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연 네비게이션 74화
“궁주님! 준비 끝났습니다.”
“……그럼 출발하지.”
타는 듯한 붉은 색의 갑주를 차려입은 염진백에게 똑같이 붉은색의 갑주를 입은 청년이 다가와 말을 했다.
그의 말에 염진백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염진백이 모습을 드러내자 바깥에서 염진백을 기다리던 태양궁의 무인들이 자신들의 병장기를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쳐들면서 소리쳤다.
“궁주님을 뵙습니다!!!”
“궁주님을 뵙습니다!!!”
그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도 염진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표정이 딱딱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런 염진백이 입을 열었다.
“……지금 외성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압니다!”
우렁찬 목소리에 염진백은 침통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 목소리에는 평소와 같은 털털함과 유쾌함은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우리를 습격한 이들은 혈교의 무리로 알려졌다.”
“…….”
염진백의 말에 우렁찬 대답을 하던 태양궁의 무인들의 입이 닫혔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염진백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자네들의 친구와 가족 혹은 사랑하는 연인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있다…….”
그 말을 끝으로 염진백은 입을 닫았다.
그리고 수 초 후, 염진백은 으르렁거리듯이 말을 해나갔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오늘 죽을 각오로 궁을 사수한다. 아니, 나아가 혈교의 무리들을 남김없이 씹어 먹을 것이다. 지금 여기서 무서운 이, 혹은 자신의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지금 즉시 나가도 괜찮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자네들에게 하는 마지막 권유다. 궁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었는가?”
그런 염진백의 말에 태양궁의 무인들이 쿵 쿵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당연합니다! 궁이 없으면 저희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희들의 사랑하는 이를 버린다는 뜻도 아닙니다. 저희는 궁도 사랑하는 이들도 모두 지킬 것입니다!!!”
그들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염진백의 딱딱한 표정이 스르륵 풀리면서 평소와 같은 미소가 입에 걸렸다.
그리고 염진백은 그런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평소와 같이 말이다.
“가자! 궁의 적들을 죽이고 우리의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러!!”
염진백의 말과 함께 무인들은 등을 돌려 내성의 성문으로 오와 열을 맞춰서 걸어갔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던 염진백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아빠! 나도 갈 거야!”
바로 염화연이었다.
그리고 염화연의 폭탄발언에 무인들의 뒤를 쫓으려던 염진백의 발이 우뚝 멈춰섰다.
그의 고개가 끼기긱 돌아갔다.
“무……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느냐?”
“나도 아빠 따라서 혈교 놈들 때려잡을래!”
염진백의 말에도 염화연은 자신의 허리에 손을 척 올리면서 당차게 말했다.
그런 염화연의 말에 염진백이 마른세수를 하며 염화연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아…… 화연아 이건 장난이 아니다. 지금 밖에선 죄 없는 일반인들이…….”
“알아. 그러니까 나도 거들겠다는 거지. 이래 봬도 나도 최절정의 무인이라고? 그것도 양기와 음기 둘 다를 다루는?”
하지만 그런다고 염진백의 말을 들을 염화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염화연의 말에 염진백은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염화연은 태천의 도움으로 빙과를 먹고 환골탈태를 한 뒤, 궁내에선 궁주인 염진백을 빼고 몇몇을 제외하면 이길 이가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혈교와의 싸움에서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어느 아버지가 자신의 딸을 죽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데려가려 하겠는가?
아무리 하려는 일에 도움이 되어도 그렇지 말이다.
염화연의 시달림에 견디다 못한 염진백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하지만 조건을 걸었다.
“좋다!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 조건이 뭔데?”
“나를 제외하고 너를 지켜줄 만한 이를 한 명 데려와라.”
염진백의 말에 염화연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무리 자신이 이번에 강해졌다지만 태양궁 내에는 그래도 자신보다 강한 이들이 몇몇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염화연의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 났다.
