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章 왕의 싸움
제갈각과 모용중강이 경악을 되새기고 있을 시각.
천중산(天中山)에서 남으로 백 리 떨어진 평야에서 예상치 못한 상봉이 일어났다.
“이, 이건…….”
명규의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의 앞엔 기진맥진하여 호송되어 온 명신이 쓰러져 있었다.
“아, 아버님…….”
“말하지 마라! 대체 어째서 이렇게…….”
명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명신은 며칠 밤낮을 샌 몰골이었다. 그가 타고 온 말은 아예 도착하자마자 탈진하여 숨이 끊어졌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순 없을 것이다. 명규는 명신이 사술에 가까운 수법에 당했음을 깨달았다.
“누구냐! 대체 어떤 개자식이 네게 이런 짓을 한 것이냐?”
“초, 초대 천마…….”
“초대 천마라고?!”
받아들이기 힘든 대답이었다. 대체 수백 년 전의 인물이 어떻게 명신에게 술수를 쓴단 말인가?
그러나 진운룡 역시 수백 년 전의 인물이다. 물론 그 진위 자체야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의 무위를 본다면 납득이 가지 않을 것도 없었다.
“환장할 노릇이군. 수백 년 전들의 원귀들이 단체로 생환하기라도 한 것인가.”
씹어뱉듯 중얼거린 명규가 아들의 손을 꼭 쥐었다.
명신은 헐떡거리면서도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아버지, 죄송…… 합니다.”
“사과할 것 없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사파 삼대는…… 소호에서 전멸했습니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어요. 저는…….”
“신아!”
“초대 천마, 그가 진운룡 님에게 찾아갈 거라고…….”
“되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마라!”
“아버지…….”
명규는 명신의 혈을 짚어 억지로 잠들게 했다. 명신은 당장 죽을 것 같은 환자처럼 힘겹게 호흡하며 잠들었다.
“…….”
스스스스스.
명규의 몸 위로 진득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단순히 정파만을 향한 게 아닌, 진운룡과 그 외의 모든 인물들을 향한 살기였다.
“이것이 전쟁인가? 이것이 우리들이 그렇게나 바라던 정파 무림을 멸망시키기 위한 전쟁이냔 말이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는 외침이었다. 명규는 분노 가득한 얼굴로 탁자를 쾅 내려쳤다.
“우리는 무인도 아니다! 그저 그자, 진운룡의 꼭두각시일 뿐!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전쟁인가? 우린 그저 노예나 다름없는 꼴이 아닌가!”
“흑천문주…….”
“그대들도 기억하겠지. 독왕 갈월의 죽음을, 진운룡에게 거역한 이들의 죽음을!”
“…….”
“놈은 우리를 수하로도 보고 있지 않소! 그저 쓰다 고장 나면 버리고 말 장난감으로 볼 뿐이지. 아니, 우린 장난감조차 되지 못하오! 최소한 장난감은 쓰는 동안만큼은 애지중지할 테니!”
“흑천문주! 흥분을 가라앉히시오.”
사파 문주들의 말에도 명규는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단순히 아들이 저 꼴이 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천중산의 전투가 지지부진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명신이 도착하기 얼마 전, 일대를 이끄는 음영으로부터 도착한 서신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들끓던 분노가 명신의 일로 기어코 폭발한 것이다.
쾅!
명규는 반쯤 구겨진 서신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대들도 눈이 있다면 이것을 읽어 보시오!”
“그건 대체 무엇이오?”
“음영으로부터 날아온 서신이오. 종남산에서의 전투가 소상히 묘사되어 있으니 읽어들 보란 말이오!”
문주들은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서신을 읽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의 표정 역시 명규와 별반 다르지 않게 변해 있었다.
음영은 전투에 대한 보고를 문자 그대로 소상히 적어 놓았다.
그게 인간으로서 느끼는 죄책감 때문인지, 진운룡에 대한 적개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차마 용납할 수 없을 정도란 것만은 분명했다.
“이게……. 이게 사실이오?”
“정말 진운룡 본인이 아군 무인들을 산사태로 매몰시켰단 말이오?”
문주들은 읽고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가늠할 수 없는 악의는 둘째 치고라도, 대체 거대한 암산(岩山)을 무너트린다는 게 일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불끈 쥔 명규의 두 손이 경련했다.
“그는 악귀요, 악마요. 우리로선 도저히 재량할 수 없는 괴물이오!”
