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연 네비게이션 108화
터벅터벅…….
“아우씨 왜 이리 길어!”
호섬의 울부짖듯이 말하는 말처럼 막상 궁 안에 발을 들이긴 했지만 넓기는 정말 드럽게 넓었다.
걸어도 걸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 무한할 것 같았던 그 길도 약 반 시진만에 그 끝을 드러냈다.
“역겹다 역겨워. 무슨 황제 한 번 볼 때마다 반 시진씩 걸려서 봐야 하는 거야?”
“그만큼 황제 폐하를 보호하기가 더 쉬우니까요. 그리고 나가실 때도 똑같은 길로 나가셔야 합니다. 보안상의 이유라…….”
“으윽…… 아까 그 지옥길을 한 번 더 걸으라고요?”
“예, 죄송하지만 외부인은 오롯이 들어올 때, 걸어온 길만 걸을 수 있습니다.”
마경석의 그 단호한 한 마디에 호섬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도 들리지 않게 혼자 투덜댔다.
어찌나 조용한지 태천의 귀에도 띄엄띄엄 들릴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후우…… 호섬아 조용히 하고 옷매무새나 다듬어라. 여기 이 문만 넘으면 황제가 있다. 괜히 꼬투리 잡힐만한 짓 하지 말고 조용히 옷이나 다듬어.”
“……쳇 맨날 나만 가지고 그래…….”
“그러면 우리보다 예의를 잘 지킬 마 장군에게 뭐라 하리? 잔소리 말고 해라? 또 기절할래?”
“에이씨! 합니다! 한다구요!!”
“진즉에 그럴 것이지. 쯧”
저 녀석 요즘 들어 기어오르는 횟수가 점점 늘어난단 말이지.
언제 날 잡고 정신교육을 다시 한번 해야겠어.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투덜대면서 옷매무새를 다듬는 호섬을 보면서 마경석이 말했다.
“이제 들어가겠습니다.”
마경석의 그 말과 함께 문 앞에 서 있던 경비병 둘이 문을 활짝 열었고, 그 문을 넘어서 나는 황제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 * *
우선 황제가 있다는 방에 들어가서 느낀 점은 무척이나 화려하다는 것이었다.
일단은 방 전체가 금으로 도금되어 있었고, 그 금으로 만들어진 방 안에 있는 황좌에는 얼굴에 나 황제요! 하는 얼굴인 노인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황금의 방 안에서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노인의 입이 열렸다.
“자네가 무림맹의 부맹주인가?”
윽…… 위압감이 어마어마한데…… 이게 한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의 위엄이라는 건가?
황제의 한마디에 나는 꽤 큰 위압감을 느꼈다.
이게 연륜에서 오는 위압감인지 아니면 황제라는 그 직위에서 오는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굳어 있어서야 될 일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몸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내공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빠르게 내 몸을 한 바퀴를 돌자 차분하게 진정되는 마음을 느끼면서 입을 열었다.
“예, 맞습니다. 제가 무림맹에서 과분한 직책이지만 부맹주를 맡고 있는 강태천이라고 합니다. 황제 폐하.”
“호오……?”
당당하게 말하는 내 모습에 황제는 나른한 미소를 지우고 재밌는 것을 발견한 사람의 표정을 지으면서 턱을 괴고 있던 자세를 바르게 하면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신기하군. 내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서서 말한 사람은 본지 무척이나 오래된 것 같은데 말이야.”
“제가 현경의 무인이라…….”
“아니! 자네가 말한 그 현경의 무인은 나도 보았네만 자네와는 반응이 달랐지. 금의위장!!”
“예, 황제 폐하. 부르셨사옵니까?”
움찔……!
황제의 말과 함께 황좌의 밑에 있던 그림자에서 솟아오른 검은 장포의 사람의 모습에 나는 움찔했다.
‘미친…… 그림자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는 게 말이 돼?’
-나도 그림자에서 나오는데?
‘……제발 넌 좀 들어가 있어라.’
-……쳇, 그리고 나는 있는 거 알고 있었거든? 네가 아직 나보다 보는 눈이 낮다는 증거야. 수련이나 열심히 해라.
최근 갑자기 자주 튀어나오는 탐에게 한소리 하고 있을 때, 태천은 탐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사람이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고?’
-응, 너도 최근에 수련하는 그 결인지 뭔지를 보면서 보는 눈이 좀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아직은 아닌가 보네? 아마 너희들 말로는 심안이라고 한다지?
‘심안? 그럼 너는 심안을 가지고 있는 거냐?’
-아니? 나는 원래부터 볼 수 있었는데? 이래 봬도 나도 용이라고?
탐의 그 말에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착각을 느꼈다.
용? 요옹? 탐이 용이라고?!
-응? 너 몰랐냐? 실망이다. 나 갈래.
‘야! 야!! 어디가!!’
실망이란 말 한마디만 툭 던지고는 탐은 쇽하니 사라졌다. 그 모습에 내가 어이없어할 때, 누가 내 옆구리를 툭툭 쳤다.
“형님!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응? 넌 또 왜.”
“방금 황제가 질문 했는데 그걸 씹으셨어요!!”
“……?!!!”
탐…… 이 망할 자식 때문에…….
호섬이의 귓속말에 나는 움찔하면서 황제를 쳐다보았고, 당연하게도 황제의 얼굴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이 망할 놈, 넌 강제 금식이다.
* * *
“무엄한 녀석 같으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딴청을 피워?!”
니 때문이잖아 망할 금의위장인지 뭐시긴지야!! 니 때메 탐이 나오고 그 나온 탐 때문에 정신이 쏠려서…… 어휴 말을 말자 말어.
