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章 차륜전
회담을 제의하오. 지금 당장. 촌각을 다투는 일이오.
사신이 가지고 온 밀서엔 딱 그 내용뿐이었다. 그조차도 일필휘지로 급하게 휘갈겨 쓴 모양새였다.
명규는 밀서가 잘 보이게끔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문주들의 얼굴 위로 갖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회담이라…….”
“촌각을 다투다니. 진운룡이 이쪽에 도착했으리라 생각하고 항복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구려.”
“바보 같은 소리. 정말 그랬다면 서신이 아니라 백기를 보냈을 거요. 애초에 그럴 작자들도 아니고. 차라리 결사항전을 택할 테지.”
“정파인들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
“그들을 과소평가하는 그대보단 낫소.”
“흥! 그사이에 겁쟁이라도 된 거요?”
쾅!
명규는 탁자를 내려쳐 문주들을 입 다물게 했다. 흥분이 많이 가라앉은 뒤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심각했다.
“말다툼은 나중에나 하시오. 지금 정해야 할 것은 회담에 응하느냐 마느냐요.”
“놈들의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와서 굳이 그런 수법을 쓰겠소? 버티고만 있어도 저들로선 승리가 보장되는데.”
“진운룡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겠소? 그가 오기 전에 우리들을 쓸어버리려는…….”
“우리들이 전멸한들 진운룡에게 일말의 타격이나 있을 것 같소?”
“그건…… 그렇군.”
무거운 침묵이 막사 안을 감돌았다.
이미 그들은 전쟁에 대한 의욕을 잃고 있었다. 진운룡에 대한 공포만으로 움직이기엔 종남산의 충격이 너무나 컸다.
“저들은 선택을 했소. 그것이 우리와의 휴전일지, 함정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오.”
명규가 문주들의 얼굴을 지그시 돌아봤다.
“이젠 우리가 선택해야 할 때요.”
“…….”
“회담에 나갈 것인가, 마지막까지 진운룡의 개로서 충성할 것인가. 마음을 정하도록 하시오.”
“나는…….”
살찐 문주가 운을 뗐다.
“나는 지금 죽음을 각오하려 하오. 나의 죽음뿐 아니라, 나의 가족들, 나의 식솔들, 나와 관련된 모든 이들의 죽음을.”
명규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렇다면…….”
“회담을 받아들입시다. 그들이 무엇을 제의할지는 모르지만, 진운룡과의 악연은 여기서 끝맺도록 합시다.”
“저 역시 그와 같은 의견입니다.”
목소리는 막사 밖에서 들려왔다.
이윽고 막사 안으로 들어서는 이는 음영이었다.
군을 수습하자마자 천중산으로 달려온 만큼, 그의 두 눈은 피로로 인해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무인의 극이었습니다. 아마 남은 평생 동안 그와 같은 무예는 두 번 다시 목도할 수 없을 테죠. 그러나…….”
음영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니, 중원이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군요. 그는 그런 존재입니다. 악귀라는 말로도 채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존재 말입니다.”
“…….”
“진운룡은 제게 말했었습니다. 중원이란 틀 자체를 깨 버리겠다고, 이 세상을 어제와는 다른 곳으로 만들겠다고요. 그것이 바로 우리들 중원인들에게 행하는 복수가 될 거라고요.”
“중원이란 틀을 깨겠다고……?”
“대체 어떻게 말인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능히 그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변혁을 우리들은 감내할 수 없으리란 겁니다.”
잠시 뜸을 들인 음영이 덧붙였다.
“그곳에 있는 것은 죽음과 공포뿐일 테니까요.”
스산한 오한이 문주들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진운룡을 잘 아는 음영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저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명규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우리는 오랜 세월 정파, 마교와 싸워 왔소. 오랜 기간을 천무맹의 그늘 아래 기 한 번 펴 보지 못한 채 살아왔고, 웅비의 때를 기다리며 힘을 갈고닦아 왔소.”
“…….”
“그러나 그것도 모두 무림이, 중원이 존재할 때나 가능한 것이오. 정파 무림에 대한 우리의 복수도, 무림 제패를 향한 집념도 말이오.”
