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四章 진마동 (136/146)

第四章 진마동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화연란의 물음에 정천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까지 깊이 생각에 잠겼던 적은 최근 들어 처음이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물었어요. 괜찮으세요, 오라버니?”

정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옛날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

“옛날이라면……?”

“그곳에 있던 시기.”

“아.”

화연란은 더 묻지 않았다. 미안함 가득한 표정이 그녀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죄송해요.”

“아니, 됐어. 차라리 내가 감사해야겠지. 떠올려 봐야 기분만 나빠지는 기억이니.”

정천은 잠시 동안 생각했다. 왜 하필 이 시점에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것일까.

이유는 이내 알 수 있었다. 마차가 지나가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던 까닭이다.

“근처로군.”

“네?”

“이 근방에 진마동이 있어.”

“아…….”

화연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사실 정천에겐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어떤 얘기를 한들 좋게 끝날 리가 없었으니까.

그랬기에 입을 닫은 화연란이 고마웠다.

정천은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타고 있는 것은 대막인들이 버리고 간 마차 중 하나였다.

바로 옆으로는 응급처치를 받은 요태희와 백미련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창도에서의 전투를 마치고 귀암산으로 귀환하는 중이었다.

사실 전투라 부르기도 힘든 싸움이었지만.

요태희와 백미련은 월골이 점거하고 있던 건물에서 구해 냈다. 고문으로 인해 쇠약해져 있었지만 다행히 중상은 없었다.

때문에 곧장 귀암산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시간이 촉박한 만큼 다행한 일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놈은 조금씩 정파 무림을 부수고 있겠군.”

말에 오른 채 마차와 나란히 걷던 장유추의 말이었다. 정천으로선 그 말을 듣고서야 정말 현실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진운룡.’

모든 일의 흑막.

완전히 결착을 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결착이란 게 정천 자신의 죽음으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상관은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된다면 어떤 의미로는 편할지도 모르고.

“정파 무림이 멸망할 일은 없을 겁니다. 천마신교도 해내지 못한 일을 그 개자식이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지요.”

관식의 말이었다.

“자넨 그다지 마교에 애착이 있는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네만.”

“그런 편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놈에게 먹잇감을 뺏기는 건 기분 더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군.”

“지금이야 공동의 적 앞에서 협력하고는 있습니다만, 본래는 우리도 천무맹도 비할 데 없는 앙숙이 아니겠습니까.”

신생 용검대를 의식한 듯한 말이었다. 정작 용검대주인 모용훈은 못 들은 척을 하고 있었지만.

눈썰미 좋은 장유추가 넌지시 물었다.

“용검대주를 그리 좋아하진 않나 보군.”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가 정파인이기 때문에?”

“그렇진 않습니다. 그랬다면 본디 정파 출신인 장로님도 꺼려했겠지요.”

“그건 그렇군.”

생각해 보면 장유추 역시 관식과 썩 좋은 첫 대면을 갖진 못했다. 천무맹 사람들 대부분이 그럴 터였지만 말이다.

관식은 곁눈질로 모용훈을 보았다.

“뭐랄까. 용검대주는 너무 잘난 인물이더군요. 성격도 좋고, 행동거지도 바르고.”

“무정검 관식과는 정반대의 인물이라, 이거군.”

“굳이 표현하자면 그렇다고 해야겠군요.”

장유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좋은 일이야.”

“……좋다고요?”

“당연한 것 아닌가?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자네들은 다시 적이니 말일세. 물론 그때까지 살아 있을 때의 얘기겠지만.”

장유추의 목소리엔 장난기가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말하기는 관식에게 하면서도 시선은 정천에게 두고 있었다.

그 시선의 의미를 모를 정천이 아니었다.

“나 역시 적이 될 수 있다, 그런 말입니까?”

“그렇게 말하진 않았네. 다만 자네도 언젠가 선택해야 할 때가 오겠지.”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을 겁니다.”

“과연 말처럼 쉬울 것 같나?”

장유추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평소의 다혈질적인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자네도 이미 여러 차례 느꼈겠지. 힘을 지닌 자는 원하지 않더라도 그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이게 되는 법일세. 옛 왕이나 황제들이 그러했고, 가까이로는 천마 역시 그렇지.”

“…….”

“자네라고 다를 것은 없네. 은거한다 치더라도 누군가는 자네를 언젠가 찾아내게 될 게야.”

“그래서 마교의 품으로 귀의하란 겁니까?”

“그것 역시 선택지 중 하나일 수 있지.”