너랑 이렇게 얘기해서 뭐하냐.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금의위장의 노성에 나도 인상을 찌푸리면서 맞받아쳤다.
“제가 딴청을 피운 탓에 폐하의 질문에 답을 못 드린 것은 명백한 제 실수입니다만…… 제가 금의위장께 이런 소리를 들을 위치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뭐라…… 윽!”
금의위장이 내 말에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무어라 답을 하려 할 때, 난 금의위장의 전신을 기운으로 압박했다.
갑작스레 움직이지 않는 몸에 금의위장의 얼굴이 시뻘게져서 내게 소리쳤다.
“감히 황제 폐하의 앞에서 내공을 사용하다니! 지금이라도 이것을 풀면 용서를…… 크엑!”
“아따 말 많으시네. 그리고 제가 멍을 때린 건 다름 아니라 당신 때문입니다. 갑작스레 튀어나서 무슨 일인가 싶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제 탓을 한 것도 모자라 소리치기까지? 그리고 이거 하나만은 알아주시죠. 저는 이곳에 황제 폐하의 신하의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 대 사람으로서 온 것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내 싸늘한 말에 표정을 파악할 수 없던 금의위장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내 말에 놀란 것도 있지만 내 어마어마한 내공에 저절로 몸이 굳는 것이었다.
‘이…… 이 무슨 막대한 내공이란 말인가?’
내심 젊어 보이는 외관에 같은 현경의 무인이란 사실과 황제의 앞이라는 사실 때문에 강경하게 나서서 우위를 점해보려던 초기의 심산과는 다르게 금의위장은 태천의 앞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현경 초입과 중입 사이의 벽도 크긴 컸지만 셀 수 없이 많은 내공과 수 많은 독초들을 먹고 생긴 독기와 용들에게서 얻은 수기와 화기가 합쳐진 혼천기는 일 갑자, 이 갑자 수준으로 나눌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자! 그래서 저에게 무슨 질문을 하셨다구요?”
그래서 뭐라고?
* * *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분명 처음만 해도 자신이 우위를 점한 줄만 알았다.
자신의 물음에 잘 대답했지만 그래도 약간의 시간 차가 있었고 그걸로 인해 자신의 위엄이 태천에게 통한 줄 알았다.
거기에 황궁의 숨겨진 힘인 금의위장까지 드러내는 초강수를 두었다.
하지만 믿었던 금의위장은 호통 한 번 잘못 쳤다가 자신의 옆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 신세가 되었고, 언제나 자신의 안마당이던 자신의 방(?) 어느새 태천의 안마당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은 황제라는 생각을 하면서 황제, 주태겸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태천을 황좌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혈교를 무찌를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아! 질보다는 양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당연히 알다마다 품질보다는 물량으로 해결한다는 의미 아닌가?”
황제의 말에 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알면 다행이네.
“그래서 황제 폐하의 군대를 얻으려고 합니다.”
“……짐의 군대를?”
“예, 현재 혈교의 전력 상황을 알고 계십니까? 저보다 강한 고수가 최소 3명입니다. 그리고 황제 폐하의 옆에 있는 저 싸가…… 아니, 저분과 동급의 고수가 무려 12명입니다.”
“으으음…….”
내 말에 황제는 침음을 삼켰다.
정보력이 아무리 좋다고는 하나 이제 막 꼬리가 드러나기 시작한 혈교의 정보를 나만큼 자세히 알지는 못하겠지.
물론 목숨을 걸고 얻은 정보긴 하지만.
“그리고 그런 그들의 교주는 얼마나 강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저보다 강한 3명의 고수의 힘을 모아도 잡지 못할 만큼 강할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희가 질을 논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래서 선택한 게 양입니다. 절대고수의 수는 부족하지만 다른 것들은 저희가 앞설 수 있습니다. 폐하의 군대만 있다면 말입니다.”
말이 끝나고 나자 황제는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옆에 있는 금의위장인지 뭐시긴지 계속 안 됩니다 폐하! 라면서 떽떽거렸지만 지풍을 날려서 마혈을 눌렀더니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현경의 고수답게 내공이 사라지는 게 눈에 띌 정도였다.
물론 차는 속도도 어마어마하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씩 줄고 있는 게 보였다.
그래도 아직까지 부담될 정도는 아니기에 입가에는 연신 미소를 지으면서 황제의 고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나고 눈을 감고 생각하던 황제의 입이 열렸다.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군.”
“얼마든지요.”
첫술에 배부른 밥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듯 천천히 다 먹어야지.
* * *
태천이 나가고 공허해진 방 안에서 이제는 몸에 자유를 되찾은 금의위장이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더니 태천이 나간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평소와는 다른 금의위장의 모습에 황제는 피식 웃으면서 금의위장을 불러세웠다.
“멈추게, 금의위장.”
“하지만……!! 폐하! 저자는 저를 농락한 것도 모자라 황제 폐하의 앞에서…….”
“됐네, 나는 이런 일로 자네를 잃고 싶지 않네. 자네는 정말 그자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이렇게 행동하는 건가? 아니면 화를 참지 못해서 이리 행하는 겐가?”
“……사실 폐하의 말이 맞습니다. 폐하의 앞에서 그런 수모를 당한 것과 제가 농락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진 것 같습니다.”
금의위장이 고개를 숙이면서 말하자, 황제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런 금의위장을 다독였다.
“지금 자네가 해야 할 것은 저자를 쫓아가서 자네의 화를 푸는 것이 아니라 혈교라는 극악무도한 집단을 막으면서 최대한 우리의 손해를 줄이고 저자에게서 많은 것을 뜯어내는 것일세.”
“예, 알겠습니다. 폐하의 명대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넓디넓은 황금의 방에서 두 명의 남자가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최소의 손해로 최대의 이득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