명규의 담담한 목소리가 문주들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우리는 미약한 존재요. 중원이란 틀을 벗어나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요. 그리고 진운룡은 그것을 깨부수려 하고 있소.”
명규는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갑시다. 회담을 합시다. 휴전이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정파인들을 대면합시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던 무림을 되찾는 길이 되기를 희망하며.”
* * *
진천백은 이미 창도를 지나쳐 서장으로 들어선 뒤였다.
진운룡의 축지엔 미치지 못하지만 초고수급에서도 최고 수준의 경신술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그는 그 시점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저 먼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시무시한 혈투를.
‘놈이로군.’
진운룡. 그리고 그와 맞서 싸우는 자는 아마도…….
‘팔룡천법왕일 테지.’
진백란의 추측은 정확했다. 진운룡은 모두의 허를 찌르고 서장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은 달리 보면 기회이기도 했다.
‘놈은 자신이 이끌던 사파 연맹군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버렸다. 이곳 서장에 고립되어 버린 것이다.’
어찌 보면 지금이야말로 진운룡을 죽일 절호의 기회. 아마도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일 터였다.
‘놈은 영악하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면 그대로 숨어 버릴 테지. 여기서 놈을 놓치게 되면 그야말로 끝이다.’
이제 진운룡은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그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중원을 벗어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드넓은 세상에서 그를 찾는 일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악의 불꽃을 중원 바깥으로까지 넘어가게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진천백은 각오를 다졌다.
진운룡을 이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팔룡천법왕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러나 최소한 그를 묶어 둘 수는 있다.
‘지금쯤 마교에서도 내가 없어진 것을 알겠지.’
어떤 의미로는 진천백이 진백란의 선택을 강요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가 움직인 이상 그녀 역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을 테니까.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라도 군을 움직일 것이다.
‘당돌한 아이였지.’
바람을 맞으며 내달리면서도 흐뭇한 미소를 짓는 진천백이었다. 만났던 시간은 짧았지만 진백란은 그의 생각보다도 훌륭한 천마였다.
그리고 그가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 손녀딸이기도 했다.
이젠 진운룡이 서장에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진천백은 내달리는 속도에 한층 박차를 가했다.
‘마음 같아선 체력과 기력을 배분해 두고 싶지만, 그럴 여유가 없군.’
치료를 아예 받지 않은 건 아니었다. 진백란은 비고에 구비되어 있던 회생단(回生丹)을 꺼내 오게 했고, 그 덕에 진천백은 치유될 수 있었다.
평소의 팔에서 구 할까지의 힘으로는 싸울 수 있을 터. 나머지 일, 이 할이 아쉽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더군다나 진운룡도 멀쩡하지만은 않을 테고.
‘팔룡천법왕이라 했던가.’
진천백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자네와 내가 미래를 위한 거름이 되세.’
* * *
용검대와 강룡단은 이미 도열한 채 정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긴장되어 있었다.
정천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지금부터 서장으로 간다. 말을 타진 않는다. 전력으로 경공을 펼쳐 그곳으로 갈 것이다.”
잠깐의 침묵.
정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곳에 진운룡이 있다면, 아마도 이것이 너희 두 타격대가 함께하는 마지막 임무가 될 것이다. 그 후에 다시 만나는 건 너희가 적이 되어서일 테지.”
“…….”
“그러니 그날을 위해서라도 살아남아라.”
말을 마친 정천이 몸을 날렸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보라는 듯한 엄청난 속도의 경공이었다.
관식과 모용훈이 시선을 교환했다.
이윽고 그들이 정천의 뒤를 따라 허공을 내달렸다.
곧 백 명의 대원들 모두가 경공을 펼쳐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정천은 뒤를 돌아봤다.
모용훈과 관식 휘하의 대원들은 제법 훌륭히 뒤따라오고 있었다.
‘저 아이들이 우리의 후배입니다, 대주님. 비록 아직은 이름만을 이어받은 것에 지나지 않지만 말입니다.’
정천은 화륜패의 모습을 그렸다.
이윽고 제갈살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기시감을 느꼈다.
서장을 향해 내달리면서도, 그의 머릿속에선 그날의 전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모두가 죽고 그 홀로 살아남게 된 날.
