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章 종남산의 피바람
“크…….”
백월청은 이를 악물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풀었다간 핏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올 터였다.
가슴이 답답했다. 단전이 바늘로 찔리는 것처럼 아팠다. 내공이 모조리 고갈된 까닭이었다.
그는 앞을 응시했다.
“…….”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룬다. 낡아 빠진 관용구였으나 지금의 상황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피눈물을 애써 삼켰다.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힘껏 억눌렀다.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수천 명이 죽었다. 아니, 수만 명이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중 절반 이상이 진운룡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괴물! 저주받을 괴물!’
백월청이 소리 없이 절규했다. 입을 열었다간 내장까지 토해 낼 것 같았기에 이를 악문 채 끅끅거렸다.
전투는 이제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반수 이상의 병력을 잃은 정파 무인들의 진형이 붕괴되고 있었다.
진운룡도 성하지만은 않았다.
상처 자체야 금세 아물었다. 애초에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은 육체였기에.
애초에 그의 호신강기를 뚫고 생채기나마 낼 수 있는 인물도 거의 없었고 말이다.
그러나 백월청과 일대제자들이 이끄는 합화유하진은 그의 기력을 상당 부분 깎아 놓았다.
진운룡이 혼자였다면, 어쩌면 합화유하진의 합격은 그의 목을 가를 수도 있었으리라. 궁극의 경지에 오른 무인의 목을 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최정예 사파 연맹의 무인들은 진운룡의 활약에 힘입어 정파 연합의 진형을 무너트렸다.
두 시진이 채 되지 않는 전투 동안 전 병력의 오 할 이상을 잃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희생이었다.
전의가 상실되는 것은 순식간.
아무로 분노가 거대해도, 아무리 증오가 거대해도 싸울 수 있을 리 없었다.
“으, 으으으!”
“으아아!”
정파 무인들이 하나둘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두셋은 순식간에 네다섯이 되더니, 이내 열 명이 되고 백 명이 되었다.
이젠 일방적인 학살이 되어 버린 상황.
정파 연합군은 그대로 전장을 이탈했다. 신명이 난 사파 연맹군은 그 뒤를 쫓았다. 자연히 추격전이 시작된 것이다.
때문에 피로 물든 종남산은 역설적으로 고요했다. 이따금 시체를 뒤지는 까마귀들만이 퍼덕일 뿐.
그곳에 남은 사람은 셋뿐이었다.
모용중강, 백월청, 그리고 진운룡.
“…….”
진운룡은 이제 여유롭게 앉아 패배자들의 몰골을 구경하고 있었다. 약간의 만족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
수천 명을 도륙해 놓고도 저리 무심할 수 있다니, 백월청으로선 절로 치가 떨렸다.
백월청은 고개를 조금 돌렸다.
그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역시나 피투성이가 된 채 널브러져 있는 모용중강이 보였다.
“제법이었다. 너희들치고는.”
진운룡의 한마디.
백월청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승자의 여유라는 거냐? 이 와중에도 우리를 비웃고 싶다는 거냐?”
“그렇진 않다. 본좌는 지금 진심으로 너희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이만큼까지 본좌를 밀어붙인 건 너희가 세 번째니까.”
백월청은 이를 갈았다.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누구인지는 묻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이 누구건 간에 어쨌든 실패했으니 놈이 살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첫 번째란…… 초대 천마를 말하는 것인가?”
모용중강이었다.
시체처럼 누워 있던 그가 필사적으로 일어나며 묻고 있었다.
진운룡의 눈에도 이채가 감돌았다.
“그렇다. 의외로군. 이미 죽은 줄 알았는데.”
“네놈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니 눈을 감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더군.”
“여기까지 몰려서도 기개만큼은 대단하구나, 중원인.”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백월청은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미 수만 명의 병력이 소모됐고, 살아남은 이들조차 대부분 도망치고 있었다.
완벽한 패배. 그것도 어마어마한 분패였다. 이 와중에 무엇이 더 남아 있단 말인가?
그래도 모용중강은 포기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선 허세 이상이 되지 않겠지만.
진운룡은 턱을 괴었다.
“예전이라면 네놈들을 그냥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지.”
“…….”
“어떤가. 본좌의 밑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느냐?”
