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章 사고(思考)의 사각(死角)
소림사의 사립문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기진맥진한 모용중강과 유령마객이었다. 그중 모용중강의 얼굴을 알아본 소림사의 무승들이 사색이 되었다.
“모용 시주!”
“괜찮소?”
그렇게 물으면서도 그들의 표정은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모용중강이 이런 꼴로 나타났다는 게 의미하는 바는 뻔했던 것이다.
종남산 전투의 패배.
그것도 어마어마한 대패일 터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단둘이서만 나타날 리가 없다.
유령마객의 부축을 받은 채 모용중강이 입을 뗐다.
“모두들 대피할 채비를 하시오. 한시라도 빨리 숭산을 떠나야 하오.”
“숭산을 버리란 말이오? 소림을 버리라고?”
“그럴 수는 없소.”
무승들이 즉각 반발했다.
그들의 표정은 결연했다. 이미 그들은 소림사와 운명을 함께 할 각오를 다진 뒤였다.
모용중강으로선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했다. 그래야 훗날이나마 기약할 수 있을 테니.
게다가 천무맹이 아직 남아 있다면…….
‘희망은 있다.’
모용중강은 헐떡거리면서도 역설했다.
“그 마음만큼은 이해하오. 게다가 이곳은 정파 무림의 무향(武鄕). 가볍게 버리고 떠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소.”
“그렇다면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차라리 모용 시주께서도 이곳에서 결사항전하십시다.”
“결사항전이 비장하기는 하되 승패를 뒤집을 순 없소. 상대는 진운룡이오.”
“모용 시주…….”
“이곳을 떠나야 하오. 훗날을 기약해야 하오.”
모용중강의 설득에도 무승들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속이 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령마객이 나직이 말했다.
“누구에게나 버리고 갈 수 없는 게 있는 법이오. 저들에겐 이곳이 바로 그럴 테지.”
“…….”
“다른 이들이나마 설득하는 게 어떻겠소?”
기실 소림사 내엔 최소한 무승들 외엔 무인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다들 전장으로 떠난 까닭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모용중강이 재빨리 물었다.
“제갈 가주는? 천중산의 전황은 어떻소?”
“제갈 시주께선 훌륭히 적을 막고 계십니다. 한차례 크게 격돌했으나 사파 군단을 물리치셨다고 합니다.”
“큰일이군.”
무승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럴 땐 큰일이 아니라 다행이라 해야 하지 않던가.
“모용 시주?”
모용중강은 대답하지 않고서 유령마객을 돌아보고 있었다.
“한시바삐 천중산으로 가야겠소. 그들을 후퇴시켜 반드시 살려 내야 하오.”
“모용 시주.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까?”
모용중강은 그제야 무승의 말에 대답했다.
“천중산의 병력을 물리려는 거요.”
“……!”
무승들의 표정이 핼쑥해졌다. 천중산이 뚫리게 되면 그다음은 곧장 숭산이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겝니까. 멀쩡히 잘 버티고 있는 병력을 빼겠다니요?”
“모용 시주,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거요!”
무승들의 닦달에도 모용중강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종남산의 전투에서 우리는 대패했소. 진운룡은 눈짓 하나만으로 종남산을 붕괴시켜 종남파와 염 장문인을 산 채로 묻어 버렸소.”
“…….”
“화산파의 백 문주도 죽었소. 종남과 화산은 이제 명맥이 끊어져 버렸단 말이오.”
“모용 시주…….”
“그런 진운룡이, 그 괴물이 이곳 하남성으로 오고 있소. 그가 도착했을 때 천중산이 피로 물들 게 뻔한데, 그것을 보고만 있으란 말이오?”
무승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모용중강의 말은 모두 사실인 듯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
절대적인 죽음이었다.
모용중강도 무승들을 더 몰아붙이진 않았다. 애초에 이러고 있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렇기에 달아나라 말하려는 거요. 일단은 이 자리를 피해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거요.”
“후일을 도모한다고 희망이 있겠습니까?”
“모르오. 어쩌면 없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릴 순 없소.”
모용중강은 열의에 찬 눈으로 무승들을 응시했다. 다시 한 번 그들을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무승들도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더욱 이곳을 지켜야 했다.