“…….”
“이대로 있으면 언젠가 우리들 역시 그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말 것이오. 아마 놈은 그러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겠지.”
문주들이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사실 이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진운룡이 처음 모습을 보였을 때, 그가 자신의 힘을 내비쳐 사파를 휘어잡았을 때.
악인이란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그들 역시 악인이니까. 아마도 대다수의 무인은 악인일 테니까.
언제나 문제는 힘이다.
더군다나 그게 절대적인 힘이라면…….
“흑천문주, 잘 생각하시오. 그대가 말하고픈 바는 알 것도 같소만, 지금은 상황을 잘 파악해야 하오.”
“그렇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소만, 순간의 혈기로 죽음을 재촉해선 안 될 것이오.”
“그러니까 그냥 입 다물고 진운룡의 개가 되란 말이오? 언젠가 버림받으리란 것을 알면서?”
“그럼 달리 무슨 수라도 있소? 이제 와서 정파인들과 화평이라도 할 것이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죽일 듯 달려들었는데?”
“되돌아가기엔 우린 너무 멀리 와 버렸소, 흑천문주!”
명규는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난 이해득실에 대해 얘기하려는 게 아니오. 우리가 택할 길은 하나뿐이란 걸 말하려는 거요!”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좌중을 돌아봤다.
“그대들 말씀대로요. 우리는 비웃음거리가 될 테지. 정파인들은 화평하려 들지 않거나, 거짓으로 잠시 동안의 휴전만 하고 말지도 모르오. 반면 진운룡의 아래에 있다 보면 조만간 정파 무림과 마교를 멸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오.”
“그러니 조금만 참으면…….”
“이해를 못하겠소? 그다음은 바로 우리라는 것을! 진운룡은 독왕군은 헌신짝처럼 내다 버렸소. 단지 그들이 갈월을 따랐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자가 우리와의 약속을 지키겠소? 우리를 내버려 두겠다는 말을 지키겠느냔 말이오!”
“하지만 정파와 이제 와 화평한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잖소!”
“수는 처음부터 있었소. 우리가 택했어야 했던 건 그것 하나뿐이었지. 공포와 비겁함 때문에 미처 보지 못했을 뿐.”
명규의 두 눈에 살의가 감돌았다.
“정, 사, 마의 힘을 합쳐 진운룡을 죽이는 것.”
“……!”
문주들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마치 말하는 법을 까먹은 사람들처럼.
어느 살찐 문주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다, 당치도 않은 소리요. 그들이 우리와 히, 힘을 합칠지도 모르거니와, 그러고도 그를 죽이지 못할 수도 있잖소.”
그들이 느끼는 진짜 공포는 이것이었다.
세 세력이 힘을 합쳐도 진운룡을 죽이지 못하는 경우.
물론 진운룡에게도 한계는 있다. 그는 신이 아니며, 그의 체력과 내력도 영원하진 않다.
그러나 그는 강할 뿐 아니라 영악하기까지 하다. 멍청한 짐승처럼 무턱대고 정면 대결을 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기회를 엿볼 테지. 그러고는 차츰차츰 세 세력을 파멸시킬 것이다. 어차피 일시적인 연맹이란 깨어지기 마련이니까.
그 이후엔 모두가 죽게 되리라.
“그대는 이것밖에 길이 없다고 말했소, 흑천문주.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오. 어느 쪽을 택하든 같은 길뿐이라 해야겠지.”
“…….”
“충성해도 죽고 반역해도 죽는다면, 차라리 충성하고 죽는 편이 낫소. 그게 조금이나마 오래 목숨을 영위할 길이니.”
명규는 절망했다. 이미 이들은 전의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그러나……!’
부딪쳐 보지도 않고서 포기를 택하다니. 명규는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들에겐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도 없단 말인가?
“무엇이 당신들을 겁쟁이로 만들었단 말이오!”
“당신의 앞에 있지 않소!”
살찐 문주가 명신을 가리켰다.
“이해를 못하겠소, 흑천문주? 우리도 무인이오. 비록 비열하고 음흉하다고 손가락질당하는 사파인일지언정 한 사람의 무인이란 말이오! 그런 우리가 정말 두려워할 게 무엇이겠소? 우리 개인의 죽음이라 생각하시오?”
명규는 그제야 이해했다.
진운룡에게 충성한들 그들은 언젠가 죽는다. 그러나 진운룡에게 항거한다면 그들뿐 아니라 그들과 연관된 모두가 죽는다.