“개소리를 하는구나. 천무맹을 멸한 네놈의 밑에 들어갈 것 같단 말이냐? 내 딸도 그곳에서 죽었다. 황룡성에 있던 모두가 죽었다!”
“모두는 아니다.”
모용중강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개소리를…….”
“극소수이긴 하지만 생존자가 있다. 너희가 모르는 걸 보니 귀암산으로 달아난 모양이군.”
‘귀암산이라고?’
백월청은 정신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분명 그날, 황룡성은 마교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 이상의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재해가 있었다는 것 말고는.
처음엔 마교의 짓이리라 다들 생각했다. 그러나 진운룡이 나타나고, 사파가 대두하면서 그것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마교는 천무맹과 같은 희생양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생존자들을 거두었을 수도 있고.
적의 적은 친구인 법이니까.
모용중강 역시 백월청만큼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그럼 린아나 다른 아이들도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말인가?’
충격에 휩싸인 그들의 귓가에 진운룡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본좌의 밑으로 들어온다면 귀암산을 칠 때 천무맹의 패잔병들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조하지. 나쁘지 않은 조건 아닌가?”
“…….”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이것도 네 재량에 감탄했기에 건네는 제안이니.”
이 전투로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정파 연합 중 최정예의 병력이 무너진 이상 정파 전체의 군세가 기울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는 사파와 정파 간의 전쟁이 사실상 끝났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다른 곳의 전투 결과가 어찌 되었든 말이다.
“팔다리가 잘려도, 구명만 잘 한다면 목숨을 건질 수는 있다. 그러나 심장이 깨어진다면 그 어떤 신의(神醫)가 오더라도 살려 낼 수 없는 법이지.”
진운룡의 말이 이어졌다.
“이 전투로써 정파 무림은 끝났다. 발악하여 얼마간 생명을 연장할 수야 있겠지만 죽음을 맞았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
“하지만 정파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건 귀찮은 일이지. 비합리적이기도 하고. 너희로서도 개죽음을 맞이하는 게 달갑지는 않을 것이다.”
진운룡이 말을 이어 갔지만 모용중강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한 가지 가능성으로만 들끓고 있었다.
‘만일 린아와 다른 아이들이 살아 있다면? 마교도들에게 구명되어 귀암산에 있는 거라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마교인들이 천무맹에서 누군가를 구해 냈다면, 그건 대체로 수뇌부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보다 뛰어난 문파, 보다 뛰어난 가문의 사람일수록 살아 있을 확률이 높다.
잔인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결국 모용린과 모용훈, 모용준이 살아 있을 가능성도 높다는 것.
그렇다면 이런 곳에서 개죽음할 순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진운룡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설령 자식들이 살아 있고, 그들을 보고 싶어 미치겠더라도 말이다.
‘나는 무림인이다.’
목숨보다 자존심을 중히 여기는, 어찌 보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족속.
그러나 모용중강은 그런 자신이 싫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들어 진운룡을 똑바로 응시했다. 일말의 비굴함도 섞여 있지 않은 눈빛이었다.
진운룡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본좌의 말을 듣지도 않은 모양이군.”
“그렇다.”
“개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이냐?”
“비굴한 삶을 택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모용중강은 가슴을 폈다. 이대로 목이 달아나게 되더라도 한 점 부끄러울 것은 없었다.
“한심하군.”
진운룡에게서 한동안 사라졌던 살기가 다시 흘러나왔다.
모용중강도 백월청도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기에, 그저 살기만 흘러나오는 것인데도 숨이 턱 막혀 왔다.
“으으음.”
“크…….”
두 사람의 낯빛이 파랗게 질렸다. 진운룡은 살기만으로 두 사람을 질식시키려는 듯했다.
돌연 진운룡에게로 암기가 날아든 것은 그때였다.
쉬익!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 진운룡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는 가볍게 손을 떨쳤다. 날아들던 비수가 이내 힘을 잃고는 땅에 떨어졌다. 그렇더라도 놀라운 것은 사실이었다.
“제법이구나. 본좌에게 들키지 않고도 이렇게나 가까이 접근하다니.”
그 순간 모용중강은 자신을 뒤에서 붙드는 감촉을 느꼈다.
