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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一章 마지막에 남는 것 (143/146)

第十一章 마지막에 남는 것

나랍멸은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돌아왔다.

실제로 그는 잠시 동안이지만 죽음을 맛보았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닌 진짜 죽음을.

세 발의 찰타라의 폭발력으로도 무한천쇄격을 이기진 못했다. 기껏해야 그 위력을 반감시키는 것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호신강기와 몸뚱이뿐.

반감됐음에도 불구하고 무한천쇄격은 나랍멸의 심장을 정지시켰다. 호신강기마저도 그 엄청난 위력을 모두 막아 내진 못했던 것이다.

무시무시한 충격으로 인한 심장 정지.

아주 짧은 시간, 그는 분명 죽어 있었다. 진운룡 역시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심장은 분명 정지해 있었고, 당연히 기척 역시 있을 수가 없었기에.

그렇더라도 진운룡의 성격상 반드시 확인사살을 했을 것이다.

십이천승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나랍멸은 정말로 죽음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나 때마침, 의도한 것은 아니나 십이천승이 나타났다. 그리고 진운룡은 나랍멸을 내버려 두고 그들을 상대했다.

명령을 불복한 그들의 충성심이 나랍멸을 살린 셈이었다.

무지막지한 충격으로 인해 심장이 정지한데다 몸 곳곳이 부서지고 찢겨진 나랍멸이었으나, 다행히 내상은 생각보다 적었다.

그리고 그에겐 십오 갑자에 이르는 무시무시한 내공이 있었다.

중원제일이라 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내공.

전투로 인해 상당 부분 소모되긴 했어도 한 사람의 몸에 담겨 있기에 지나치게 큰 내공이었다.

그리고 이를 운용하는 현원청화공은 본디 구도의 길, 불도의 길에서 탄생한 구세(救世)의 무공.

현원청화공의 기운은 싸늘하게 식어 가는 나랍멸의 몸속을 주천했다. 미약하며 느리지만 꾸준히.

무한천쇄격으로 인한 충격이 컸던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현원청화공의 기운이 워낙 약했던지라 진운룡조차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리고 조금 전, 진천백과 진운룡이 혈투에 들어간 시점에.

나랍멸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

나랍멸은 눈을 뜨자마자 대강의 상황을 인지했다. 그리고 곧장 기척을 최대한 죽였다. 깨어나자마자 눈치채여서는 죽음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최후의 수단을 준비했다.

‘맞서 싸워서는 그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초대 천마이자 과거의 지존이었던 진천백조차도 지금의 진운룡 앞에선 초라해 보일 지경이었다.

절세신공이란 천마신공의 기운이 저리도 안쓰러워 보일 줄이야.

그 어떤 무인도 그를 이길 수는 없으리라.

‘무인이라면 그렇겠지.’

나랍멸은 무인이다. 그러나 동시에 서장 현교(顯敎)의 교주이기도 했다.

서장의 무술은 주술과 종교를 뿌리로 한 것.

중원의 무술과는 그 시작점도 역사도 달랐다.

그렇기에 서장의 무인인 그만이 사용할 수 있는 수단도 존재했다. 엄밀히 말해 무인이 아닌 교인으로서 택할 수 있는 수단 말이다.

그게 성공하려면 진천백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애초에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포기했으리라.

—약간이라도 좋습니다. 찰나라도 좋습니다. 그의 주의를 끌어 주십시오. 그에게도 사각이란 게 생기도록, 그가 오로지 당신에게만 집중하도록 말입니다.

—힘겨운 부탁을 하는구먼, 젊은이.

나랍멸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초대 천마인 그에게 나랍멸의 나이는 분명 젊은 수준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부탁드립니다. 서장뿐만 아니라 중원을 위해서…….

—걱정 말게. 그렇게 부탁하지 않더라도 이 늙은이는 전력을 다할 테니까.

순간 진천백의 두 눈에서 푸른빛의 기광이 뿜어져 나왔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스스스스스!

