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章 두 사람의 대면
“…….”
“…….”
불편한 침묵.
천마의 방에는 세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정천과 진천백, 그리고 진백란이었다.
본디 진천백은 정천과 단둘이 방에 남기를 바랐다. 그랬기에 진백란과 귀도신마가 자리를 비워 줄 것을 부탁했다.
“이 친구와 긴히 할 얘기가 있네. 모두 방에서 나가 주지 않겠나?”
“나도 듣겠어요.”
진백란의 고집은 확고했다. 진천백이 그녀를 설득하려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현 천마신교의 주인으로서 두 사람의 대화를 꼭 들어야겠어요.”
“으음.”
진천백으로서도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결국 그도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말았다.
“어쩔 수 없군. 그럼 너도 남아 있으려무나. 어쨌든 자네는 나가 주었으면 좋겠네.”
“…….”
귀도신마의 낯빛이 거멓게 죽어 버렸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 이들이 떠올랐던 까닭이다.
죽여 버리겠다며 이를 갈던 멸살독마의 얼굴이 가장 생생했다. 다른 이들 역시 정도만 다를 뿐 반응은 비슷할 것이다.
“나, 나도 남으면 안 되겠습니까?”
“나가도록 해요, 귀도.”
“처, 천마…….”
“나가라고 했어요.”
귀도신마는 마른침을 삼켰다.
진백란은 냉기를 풀풀 풍기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 역시 분노를 아주 푼 것이 아니었다. 진천백을 원망할 수 없다 보니 도리어 귀도신마에게로 분노가 집중되고 있었다.
‘나가도 죽음이고 남아도 죽음이구만.’
귀도신마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뱉었다.
“그럼 나가겠습니다.”
세 사람 중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귀도신마가 나가기를 바라는 듯했다.
‘젠장. 빌어먹을. 망할.’
오만 가지 욕설을 속으로만 뱉으며 방을 나서는 귀도신마였다.
그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진천백이 입을 열었다.
“시간을 촉박하고 여유는 부족하니 속히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함세.”
“그 전에 한 가지만 묻죠. 노인장은 대체 누구십니까?”
“나 말인가?”
진천백은 대답 대신 내력을 살짝 발출했다.
우우우웅.
정천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천마신공…….”
깔끔했다. 군더더기가 거의 없었다. 기운의 완성도 면에선 전대 천마 진검운이나 현 천마 진백란의 그것보다도 우위에 있었다.
기운을 가라앉힌 진천백이 말했다.
“확인도 겸할까 하니, 자네 역시 가볍게 기운을 발출해 보지 않겠나?”
“그러죠.”
정천 역시 강룡수라마공의 기운을 일주시켰다. 스산한 검은 기운이 정천의 피부 위로 스멀스멀 피어났다.
“으음.”
진천백이 나직이 침음했다.
거칠다. 본래의 천마신공이 깔끔하며 군더더기가 없는 공예품 같은 느낌이라면, 강룡수라마공은 곳곳에 흠집과 생채기가 나 있는 쇠붙이 같은 느낌이었다.
마공의 흔적뿐 아니라 별것 없는 길바닥 무공의 흔적까지 발견할 수 있었다. 놀라운 건 각각의 무공이 어울리지 않을 듯하면서도 제법 훌륭하게 어우러져 있다는 것이었다.
불균형한 면이 많긴 하나, 오히려 그렇기에 폭발력 면에선 본래의 천마신공을 초월할 수도 있을 듯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욱 위험할 수도 있으리라.
‘수많은 무공들의 흔적이 느껴진다. 사선에서 직접 부딪쳐 가며 갖가지 무공들을 기워 붙인 것인가.’
나쁘게 말한다면 잡종.
그러나 때로는 혼혈이 순혈보다 위력적일 수 있는 법이다.
기운을 갈무리한 정천이 담담히 말했다.
“노인장께선 초대 천마이신 모양이군요.”
“……이 늙은이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자네도 그렇고 이 아이도 그렇고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군.”
“선례가 없었다면 저도 믿지 못했을 겁니다. 차라리 다른 방식으로 천마신공이 전래되어 왔다고 생각했을 테죠.”
“지금 선례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진천백이 살짝 긴장된 얼굴을 했다.
“진운룡이나 팔부혈선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아닌 것 같네만.”
“제대로 보셨습니다.”
“누가…… 옛 동료들 중에 아직 살아 있는 이가 있단 말인가?”
“궁후 요태희에 대해 아시리라 봅니다만.”
“……!”