“가십시오, 모용 시주. 가서 제갈 시주와 무인들을 구명하시오.”
“그럼 스님들께선……?”
“우린 마지막까지 이곳에 남겠소.”
그 말을 끝으로 합장을 하는 무승들이었다. 모용중강은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이들은 지금 목숨을 던져 시간을 벌어 주겠노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원한은 반드시 갚겠습니다. 진운룡의 목숨으로.”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라 하더군요. 우린 중원이 안정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알겠습니다.”
모용중강은 더 말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무승들도 결연한 표정으로 그를 배웅했다.
“갑시다. 천중산으로.”
모용중강과 유령마객이 걸음을 재촉했다.
두 사람이 천중산에 도착한 것은 하루 뒤였다. 내공이 바닥나도록 경공을 펼친 덕에 그 먼 거리를 하루 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역시나 모용중강을 알아본 무인들이 그들을 문주들에게 안내했다. 문주들은 모용중강의 몰골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모용 가주!”
“괜찮으시오?”
모용중강은 이제 얼굴에서 핏기를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응급처치만 대강 하고서 달리고 또 달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말조차 꺼내기 힘든 상태였기에 유령마객이 대신 입을 열었다.
“제갈 가주는 어디 있소?”
“그대는 누구요?”
“나는 천마신교의 유령마객이오.”
“……!”
스르릉! 차릉!
그 자리의 무인들 대부분이 무기를 뽑아 들었다. 지금은 많이 빛바랬지만 마인, 그것도 마교십존의 악명은 여전히 유효했다.
진득하니 집중되는 적의.
그럼에도 유령마객은 눈썹 하나 꿈적하지 않았다.
그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생각하오만.”
“……마교도가 어째서 여기에?”
“길게 설명할 여유가 없소. 제갈세가주 제갈각은 어디에 있소?”
“설명부터 하라!”
그들이 흉흉한 얼굴로 소리칠 때였다.
“그만들 하시오.”
제갈각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잘려 나간 왼팔을 붕대로 단단히 압박한 채였다. 그나마 모용중강보다는 상태가 좋아 보인다는 게 위안일까.
제갈각의 표정은 어두웠다.
거의 매달리다시피 유령마객의 부축을 받고 있는 모용중강을 본 까닭이었다.
“그대가 이런 것이오?”
“그랬다면 이 자리에 오지도 않았을 거요.”
“그렇겠군. 내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구려.”
제갈각이 손짓을 했다.
무기를 거두라는 의미.
마뜩찮아 하면서도 무인들이 무기를 거두었다. 그것을 본 유령마객이 곧바로 말했다.
“종남산에서 정파 연합군은 궤멸되었소.”
“……!”
“그럴 수가!”
모두들 경악성을 뱉었지만 제갈각은 의외로 침착했다. 사실 모용중강의 모습을 봤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역시 그런 건가. 진운룡은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던 모양이군.”
“그렇소.”
“종남파와 화산파는 어찌 되었소? 아니, 물을 것도 없겠군.”
“…….”
“사파 연맹군의 피해는?”
“아주 없다고는 못하겠으나 미비한 정도요. 사상자를 최대한 잡더라도 천 명을 크게 넘진 않을 거요.”
그 정도라면 대패 정도가 아니었다. 정파 연합군은 되돌릴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입은 것이다.
“크윽.”
“진운룡 한 명 때문에 이런 결과가 생겼단 말인가!”
문주들이 분통을 터트렸다. 천중산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었던 만큼 그들이 느끼는 박탈감과 절망감도 그만큼 컸다.
제갈각은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려는 모습이었다. 그마저 이성을 잃는다면 이곳 역시 허물어지는 건 순식간일 터였다.
제갈각은 유령마객의 붕대로 가려진 얼굴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대가 모용 가주를 구명한 것 같군. 그리고 그를 이곳까지 부축해 왔다는 건…… 마교가 우리와 손을 잡고자 한다는 의미로 봐도 되겠소?”
“적의 적은 동지란 말이 있듯, 천마께서는 이미 정파와 손을 잡고 계시오.”
“그게 무슨 의미요? 게다가 우리가 알기로 천마 진검운은 이미…….”
