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연 네비게이션 57화
“그래도 그 녀석들은 일반인들은 잘 건드리지 않았어. 나는 경지가 일반인 수준까지 떨어져서 그 녀석들의 관심 밖이었지. 뭐 하급 교인들이야 달랐지만 말이야. 그래서 어느 정도 소식은 들을 수 있었어. 혈교에는 여럿 현경(탈마)의 고수들이 존재하고, 거기에 혈교주는 못해도 현경의 극에 이르렀다는 말이 돌았지. 그래서 내가 더욱 강해져야 한다고 하는 거다. 지금 이 정도의 힘으로는 혈교주는커녕 그 밑의 인간들도 잡지 못해!”
-……그래서 이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이유가 뭐냐?
탐의 말에 태천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고,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줄은 나도 몰랐는데, 막상 내가 그렇게 되니까 입이 근질근질했거든.”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 그건 또 뭔 소리야?
“아아,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내 이야기를 꼭 털어내고 싶었거든. 이렇게 말하니 후련하고 좋네.”
-참, 너도 고생이다. 고생이야.
“읏차. 그런데 그 녀석은 죽은 거냐?”
-어. 내 배 속에 잘 있다.
탐의 말에 태천이 큭 하고 웃은 후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양의심공은 두 명의 자아와 두 개의 의지가 한 몸에 있는 거랬는데…… 너가 먹었으면…… 한 몸에 두 가지의 의지는 있는데…… 한 명의 자아만 있는 거네?”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분간이 안 가자 태천은 고개를 털면서 탐에게 말했다.
“어휴. 몰라, 일단 나가고 보자.”
-그래. 나가라.
팍!
태천의 말에 탐이 태천의 이마를 탁! 쳤다. 탐이 이마를 치자 태천은 자신의 정신이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태천의 귀에 탐의 말이 꽂혔다.
-그리고 너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라. 네 주변을 돌아봐라. 널 따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나 확인해.
그 말을 끝으로 태천의 시야가 암전됐다.
탐의 마지막 말에 태천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고맙다. 돌아가면 먹을 것 좀 챙겨주마.’
* * *
“흐어어어억!!!”
현실로 돌아온 태천이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태천이 갑자기 눈을 뜨더니 숨을 거칠게 내쉬자 호법을 서던 청운자와 천동이 무언가 잘못됐나 싶어서 급하게 태천에게 다가가 물었다.
“괜찮은가?”
“야! 강태천! 괜찮냐? 내가 누군지 알겠어?”
천동이 태천의 볼을 찰싹찰싹 때리며 묻자, 태천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자신의 뺨을 계속 때리고 있는 천동을 보며 말했다.
“……그만하지?”
“들켰냐?”
진즉에 태천이 정신이 든 것을 알고서도 뺨을 때리던 것을 들킨 천동이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물러섰다.
천동이 물러서자 청운자가 태천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말했다.
“어떤가? 정신은 괜찮은가? 어지럽지는 않고? 혹 누군가 자네에게 속삭이고 있지 않은가?”
청운자의 말에 태천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정신도 괜찮고 어지럽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가 저에게 속삭이는 일은 이제 다시 없을 겁니다.”
태천의 말에 청운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나는 지금도 속삭임을 듣고 있는데…….”
“장문인께서는 아직도 또 다른 자아를 가지고 계신가 보군요?”
“음? 설마 자네?!”
청운자가 그제야 태천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태천을 쳐다보았다.
그런 청운자의 표정을 본 태천은 탐이 잠들어 있는 자신의 왼팔을 한번 내려다보고는 청운자를 향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제 몸에 있는 자아는 저 하나뿐입니다. 저 혼자 있기도 바쁜데 딴 놈한테 넘겨줄 자리는 없습니다.”
태천의 그 말에 청운자는 입을 떡 벌린 채 태천을 멍하니 쳐다보았고, 태천은 그런 청운자의 시선을 즐기며 속으로 탐에게 말했다.
‘좀 있다가 흑삼 좀 더 주마.’
-음음…… 당연히 그러셔야지. 낄낄.
탐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태천은 생각했다.