“장로로 임명되더니 사람이 너무 성실해진 것 아닙니까? 장 선배답지 않은데요.”

“노부의 성향은 아무래도 마교 쪽에 가까운 것 같아서 말이지. 기왕 장로 노릇을 한다면 제대로 해 봐야지 않겠는가?”

“좋을 대로 하십시오. 그래도 전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을 겁니다.”

장유추는 뭔가 더 말하려 했다. 하지만 정천이 시선을 보내 말하지 말라는 눈짓을 했고, 하릴없이 입을 다물었다.

모용훈은 그때까지도 침묵하고 있었다.

대화를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에 자신이 낄 계제는 없다고 생각했다.

‘일시적인 동맹이라.’

그것은 천마 진백란도 잘 알고 있고, 신생 천신맹주인 남궁운 역시 잘 아는 바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인이란 결국 끝없이 싸울 수밖에 없는 생물이었고, 당연하게도 싸움이란 상대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 같은 말장난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서로가 다른 깃발을 든 이상 언젠가는 부딪칠 수밖에 없다.

신생 용검대주인 그 역시 마찬가지.

특히나 바로 곁에 있는 관식과는 앞으로도 여러 차례 충돌하게 될 것이다. 용검대와 강룡단의 역사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물론 예외도 있었지만 말이지.’

모용훈은 뒤편의 정천을 힐끔 보았다. 그는 다시 마차에 기대어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대체 그곳, 진마동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 * *

살육의 나날.

진마동에 들어선 그들을 반기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들은 덤벼드는 마수들을 찢고 부수며 나아갔다. 전투의 끝에 잠시 동안 찾아오는 휴식을 만끽하고, 또다시 몰려드는 마수들과 싸우고 또 싸웠다.

셀 수도 없을 정도의 긴 시간.

햇빛을 보지 못한지도 너무나 오래되었다.

이따금 마수들이 들고 있는 횃불을 밝히기도 했으나 잠시뿐이었다.

빛은 더 이상 그들의 곁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차츰 그 사실에 익숙해져 갔다.

토벌대 전원은 진마동에 들어선 첫날을 기억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진마동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규모의 붕괴로 인해 입구가 틀어 막혔다. 수십억 관의 산더미가 바깥으로 나아갈 길을 완전히 막아 버렸다.

남은 것은 아래로 나아가는 것뿐.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모두들 운명의 그날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만일 그때 이곳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차라리 명령에 불복하여 달아났더라면.

후회해 봐야 남는 것은 처참할 정도의 자괴감뿐이었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저 운명을 저주할 뿐.

달려드는 마수들을 찢어발기며, 용검대와 강룡단은 아래로 나아갔다.

차츰 고요가 그들을 찾아왔다.

죽어 자빠진 이들도 부기지수거니와, 살아남은 이들조차 차츰 말수가 줄어 갔다.

마치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사치라는 듯.

물론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이곳은 지옥이야. 나락이야. 우린 살아 돌아가지 못할 거야.”

어느 얼간이의 목소리.

사위가 컴컴한 어둠뿐이었기에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기감(氣感)을 통해 그곳에 있음을 알 뿐이다.

“우리 모두 죽을 거야. 여기서 죽을 거야. 아무도 우리가 죽어갔다는 걸 알지도 못하겠지.”

“그럼 자결이라도 하든가. 다른 사람들 기분까지 잡치지 말고 너 혼자 뒈지든가 해라.”

퉁명스러운 대꾸.

얼간이의 눈에서 살기가 쏘아졌다. 어둠뿐이었지만 그가 순간적으로나마 생기를 되찾았음을 다들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것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조롱이 됐든 역정이 됐든, 무언가 반응할 수 있는 인간적인 대응을.

“개자식! 네놈이나 다른 놈들도 마음속으로는 나와 같을 것 아니냐! 차라리 죽는 게 지금보단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잖나!”

멀찍이서 지켜보던 정천이 화륜패를 돌아봤다. 화륜패는 내버려 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는, 소리 없이 행동으로만 이루어지는 대화.

생존자 중에서도 최강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은 이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마뜩치 않았던 정천이 결국 전음을 보냈다.

—그냥 내버려 두란 말입니까? 저대로 뒀다간 싸움판 나게 생겼는데.

—좀 지켜보도록 하지. 안 그래도 무료한데 잘 된 일 아니냐.

—내분이 일어났을 때 습격이라도 벌어지면 정말 난리가 날 겁니다. 한둘이 죽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 걸요.

—그렇겠지.