유령마객은 쓴웃음을 지었다. 새로운 천마가 추대되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정파 무림의 정보망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전대 천마께서 서거하신 바, 새로운 천마께서 추대되었소.”
“그랬군.”
제갈각은 착잡한 심정을 느꼈다. 유령마객이 쓴웃음을 지은 것과 같은 이유로.
“그렇다면 이미 손을 잡고 있다는 건 무슨 의미요?”
“추측해 보시오.”
제갈각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설마!”
문주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제갈각은 그들을 위해 일부러 소리 내어 물었다.
“천무맹의 생존자들이 있다는 것이오? 그리고 그들이 천마신교와 함께 있다는 뜻이오?”
“정확히 보셨소.”
“……!”
“생존자들!”
그제야 문주들도 충격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제갈각은 재빨리 냉정을 되찾고서 유령마객에게 물었다.
“어느 정도요? 몇 명이나 살아남았소?”
“대략 삼천여 명 정도요.”
황룡성의 주거 인구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 그러나 지금으로선 그 정도나마 살아남은 것도 기뻐할 일이었다.
“그렇군. 전대 맹주와 다른 이들도 살아남았소?”
“전대 맹주가 남궁운을 가리키는 거라면, 그렇소. 더불어 천무맹 군사 제갈현 역시 살아남았소.”
“형님께서! 그렇다면…….”
제갈세연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살아 있을 공산이 크다. 제갈각은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사사로운 이유로 눈물을 흘릴 수는 없다.’
고개를 저어 눈물을 털어 낸 제갈각이 말을 돌렸다.
“마교와 천마에게 감사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소.”
“감사할 필요는 없소. 우리 역시 정파 무림의 도움을 크게 받았으니.”
그때 반쯤 혼절해 있던 모용중강이 눈을 떴다.
“제갈 가주…….”
“모용 가주! 괜찮으신 거요?”
“내 몸 따위는 아무래도 좋소. 그보다도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버려야 하오.”
제갈각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천중산을 버린다는 것은 곧 숭산까지의 길을 내주겠다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진운룡이 아니라 당장 백 리 너머의 사파 이대부터가 문제였다.
서전에서 호되게 당해 약이 오른 데다 군량까지 바닥난 명규와 사파 무인들은 노도처럼 숭산까지 짓칠 터였다.
결국 소림사가 그들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럼에도 모용중강은 재촉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소, 제갈 가주. 더 지체하다간 앞뒤로 사파 놈들에게 포위당하게 될 거요.”
“하지만…….”
“이미 진운룡과 놈의 군세는 이곳으로 오고 있을 거요. 어쩌면 사냥개를 풀 듯이 우리를 몰아세우려는 것일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 되었든 우리로선 혈로를 뚫고 귀암산으로 가야만 하오.”
희생을 각오하고 훗날을 기약한다. 그 의미는 제갈각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달랐다.
“어서. 다른 길은 없소, 제갈 가주.”
“…….”
제갈각은 고민에 잠겼다.
모용중강이 필요 이상으로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그 정도의 대패를 당한 직후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화산과 종남이 이미 무너졌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수많은 문파와 가문들이 스러진 뒤다. 이미 너무나 많은 피와 시체가 뿌려졌다.
과연 정파 무림이 회생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 최후의 반격이나마 도모해야 한다.’
모용중강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불길을 피해 노루가 달아나듯, 사냥꾼을 피해 토끼가 도망치듯.
처절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살아남는 방식일 것이다.
“무인이 아니라 노루와 토끼인가.”
제갈각의 혼잣말에 문주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의미를 이해한 사람은 모용중강과 유령마객뿐이었다.
“노루와 토끼로서는 도망이야말로 항거의 방법일 테지요.”
“그 말이 옳소. 하지만…….”
제갈각이 말끝을 흐렸다. 무언가 불안에 차 있는 표정이었다.
유령마객은 심상찮은 느낌을 받았다.
지금 제갈각의 표정은 단순히 달아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분개하였을 터. 그러나 제갈각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얼굴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듯.
“왜 그러시오, 제갈 가주?”
모용중강도 의아함을 느낀 듯 물었다.
제갈각의 이마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의 입이 불안하게 달싹였다.
