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연 네비게이션 86화
다음 날, 날이 밝은 뒤 나를 배웅하기 위해 궁주를 비롯해 설미진과 표태원이 부둣가에 나와 있었다.
그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나는 차디찬 북해를 가르는 배 위에 몸을 실었다.
뭐 수영해서 가도 되긴 하는데 솔직히 그건 나도 피곤해서 두 번은 못 할 일이기에 곱게 배에 몸을 실었다.
나를 태운 배는 빠르게 육지에 닿았고, 나를 내려주고는 배는 빠르게 북해빙궁으로 돌아갔다.
육지에 발을 디딘 나는 몸을 풀었다.
달려갈 거리가 멀기에 준비 운동은 필수였다.
몸을 다 푼 뒤에 나는 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네비!”
‘네, 태천 님.’
“목표는 운남이다!!!”
‘네!’
네비의 대답을 들으면서 나는 빠르게 운남을 향해 달려갔다.
맹의 중추적인 인물을 포섭하기 위해서.
* * *
운남.
이미 한 번 왔던 도시지만 활기차고 상인들의 활발한 상행위에 나는 눈을 감고 이 시장의 기분을 만끽했다.
아! 그리고 예전에 약초들을 팔 때 안면을 익혀두었던 몇몇 상인들과 인사를 하면서 나는 오독문으로 향했다.
여기 운남의 사람들은 오독문의 손님이나 오독문의 사람이라면 참 잘 대해준다.
하긴 예전의 운남은 그저 시골 촌구석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오독에서 정도 무림에 손꼽히는 고수인 독왕이 나오고 그 독왕이 속한 오독문에서 각종 약재나 독초 등을 구매하다 보니 상권이 발달하게 되고 타 도시에서 많은 이들이 찾게 되면서 왠만한 대도시들 못지않게 성장했으니 오독문의 손님들에게 잘 대해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오독문의 정문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독왕에게 일대일 수련을 받은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경비들이 나를 친절하게 안으로 안내해 주었다.
큼큼 역시 사람은 인맥이지?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면 소가주님이 오실 겁니다.”
“소가주라…… 독향 님을 말하는 거죠?”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정겨운 이름에 나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고, 내 끄덕임을 본 뒤 경비들은 다시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이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독문의 소가주, 독향이 나타났다.
독향은 나를 보자마자 달려오더니 와락 끌어안으면서 반가움을 표현했다.
“강 대협! 오랜만입니다!”
“그러는 소가주님도 안색이 좋아 보이십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강 대협이 주고 가신 여러 독초들 덕분에 소득이 있어서 말입니다.”
독향의 말에 나는 내가 가기 전에 주고 갔던 여러 독초들을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같이 대단한 독초들이었다. 물론 나한테는 별 도움이 안 돼서 주고 간 것이긴 했다만 도움이 됐다니 참 다행이다.
“그래서 독왕 어르신은?”
“아 가주님은…….”
“또 거기에?”
내 물음에 독향은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 나이가 몇인데 아직까지 팔팔하시네.
하긴 현경의 고수 그것도 중입이면 여든 먹은 할아버지라도 약관의 일반인들보다 팔팔할 테니 말이다.
독향의 말에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독향에게 말했다.
“그럼 오랜만에 거기로 가죠.”
“괜찮겠습니까? 거기에는 위험한 독들이…….”
독향의 걱정 어린 물음에 나는 피식 웃으면서 독향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치고는 앞장섰다.
이미 한 번 가본 곳이었기에 독향의 안내도 필요 없었다.
나 혼자 앞장서서 가자 뒤에 멍하니 서 있던 독향이 후다닥 뒤쫓아왔다.
* * *
똑똑똑.
독 제련실의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한창 독 실험 및 제련을 하고 있던 독왕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자신의 옆에 있던 장로 한 명에게 손짓했다.
하늘 같은 가주의 부름에 장로가 후다닥 달려와 물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야.”
“네…… 넵?”
일반 문도들에게야 하늘 같은 장로지만 현경의 고수인 가주의 앞에선 그도 일반 문도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독왕이 말했다.
“가서 문 열어주고 와라.”
“네? 잘 못 들었습…….”
“팍씨, 나이 좀 먹었다고 대들지?”
독왕의 손에서 보랏빛을 띠고 있는 독강의 모습에 장로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궁시렁대면서 문을 향해 걸어가 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연 이가 자신보다 아래라면 한소리 할 각오로 연 그의 눈에 소가주의 모습이 보였다.
말만 소가주지 실질적으로 물러난 독왕을 대신해 가주의 책임을 다하고 본신의 무위 또한 장로인 자신과 밀리지 않는 소가주의 모습에 장로는 조용히 문을 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문을 열고 사라지는 장로의 모습에 독향은 의아해했지만 이내 멀리서 보이는 독왕의 모습을 보곤 소리쳤다.
“아버지!”
“쯧. 귀청 떨어지겠다. 그리고 가주님이라 불러라.”
“제가 가주의 일까지 다 하는데요?”
“……큼큼 무슨 일이길래 네가 여기까지 온 게냐?”
독왕의 말에 독향이 씨익 웃으면서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독향의 모습에 의아해하던 독왕 독경천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강태천!!”
독경천의 외침에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태천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오래간만입니다. 어르신.”
* * *
독왕을 데리고 태천과 독향은 다시 손님 접견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독향이 잠시 차를 가지러 일어나고 나서야 태천과 독왕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갑자기 무슨 일이냐? 마교 일은 잘되었고?”