넘실거리는 듯한 푸른 기운이 진천백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그 정체를 모를 진운룡이 아니었다.

“혼령연소……!”

진운룡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는 경멸스럽다는 듯 진천백에게 일갈했다.

“미개인 중원인들의 얄팍한 사술 따위를 펼치려는 것이냐? 싸구려 목숨을 담보 삼아서라도 본좌를 이겨 보고 싶단 말이더냐?”

“그들의 것과는 조금 다를 게다.”

푸른빛을 뿜던 진천백의 눈동자가 이내 검은빛으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진천백의 몸에서 흘러나온 푸른 기운이 한곳으로 뭉쳐졌다.

그리고 마치 여의주와 같은 구슬의 형상이 되었다.

구슬은 다시금 진천백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정확히는 그의 단전으로.

최소한도의 생명력을 제외한 모든 수명을 천마신공의 내력으로 변환시킨 것이었다.

“멸혼천마공(滅魂天魔功). 네놈과의 일전을 위해 빚어 낸 비장의 무공이다.”

보통의 혼령연소는 육체에 존재하는 생기(生氣)를 끌어다 쓰는 것.

자칫하면 목숨이 위험한 것은 같으나 내단이나 영약으로 회복할 수 있다. 실제로 정천이 그렇게 회생한 경우였고.

하지만 멸혼천마공은 달랐다.

내장, 골수에까지 남아 있는 모든 기력을 끌어내는 것. 그렇기에 어떤 영약으로도 다시는 회복될 수 없다.

이미 진천백의 목숨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셈.

그에겐 이제 일각의 여생만이 남아 있었다.

결국 여기서 이기든 지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뜻이었다.

진운룡은 그것까진 몰랐다. 그러나 진천백의 투지가 보통이 아니란 것만은 알았다.

“흥. 그동안 멍청히 있지만은 않았다는 거냐?”

“지난 나날 동안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 너는 모를 거다. 내가 얼마나 오늘을 기다려 왔는지를!”

“웃기는 소리. 본좌에게 겁먹어 은거했던 주제에 허풍을 떠는구나!”

“너를 두려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저 내가 너를 막지 못하게 될 경우만을 두려워했을 뿐!”

“개수작을 부리는구나. 결국은 그 말이 그 말 아니더냐!”

“너처럼 오만에 가득한 존재는 내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을 테지.”

딱 잘라 말한 진천백의 두 손 위로 흑색의 강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만 떠들자꾸나. 삼백 년 넘게 이어져 온 악연을 어서 끝내야 하니.”

“그래! 네놈의 죽음으로 말이지!”

진운룡이 땅을 차냈다. 삽시간에 멸마환영무로 몸을 감싼 그가 진천백에게 그대로 돌진했다.

진천백은 격왕유권(擊王流拳)의 식을 펼쳐 진운룡의 미간을 노렸다.

돌진해 오는 힘을 그대로 이용하여 두개골을 부숴 버릴 생각이었다.

그것을 모를 진운룡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구태여 경로를 바꾸거나 돌진을 멈추진 않았다.

진운룡 역시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천화투계(千火鬪界)라 명명한 권식을 펼쳤다.

두 사람의 신형이 순간 겹쳐졌다.

콰아아앙!

무시무시한 폭발이 사방을 휩쓸었다.

널브러져 있던 십이천승들의 시체가 갈가리 찢겨져 허공으로 비산했다.

하마터면 나랍멸도 그 위력에 몸이 박살날 뻔했다. 아슬아슬하게 호신강기를 끌어내 버텼기에 망정이었다.

다행히 진운룡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 그만큼 진천백이 그의 시선을 잘 끌고 있다고 봐야 했다.

콰과과과광!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두 사람의 권과 각이 충돌했다. 그럴 때마다 허공을 찢어발기는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스스로를 능히 고금제일이라 칭할 수 있을 두 존재. 그렇기 때문일까. 나랍멸의 눈에 비치는 두 사람의 혈투는 처절하기보다도 예술적이었다.