진천백은 크게 놀란 얼굴이었다.
오만 가지 감정의 분광(分光)이 그의 얼굴 위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진천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듯한 기세였으나, 그는 힘겹게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를 보는 건 조금 뒤에 해도 되겠지. 지금은 자네와의 일이 더 급하니 말일세.”
정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요태희 역시 고문의 후유증 때문에라도 당분간 요양해야 할 처지였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저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다네. 몇 가지 확인할 것도 있고 하니 말일세.”
“확인이라면……?”
“진운룡의 계획.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수백 년에 걸친 계획 말일세. 일단은 그것에 대해 듣고 싶네.”
정천은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좀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만.”
“괜찮네. 그래도 시간이 촉박하니 되도록 중요한 부분만 말해 주었으면 하네.”
잠자코 듣고 있던 진백란이 끼어들었다.
“자꾸 시간이 촉박하다 하시는데, 그건 사조님의 상처와 관련된 것인가요?”
“그렇다고 해야겠구나.”
진천백은 소호에서의 전투와 천중산, 종남산의 전황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아직 유령마객과 통천각 요원들이 귀환하지 않은 상황.
그렇기에 진천백의 설명은 마교에 있어 중요한 정보였다.
막상 듣는 이들 입장에선 전혀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
“그럴 수가…….”
이야기를 듣는 두 사람의 표정이 절로 어두워졌다.
소호에서 승리했다고는 하나 천중산의 전투는 교착상태. 종남산에선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으며 대패했다. 더군다나 병력의 질과 양은 종남산 전투 쪽이 가장 컸던 상황.
전황은 완전히 진운룡과 사파 쪽으로 넘어갔다고 봐야 했다.
“종남과 화산이 무너졌으니, 섬서성은 완전히 끝났다고 봐야겠군요.”
“게다가 산동성도 지척이니 소림까지 넘어갈 거라고 봐야겠지.”
진백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로서도 한 개인으로서도 결코 달가운 상황이 아니었다.
일생의 숙적인 정파 무림이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다는 점도, 그것이 정파 이상의 적인 진운룡의 소행이란 점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설명을 마친 진천백이 말했다.
“이젠 자네가 얘기해 주게. 듣기로는 하루아침에 황룡성이 박살나고 천무맹이 와해되었다고 들었네만.”
“제대로 들으신 겁니다.”
“그렇다면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건…….”
정천은 최대한 내용을 추려서 설명했다. 나머지 일곱의 팔부혈선을 배반한 진운룡의 행동, 압도적인 무위와 죽음을 각오해야 했던 전투 등을.
이야기는 반 시진 가까이 이어졌다.
진천백도 그렇지만 진백란으로서도 직접 듣는 건 처음이었기에 몰입한 채 경청했다.
“후우.”
모든 것을 알게 된 진천백이 무거운 한숨을 토했다.
“만약 ‘문’이 열리고 진운룡이 고향으로 귀환했다면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졌을 걸세.”
“그 고향이란 곳에서 말입니까?”
“그렇다네.”
“역시 그쪽 출신이라 그런지 중원의 안위보단 고향의 안위가 걱정인 모양이군요.”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네.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그보다도…… 자네가 진운룡과 ‘문’을 격추하는 데 썼다는 초식, 잠시만 견식할 수 있겠나?”
“멸천 말입니까?”
“그렇다네.”
대답하면서도 진천백은 쓴웃음을 지었다.
멸천.
하늘을 멸한다.
참으로 오만한 작명이었다. 천마였던 진천백이나 천무맹주였던 진운룡조차도 차마 붙이지 못한 명칭 아닌가.
때문에 과연 어느 정도이기에 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진운룡을 패퇴시켰다니 상당히 강력한 초식이기야 하겠지만…….
프츠츠츠!
정천의 눈자위가 검게 물들었다. 그의 양손에서 뿜어져 나온 강기가 무서운 기세로 솟구쳤다.
콰드드드!
방 안으로 강렬한 돌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솟아난 칼날 끝의 기운에 천장의 일부가 부서져 나갔다.
그리고 그 기운 자체는 능히 산조차 무너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최대한 힘을 억제했음에도 이 정도.
진천백은 조금 전까지의 자신을 책망했다. 이건 그 오만한 작명이 어울리는 초식이었다.
“무지막지하군.”
짤막한 감탄. 진천백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흘렸다.
멸천 자체에 대한 경악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진운룡에 대한 경악이 너무 컸다.
‘이런 것을 직격당하고도 살아남았단 말인가?’