어머니와 아버지, 아내와 자식들까지 말이다.
명규는 두 다리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랬던가.’
명규는 잘 몰랐지만 이미 진운룡은 직, 간접적으로 문주들에게 한마디씩 피력해 왔었다.
배반을 생각하는 순간 죽음은 너희뿐 아니라 주변으로까지 퍼질 것이라고.
명규는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쥐었다.
꾹 쥐어진 주먹에선 가느다란 선혈이 흘렀다.
‘우리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정말로?’
비슷한 시각.
모용중강 역시 명규와 마찬가지로 착잡한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이유는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결국 우리로선 그를 이길 수는 없단 말인가?’
결사의 마음으로 항전하려 했거늘, 돌아오는 것은 코끼리를 이길 수 없는 개미의 심정뿐이다.
차라리 다 집어치우고 먼 곳으로 도망치고만 싶었다. 중원을 벗어난 먼 지역으로.
그러나 과연 그곳 역시 안전할 수 있을까?
“대체…….”
모용중강이 힘겹게 운을 뗐다.
“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우리로선 진운룡에게 대항할 방법 따위는 없는 것일지도 모르오.”
“모용 가주…….”
“놈은 괴물이오. 어쩌면 괴물 이상일지도 모르지. 숭산이 아니라, 서장, 혹은 귀암산…… 그런 곳을 동시다발적으로 방비해야 하다니. 그게 가능키나 하단 말이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하단 말이오?”
문주들은 착잡함 속에 침묵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암만 발버둥을 쳐 봐야 절망감만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제갈각이 말했다.
“항거합시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천한 힘이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합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어쩌면 은거기인의 등장에 의지해야 할지도 모르지. 아니면 신령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할지도 모르고. 기적이 일어나야만 할지도 모르오.”
제갈각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잇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지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합시다. 가장 가까이에 산재된 일들을, 사냥감의 발버둥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도 합시다.”
“제갈 가주…….”
“우선의 문제는 남쪽에 있는 사파 제이대요. 일단은 그들을 상대할 방법부터 찾도록 합시다.”
대화를 곧장 회의로 이끄는 제갈각이었다.
문주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얼마나 처절한 회의란 말인가.
정작 거대한 적은 따로 있는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이런 것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괴감이 든다.
그래도 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현실 도피가 아니기만을 바라며.
모용중강 역시 그러한 심정이었기에 바닥난 힘을 다해 입을 움직였다.
“회담을, 사파 연맹과 회담을 엽시다.”
“회담……이라고 하셨소?”
모용중강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설득해 봅시다. 인간성에 호소하든, 이해득실을 따져 보든, 어떻게든 그들을 진운룡에게서 돌아서게 만드는 거요.”
“그게 가능한 일이겠소? 더군다나 진운룡이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오. 어쩌면 그가 서장이나 다른 곳으로 향했으리란 것이 오답일 수도 있소.”
“그렇더라도 시도해 봐야 하지 않겠소? 그리고 놈이 이곳으로 온다면, 어차피 무슨 수를 쓰든 간에 감당할 수도 없을 거요.”
그건 그랬다. 이미 정파의 최정예 병력이 대패한 상황이 아닌가.
“하지만 놈이 이곳에 없다면, 그리고 저들 역시 놈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있다면…… 이 회담은 성공하게 될 확률이 높소.”
“그건 맞는 말이오.”
제갈각도 동의했다. 다른 문주들도 핏기 없는 얼굴로나마 동의했다.
대단한 계책이라 할 수도 없는 방법. 그것도 불확실하기 그지없는 감정에의 호소라니.
그러나 지금 믿을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뿐이었다.
제갈각은 내심 씁쓸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사자를 보냅시다. 허무하기 짝이 없는 방법으로나마 발악해 봅시다.”
* * *
쾌속(快速)의 경지에 이른 무인은 내달리는 것을 넘어 하늘을 달리듯 움직일 수 있다.
이들의 움직임을 실로 바람과 같아 화살이나 암기조차 뒤를 쫓기 힘들 정도다.
그것마저 초월하여 축지(縮地)의 경지에 이른 무인에게 있어, 더 이상 세상과 대륙은 드넓은 미지의 영역이 아니게 된다.
그저 마음만 언제든 가 닿을 수 있는 곳일 뿐.