쩌저적!

진천백의 어깻죽지가 찢겨져 나가며 안쪽의 뼈를 드러냈다.

찢겨진 피부 속에서 멸혼천마공의 기운이 솟구치더니 삽시간의 상처를 뒤덮어 치유했다.

콰과곽!

진운룡의 옆구리 살점이 뜯겨져 나가며 갈빗대가 드러났다. 이윽고 새하얀 빛이 그곳을 감싸서는 상처를 치유했다.

극성까지 끌어올려진 두 사람의 무공은 자가치유 능력까지 극한에 이르러 있었다.

서로를 죽이려면 즉사할 수준의 치명타를 입히거나 내력이 바닥나게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상황은 진운룡에게 유리했다.

“알고 있는가, 옛 친구여! 네게 남은 시간은 이제 반 다경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

“분하지만 네놈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본좌의 발끝이나마 쫓아왔다는 걸 인정해야겠군. 그러나! 이제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입으로 싸울 것이냐, 옛 친구여?”

빈정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진천백의 주먹이 진운룡의 입속으로 꽂혔다.

절정의 강기가 실린 주먹이 진운룡의 이빨을 모조리 부숴 놓았다.

어차피 금세 회복될 타격.

그러나 부숴진 진운룡의 자존심까진 회복시킬 수 없을 터였다.

“네놈이 감히!”

진운룡의 이마에 핏대가 돋았다.

괴물에 가까운 재생력을 얻었다고 아프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고통보다도 자신의 자존심을 살살 긁어대는 진천백에 대한 분노가 더욱 컸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기에 마지막이나마 곱게 보내 주려 했거늘, 도저히 안 되겠구나!”

파바바밧!

진운룡의 양 어깻죽지로부터 백색의 날개가 뿜어져 나왔다.

‘무한천쇄격!’

진천백 역시 오랜 과거에 단 한 번 목도한 적이 있는 최강의 절초였다.

그 당시엔 미완성이었음에도 이미 대적할 초식이 존재하지 않았던, 문자 그대로 무적의 절초.

그러나 지금의 무한천쇄격은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저 목도하고만 있을 뿐인데도 두 눈이 불타 버릴 것만 같았다. 피부가 살라지고 혈관이 끓어오를 것만 같았다.

땅 위로 강림한 두 번째 태양.

황홀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운이었다.

진천백은 마지막이 왔음을 실감했다. 무한천쇄격에서 살아남더라도 기력이 다할 것이 분명했기에.

하지만 그렇기에 그의 마음속은 도리어 평온해졌다.

“나도 전력으로 가겠다.”

진천백은 두 손을 합장했다.

중원의 무공은 본디 그와 진운룡에 의해 뿌리내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중원인들에게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진운룡은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진천백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 펼치려는 수법은 그가 은거하는 동안 발전시킨 최강의 초식. 그 깨달음은 긴 역사 속에 발전한 중원의 무공에서 따왔다.

우우우웅!

오만 가지 빛이 진천백을 중심으로 은은하게 퍼졌다. 그리고 그 기운의 정체는…….

“흥!”

진운룡이 신경질적인 웃음을 뱉었다.

“그야말로 잡탕이 따로없구나. 어리석은 놈!”

그의 말대로였다. 지금 진천백에게선 천마신공뿐만 아니라 수십 가지 무공들의 기운이 조금씩 느껴지고 있었다.

명문 세가의 비전 무공에서부터 저잣거리의 삼류 심공에 이르기까지.

약간씩이지만 그 색채를 조금씩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이 절기엔 이름이 없었다.

진운룡의 입장에선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기나긴 은거로 인해 미쳐 버린 모양이로구나. 최종적으로 선택한 절초라는 게 고작 그따위란 말이냐?”

“그렇다.”