정말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진운룡의 무공은 진천백이 예상했던 것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그게 그날 날렸던 멸천인가?”
“그렇습니다. 위력 자체는 더 자제한 만큼 비교하기 힘들겠지만요.”
“……그날 썼던 것에 비해 어느 정도라 생각하나?”
“칠 할쯤? 그땐 혼령연소까지 동원했으니 차이가 더 클 수도 있습니다.”
진천백은 주먹을 꾹 쥐었다. 이보다 강했으며, 그것마저 버텼단 말인가.
‘만일 귀암산으로 오지 않고 곧장 진운룡과 대면했다면 처참했을 것이다.’
과연 몇 초나 버틸 수 있었을까.
진천백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 늙은이와 자네가 협공하더라도 지금의 진운룡을 당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
“아마 힘들 겁니다.”
담담히 대꾸하는 정천이었다.
진천백만큼이나 놀라고 있던 진백란이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그 정도로도 이길 수 없다고?”
“그만큼 진운룡은 괴물이니까. 심멸의 경지에 다다른 인간이니 나조차도 벅찰 수밖에 없지.”
“심멸!”
앞서 들은 이야기보다도 경악스러운 한마디였다. 그야말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궁극의 영역이 아닌가.
마음만으로, 의지만으로 사람을 죽인다. 세상만물을 오로지 의지 하나만으로 제어하고 지배한다.
무림 역사상 수많은 무인들이 나타나고 쓰러져 갔으나 그 누구도 다다르지 못한 경지였다.
진운룡이 정말 그 영역에 발을 들였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 신선이라도 대적할 수 없는 존재일 터였다.
진천백은 허탈한 심정이 되었다.
수백 년을 은거하며 때를 기다렸다. 시기를 가늠하며 역량을 갈고닦았다.
그럼에도 진운룡과의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도리어 더욱 격차만 벌린 채 감히 맞설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 결착을 냈어야 했다. 동귀어진이라도 노렸어야 했다.’
그가 초대천마로서, 진운룡이 초대 천무맹주로서 마지막으로 격돌했던 소화산(小華山)의 혈전.
최초의 정마대전을 끝맺음하던 그날.
수많은 이들이 스러져 갔다.
중원인들뿐만 아니라 그의 동족들 역시 소화산의 언저리에 피를 흩뿌렸다.
그곳에서 진천백과 진운룡은 삼 일 밤낮을 싸웠다. 최후에는 서로가 탈진하여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죽지 않았다. 죽기 직전까지 몰리기는 했지만.
그날 이후로 진천백은 죽음을 가장하여 은거에 들어갔다.
진운룡 역시 살아남은 일곱 동족과 함께 팔부혈선이 되어 천무맹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사실 치명상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상처는 단전에까지 뻗쳐 있어, 회복하는 데에만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미 그때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장기전이라는 것을.
“천마신교도 천무맹도 훌륭히 뿌리를 내린 상태였지. 이 늙은이는 생각했네. 내가 뿌려 놓은 씨앗을 중원인들이 싹 틔우게 하여, 그들의 힘으로 천무맹과 팔부혈선을 무너트릴 수 있게 하겠노라고.”
“그것이…….”
“마교와 천무맹의 기나긴 전쟁의 시작이었군요.”
진천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예는 그 당시에도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고 있었네. 거기에 희망을 걸어 보기로 한 거지.”
“그리고 수백 년이 흘러 버렸군요.”
“그렇다네. 내가 실수한 게야. 어쩌면 그때 이미 너무나 지쳐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진천백이 씁쓸히 웃었다.
“발전이니 뭐니 하는 것도 결국은 핑계에 지나지 않네. 난 지쳐 있었네. 모든 것을 버리고 쉬고만 싶었던 걸지도 모르지.”
“…….”
“그러나 결국은 멍청한 생각이었네. 그날 그 자리에서 진운룡과 함께 산화해야 했어. 그랬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테지.”
진천백은 순식간에 수십 년은 늙어 버린 것 같았다.
“자네를 만난다면 희망이 있을 거라 생각했네. 협공한다면 진운룡을 쓰러트릴 수 있으리란 희망. 그러나 그것도 힘들 것 같군.”
“잠시만요, 사조님.”
진백란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정천은 이미 한 차례 진운룡을 패퇴시켰어요. 거기에 사조님께서 힘을 빌려 주시는데, 어떻게 그자를 이길 수 없다는 거죠?”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
정천이 진천백 대신 대답했다.