“모용 가주, 유령마객, 혹시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았소?”
“어떤 가능성 말이오?”
“사냥꾼이 사냥감의 도망 경로를 꿰뚫어 보고 있을 가능성. 나아가 사냥감의 허를 찌른 채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
“그게 무슨……?”
“정말 진운룡의 다음 행보가 숭산이라 생각하시오?”
유령마객이 움찔했다. 반면 모용중강은 여전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숭산 외에 그자가 노릴 곳이 있단 말이오?”
“만약 우리하고만 전쟁을 벌이는 입장이었다면, 오직 정파 무림 하나만이 그의 적이었다면 숭산이 다음 행선지가 됐을 거요. 그러나 진운룡의 적은 우리뿐만이 아니잖소?”
그제야 모용중강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마교, 그리고 천무맹…….”
“유령마객의 말대로라면 마교와 진운룡의 전쟁은 사파와 정파의 전쟁 이전부터 시작된 셈이오. 그날, 황룡성이 무너지던 날부터 말이오.”
“…….”
딱딱하게 굳은 두 사람에게 제갈각이 말했다.
“정말 진운룡이 우리도 예상할 수 있을 법한 행보를 택할까요?”
유령마객이 헛숨을 삼켰다.
‘이런 바보 같은! 우리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진운룡의 무위를 봤을 때 깨달았어야 했다. 그의 행보를 평범한 인간의 그것에 맞추어 예상해서는 안 되었다는 것을.
지금의 진운룡에게 있어 숭산은 그다지 급히 공격해 들어갈 필요가 없는 계륵에 불과하다. 아니, 종남산의 전투가 결착됐을 때부터 정파 무림 자체가 신경 쓸 필요 없는 존재로 전락했다.
그런데 진운룡이 구태여 정파 잔당들을 쓸어버리려 행차할까?
‘그럴 리가 없잖나!’
유령마객과 모용중강은 헛걸음을 한 셈이다. 진운룡이란 존재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했다.
“진운룡은 숭산을 치지 않을 거요.”
유령마객의 목소리가 나직이 떨렸다. 사태를 파악한 모용중강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애써 냉정을 유지한 채 제갈각이 물었다.
“그렇다면 그의 다음 행선지는? 역시 귀암산이 될 것 같소?”
“어쩌면. 아니, 모르겠소. 아무리 그 혼자라 해도 마교 전체를 상대할 순 없을 텐데…….”
귀암산을 노린다면 휘하의 사파 병력을 대동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행군 속도는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혼자라면?
모두의 계산을 넘어선 곳에 예상치 못한 순간 나타날 수 있다. 진운룡의 무위라면 가능할 테니까.
‘만일 휘하 병력과 함께 간다면 귀암산, 그렇지 않은 경우엔…….’
유령마객의 머릿속에 사막의 모래바람이 스쳐 갔다.
“서장!”
* * *
덜컹!
문을 열고 들이닥치는 정천을 보며 칠삼이 깜짝 놀랐다.
“자네! 돌아왔던 건가?”
정천은 대답도 않은 채 물었다.
“란아는 어디 있지?”
“문주 아가씨 말인가? 안채에 있을 걸세. 근데 웬 시커먼 새를 한 마리 데려왔더구만. 처음엔 까마귀인 줄 알았는데 생긴 걸 보니 그건 아니더군.”
정천은 더 듣지 않고서 안채로 들어갔다. 쉬고 있던 화연란이 화들짝 놀랐다.
“오라버니?”
“그 녀석 어디 있어?”
“예?”
“새 말이야. 검은 놈!”
화연란이 얼떨떨한 얼굴로 한쪽을 가리켰다. 흑응은 간소하게 만들어 놓은 나무 장식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정천은 성큼성큼 걸어가 흑응을 집었다. 거친 손길에 깨어난 흑응이 퍼덕거렸다.
“왜 그러세요, 오라버니?”
정천은 대답하지 않은 채 바깥으로 나가 흑응을 냅다 던졌다.
흑응은 그대로 날개를 퍼덕이더니 서쪽으로 죽 날아가 버렸다.
“오라버니?”
정천은 흑응이 날아가는 방향을 말없이 응시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엄밀히 말해 정천이나 마교 측에선 선공을 취할 수 없다.