그것은 진운룡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
그는 세찬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을 응시했다. 모든 생명을 앗아갈 듯한 열사(熱砂). 들이키기만 해도 폐부를 불사를 듯한 열기(熱氣). 감각을 조롱하듯 이지러지는 아지랑이[遊絲]…….
그 어떤 것도 그에게 감흥을 주지 못했다. 어쩌면 이는 초월자의 운명일지도 몰랐다. 대자연의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기에, 그 경이로움마저 하찮게 보이는 것이리라.
“네 녀석도 비슷한 심정일지 궁금하군.”
진운룡의 독백은 정천을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막 너머에 있을 또 한 명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비술의 힘을 빌려 십오 갑자의 내공을 몸에 품었다던가. 그 힘을 대가로 평생의 대부분을 향불과 고요로 가득한 동굴 안에 만들어 놓은 성채 속에서 살아야 한다던가.”
진운룡이 코웃음을 쳤다.
“가련하기 짝이 없구나.”
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그는 조금까지도 자신이 바라보던 사막의 모래 위를 내달리고 있었다.
그는 종남산의 전투가 끝나자마자 음영에게 군을 맡겼다.
쓸데없이 무리하지 말고 천중산의 전투나 지원하라는 명령도 덤으로 남겨 놓았다.
그게 끝나자마자 서쪽으로 달렸다. 그리고 지금은 감숙성과 청해성을 가로질러 서장에 들어선 뒤였다.
‘정파의 얼간이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겠지. 그리고 그것은 마교의 멍청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군가는 지금쯤 눈치를 챘을 수도 있다. 마교나 정파 무림에도 머저리들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그중 진운룡의 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는 이는 없으리라.
‘정천? 하! 아무리 놈이라 해도 이 거리를 한순간에 주파할 수는 없다.’
아무리 높게 잡더라도 정천의 경공술은 진운룡의 아래. 최대한 빨리 오더라도 귀암산에서 이곳까지 이틀은 걸린다.
월골이 보내 준 전서응이 도움이 되었다.
월골은 자신이 창도에서 정천과 맞붙게 되리란 사실을 전서응에 실어 보냈다.
거기서 월골이 승리했든 아니든 진운룡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이겼을 거라 생각하기도 힘들었고 말이다.
‘놈을 죽이는 건 내 몫이니까.’
중요한 건 정천이 서장에 없다는 것. 창도에서의 전투가 끝난다 해도 서장으로 갈 가능성은 적었다. 귀암산으로 향했으면 향했지.
그 덕에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을 터였다.
팔룡천법왕, 나랍멸은 눈을 떴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은 하루였다. 나유타는 포달랍궁의 삶이 지루한지 어린애처럼 칭얼거리고, 유모는 근엄한 얼굴로 그녀를 꾸짖고, 기분 좋은 음식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조금은 답답하지만 하루하루가 충실한 삶.
아마 모두에게 그러할 터였다.
그러나 나랍멸에겐 그렇지 않았다.
“나유타.”
나랍멸이 입을 열었다. 최대한 평정을 지속하려 노력하면서.
“부르셨어요, 법왕님?”
“십이천승을 불러와 주세요. 그리고…….”
“그리고요?”
제발 살아남으세요.
나랍멸의 입속에서만 그 말이 맴돌았다.
“아니, 아닙니다. 어쨌든 십이천승 전원을 호출해 주었으면 해요.”
최대한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하는 나랍멸이었다. 그럼에도 감출 수 없는 미묘한 긴장감을 나유타가 느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알겠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나유타가 방을 나섰다.
나랍멸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인외의 존재. 감각에 있어서도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초인이었다.
그렇기에 느낄 수 있었다.
우물가에서 어린 시종이 물을 깃다가 넘어진 것도, 그것을 본 늙은 마부가 껄껄 웃으며 수건을 던져 주는 것도.
그 너머, 어느 집안에서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도, 칭얼거리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젊은 여인네의 미소도.
급히 이곳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흑응의 움직임도, 그보다 빠르게 접근해 오고 있는 거대한 존재도.
‘강자다!’
나랍멸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져만 갔다.
아마도 ‘그’일 것이다.
마교가 두려워하고 정파 무림이 두려워한 존재. 중원을 넘어 서장까지 불사르고 말 암염(暗炎).
진운룡이 오고 있었다.
나랍멸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십이천승이 들어왔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법왕.”