정천은 나직이 혀를 찼다.

화륜패는 눈에 띄게 쇠약해져 있었다. 육체적으로 그렇다는 게 아니었다. 쇠약해져 있는 것은 그의 정신이었다.

아마도 죄책감 때문일 터.

‘멍청한 늙은이.’

용검대와 강룡단의 최초 이백 명. 그중 이 모든 사건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아마도 단 둘뿐일 터였다.

용검대주 화륜패와 강룡단주.

그중 강룡단주는 얼마 전의 전투에서 비명횡사했다. 결과적으로 진실을 아는 사람은 화륜패 혼자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진실이란 것은 아마도…….’

어째서 그들이 진마동에 들어서게 됐는가, 진마동의 입구가 토사로 막혀 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따위일 테지.

때문에 화륜패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마 이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인 양 죄책감을 느끼는 것일 터.

어쩌면 죽어 버린 강룡단주가 부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으로 도피하지 못하는 것 역시 역설적이게도 그 죄책감 때문이겠지만.

정천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애초에 말상대와는 거리가 먼 정천이었고, 심중의 고뇌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화륜패도 아니었으니.

그저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가만히 앉아 보고 있어야 할 뿐이었다.

그것도 시시탐탐 그들을 노리는 괴수들의 요람에서 말이다.

“우리 모두가 죽게 될 거라고! 이 지옥에서!”

얼간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공동 전체에 메아리쳤다.

‘빌어먹을 자식이.’

정천이 검에 손을 가져갔다. 여차하면 베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때 묵묵히 듣고만 있던 강룡단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지옥이나 나락이 아니다.”

얼간이가 홱 고개를 돌렸다.

“지금 뭐라고 했지?”

“나락이 별건가? 꿈에서 깨어났을 때 왜 아직도 살아 있는가 후회가 드는 곳이 바로 나락이지.”

나직하나 힘이 있는 목소리.

길길이 날뛰던 얼간이가 순간적으로 움츠러들 만큼 스산한 목소리였다.

정천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건 기억 못해도 펼치는 검법과 지니고 있는 내력의 특색 정도는 뇌리에 남아 있었으니.

‘제갈세가의 검법을 쓰는 마교도였지.’

기이한 녀석이었다. 마교도가 정파 명문세가의 검법을 쓰다니.

때문에 몇몇은 그에게 제갈 마두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인물이 인물인데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자주 쓰이진 않았지만.

그 정도의 특색이라면 이 깊은 공동 안에서는 대단한 개성이라 봐야 했다.

“난 이제야 나락에서 벗어난 기분이야. 잠에서 깰 때마다 반드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거든.”

“제정신이 아니군.”

“그렇게 생각하나? 내가 보기엔 오히려 네가 그런 것 같은데. 그렇게 두렵다면 죽음으로써 도피해 버리면 될 일 아닌가.”

“나, 나는…….”

“자결하는 게 무섭다면 도와줄 수도 있다.”

얼간이는 입을 다물었다. 죽네 사네 난리쳤던 게 마치 거짓말이라는 양.

애초에 그 역시 죽고 싶진 않은 것이었을 뿐.

그 정도는 그 자리에 있는 모두고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얼간이의 숨이 끊어진 것은 대화를 나누고 며칠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애초에 어둠뿐인 공동에서 날짜를 계산하는 것은 무의미하겠지만.

정천이 제갈 마두와 말을 붙이게 된 것도 그날이었다.

“아직까지 용케 살아 있군.”

“…….”

“꽤 운이 좋은 모양이야. 정파 무공을 쓰는 마교도 치고 오래 사는 놈은 못 봤는데.”

“…….”

“계속 벙어리 행세만 하고 있을 거냐?”

나직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어둠 너머로도 그가 귀찮아 한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대체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지?”

“별것 없어. 그냥 같이 살아남은 처지에 얘기나 좀 해 보자는 거지.”

이제 남은 생존자는 스무 명 남짓.

최초의 토벌대에서 일 할만이 남게 된 셈이었다.

그렇다고 유대감이 생기거나 할 수준은 아니었다.

서로의 지식을 총동원해 무공을 발전시키고는 있었으나, 그것도 결국은 생존을 위한 궁여지책에 지나지 않았다.

서로가 대화한다거나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애초에 그러기엔 피로하기도 했고.

아래로 깊이 내려갈수록 마수들의 힘과 습격 횟수는 늘어나고 있었다.

토벌대는 그러한 습격을 분쇄하며 나아가는 중이었다. 마수들을 베거나 찢어발기며, 때로는 그것들의 피와 고기를 섭취하면서.