그들의 적은 어디까지나 진운룡 하나. 때문에 진운룡에 비해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진운룡이 그들의 허를 찌르고 서장으로 향했을 수도 있다.
정말 그렇다면 최선의 방안은 추려 낸 최정예 병력을 서장으로 진군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진운룡은 오히려 여기까지 예상하고서 연막을 쳤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최정예 병력이 빠진 것을 확인하게 되면 도리어 귀암산을 칠지도 모른다.
이쪽에선 그런 가능성에도 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지금으로써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것뿐.
‘제 시간에 도착했으면 좋겠는데.’
팔룡천법왕은 흑응이 보기와 달리 한 시진에 천 리를 날아가는 영물이라고 했다. 지형지물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정천이 전력으로 경공을 펼치는 것보다 빨랐다.
흑응이 도착한다는 것은 본디 힘을 빌려달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을 신호로 진운룡과의 결전을 위해 와 달라는 의미.
그러나 지금 흑응을 날린 이유는 경계하란 신호였다. 혹은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본인 역시 도망치라는.
‘완전히 허를 찔렸다.’
시야에서 흑응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 뒤로도 정천의 표정은 펴지질 않았다.
좋지 않은 일이리라. 표정을 읽은 화연란도 내심 긴장했다.
“그로군요.”
“응. 아마도…….”
“이곳에 나타난 건가요?”
정천은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편했겠지.”
영민한 화연란은 알 수 있었다. 정작 위험한 쪽은 마교가 아닌 서장이라는 것을.
“도우러 갈 순 없는 거예요?”
“가야겠지. 서장이 당한다는 건 마교로서도 좌시하고만 있을 일이 아니니까.”
종전의 목표대로 떠나는 것은 용검대와 강룡단. 다만 그에 앞서 통천각 요원들이 이미 출발했다.
이제부터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
마교로선 병력의 운용을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어느 쪽으로 허를 찔리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택할 수 있는 건…….’
정천이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진백란이 호위자 한 명 대동하지 않은 채 헐레벌떡 뛰어왔다.
“정천! 혹시 사조님을 보지 못했어?”
“노인장 말이야? 치료를 받으러 간 줄 알았는데?”
“나도 그런 줄 알았어. 그런데 누구도 보지 못했다는 거야.”
정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먼저 서장으로 떠나 버렸군. 바보 같은 노인네.”
“역시 서장으로 향하신 거겠지?”
“아마도…….”
정천이 말끝을 흐렸다. 진백란은 마음속으로 뭔가를 결심한 표정이었다.
결심을 굳힌 그녀가 말했다.
“정천, 당신이 용검대와 강룡단을 통솔해 줘. 그들과 함께 지금 곧장 서장으로 떠나도록 해. 나도 정예 병력을 엄선해 곧바로 따라가겠어.”
“서장으로 가겠다고? 하지만…….”
“진운룡에게 휘둘릴 수도 있다는 것 알아.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은 어느 쪽엔가에는 패를 걸어야 하잖아?”
“그래서 네 패를 서장에 걸겠다는 거야? 만약 틀린다면 빈집이 된 귀암산이 유린당할 수도 있어.”
“나도 알고 있어!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고민한 거고.”
진백란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정천이 걱정하는 것 이상으로 그녀의 근심은 클 것이었다. 그녀의 선택 한 번에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그때 화연란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곳은 남게 될 이들에게 맡기세요. 그리고 그들을 조금만 더 신뢰해 주세요.”
“하지만…….”
“당신은 천마예요. 그렇다면 자신의 선택을 끝까지 관철하세요. 당신이 흔들리면 마교도 흔들리니까요. 남은 이들도 당신의 뜻을 존중할 거예요.”
“그건 너무 뻔뻔한 태도로군.”
“한 집단의 우두머리는 조금 뻔뻔해도 돼요. 아버님께서 가끔 술에 취하실 때마다 하셨던 말씀이죠.”
“……그다지 위안이 되진 않는걸. 하지만 그 마음만은 고맙게 받겠어.”
진백란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서 정천을 돌아봤다.
“출발해. 이번에야말로 진운룡, 그 개자식을 서장의 모래 속에 파묻어 버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