“멍청한! 그따위 잡기(雜技)는 누더기나 다름없다. 감히 본좌의 무한천쇄격에 그깟 것으로 대적하려 하다니!”

“상대하기 쉽다면 네놈으로선 더욱 좋은 일 아니냐? 웃기는 놈이군.”

코웃음을 치는 진천백.

진운룡도 더 화를 내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전에 없을 정도로 싸늘하게 식었다.

“그래. 네놈 말이 옳다. 그래도 일생을 건 숙명의 호적수라고 생각했는데, 본좌가 착각을 한 모양이군. 네놈도 결국은 쓰레기에 불과한데 말이다. 다른 중원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쓰레기가 널 죽일 것이다.”

“웃기는 소리!”

진운룡이 곧바로 진천백에게 돌진해 들어갔다. 진천백 역시 물러나지 않고 진운룡을 향해 몸을 날렸다.

팟!

두 사람의 기운이 폭발하는 대신 뭉쳐 들었다. 진운룡의 무한천쇄격과 진천백의 이름 없는 절기는 마치 서로를 잡아먹으려는 맹수처럼 엉켜들었다.

진운룡은 그제야 이름 없는 절기의 정체를 알았다.

‘이건 일종의 배척공(排斥功)이군!’

반발하여 폭발하는 대신 융화하여 상쇄한다.

보통 무공과 무공의 충돌은 쇠붙이끼리의 충돌과 같다. 서로가 강하게 밀어붙이면 결국은 어느 한쪽이 꺾이게 되는 법이었다.

반면 무공과 배척공의 충돌은 화염과 물의 충돌과 같았다.

물을 맞은 화염은 사라지는 법. 마찬가지로 물 역시 증발하여 사라지게 된다.

화염이 더 강하다면? 어느 정도 불길이 줄어들겠지만 불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물이 더 강하다면? 불을 꺼 버리게 되는 것이다.

진천백의 이름 없는 절기는 거대한 물이었다. 무한천쇄격의 화염을 꺼트리고 마는.

‘그러나!’

무한천쇄격은 여느 화염과는 격이 달랐다.

“나의 무한천쇄격은 태양이다!”

진운룡의 기운이 한층 강해졌다. 그는 정말 진천백의 ‘물’을 모조리 증발시켜 버릴 기세였다.

치지지직……!

진천백의 몸이 조금씩 탄화하고 있었다. 손끝에서부터 그의 몸이 석탄처럼 변해선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회복할 수 없다. 진천백은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무한천쇄격의 힘은 너무나 거대했다. 거기에 더하여 멸혼천마공에도 한계가 와 버렸다.

진천백의 몸이 안팎으로 붕괴되고 있었다.

‘끝이로군.’

진천백은 눈을 감았다.

의외로 고통은 없었다. 고통을 느껴야 할 신경이 마비되어 버린 까닭이었다.

멸혼천마공의 내력이 바닥난 그는 인간이라기보다도 차라리 나무토막에 가까웠다.

‘아쉽군.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볼 것을 그랬어.’

진천백의 머릿속에 요태희가 스쳐 갔다. 아쉬운 것은 그녀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그녀와의 추억만큼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분명히 남아 있었다.

‘작별이오.’

진천백의 마지막 한마디는 끝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뒈져라!”

무한천쇄격의 광포한 기운이 진천백의 몸을 완전히 소멸시켜 버렸다. 살점 하나, 세포 하나 남김없이.

“하하하하!”

진운룡은 광소를 터트렸다.

평생 이어져 온 지긋지긋한 인연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계획을 세우면서도 언제나 눈엣가시처럼 마음에 걸렸던 놈이었다.

그런 진천백이 죽었다.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진운룡은 그 사실에 해방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는 웃음을 그치고서 멸마환영무의 기운을 거뒀다.

‘생각 이상으로 기력을 소모했군.’

물론 별문제는 없었다. 어차피 운기조식을 한 번 하고 나면 끝날 일이었다.