“떠들고 싶지 않다. 그럴 힘이 있으면 나중을 위해 비축해 두어라.”

“나도 너처럼 딱딱한 놈이랑은 떠들고 싶지 않아. 단지 떠들 여력이나마 있는 사람이 우리뿐이니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거다.”

“그게 무슨 뜻이냐?”

“요즘 다들 죽을상을 하고 있으니까. 남이 지껄이는 이야기라도 듣고 있으면 좀 힘이 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제갈 마두는 희한하다는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이름이 어떻게 되나?”

“정천. 바를 정(正)에 하늘 천(天)을 쓰고 있지. 공교롭게도 이름을 지어 준 인간이 그 두 글자밖에 쓸 줄을 몰라서.”

나직이 뒤편의 화륜패를 가리키는 정천이었다. 화륜패는 피로한 모양인지 대꾸도 않고 있었다.

사실 대부분이 화륜패와 마찬가지였다. 입을 열 여력조차 아쉬워질 만큼 지쳐 있었다.

그나마 그중 힘이 남아도는 사람은 둘뿐.

‘그게 우리란 말이군.’

제갈살과 정천이 쉬엄쉬엄 싸우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습격 때마다 맨 앞에 서는 사람은 그들 두 명이었다.

그럼에도 여력이 남는다는 것.

그 의미는 간단했다. 만약 최후까지 남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일 거란 의미였다.

“용검대 쪽에선 네가 일인자인 모양이군.”

“단순히 싸움질 잘한다고 일인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최소한 이곳에서라면 강한 자가 일인자라고 봐야겠지. 그만큼 생존의 가능성도 높으니.”

“누가 마교도 아니랄까 봐 고까운 소리만 하는군.”

“이런 걸 원하는 게 아니었나?”

정천은 피식 웃었다. 생각한 것보다는 말이 통하는 녀석이었다.

“그래도 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쪽보단, 한 명이라도 더 살리는 쪽을 택하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간단해. 너와 내가 조금 더 노력하자는 거지.”

제갈살은 말없이 정천을 응시했다. 정천의 말이 이어졌다.

“요 며칠 동안의 전투에선 극히 힘을 아끼더군. 딱 네가 살아남을 수 있는 수준으로만 싸우더란 말이다.”

“대단한 눈썰미로군. 그 와중에 그런 것도 간파하고.”

“네가 조금만 더 힘을 썼더라도 두어 명은 더 살릴 수 있었겠지.”

“그랬을 거다. 하지만 그럴 이유가 딱히 없었다. 그 두어 명이 그 자리에서 살아남았더라도 다음 전투에서 죽게 됐을 테니.”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그래서, 어차피 죽게 될 그들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힘을 써 달라?”

“그래.”

“너와는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말이군. 그렇게 성인군자 같지는 않아 보였는데.”

“제대로 봤다. 난 성인군자가 아냐. 딱히 대단한 이유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럼 왜 그런 말을 하지?”

잠시 뜸을 들이던 정천이 대답했다.

“복수는 여럿이서 하는 게 달콤하니까.”

“복수?”

“그래. 우리를 여기에 가둔 놈들에 대한 복수. 설마 이 모든 일이 우연의 연속으로 벌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물론 모든 일의 배후엔 음모가 있었겠지. 하지만 그들에게 복수하는 게 의미가 있나? 하물며 이곳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하지 않아.”

정천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우리는 강해졌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예전의 우리였다면 이백 명 모두가 달려들었대도 수억 관의 돌무더기를 어찌할 수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

“그때의 십분의 일인 스무 명으로도, 아니 어쩌면 그보다 적은 인원으로도 할 수 있다. 이곳의 입구를 틀어막은 토사를 부수고 밖으로 나갈 수 있다.”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다. 그것은 제갈살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토사를 부수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이미 생존자들 개개인이 중원에서 초고수 소리를 들을 만큼 강해진 뒤였으니.

문제는 거기까지 돌아가는 일.

마수들은 이제 네 시진을 주기로 지속적으로 습격해 오고 있었다. 그 강맹함 역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상태였다.

초고수인 그들조차 감당키 어려운 존재들이 무더기로 쏟아진다.

되돌아가기는커녕 버티고 있는 것조차 기적이었다.

“바보 같은 생각이다. 습격을 단단히 대비하고 싸워도 겨우 연명하고만 있는 실정이다. 이 와중에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그 괴물들에게 등을 내주는 꼴밖에 되지 않겠지.”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럼 얘기 다 했군. 허무맹랑한 계획일랑 집어치우고 가서 쉬어라.”