“녀석에겐 ‘문’이라는 볼모가 있었지. 그것을 지키려고 어쩔 수 없이 멸천을 몸으로 받아야 했어.”
“그런…….”
“하지만 이젠 아냐. 지금도 적중하기만 한다면 치명타를 먹일 수 있겠지만, 놈도 바보가 아닌 이상은 피해 버리고 말겠지.”
“피할 수 없도록 발을 묶어 두면 되잖아!”
“그것조차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다, 아이야.”
진천백이 힘 빠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놈이 정말 심멸의 경지를 밟은 이상 희망은 없다. 이제는 싸우는 게 아니라 달아나서 목숨을 보전할 길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진백란은 화가 난 얼굴로 쏘아붙였다.
“얼빠진 소리 하지 마세요. 암만 사조님이래도 그따위 소리만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어요.”
숫제 부하에게 윽박지르는 듯한 한마디였다. 실제로 그녀는 진천백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지켜보는 정천이 다 긴장할 지경.
“저기,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당신은 가만히 있어.”
한마디로 정천의 입을 다물게 한 그녀가 진천백을 똑바로 쏘아봤다.
“본인이 말하셨죠? 당신의 후예들에게 희망을 걸어 보기로 했다고.”
“……그랬지.”
“그걸 충족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다들 여기에 목숨을 걸고 있어요.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헤쳐 나가려 하고 있다고요. 그러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그래. 미안하구나.”
그제야 진백란의 표정이 풀어졌다. 살기 풀풀 풍기던 데서 조금 찡그린 정도로.
“게다가 아직 비장의 수가 남아 있어요. 그렇지?”
정천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하는 진백란. 정천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랬던가?”
“팔룡천법왕이 있잖아!”
그녀의 말에 진천백이 깜짝 놀랐다.
“팔룡천법왕! 그렇군. 아직 그가 남아 있었어.”
그나 진운룡과는 전혀 다른, 이미 처음부터 이곳에 존재했던 세외의 지존.
서장의 역사는 중원의 그것과 다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장 무공의 역사 역시 중원의 그것과는 달랐다.
진천백과 진운룡이 전파하여 발전시킨 중원의 것과 달리, 서장의 무공은 그들 특유의 술법과 결합되어 독특하게 발전해 왔다.
그리고 팔룡천법왕이야말로 그 정수.
천년에 걸친 내공은 진운룡에게 대적하기에 한 치의 부족함도 없을 터였다.
“그랬군. 허허. 그래. 팔룡천법왕까지 합세한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진천백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러나 정천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진운룡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세상엔 알고도 대처 못하는 것들이 있는 법이잖나.”
“진운룡이 그런 실수를 범할까요?”
진천백의 표정이 금세 가라앉았다.
“그건…… 그렇군.”
“게다가 팔룡천법왕의 무공은 불안정합니다. 그 넓이는 하해와 같지만 그 깊이는 얘기가 다르죠.”
“뭔가 문제라도 있나?”
“실전 경험이 절망적일 정도로 부족합니다.”
“으음.”
진천백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떤 의미로는 지니고 있는 내공의 규모보다도 중요한 것이 경험이었다. 싸움이란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니니 말이다.
변수에 대처하고 변칙에 대처한다.
그것이 가능케 하는 것은 외공도 아니고 내공도 아닌 경험과 지혜였다.
“자넨 어떻게 보는가. 이 늙은이와 자네, 팔룡천법왕이 협공한다면…….”
“오히려 한 명씩 싸우느니만 못할 수도 있습니다. 협공이란 게 본디 당하는 쪽보다 가하는 쪽이 어려운 법이니까요.”
“확실히 그렇군. 나도 자네도 팔룡천법왕도 손 한 번 맞춰 보지 못했으니.”
게다가 그래 볼 시간조차 촉박하다. 두 사람은 절로 한숨이 나오는 걸 느꼈다.
“자꾸 그렇게 비관적인 얘기만 할 거야?”
듣다 지친 진백란이 정천을 닦달했다. 정천으로선 그저 억울했지만.
“힘든 걸 힘들다고 하는 게 뭐 어떻다고?”
“당신답지 않으니까 그렇지!”
“난 원래부터 이랬어. 솔직한 심정으론 그냥 어딘가로 도망쳤으면 좋겠는데.”
“자꾸 그런 소리나 할래?”
“쳇.”
물끄러미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진천백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자네들은 대체 무슨 사이인가?”
“그건…….”
진백란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정천의 눈치를 살폈다. 막상 정천은 아무 생각도 없어 보였지만.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만.”