‘이걸로 목표에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게 섰거라, 혈교주! 강태천이 간다!’
후웅…… 후우웅…….
양의심공을 익히고 내면세계에서 빠져나온 지 일주일 째.
태천은 한 손으론 검을, 다른 한 손으론 도를 휘두르며 양의심공에 익숙해지려 노력하고 있었다.
“후욱…… 후욱…… 아우, 이거 역시 힘드네.”
“그래도 꽤 많이 늘었군.”
거칠게 숨을 내쉬는 태천의 옆에서 청운자가 말했다.
“그래도 벽력도법이 내 검법과 비슷한 패도적인 도법이라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이 정도도 못 했을 겁니다.”
“그렇다 해도 자네의 실력이 폄하되는 건 아니네.”
“쩝…… 뭐, 그건 그렇지만…….”
내면세계에서 나온 뒤 태천은 청운자에게 도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청운자도 태천이 내면세계에서 새롭게 태어난 또 다른 자신의 자아를 봉인하는 게 아니라, 아예 없애 버렸다는 말을 듣고 그 방법을 듣기 위해 태천의 곁에서 도법을 봐주고 있었다.
물론 태천이 없앤 게 아니라 탐이 없앤 거라 태천도 방법을 모르지만, 청운자가 좋게좋게 알아들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태천은 도를 휘둘렀다.
부웅……! 부우웅!!
오른손으로는 천마검법을, 왼손으로는 벽력도법을 펼치며, 태천은 양손으로 무공을 펼치는 연습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태천이 있는 연무장에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태천은 도법과 검법을 펼치는 것을 멈추고 발소리의 주인이 오는 것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소리의 주인이 나타났다.
“여어! 이른 아침부터 열심이네?”
“쯧…… 천동, 니가 느린 거다.”
“하? 야, 지금 새벽이다? 그건 알고 있지?”
천동의 말대로 지금 막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천동의 말에 고개를 돌린 태천은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는 무안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큼큼…… 그럼 왔으니 대련이나 시작할까?”
“좋지!”
태천의 말에 천동은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들며 대련 자세를 잡았다.
천동이 자세를 잡자 태천도 한 손에는 검을, 다른 한 손에는 도를 쥐었다.
둘이 자세를 잡자 청운자가 그들의 한가운데에 서서 심판을 보았다.
“시작!”
청운자의 시작 소리와 함께 태천과 천동은 서로를 향해 마주 달려갔다. 그러고는 서로를 향해 검과 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천동이 태천을 향해 펼친 검법은 태극혜검이 아니었다.
“읏! 이건 또 뭐냐?”
태천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급하게 도와 검을 교차해서 천동의 검을 막으려 했지만, 천동은 물 흐르는 것같이 태천의 검과 도를 타고 내려가 태천의 목을 노렸다.
자신이 검과 도를 교차해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천동의 검이 힘을 잃지 않고 자신의 목을 향해 떨어지자, 태천은 검과 도를 거두고 뒤로 몇 발짝 물러나며 물었다.
“그건 뭔 검술이야!”
“너를 이기려면 쾌로는 안 될 것 같더라고.”
원래 태천이 익히고 있던 천마검법은 기교는 얼마 없지만 막대한 힘으로 찍어 누르는 듯한 검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쾌검을 익힌 천동은 강검의 성질을 지닌 태천에게는 밀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천동이 택한 것은 부드러운 검법, 유검이었다. 하지만 태천에게 이기고 싶다고 아무 유검이나 익힌 것이 아니었다.
“태극조화검이다. 너의 그 무지막지한 강검을 이길 방법을 고민하다가 장문인께 가르침을 받았지.”
“쳇…… 그래 봤자야!”
천동의 말에 태천은 검과 도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다시 달려들었다.
카강 카강 캉캉캉!
태천은 천동의 곁에 붙어서 폭풍같이 검과 도를 휘두르며 압박해 나갔다.
하지만 천동은 물 흐르듯이 태천의 검과 도를 비껴치며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태극조화검을 익힌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상성이란 게 있는 거다. 태천아.”
“그으래? 상성? 상성 좋지!!”