“예. 독왕 어르신이 주신 문건과 도움 덕분에 잘 되었습니다.”
“클클클 그럼 다행이고 그래서 화향이도 호진이 녀석과 잘 이어진 것 같더냐?”
짓궂은 독왕의 미소에 태천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주 깨가 쏟아지더군요.”
“크하하하!! 좋아 아주 좋아!”
“그런데 아직도 독을 만들고 계신 겁니까?”
“그럼! 요즘 천독. 고놈을 만들 방법이 얼추 만들어졌거든.”
독경천의 그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걸 만들 방법을 찾았다고?
현경의 고수조차 일수에 핏물로 만들어버린 무시무시한 독을?
“표정이 장관이구나. 그리도 놀랍더냐?”
“큼큼…… 천독이라면 무형지독을 말씀하시는 게 맞죠?”
“그래. 이제 거의 막바지다. 거의 다 완성되었어.”
태천의 표정을 보고 놀리던 독경천이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태천에게 자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자랑하던 독경천이 태천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무슨 성과라도 있었느냐? 내가 가르쳐준 섭독심법은 몇 성이나 달성했느냐? 떠날 때 10성이었으니 그래도 11성은 되었겠지?”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독경천의 모습에 나는 혀를 내두르면서 하나하나 답하기 시작했다.
“일단 성과라면 많이 있었죠. 마교에서 교주행세도 해보고 북해빙궁에 가서 전설적인 과실인 빙과도 먹어보고 용도 만나고 또 태양궁에 가서 혈교랑도 싸우고…….”
내 입에서 나오는 믿을 수 없는 내 말에 처음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독경천의 표정이 점점 놀람으로 점철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다음 말은 여태까지보다 파격적인 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경이 되었습니다.”
쾅!!
“뭐…… 뭐야!! 현…… 현경이란 말이냐!?”
내 말에 독경천은 책상을 쾅! 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물었다.
어이쿠 이거가지고 그렇게 놀라시면 안 되는데?
“네. 그리고 겸사겸사 만독불침도 달성했는데.”
“…….”
내 말에 더 이상 답할 힘도 없는지 독경천은 자리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바로 그때 독향이 차와 간단한 다과들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방에 들어온 독향은 방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버지는 왜 저리 축 처져 계신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향이 좋네요.”
그리 말하면서 나는 독향이 가져온 차를 후루룩 마셨다. 아, 차 맛 겁나 좋네.
* * *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독왕에게서 내 이야기를 들은 독향이 독왕과 똑같은 표정을 지은 것은 비밀로 하고 그 후에 일에 대해 독경천과 독향과 함께 논의하기 시작했다.
포문을 연 것은 바로 나였다.
“맹을 하나 만들려고 합니다.”
“맹?”
“갑자기 무슨 맹을?”
갑작스러운 내 말에 둘이 의아함을 표하자 나는 태양궁에서 있었던 혈교와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가 한 말이 이해가 됐는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대협의 말은 혈교에는 지금 정도 무림에는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현경의 극인 고수가 무려 3명에, 그들이 모시는 교주의 무위는 측정조차 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이 지칭하는 ‘그분’은 아마 교주를 상징하는 말일 겁니다. 현경의 극에 달한 고수들이 모시는 자라면…… 정말 전설상의 경지인 생사경의 경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생사경!”
생사경, 길고 긴 중원무림과 세외 무림까지 통틀어서 단 세 명밖에 도달하지 못한 경지였다.
소림에 달마, 무당에 장삼봉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교에 천마, 이렇게 단 세 명만이 발을 디딘 경지가 바로 생사경이었다.
물론 생사경으로 끝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 내려오는 자연경의 경지에 발을 디뎠다는 말도 있지만 대부분 생사경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그 세 명 모두 생사경이라고 생각 중이다.
그런 경지에 도달한 인물이 혈교에 있다는 사실에 독향은 물론 독왕 독경천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물론 이건 정말 사실인지는 모릅니다. 그저 교인이기에 같은 동급의 무인을 섬기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정말 생사경이라면…… 이렇게 조각나 있는 현재의 무림으로서는 막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내 생각이 틀린 것도 아닌 것이 내가 회귀하기 전에는 혈교에게 대부분의 파들이 봉문은 물론이고 멸문까지 당한 곳이 많았다.
그리고 혈교의 교주인 혈교주의 손에 정도 무림인 중 가장 강한 검황이 죽었기 때문에 혈교주의 무위는 최소로 잡아도 현경의 극에 달한 무인일 것이다. 라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선 이걸 납득시킬 방법이 없으니 그저 추측성 발언으로 들리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네가 생각한 것이 이 무림맹이란 거냐?”
끄덕끄덕.
독경천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독경천은 한숨을 내쉬면서 독향에게 말했다.
“후우…… 향아.”
“네. 아버…… 아니, 가주님.”
독경천에게서 느껴지는 기세에 아버지라 답하려던 독향은 급하게 가주라는 말로 바꾸어 말했다.
그런 독향에게 독경천이 명령했다.
“그래. 가주의 이름으로 말하겠다.”
“말씀하십시오.”
“지금 당장 오독문의 회의를 열겠다. 이 회의는 가주급 이상만 모인 회의로 할 것이고 너는 소가주의 직위로 참석을 허하겠다.”
그 말에 독향을 무어라 답하지 않고 그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생각했다.
‘좋네. 잘 되어가고 있어.’
구파일방과도 비견되는 곳 중 하나인 오독문의 무림맹 참석을 생각하면서 태천은 이제는 식어버린 차를 홀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