“…….”
“굳이 따지자면 일시적인 협력 관계라 해야겠죠. 어쨌든 당장은 진운룡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있으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던 진백란이 몸을 홱 돌렸다.
“피곤해. 그만 가서 자겠어.”
“그렇게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고 싶으면 그냥 가서 자면 되잖아.”
“이익!”
진백란은 정천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갑작스러운데다 내공까지 실렸기에, 졸지에 걷어차인 정천으로선 억 소리가 나왔다.
“뭐하는 짓이야?”
정천이 묻든 말든 홱 하니 방을 나가 버리는 진백란이었다.
정천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정강이를 문질렀다.
“젠장. 대체 왜 저러는 건지.”
“……자네도 평생 싸움만 해온 모양이구먼.”
“그렇긴 합니다만,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아닐세. 그나저나 저 아이도 꽤나 힘들겠어.”
“……?”
희미하게 미소를 짓던 진천백이 이내 표정을 굳혔다.
“어쨌든 이 늙은이는 이만 가 봐야겠군.”
“귀암산을 떠날 생각입니까?”
“마음 같아선 당장 자네를 데리고 진운룡에게 쳐들어가고 싶네만, 승산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 다른 방법을 택해야겠지.”
“우선은 치료부터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 전에 정파인들을 한 명이라도 살리는 게 급선무일 것 같군. 지금이라도 당장 숭산으로 달려가야겠네. 최대한도로 경공을 펼쳐 내달리면 하루 안에 도착할 수 있겠지.”
“가는 도중에 진운룡과 조우하게 될 겁니다. 그 정도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인물을 좌시하고 있을 자가 아니니까요.”
그는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존재였다. 중원이 아무리 드넓다 한들 그의 기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귀암산이 있는 사천성과 숭산이 있는 하남성 사이엔 섬서성이 있다.
그리고 진운룡은 이미 그곳을 손에 넣은 상태. 그의 기감은 섬서성 전역에 뻗어 있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숭산까지 가는 것도 문제지만 돌아오는 것은 더더욱 문제다.
혼자라면 모를까, 패잔병들을 거느리고서 과연 혈로를 뚫을 수 있을까?
단순히 적병들만 있는 게 아니라 진운룡 본인이 버티고 있을 텐데?
그건 아무리 진천백이라 해도 힘들 터였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나.”
“그건 그렇죠.”
정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자네가? 하지만…….”
“생존 가능성을 따진다면 어르신보다는 제가 월등히 높을 겁니다. 게다가 전 본디 정파인인 만큼 섬서성과 주변 지리를 비교적 잘 알고 있습니다.”
“으음.”
“그러니 제가 가겠습니다. 노선배께선 이곳에 남아 치료부터 받으십시오.”
말을 마친 정천이 걸음을 떼었다.
* * *
“이 빌어먹을 놈, 육시를 해도 모자랄 놈! 네놈의 죄를 네가 알렷다?”
“…….”
“뭐라 변명이라도 해 봐라, 귀도신마!”
멸살독마는 당장이라도 귀도신마를 때려죽일 기세였다.
반면 쇠사슬로 꽁꽁 묶여 있는 귀도신마는 해탈한 표정이었다.
“할 말이 없수다. 죽일 테면 죽이쇼, 영감.”
“이놈이 그래도?”
“뭐가 문제요? 벌도 달게 받겠다는데.”
“네놈의 태도가 문제란 말이다! 감히 천마를 위험으로 몰아넣고도 태연하기 짝이 없는 그 태도가!”
“그러니까 말했잖소. 천마께선 안전하시다고요. 애초에 그분이 그리 간단히 위기에 빠질 분이오?”
“입은 살아서 잘도 놀려대는구나!”
“젠장! 그러니까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단 말요!”
멸살독마는 이제 분노가 극에 달해 터질 지경이었다.
‘망할 놈!’
방으로 쳐들어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진백란의 안위가 염려되어 그러질 못하는 실정. 그런데다 귀도신마는 속을 벅벅 긁어댄다.
조금만 더 건드리면 주변을 다 아작 낼 기세였다.
“거기까지만 해요.”
“……!”
진백란이었다. 그녀가 방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천마!”
멸살독마는 언제 열불을 냈냐는 듯 진백란에게로 다가갔다. 임철형을 비롯한 다른 수하들도 그녀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고요?”
유난히 호들갑을 떠는 멸살독마였다. 어째 그는 진백란이 천마의 자리에 오른 뒤로 장로가 아닌 유모에 가까워져 가는 것만 같았다.
