”
하지만 검과 주먹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다름 아니라 주먹이었다.
지이잉…….
“이게 대체 무슨……!”
검을 타고 손으로 전해지는 진동과 반동에 육천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아무리 현경의 고수라 몸이 다른 이들보다 단단하고 권강까지 둘렀다지만 자신 또한 마찬가지로 검강을 둘렀다.
거기에 십이혈천이라는 이름답게 들고 있는 검은 능히 명검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그런 예기가 곁들인 검강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밀렸다는 사실에 육천은 손이 부들부들 떨어댔다.
그리고 그런 육천의 모습을 보면서 태천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때? 금강불괴의 단단한 주먹맛은?”
“……금강불괴! 망할 투신인가?”
“호오…… 투신이 금강불괴인 것도 알고 있어? 정보력이 꽤 대단한데?”
투신이 금강불괴라는 것은 태천도 북해빙궁에 가서야 알았다.
그런데 혈교에서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에 태천은 꽤 놀랬다.
‘정보력이 얕볼 수준은 아니군. 세외에 거주하고 있는 투신의 현재 상황 등까지 알고 있다니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태천이 주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쨌든 빨리 끝내자. 나도 저거 유지하기는 조금 힘들거든.”
태천의 말마따나 태천 자신도 이기어검에 강기까지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두 개의 이기어검과 이기어도 때문에 안 그래도 내공이 어마어마하게 다는데 거기에 세 개의 강기까지 유지하려니 구멍 뚫린 항아리처럼 내공이 빠르게 사라졌다.
물론 그래도 빠르게 내공이 보충되고는 있으나 저들의 뒤에 누가 있는지를 모르니 한 줌의 내공이라도 아껴야 할 상황이었다.
거기에.
‘내공을 바닥까지 쓰면 자동으로 이게 사용되니 문제지.’
몸 안에서 느껴지는 소량의 뇌기에 찌릿찌릿함을 느끼면서 태천은 주먹에 힘을 꽉 주었다.
“어금니 꽉 깨물어라. 강냉이 날아간다.”
그 말과 함께 태천은 육천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런 태천을 향해 육천도 검을 치켜들고는 달려들었다.
쾅!!
* * *
그렇게 궁에서는 태천과 육천 등이 싸우고 있을 때, 경비가 사라진 황궁의 담을 누군가 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