정천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난 되돌아가자고 얘기하지 않았어. 그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

“나는 지금 더 밑으로 내려가자고 말하고 있는 거다. 이 빌어먹을 나락의 밑바닥까지 가보자고 말하고 있는 거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이곳도 무한하지는 않아. 이제 끝이 보이고 있다. 이 망할 곳의 막다른 골목이 나타날 때가 됐다는 거다.”

그 무슨 허튼소리냐고 말하려던 제갈살이 입을 다물었다.

마음에 짚이는 게 없지는 않았다.

‘설마 그것을 얘기하는 건가?’

초인적으로 발달한 기감 덕에 그들 대부분은 수십 장 너머 거리의 물방울 떨어지는 것까지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출한 편인 제갈살은 얼마 전부터 특별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깊은 곳, 그러나 아득히 멀다고는 할 수 없는 곳.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제갈살의 동요에 정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느끼고 있었군.”

“…….”

“그것, 아니 그놈이라 해야 할까. 놈이야말로 이 나락 같은 곳의 주인이 분명하다.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내려갈수록 마수들이 강해졌던 것도, 놈들의 습격이 잦아지고 맹렬해진 것도 그 때문이겠지.”

“네 말대로라면 왜 놈은 직접 나타나지 않은 거지? 그렇게 강대한 놈이라면 자잘한 것들을 보낼 필요도 없지 않았나?”

“그건 나도 몰라. 솔직히 지금 말한 것도 모두 가정에 지나지 않고.”

그건 그랬다. 온통 심증뿐인, 물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가정.

“그렇더라도 밑져야 본전 아니겠어?”

제갈살은 정천을 물끄러미 보았다. 정천은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난 가능한 많은 이들과 함께 돌아가고 싶다. 그리고 우릴 이 꼴로 만든 것들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 주고 싶다. 그래야 죽어간 동지들도 조금이나마 편하게 눈을 감을 테니.”

“망자는 그저 망자에 지나지 않아. 누가 뭐라 치장하든 결국은 시체에 불과하다. 그들이 정말 복수를 원하는지도 알 수 없지 않나?”

“그럴지도. 그저 내 개인적인 만족을 위한 거라 생각해도 좋다.”

“그래서, 나더러 그 개인적인 바람이 이루어지게끔 도와 달라?”

“그래.”

제갈살은 입을 닫았다. 정천도 더 재촉하지 않았다. 때마침 그들의 기감이 미칠 듯이 위기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무저갱의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살의와 투지. 흉포한 기운에 피부가 저릿했다.

놈들이 몰려온다.

스르릉.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것을 본 다른 동지들도 상황을 파악했다.

“모두들 정신 차려!”

“놈들이 온다!”

그들의 외침에 호응이라도 하듯, 먼 공동의 밑바닥으로부터 걸쭉한 포효가 들려왔다. 피에 굶주린 마수들의 포효였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반복해 온 전투가 다시 시작된다. 모두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피로와 절망감이 가득했지만, 제갈살과 정천만은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즐기지 않고선 정말 미칠 것만 같았기에.

“난 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만 검을 휘두를 것이다. 솔직히 말해 너나 다른 이들이 죽든 말든 상관은 없어.”

제갈살은 조금 뒤에야 마지못해 말하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렇지만 평소보다 실력 발휘를 조금 더 할 수는 있겠지.”

정천은 피식 웃었다.

“그럼 그 실력 좀 볼까?”

“얼마든지.”

제갈살이 땅을 박차고 나아갔다.

그의 검이 순간적으로 빛을 토했다.

선봉으로 달려들던 돼지머리 마수들의 모가지가 하늘로 치솟았다.

정천조차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의 쾌속. 속도로는 중원에서도 겨룰 자가 거의 없다는 연환삼십육검(連環三十六劍)의 초식이었다.

정천은 짧은 순간 압도되었다. 제갈살의 검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도 높은 경지였다.

“저 녀석, 천재로군.”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화륜패의 말이었다.

“어쩌면 네 녀석 이상의 재목일지도 모르겠다. 저 정도의 기재가 숨어 있었다니.”

“몸은 좀 괜찮은 겁니까?”

“쓸데없는 걱정일랑 말고 네놈 앞가림이나 잘해라, 녀석아.”

화륜패는 큼직한 폭뢰검을 흔들어 보이고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잠시 그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정천도 이윽고 앞으로 돌진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전투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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