자신의 검과 도를 전부 다 막아내는 천동을 보며 태천이 이를 뿌득 갈더니 천동을 향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네가 좋아하는 상성, 나도 써줄게!”
그렇게 말하며 태천이 다시 천동에게 달려들었다.
똑같은 방식으로 달려드는 태천의 모습에 천동이 한숨을 쉬며 다시 태극조화검을 펼치려 할 때, 태천의 검식이 바뀌었다.
그리고 섬전과 같은 속도로 태천의 검이 천동을 찔러 들어왔다.
“큭! 갑자기 검식을 바꿔? 그것보다 대체 이 검식은 뭐지?”
태천이 달려들던 도중 검식을 바꾼 것도 신기하고 기상천외한 일이었지만, 자신의 태극조화검을 깨고 자신을 공격한 이 기묘한 검식이 궁금했던 천동이 태천에게 물었다.
천동의 질문에 태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냐?”
태천의 말에 천동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서 어디서 보았을까 생각할 때, 심판을 보던 청운자의 입에서 정답이 나왔다.
“……독고구검이군. 그런데 자네가 어찌 화산의 비전을……?”
천동은 그제야 태천이 펼친 검법을 생각해 냈다.
“그래! 천하제일 무림대회에서 네가 화산파 김무학의 독고구검을 사용했었지.”
“이제 기억나냐? 그럼 맞아야지. 니가 그렇게 좋아하던 상성에 한번 처맞아봐라.”
방금까지 자신의 공격이 하나도 통하지 않아 꽤 열이 났던 태천이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천동에게 검을 휘둘렀다.
섬전과도 같은 속도에 천동이 기겁을 하며 태극혜검으로 응수했다.
천동이 태극혜검을 사용하자 태천이 걸렸구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쾌검을 쓴 거야?”
“아차!”
상상도 못 할 빠르기의 쾌검에 자신도 모르게 쾌검으로 응수했지만…… 태천에게는 무기가 하나 더 있었다.
“젠장…….”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는 천동을 향해 태천의 뭉툭한 도가 날아오고 있었다.
이건 못 막겠다는 생각에 천동이 불완전한 자세로 태극조화검을 펼쳐 도를 흘려내고는 간신히 몸을 뺐다.
“어휴…… 미친놈 같으니.”
“왜? 네가 좋아하는 상성. 나도 좀 써보자.”
태천은 그리 말하면서 독고구검의 아홉 검식을 전부 펼쳐 보였다.
강검, 쾌검, 유검은 물론, 철조와 봉, 편과 같은 무구들을 상대하는 검식까지 전부 보고 나자, 천동이 양손을 들고 항복 의사를 밝혔다.
“에라이. 진짜 못 해먹겠네.”
“이걸로 7승 0패 0무네?”
“그래, 니가 다 이겨먹어라 그냥.”
지난 일주일 동안 태천과 천동은 매일 대련을 한 번씩 했지만, 결국 천동의 전패로 마무리 지어졌다.
첫날에는 태천이 도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천동에게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태천의 오른손에 있는 검을 막지 못해서 결국, 패배했다.
그 뒤부터 태천의 도를 다루는 실력이 점점 늘어나면서 기회조차 사라져 버려, 청운자에게 부탁하여 겨우겨우 태극조화검을 익혔는데, 이것마저 막혀 버리자 천동은 허탈해했다.
그런 천동을 태천이 위로하며 말했다.
“괜찮아. 네가 못난 게 아니라 내가 잘난 거니까.”
물론 위로를 가장한 자기 자랑이었지만.
“에라이, 꺼져!”
“큭큭큭, 안 그래도 오늘 꺼질 예정이다.”
“……벌써 그렇게 됐냐?”
“응. 그래도 장문인에게 벽력도법을 배운다고 일주일이나 머무른 거지.”
천동은 꺼지라고는 했지만, 막상 꺼진다고 하니 아쉬운 듯 태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잘 가라.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말고.”
“맞기는 니가 나한테 맞을 것 같은데?”
천동의 말에 태천이 주먹을 들고 위협하자, 천동이 두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폭력 반대! 평화 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