진마동의 최하층부. 그곳에 있는 것은 그들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존재였다.
흑색의 마룡(魔龍).
최후의 열 명 모두가 실감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이야말로 모든 것의 시작점. 이 진마동이란 이름의 나락의 주인이노라고.
놈은 너무나 거대했다. 놈이 처음부터 나타나지 못했던 것도 저 어이없을 정도의 규모 때문인 듯했다.
놈이 어떻게 그 많은 괴물들을 부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째서 진마동이 중원에 나타났는지, 어떻게 이곳의 심장부에 갇히게 됐는지도 알 바 아니었다.
그들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하나.
놈을 죽이겠다는 일념뿐!
전투는 처절했다. 포효와 금속음, 비명과 폭발음이 공동을 뒤흔들었다.
“오냐, 내 살점을 먹고 뼈를 씹어라! 네놈의 죽음을 위해서라면 뭐든 주겠다!”
화륜패의 광기에 찬 웃음소리.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 지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죄책감에서 해방된 것만 같았다.
“크아앗!”
“타핫!”
곳곳에서 울리는 기합성. 그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줄어들었다. 마룡의 발버둥 역시 조금씩 미약해져 가고 있었다.
동료들이 죽는다.
마룡이 차츰 죽어 간다.
그럴수록 정천의 마음속은 살의에 지배되어 갔다.
“우리가 방패가 되겠다!”
“저 개자식을 죽여 버려!”
마지막으로 남은 두 동료의 외침. 그중 하나는 제갈살이었다.
정천은 그의 눈빛을 보았다. 무지막지한 열의에 휩싸여 있는 눈빛이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네가 돌아가라. 돌아가서 복수를 마무리지어다오.”
그 눈빛. 제갈살의 마지막 눈빛이 정천의 뇌리 속에 깊숙이 박혀 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것도 이제 곧 끝난다.’
정천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진운룡은 강대했다. 아마도 일대일로는 정천으로서도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 마룡 이후로 최강의 적이라 할 만했다.
그랬기에 다른 이들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천무맹의 힘을, 그리고 마교의 힘을.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너무 안이한 생각이었다.
결국 끝맺음은 정천 자신의 손으로 해야 했다. 그로써 진정한 복수가 마무리되는 것일 테니까.
설령 그로 인해 죽게 되더라도 말이다.
* * *
“후후후…….”
진운룡이 전율하듯 웃음을 뱉었다. 그의 발아래로는 상처투성이인 나랍멸의 몸이 나동그라져 있었다.
온몸이 피로 칠갑이 되어 있는 처참한 모습.
숨은 이미 끊어진 모양이었다.
“하하하하하!”
진운룡이 광소를 터트렸다. 그의 온몸에도 생채기가 가득했지만 치명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보았나! 이것이 바로 본좌의 진정한 실력이다. 십오 갑자의 내공? 서장의 수호자? 그깟 것은 본좌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다!”
무(武)라는 것은 결국 싸우기 위한 수단. 그것이 최대한도로 충족되는 것은 싸움에서 승리한 순간일 수밖에 없다.
중원의 틀을 깨겠다느니, 혹은 세상의 평화를 만들겠다느니 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했다. 무예란 결국 싸우는 방법이고, 무인이 충만함을 느끼는 것은 싸움 속에서일 수밖에 없었다.
무인은 싸우기 위해 살아가는 자들인 것이다.
미친 듯이 웃어젖히던 그가 한순간 뚝 멈추었다. 대신 차가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서장의 땡초들아?”
그의 앞에는 십이천승들이 서 있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나랍멸의 명을 어긴 채 이곳으로 오고 만 그들이었다.
“법왕님…….”
“이렇게 처참히…….”
그들의 눈에선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랍멸은 그들에게 있어 왕이요 주인이자 가족이었다.
진운룡에겐 그 모든 감정이란 게 그저 비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할 테냐? 시체가 되어 버린 너희 주인의 복수라도 할 것이냐? 너희 따위는 눈 깜빡할 새에 모조리 죽일 수 있는 본좌에게?”
“죽음이 눈앞에 있을지언정 피할 생각은 없다.”