“그래요. 돌리지 않고 말하지요.”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 이미 뭔가 있음을 눈치챈 십이천승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나랍멸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서장을 불사를 자, 정파와 마교가 동시에 두려워한 인물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십이천승들은 의외로 크게 놀라지 않았다. 아마도 오랫동안 마음의 준비를 해 왔기에 그럴 터였다.
그렇더라도 한껏 긴장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저는 지금부터 궁을 나설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궁으로 대피시킨 후 방비를 맡으세요.”
“저희도 따라가겠습니다.”
“따라오지 마십시오. 저보다는 서장 사람들의 안위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오나 법왕…….”
“싸우는 것은 저 한 명이면 족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나랍멸은 가슴이 미어지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여러분은 짐만 될 뿐입니다.”
“법왕…….”
“그자는 아마 정천 시주보다도 강할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정천 시주조차 당해 내지 못했지요. 냉정히 말해 따라오지 않는 편이 도와주시는 겁니다.”
냉랭한 말에도 십이천승들은 눈물만 삼킬 뿐이었다. 그것이 나랍멸의 본심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랍멸의 눈동자도 촉촉하게 젖었다.
“가십시오. 가서 사람들을 대피시키십시오.”
“알겠……습니다, 법왕.”
“부디 존체(尊體)를 보존하십시오.”
목례를 한 십이천승이 방을 나섰다.
나랍멸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방을 둘러봤다. 한때는 벗어나고 싶어 갈등하고 고뇌했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떠난다는 게 슬프기만 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허락된 시간 반년을 모두 써 버릴 것을 그랬구나.’
그게 무엇보다 아쉬운 일이었다.
어찌 보면 세속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런 것을 아쉬워하다니. 나도 훌륭한 구도자라 보기는 어렵겠구나.’
피식 웃은 나랍멸이 걸음을 떼었다.
이미 십이천승은 포달랍궁 전체에 대피령을 내린 뒤였다.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궁 지하의 대피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법왕님!”
사람들에게 휩쓸려 가던 나유타가 소리쳤다. 잠깐이나마 돌아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랍멸은 끝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미련만이 남을 뿐이다.’
그는 포달랍궁의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팟.
새하얀 햇살이 나랍멸의 창백한 얼굴 위로 쏟아졌다. 따스한 느낌. 향불이나 모닥불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따스함이 나랍멸을 감쌌다.
그리고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서장의 전경이 그를 맞이했다.
나랍멸은 한순간 압도됨을 느꼈다.
“아…….”
처음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볼 때마다 환희가 절로 느껴졌다. 다음에 다시 볼 일이 생긴다면 역시나 같은 기분이리라.
데엥. 뎅 데에엥…….
포달랍궁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서장 전역에 울려 퍼졌다. 외세의 침략을 의미하는 종소리였다.
이제 곧 서장은 혼란에 잠길 것이다. 밥 짓던 아낙도, 아기를 어르던 젊은 어미도 공포에 질린 채 피신하게 될 테지.
나랍멸은 슬픈 눈으로 서장을 돌아봤다. 그의 고향. 그가 지켜야 할 곳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러려면 이겨야 한다. 이기지 못한다면 시간이라도 최대한 끌어야 한다.
‘흑응이 오고 있다는 건 마교에서도 이 사실을 파악했다는 것. 그렇다면 그들의 지원군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랍멸은 자신의 힘을 과소평가하진 않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맹신하지도 않았다.
이기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게 힘들다면 시간이라도 최대한 끈다.
그것을 되새기고 나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로구나.’
팔룡천법왕으로서 이렇게까지 수세에 몰린 경우는 처음이었다. 지금껏 그가 행해 온 일들이 지나치게 쉬웠던 것일 테지만.
어쨌든 이제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간다.’
나랍멸이 땅을 박찼다. 그는 순식간에 수십 장 위의 허공을 뛰어올랐다.
그리고 허공답보를 펼쳐 달려 나갔다.
“대체 어찌 된 일이죠?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구요!”
나유타는 십이천승 중 한 명에게 끈덕지게 달라붙고 있었다.
안 그래도 착잡한 심정이던 십이천승은 매몰차게 그녀를 밀어냈다.
“잠자코 대피하기나 해라! 지금은 네게 신경 쓸 여유가 없단 말이다!”
“나쁜 놈이 쳐들어온 거죠? 법왕님이 싸우러 나간 거죠?”
“그만 묻고 대피하기나 해라!”
