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終章 (145/146)

終章

정파 연합과 사파 연맹은 극적으로 화의를 체결했다. 무척이나 짧은 전쟁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서로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진운룡의 죽음이 공표된 것은 며칠 뒤의 일.

천마신교는 자세한 이야기는 회피했다. 그저 그가 죽었다는 것만을 공표했을 뿐.

정파 무림도 사파 무림도 이에 큰 반발이나 의문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두 세력이었다.

남궁운이 이끄는 천신맹 세력은 섬서성으로 귀환했다. 화산과 종남이 사라진 그곳에 새로이 세력을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긴 악몽은, 일단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형님, 제발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십시오.”

천신맹이 귀암산을 떠나던 날. 제갈순은 마지막으로 제갈현을 설득하고 있었다.

“아우야, 잊었더냐. 나는 이제 천무맹 군사가 아닌 천마신교의 장로다.”

“허나 진정으로 원하여 된 것은 아니잖습니까? 천마 역시 형님이 원하신다면 놓아주겠다고 했고요.”

“이것은 속죄다. 우리의 네 번째 형제를 위한 속죄.”

“네 번째…… 형제라니요?”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서자가 한 명 있었지. 가문 내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알고 있던 이야기다. 당시 처분을 맡았던 이는 아버님의 최측근이었는데, 차마 그 아이를 죽일 수 없었기에 귀암산으로 보내 버렸다고 하더구나.”

“…….”

“그리고 정천의 이야기나 정황들을 보면, 그 아이는 진마동에서 최후를 맞이했던 게 확실하다. 우리는, 제갈세가와 강호무림의 모두가 그 아이와 마교에 큰 빚을 진 셈이지.”

제갈순의 고개가 떨어졌다. 제갈현은 희미하게 웃고서 말했다.

“어쨌든 잘 살려무나. 각이에게도 잘 얘기해 주길 바란다.”

“형님…….”

“가거라. 다음에 만날 땐 형제가 아닌 천신맹과 천마신교의 일원으로서 만나게 될 것이다.”

* * *

멸살독마는 울상을 지었다. 그의 앞에는 천마 진백란에 의해 갈가리 찢겨진 두루마리들이 가득했다.

“너무하십니다, 천마.”

“너무하는 건 독마예요. 진운룡 건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는 거예요?”

엉망이 된 두루마리엔 하나같이 그럴싸한 혼담 상대의 정보들이 적혀 있었다.

다른 이도 아닌 천마의 배필인 만큼 그 범위는 중원뿐 아니라 서역에까지 뻗어 있었다.

“본교의 수호뿐 아니라 후계를 남기는 것 역시 천마의 의무입니다. 천마께서도 언제까지고 꽃다운 청춘일 순 없으니, 하루라도 빨리 혼약하시어 후사를 남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독마, 본좌는 천마신교와 혼약했어요.”

“그런 말로 어물쩍 넘어가시려는 겝니까?”

진백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듯 조심스레 말했다.

“저, 독마. 사실 나…… 이미 태기를 느끼고 있어요. 아마도 정천, 그 사람의 아이인 것 같아요.”

“어디서 약을 파십니까? 허튼소리 마시고 하나 찍으십쇼.”

“아, 정말!”

진백란은 옆에 놓인 꽃병을 냅다 던졌다. 물론 그런 것에 맞을 멸살독마가 아니었다.

“이 늙은이는 포기하지 않을 겝니다. 정 꼴 보기 싫으시면 귀양을 보내시지요.”

“정말 그래 버릴까……?”

“물론 그러더라도 포기하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흥.”

코웃음을 친 진백란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표정이 순간 쓸쓸해졌다.

“그 사람은요, 독마?”

짤막한 물음.

그 안에 내포된 의미를 모를 멸살독마가 아니었다.

“지금쯤은 사천성의 경계를 넘어가고 있을 테지요. 조만간 강룡단이 귀환할 겁니다.”

“그런가요.”

진백란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진운룡과의 결전이 끝나고, 그녀가 도착했을 때쯤엔 정천은 이미 탈진하여 혼절한 상태였다.

체내의 진기가 모조리 바닥난 데다 호흡까지 미약하여 정말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비슷한 내공을 지닌 진백란이 내력을 전달하지 않았다면 정말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흥. 그 망할 녀석, 천마께서 구해 주신 은혜도 모르고 그냥 떠나 버리다니. 웃기는 놈 아닙니까?”

진백란은 멸살독마의 투덜거림을 한 귀로 흘려 넘겼다. 어차피 그 역시 진심으로 저리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빚을 진 것은 우리지.’

정천 한 명만이 아니었다.

진천백과 나랍멸, 십이천승을 비롯해 진운룡에 의해 죽어간 모든 이들. 무림은 그들에게 미래를 빚진 셈이었다.

게다가 진백란은 정천이 떠나는 이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도저히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눈앞으로 펼쳐진 황야.

그곳을 응시하던 모용훈이 물었다.

“정말 중원을 완전히 떠나실 겁니까?”

“그래. 일단은 서역으로 갈 생각이다.”

“다시 생각하실 순 없겠습니까? 지금이야말로 형님 같은 분이 필요한 때입니다.”

정천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야, 모용훈.”

“예?”

“난 중원제일인이다.”

자랑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모용훈도 관식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진운룡과 팔룡천법왕이 죽은 이상, 이제 중원을 통틀어 정천에 필적하는 무인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도 큰 문제가 된다.

정천을 이용하려는 이들, 혹은 정천을 두려워하는 이들. 어느 쪽이 되었든 정천이 존재하는 동안은 언젠가는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무림은 다시 피로 물들겠지.’

싸움은 무인의 숙명이다. 모용훈도 관식도은 언젠가 자기 자신들의 피로 목욕하게 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지금의 무림엔 휴식이 필요했다.

“어쨌든 앞으로 잘해 봐라, 용검대주, 강룡단주.”

“……예.”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이 말을 돌려 물러났다. 이제 정천을 배웅하고 나면 모용훈과 용검대는 섬서성으로, 관식과 강룡단은 사천성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다음번엔 적으로서 만날 것이다.

‘그날까지…….’

‘정진해라.’

두 사람은 눈빛만으로 대화를 나눴다. 그다지 서로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나눌 수 있는 대화도 있는 법이었다.

“…….”

정천은 말없이 황야를 응시했다.

일단은 서역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중원이 아니라면 어느 곳이든 좋았다.

‘가능하면 혼자인 편이 더 나았겠지만.’

정천의 옆으로는 화연란을 비롯한 화륜문 식구들이 서 있었다.

비단 그들뿐 아니라 모용린과 요태희 역시 그를 따라왔다. 장유추 역시 서역에 가 보고 싶다고 난리를 쳤으나 장로의 직위 때문에 오질 못했다.

어쨌든 당분간 중원과는 작별이었다. 지난 십여 년과도, 응보와 분노로 점철된 나날들과도.

정천은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아침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출발하자.”

정천이 먼저 말을 달렸다. 다른 이들도 말고삐를 죄어 그 뒤를 따랐다.

한 무인의 여정이 끝났다. 한 인간의 여정이 시작됐다.

세상이 그 앞에 있었다.

〖강룡검제 終〗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