“더더군다나 그것이 너와 같은 악귀와의 싸움이라면!”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드는 십이천승이었다. 그럼에도 진운룡의 미소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제법 훌륭하게 떠든다만 실력은 그에 걸맞지 못한 모양이군.”
“어서 덤비기나 해라, 악도여!”
“그런데다 무르기까지 하군.”
진운룡이 차갑게 물었다.
“본좌가 이미 공세를 시작했음을 모른단 말인가?”
“뭣……?”
퍼억!
십이천승 중 하나의 머리가 폭발해 버렸다.
‘심멸!’
나머지 열한 명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진운룡 역시 약간이지만 놀라고 있었다. 이제야 깨달은 것이지만, 전투가 거듭되면서 그의 심멸 역시 더욱 강력해져 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집중력이 강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의 그는 수백 리 바깥의 물방울 소리까지 감지할 수 있었다.
“본좌는 이미 절대지존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더더욱 강해지고 있다! 세상 그 무엇도 본좌를 막을 수는 없다!”
진운룡이 양팔을 힘차게 뻗었다.
“컥!”
“크으윽!”
좌우측 끄트머리에 있던 천승들이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진운룡이 심멸로써 그들의 심장을 터트려 버린 것이다.
“으아아!”
“개자식!”
천승들이 이성을 잃은 채 달려들었다. 냉정을 찾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눈앞의 현실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죽어라!”
“타핫!”
사방에서 공세가 몰려들었다. 진운룡은 심멸을 거두고 멸마환영무를 펼쳤다.
파앗!
백색 빛이 사위를 물들인 순간, 그에게 덤벼들던 천승들은 갈가리 찢겨 튕겨져 나가고 있었다.
인간의 눈으로는 쫓을 수조차 없는 속도.
열두 명이던 천승들 중 한 명만이 남게 될 때까지는 반 다경도 채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천승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의 두 눈에서 공포와 절망으로 인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굴복할 수는 없었다.
“네놈에게도…….”
천승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놈에게도 곧 죽음이 찾아올 것이다.”
“유언치고는 그리 창의적이지 못하군.”
파악!
천승의 머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진운룡은 피식 웃고서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거야 원 차륜전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옛 친구여.”
“…….”
진천백이 그곳에 서 있었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진운룡의 미소가 짙어졌다.
“헐레벌떡 달려온 모양이군. 그나저나 아직까지도 그 질긴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그런 것치고는 그리 놀라지 않는군.”
“그 무엇도 본좌를 놀라게 할 수는 없으니까. 사실 네놈 따위가 살아 있건 말건 간에 아무것도 변할 것은 없지 않겠나?”
“오만한 성품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너 역시, 불가능한 일에 끈질기게 매달리는 것은 달라진 게 없군.”
진운룡이 손을 내저었다.
“본좌가 옛 정을 생각하여 자비를 베풀지. 꺼져라. 그리고 다시는 본좌 앞에 나타나지 마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주지.”
“달아날 거라면 여기까지 죽기 살기로 뛰어오지도 않았을 게다.”
“그래서, 구태여 죽음으로 뛰어들겠다는 건가?”
“네놈의 야욕을 끝맺겠다는 거다.”
차갑게 쏘아붙인 진천백이 내력을 끌어올렸다.
아주 잠깐, 그의 뇌리에 요태희의 얼굴이 스쳤다.
‘결국 만나 보지는 못하는군.’
아쉬운 마음이 아주 없진 않았다. 어찌 됐든 옛 연인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미련은 남지 않았다.
쿠구구구.
천마신공의 기운이 진천백을 감쌌다. 전성기 때의 그와 비교하더라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진운룡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아직까지도 그 구닥다리 신공밖에 믿을 게 없나 보군. 게다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도 여전하구나.”
쿠오오오!
멸마환영무의 기운이 우악스레 사위를 잠식했다. 백색 기운이 촛불을 쓸어 내는 바람처럼 무지막지하게 뿜어져 나왔다.
“…….”
그야말로 압도적인 차이.
그럼에도 진천백은 절망하지 않았다.
이미 각오를 하기도 했지만, 나직이 들려온 전음 때문이기도 했다.
—약간이라도 좋습니다. 그의 주의를 끌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