“그리고 그 나쁜 놈이 무척 강한 거죠?”
십이천승은 대답도 윽박도 꺼내지 못했다. 정곡을 찔리기도 했거니와 나유타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법왕께서 반드시 승리하실 거다. 그러니 그분을 믿고서 대피하거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렇지 않으니까 다들 대피시키려는 게 아니고요?”
“너 정말……!”
나유타는 눈물을 쓱 닦아 냈다.
“울고불고 하지 않겠어요. 그랬다간 법왕님한테 혼날 테니까. 하지만 가만히 앉아만 있지도 않겠어요.”
“네가 나가 봐야 무얼 할 수 있단 말이냐?”
“말 한 필만 빌려 주세요.”
“뭐라고?”
“전 원래 유목민 출신이에요. 서장의 지리는 눈에 꿰듯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중원인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을 거예요.”
십이천승이 고개를 저었다.
고작 말 한 필만으로 중원까지 가겠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불가능한 일이다. 얼마 가지 못해 죽고 말 거야.”
“가게 해줘요!”
“그럴 수는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나유타가 십이천승을 밀쳐 내고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십이천승은 그녀를 쫓으려 했으나 곧 들이닥친 사람들의 물결에 휩쓸리고 말았다.
“가선 안 된다! 죽음만 재촉할 뿐이야!”
일각 후.
한 필의 말이 포달랍궁을 떠나 무섭게 질주했다.
* * *
허공을 달리던 나랍멸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사막이 끝나고 황야가 시작되는 지점. 그를 향해 걸어오는 하나의 인영을 발견한 뒤였다.
나랍멸이 땅으로 내려섰다.
건장한 체구의 장년(壯年)이었다. 자신감 가득한 미소가 조각처럼 새겨진 얼굴. 흑단처럼 빛나는 두 눈동자엔 일말의 인간성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망토처럼 흩날리는 무시무시한 살기.
그가 바로 서장을 불태울 암염임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사내, 진운룡이 걸음을 멈추고서 물었다.
“네가 팔룡천법왕인가?”
“그렇습니다.”
“본좌가 제대로 찾아왔군.”
“시주께서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그냥 왔던 길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을지요?”
“내가 무서우냐?”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기개도 없고 자존심도 없는 놈이군. 이거 실망이 큰데.”
“뭐라 말하셔도 좋습니다. 나를 비웃음으로써 기분이 좋아진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기필코 싸워야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다만…….”
“다만, 뭐냐.”
“서장만은 건드리지 말아 주십시오.”
진운룡이 피식 웃었다.
속내를 파악할 수 없는 웃음이었다.
“싫다면?”
“전력을 다해 싸우는 수밖에요.”
나랍멸의 몸으로부터 은은한 청광이 흘러나왔다. 팔룡천법왕의 상징이자 서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현원청화공(現原靑花功)의 기운이었다.
우우우웅.
천마신공이나 강룡수라마공과는 정반대 성질을 지닌, 고요하게 사위를 압도하는 부드러운 기운.
그러나 그 앞에서도 진운룡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미개한 것들이 머리를 쥐어짜 낸 결과물 치고는 제법이로군.”
“그렇게 남을 헐뜯는 것 말고는 자기 자신을 표출할 방법이 없습니까?”
“본좌와 논담이라도 나누겠다는 건가? 미안하지만 너희들 땡초들의 시시콜콜한 헛소리를 상대하고 싶지는 않다.”
파아앗!
진운룡의 절대신공, 멸마환영무의 기운이 격발되었다. 사막 위의 태양조차 무색케 할 백색 강기가 사방으로 뿜어지며 열풍을 일으켰다.
실로 무시무시한 기운.
정천의 강룡수라마공도 강맹했지만 멸마환영무는 그것조차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공의 깊이는 내 쪽이 우위다.’
구백 년, 십오 갑자에 걸친 무시무시한 내력을 몸에 담고 있는 나랍멸이었다. 게다가 그의 두 어깨에 걸쳐진 것은 그보다도 거대했다.
팔룡천법왕이란 이름은 비단 나랍멸뿐 아니라 앞서 서장을 수호했던 네 사람의 영령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실패는 허용되지 않는다.
나랍멸은 사람들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서장을 지킬 것입니다. 서장의 수호자로서.”
“우습군. 그렇다면 본좌가 네가 지키려는 것 모두를 파괴해 주마. 네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손수 가르쳐 주마.”
진운룡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