고마운 일이긴 하나 진백란으로선 조금 자존심 상하는 일. 그녀는 쏘아붙이듯 멸살독마에게 물었다.
“괜찮지 않으면, 본좌가 잘못되기라도 할 거라 생각했나요? 그간 본좌가 그렇게나 그대들에게 미덥지 못했단 말인가요?”
“그, 그런 게 아니오라…….”
“그런 게 아니라면? 천마는 마교의 지존이지, 그대와 다른 이들이 공주처럼 받드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본좌가 미덥지 않은 게 아니라면 이렇게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을 텐데요?”
“천마…….”
“본좌의 말이 틀렸나요?”
“그, 그것이…….”
우물쭈물 땀만 뻘뻘 흘리는 멸살독마였다.
진백란도 그의 걱정이 충성심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기에 더 쏘아붙이지는 않았다.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해요, 독마.”
“그, 그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천마.”
비교적 냉정을 유지하고 있던 임철형이 물었다.
“그런데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천마궁을 습격한 역적 놈은 어찌 되었고요?”
잠시 대답을 꺼리던 진백란이 말했다.
“그는…… 역적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그는 대체 누구입니까?”
“본좌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고만 해 두죠. 조금 성격이 괴팍하긴 하지만 문제의 소지는 없어요.”
적당히 말을 돌리는 진백란이었다.
애초에 초대 천마라고 소개해 봐야 다들 혼란에만 빠질 터였다.
임철형과 멸살독마 등은 그들 나름대로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정체불명의 노인과 귀도신마가 진백란을 제압한 모습을 보았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들이 묻기도 전에 진백란이 선수를 쳤다.
“피곤하군. 들어가서 쉬겠어요.”
“천마…….”
“질문은 나중에 받죠. 문제는 없겠죠?”
“무, 물론입니다.”
“그럼.”
진백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걸음을 떼었다. 결과적으로 멸살독마와 수하들은 귀도신마에게로 다시 몰려가게 되었다.
독수로 귀도신마의 목을 겨냥한 멸살독마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지 못하면 네놈 모가지를 문드러지게 만들 테다.”
임철형 역시 기세등등하게 손 관절을 꺾어 보이고 있었다. 안 그래도 평소 나대기 좋아하는 귀도신마가 눈엣가시인 두 사람이었다.
“이런 젠장! 진운룡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데 우리끼리 이래서야 쓰겠소?”
“흥. 그놈이 귀신이라도 된다더냐? 갑자기 휙 하고 여기 나타나게?”
“놈은 능히 그러고도 남을 괴물이오!”
귀도신마가 바락바락 소리쳤다.
그때 자리를 뜨려던 진백란이 걸음을 멈췄다. 별것 아닌 귀도신마의 한마디가 그녀의 불안을 자극했다.
‘그러고도 남을 괴물…….’
그녀는 조금 전 들었던 진천백의 얘기를 떠올렸다. 종남산을 붕괴시켜 산사태를 일으켰다는, 무인의 한계 따윈 아득히 넘어선 행적에 대해.
그녀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불안이 증폭되고 있었다. 자그마한,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한 가지 가능성.
마침 정천과 진천백이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천마, 나 잠깐 용검대랑 강룡단 데리고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은데.”
홱.
진백란이 정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경직되어 있는 그녀의 표정을 본 정천이 긴장했다.
“……왜 그래?”
“바람이 과연 한 곳으로만 흐를까? 마음만 먹는다면 세상 어느 곳으로든 흐를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어디까지 갈 수 있지?”
갑작스런 질문에 정천이 말을 더듬거렸다.
“어, 글쎄. 경공을 최대한 펼친다면 성(省) 한두 지역을 횡단하는 것쯤은…….”
정천의 말끝이 흐려졌다.
진백란이 말하고픈 바가 이해되었던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진운룡은 중원 어디에서든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중원을 넘어선 지역이라도 남들이 차마 쫓을 수 없는 곳까지 이동할 수 있다.
그리고 진운룡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대는 비단 정파 무림 하나뿐이 아니다.
‘놈이라면 응당 예상을 뛰어넘은 수를 펼칠 거다.’
진운룡은 숭산으로 가지 않는다. 오히려 이쪽의 허를 찌르려 할 터.
‘그렇다면 대체 어디를?’
정천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조금 전 진천백과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이 늙은이와 자네, 팔룡천법왕이 협공한다면…….”
정천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서쪽으로 향했다.
‘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