“에? 강 아저씨는?”
“강 장로는 이미 외성에서 전투 중이다.”
“으음…… 그러면 김 아저씨는?”
“김 장로는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강 장로와 마찬가지로 외성에서 전투 중이다.”
“으으으윽…….”
거듭되는 좌절에 염화연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 모습에 염진백은 속으로 히죽 웃었다.
‘흐…… 그래도 못 나가겠군. 확실히 화연이를 데려가면 혈교 놈들을 제압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휴우…… 그래도 다행이지. 내가 더 노력해야겠군.’
염화연을 두고 가니 자신이 염화연의 몫까지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염진백이 하고 있을 때, 그런 염진백의 귀에 염화연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 사람! 나 치료해 준 그 사람 있잖아! 그 사람도 엄청 강하던데. 그 사람이 어때? 괜찮지?”
“그래. 태천 군이라면 괜찮겠지…… 하지만! 그 사람은 지금 궁에 없는 걸로 아는데?”
그리 말하면서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가려던 염진백의 입꼬리는 이어지는 염화연의 말에 우뚝 멈춰섰다.
“저어기 오는 것 같은데?”
그리 말하며 염화연은 한쪽을 향해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그 손끝에는 달려오는 태천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염진백은 마른세수를 했고, 염화연은 헤실헤실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 * *
“하……? 궁주님 지금 그 말이…… 하아…….”
뭐 빠지게 달려온 태천은 도착하자마자 자신에게 딸을 맡아달라는 말을 하는 염진백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태천을 염진백이 달래며 말했다.
“미안하네. 그런데 화연이, 저 아이가 계속 자신도 가겠다고 하길래…… 하지만 저 아이의 실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 막을 명분이 없어서…… 정말 미안하네.”
“저는 화연이에게 위험한 곳만 골라서 가게 될 텐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그래도 화연이가 자신의 몸은 지킬 만한 실력은 되지 않은가?”
결국 태천이 두 손을 들었다.
‘그래도 저번에 보니 동급의 고수 정도는 가뿐히는 아니어도 이기긴 할 것 같으니…… 하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꺄아! 고마워! 오라버니 짱!”
태천의 말에 화연이 태천에게 찰싹 붙어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하지만 태천은 목석과도 같이 무뚝뚝하게 화연을 밀어내면서 염진백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화연이의 문제도 해결된 것 같으니 빠르게 가죠. 아까 오면서 보니 궁주님과 같은 붉은 갑주를 입은 무인들이 외성을 향해 가고 있던데 시간을 많이 뺏겼네요.”
“음…… 태양대가 벌써 거기까지 갔군. 우리도 어서 출발하지.”
“그 무인들이 태양대라는 이름이었군요. 알겠습니다. 저희도 빨리 가죠.”
그리 말하면서 태천은 화연에게 말했다.
“일단 데려가라고 하시니 데려가는데 몇 가지는 꼭 지켜.”
“응! 뭔데?”
“첫째! 내 말을 무조건 들을 것!”
“알았어! 두 번째도 있어?”
“당연하지. 둘째! 내 말을 무조건 들을 것! 셋째도 내 말을 무조건 들을 것!! 이것만 기억해. 내가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마.”
태천의 말에 화연은 입을 삐죽 내밀면서 말했다.
“쳇. 완전 우리 아빠네. 아빠야.”
“어찌 되었든 이거 수락 안 하면 난 안 데려갈 거다.”
하지만 결국 태천의 말에 화연은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무조건 오라버니 말을 들을 것! 맞지?”
“그래. 그러면 돼. 그리고 늦었으니 뛰자. 경공은 알지?”
“응응!”
“그러면 가자. 궁주님도 일단 함께 가시죠.”
“알겠네.”
그리 말한 뒤, 태천은 외성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 뒤를 진백과 화연이 쫓았다.