그야말로 끝이 없는 하해(河海).

진운룡 스스로가 생각해도 그에겐 한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어리석은 중원의 쓰레기들아. 너희들의 알량한 능력으로 신에게 대적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본좌는 신이다. 그런 본좌에게 대적하려 한 것 자체가 너희들의 실수였다.”

이제 그는 아무것에도 구애되지 않았다. 그 무엇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개미가 수억 마리인들 잠룡이 콧방귀나 뀔까?

애초부터 진운룡이 가장 신경 썼던 세 사람은 정천과 팔룡천법왕, 그리고 진천백이었다.

그 세 사람이 힘을 합치고, 거기에 중원인들의 단결력이 더해진다면 상당히 위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중 둘이 죽었다.

정천이 남아 있다고 해도 진운룡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놈 따위가 본좌를 이길 수는 없기에!”

이미 첫 대결 때도 정천을 압도했던 그였다. 게다가 이젠 심멸의 영역에 들어서기까지 했다. 그때보다 훨씬 강해진 것이다.

이젠 사파 연맹도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처음부터 만약을 대비한 일종의 담보물에 지나지 않은 사파 무림이었다.

“모두 없애 버려야겠군. 안 그래도 이 빌어먹을 땅덩어리에 얽힌 기억이 너무 안 좋으니 말이야.”

그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문’을 열기 위한 기술은 동료들이 죽음으로써 완전히 실전되어 버렸다.

그런 짜증스런 기억이 섞인 땅.

이제는 중원 자체가 눈엣가시였다. 그러니 부숴 버리려는 것이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삼아 모래성을 밟아 부수는 것처럼!

“일단은 운기조식부터 해야겠군. 지금으로도 두려울 게 없지만,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으니.”

그는 방심하지 않는다. 소모된 기력을 내버려 두어 패배의 빌미를 제공하는 바보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운룡은 모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의 그야말로 방심을 하고 있다는 것을.

콰악!

“……!”

진운룡은 양쪽 관자놀이를 짓누르는 손길에 화들짝 놀랐다.

누군가 후방에서부터 그의 손끝으로 그의 옆머리를 꾹 누르고 있었다.

‘서, 설마 진천백이?’

그럴 리는 없었다. 진천백의 온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직접 보지 않았던가.

그는 황급히 멸마환영무를 격발하려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누, 누구냐!”

그의 다급한 외침에 뒤쪽에서부터 대답이 들려왔다.

“방심하셨군요, 악도여.”

“네놈은!”

차분하지만 적의가 실려 있는 목소리. 팔룡천법왕 나랍멸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세상 어느 무인도 당신을 당해 낼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은 진정 고금제일, 최강의 무인이오. 그렇기에……!”

나랍멸의 두 눈이 백색의 빛을 뿜었다.

“무술이 아닌 비술로써 그대를 상대하려 하오.”

“비, 비술이라고?”

나랍멸은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서장 현교의 범어(梵語)를 나직이 외기 시작했다.

서장 현교 최후의 술법인 정신살(精神殺).

그는 지금 진운룡의 머릿속, 정신 자체로 침투하려 하고 있었다.

‘싸움으로써 이길 수 없다면 정신과 정신의 대결로써 이기는 수밖에!’

타인의 마음을 지배하거나 제압하는 것이야말로 서장 주술의 궁극적인 경지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랍멸이 펼치려는 주술은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위험한 것이었다.

그 역시 목숨을 바치려 하고 있었다. 진천백이 그랬던 것처럼.

‘이것으로 서장을 지켜 낼 수만 있다면!’

나랍멸은 두 눈을 감았다. 그의 정신은 잘 벼려진 화살이었고, 그것을 발사하는 것은 그의 생명이었다.

목표는 진운룡의 정신 자체.

자신의 정신을 무기로 삼아 상대의 정신을 깨부숴 빼앗는다.

성공하면 상대방의 영혼은 내부에서부터 완전히 붕괴될 것이다. 그리고 빈 그릇이 된 육체를 나랍멸이 차지할 수 있으리라.

반면 실패하면 죽음뿐.

육체의 주인은 여전히 진운룡일 것이고 나랍멸의 정신은 그대로 소멸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더라도 최소한 시간을 끌 수는 있을 것이다.’

정신끼리의 싸움은 무공 대결보다도 치열하기에. 게다가 승산도 상당히 컸다.

나랍멸은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뒤는 당신에게 맡깁니다.’

정천을 향한 말이었다. 비록 그에게 들리진 않겠지만.

준비를 마친 나랍멸이 시위를 놓았다.

팟!

정신의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네놈이 감히……!”

발버둥 치던 진운룡의 몸이 일순 경직됐다. 그 순간 생기를 잃은 나랍멸의 몸이 스르륵 무너졌다.

털썩.

진운룡이 무릎을 꿇었다. 그의 두 눈은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생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용검대와 강룡단이 창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은 통천각 요원이었다.

그는 정신을 잃은 소녀를 들고 있었다.

“그 아이는…….”

분명했다. 팔룡천법왕의 시녀인 나유타였다.

“기진맥진한 채 말을 달리고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기절하기 전의 말로는 포달랍궁이 위험하다고 하더군요.”

모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정천은 그 가운데 침묵하고 있었다.

이미 그는 느끼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전투가 있었음을, 처절하기 그지없는 혈투가 벌어졌음을.

그리고 그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도.

후자의 경우엔 직감에 가까웠다. 어쩌면 이미 전투는 끝났고, 진운룡은 자취를 감추었을지도 몰랐다.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그 경우 택해야 할 방법은 기다리는 것.

마교의 대군을 기다려 서장을 봉쇄하고 진운룡의 흔적을 샅샅이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운룡이라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터. 오히려 마교의 병력을 각개격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시 지금 승부를 내야 한다.’

정천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나마 놈을 죽일 가능성이 있는 것은 지금뿐이었다.

게다가,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뒤는 당신에게 맡깁니다.’

팔룡천법왕의 목소리였다. 창도에 도착하기 조금 전에 얼핏 들려왔던 한마디…….

그리고 이곳엔 그의 시녀인 나유타가 있었다.

“대형?”

관식이 정천의 눈치를 살폈다. 내내 침묵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정천은 고개를 들어 모용훈과 관식을 보았다. 그리고 그 너머에 도열해 있는 용검대와 강룡단의 대원들도 돌아봤다.

용검대와 강룡단의 이름을 이어받은 이들.

그러나 이 싸움은 이들의 몫이 아니었다.

역시 이 모든 싸움을 끝맺을 사람들은 ‘진짜 동지들’이었다.

“너희는 이곳에서 기다려. 나 혼자 서장으로 가겠다.”

“예? 그럴 수는 없습니다!”

관식이 반발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정천이라 해도 혼자 진운룡을 당해 낼 순 없었던 것이다.

반면 모용훈은 차분했다.

“스스로 끝맺음을 하시겠다는 거군요. 비록 그로 인해 죽게 된다 하더라도요.”

“그래.”

“그렇다면 형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모용훈의 얼굴에도 결심이 어려 있었다.

어쩌면 그 선택으로 인해 마교가 위기에 빠질 수도 있음에도.

정천은 마교가 지닌 최강의 전력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해야 했다. 그리고 만약 진운룡과 싸우게 된다면, 최소한 그들이 함께하여 칼받이 역할이라도 해줘야 했다.

실리를 따진다면 함께 가야 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모용훈은 정천의 말을 따르겠다 하고 있는 것이었다.

관식은 이를 악물었다. 이건 자살행위다. 다른 이라면 죽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정천이었다.

‘그럼에도 이분 혼자 보내 드려야 하나?’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동안, 정천은 이미 달려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대형!”