* * *
외성을 향해 추섬보를 사용해 빠르게 달려가던 태천은 자신에게 그리 뒤처지지 않는 둘을 보곤 꽤 놀랐다.
‘꽤 빠르네? 궁주야 뭐 현경의 무인이라 그렇다고 치지만 화연이는 좀 의왼데?’
태양궁의 궁주이자 현경의 무인인 염진백이야 추섬보를 사용하는 태천과 비슷하다지만 최절정인 화연도 태천에게 뒤처지지 않았다.
그 모습에 태천이 화연과 진백에게 물었다.
“그런데 궁주님이야 그렇다고 하지만…… 화연이는 어떻게 따라오는 겁니까?”
“아? 그거 말인가? 화연이는 우리 궁에 내려오는 신법을 10성까지 익혔네. 애가 어릴 때는 달리는 것을 참 좋아해서 말일세. 몸이 안 아플 때는 매일매일 달리곤 했었지. 그래서 내가 신법을 가르쳐주니 곧장 배우더군.”
“대단하지? 헤헤.”
진백의 말에 화연은 시시덕거리면서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태천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말했다.
“그러면 속도를 더 올려도 되겠네?”
“에?”
“응? 그게 전력 아니었나?”
둘의 물음에 태천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럴 리가요. 그럼 제대로 달리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추섬보는 8성의 경지의 한계를 풀고 9성의 힘으로 달렸다.
그와 함께 거의 근접해서 달리던 진백과 화연과의 거리가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태천이 점점 멀어지자 화연은 승부욕이 생겼는지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달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천과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졌다.
그 모습에 결국 화연은 백기를 들었다.
화연의 백기에 피식 웃으면서 진백에게 말했다.
“궁주님은 아직 괜찮으시죠?”
“음? 아아 나야 괜찮네. 내공도 아직 넘치고 신법의 경지도 그리 낮지 않아서 말일세.”
“알겠습니다. 화연아 너는 업혀라.”
“에? 정말?”
태천의 말에 화연은 화들짝 놀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 모습에 태천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업혀, 그래야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지.”
“……알았어.”
태천의 다그침에 화연은 폭 하고 태천의 등에 매달렸다.
화연이 매달린 것을 확인한 태천은 다시 자세를 잡고는 외성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 * *
-꺄아아악!!
-사…… 살려주세요…… 집에…… 집에 가족들이…….
-다리가아!! 내 다리가아!!!
외성은 난장판이었다.
다리가 잘린 사내, 혈교 무사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살려달라 애원하는 어린아이, 혈교 무사들에게 머리끄덩이를 잡힌 채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는 여성까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소동의 중심인 혈교 무사들이 그런 모습을 킬킬거리면서 쳐다보며 농을 던졌다.
“너는 이번에 얼마나 죽였냐?”
“나? 한 10명 넘게?”
“크하! 부럽다, 부러워. 너 정도면 교에 가면 상을 받겠구만.”
“으히힛…… 부족해! 아직 피가 고프다고!”
“낄낄낄. 난 아직 5명밖에 못 죽였는데. 쯧 어디 더 없나?”
“에이 그러지 말고 우리 요거나 하는 게 어때?”
농을 던지면서 떠들던 혈교 무사 중 한 사람 손가락을 원형으로 만든 뒤, 검지로 쑤시는 시늉을 하며 다른 무사들에게 물었다.
그의 물음에 다른 무사들이 파하하 웃으면서 말했다.
“크크큭. 그거 좋지! 어디 뭐 구해둔 데 있어?”
“당연하지! 킥킥 아마 이미 하고 있지 않으려나? 우린 그냥 으슥한데 아무 데나 들어가서 끼면 된다고! 킥킥킥.”
“으하핫!!! 그렇겠구만! 좋아~ 어디 보자~ 으슥한 데가~?”
그의 말에 킥킥거리면서 으슥한 데를 찾던 남자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야. 저기 누구 오는 것 같지 않냐? 불이 달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