“막을 거냐? 아니면 쫓아올 거냐? 어느 쪽도 할 수 없을 거다. 지금부터 전력으로 달려갈 거니까.”

“대형…….”

관식이 결국 체념할 때였다.

“무슨 짓이지?”

진백란이었다. 그녀와 멸살독마, 화연란과 장유추가 급히 달려왔다.

“생각보다도 빨리 왔네?”

“본대는 사흘 거리에 있어. 작전을 세워 두기 위해 우리끼리만 일단 왔어.”

“그렇군. 어쨌든 난 이만 가 보도록 하지.”

“멈춰! 혼자 뭘 어쩔 생각이지?”

“진운룡과 결착을 낼 거다.”

담담한 정천의 대답에 진백란이 언성을 높였다.

“당신 미쳤어? 대체 왜 이제 와서 그러는 거야? 혼자서 그 괴물을 당해 낼 수 없다고 했던 건 다름 아닌 당신이었잖아?”

“그랬지.”

“그런데 이제는 혼자 가서 싸우겠다고? 정신 차려. 항상 합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당신 아니었어?”

“그랬지. 이것도 합리에 따른 행동이야.”

진백란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마치 온몸으로 정천의 말에 반대하겠다는 듯.

“천마신교의 전 병력을 동원해 싸워야 해. 많은 이들이 희생되겠지만 그게 가장 승산이 높은 방법이야. 다수가 소수보다 강한 건 당연하잖아?”

“진운룡이 바보가 아닌 이상 정면으로 치고 들어올 리 없어. 드넓은 서장을 마당으로 삼아 마교를 각개격파해 버릴 거야.”

“하지만…….”

진백란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분노를 느꼈다. 다른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수만 명의 사람이 한 사람을 감당하지 못해 각개격파를 당할 수 있다는 현실에 대한 분노였다.

‘그래! 이것이 강호. 한 사람이 백 명의 위에 설 수 있는, 모두가 불평등하며 우월한 자만이 한없이 군림할 수 있는 이곳이 바로 무림!’

머리로는 이해가 간다. 그러나…….

“혼자 가면 죽게 될 거야…….”

진백란의 목소리가 흐트러졌다.

마치 칭얼거리는 아이처럼.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는 연인처럼.

그것은 화연란도 마찬가지였다.

“가지 마세요, 오라버니. 또다시 혼자서 가 버리지 마세요.”

“혼자가 아니야.”

정천의 담담한 목소리. 그 순간 화연란은 두 눈을 의심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정천의 옆에 서 있는 몇 사람의 모습이 보였던 까닭이다.

그중 한 사람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꿈에서도 잊지 못할 얼굴이었다.

“아버지……?”

희미하지만 분명 화륜패였다. 그의 모습이 정천의 옆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정천은 그녀의 반응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화륜패의 영령이 정말 나타났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그는 화륜패를 비롯한 동료들의 목숨까지 짊어지고 있었으니.

그리고 그렇기에 질 생각도 없었다.

“반드시 돌아오겠다고는 하지 않겠어. 어쩌면 나 역시 죽게 될지도 모르지. 어쩌면 진운룡이 살아남아 마교와 무림 전부를 유린하게 될지도 모르지.”

“정천…….”

“그래도 난 갈 거다. 이해득실을 따졌기 때문도, 승산이 있기 때문도 아냐. 웃기는 일이지만, 내 마음이 그렇게 시키기 때문이다.”

그를 말릴 수는 없을 것이다. 진백란도 화연란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 것 같았다.

“당신 같지 않은 말이네.”

진백란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가.”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마음대로 가 버려. 혼자 가서 죽든 말든 당신 마음대로 해!”

화연란 역시 결국 꺼내는 말은 한마디뿐이었다.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지만, 지금 정천에게 필요한 말은 한마디뿐일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다녀오세요, 오라버니.”

“응.”

정천이 몸을 날렸다. 그는 그대로 사막의 모래바람이 되어 서쪽을 향해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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