붕대로 몸을 둘둘 감은 사내였다. 강시귀가 아닌가 싶을 만큼 체온이 차가웠으나, 분명 시체가 아닌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그는 통천각주 유령마객이었다.
물론 진운룡이나 모용중강, 백월청이 그것을 알 리는 만무했다.
“네놈은 누구냐.”
“천마신교의 유령마객.”
의외로 정직하게 답하는 유령마객이었다.
애초에 그로서는 모습을 드러낸 시점에서 이미 죽음을 각오한 일이었다.
일단 발각된 이상, 진운룡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내가 지니고 있는 모든 암기와 비술을 사용한다면 모를까.’
그렇더라도 도주 가능성은 대략 이 할.
혼자라면 팔 할쯤 됐겠으나 짐이 둘씩이나 딸린 이상은 이 할도 많이 잡은 편이었다.
‘맞서 싸운다면?’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일 합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기력 소모가 상당하다고는 해도 애초에 지니고 있는 무공 자체가 격이 달랐다.
유령마객뿐 아니라 옛 마교십존 모두가 있다고 해도 진운룡을 감당할 순 없으리라.
진운룡도 그것을 알았기에 이내 냉소를 지었다.
“마교의 나부랭이가 왜 모습을 드러냈는지는 모르겠으나, 스스로 생각해 봐도 그게 실책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아마도 밀정이나 첩자 같은데, 네놈은 그저 숨어서 지켜보고나 있어야 했다. 무엇 때문에 모습을 드러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게 명을 재촉하는 셈이 되었군. 어리석구나.”
“동의하오.”
유령마객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천마 진백란이 그에게 내린 명령은 간단했다. 섬서성의 전투를 관찰한 후 귀환할 것.
그는 그 명령만 충실히 따랐어야 했다.
‘그러나…….’
왠지 모용중강의 죽음을 그냥 두고 넘길 수가 없었다. 나서 봐야 개죽음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진운룡은 여유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애초에 당황한 것도 처음의 잠시뿐이었다.
“너 역시 보통내기는 아닌 듯하군. 은신한 채 본좌에게 이만큼이나 접근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
“어떠냐. 마교를 버리고 본좌의 밑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느냐?”
“사양하겠소.”
진운룡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렇다면 죽어야겠군.”
유령마객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진운룡의 심멸을 본 이상 한순간도 긴장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내 내장이 찢어발겨질 수 있으리라.’
예상한다고 피하거나 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애초에 진운룡 본인이 아닌 이상은 원리조차 알 수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머릿속이 절로 복잡해졌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진운룡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 셋을 모두 죽이고도 남을 것이다.
그때 백월청의 전음이 들려왔다.
—어찌 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왕 이렇게 된 것 부탁 하나만 하겠소.
—……?
—모용 가주를 데리고 달아나시오. 놈은 내가 목숨을 던져 막아 볼 테니.
유령마객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몸을 일으키는 백월청이었다.
그의 표정은 결연했다.
이미 부러져 토막이 난 명검 염화용아의 칼날 위로 검강이 치솟았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미약한, 마치 그의 운명과 같은 기운이었다.
진운룡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죽음을 재촉하는군.”
“가시오!”
짧게 소리치며 백월청이 몸을 날렸다.
츠츠츠츠.
그의 몸에선 한 줄기의 연기 같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혼령연소.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불사르고 있는 것이었다.
진운룡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정천에게 호되게 당했던 그로서는 혼령연소라는 것 자체가 좋게 보일 수가 없었다.
“……네놈만큼은 온몸을 찢어 죽이겠다.”
“좋을 대로 해라!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백월청의 목소리엔 힘이 넘쳤다. 회광반조란 이런 것을 일컫는 것이리라.
유령마객은 이미 모용중강을 든 채 최대한 먼 곳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모용중강 역시 달리 방도가 없음을 알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아압!”
핏빛으로 물든 일몰 위로 백월청의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 * *
고릉(高陵).
종남산으로부터 오백 리도 넘게 떨어진 곳이었다. 유령마객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내달려 도착한 곳이기도 했다.
그들은 일단 그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유령마객도 지쳐 있었지만 정말 위중한 쪽은 모용중강이었다.
원체 상처가 깊었던 데다 급히 이동하는 와중에 더욱 벌어져 출혈이 심했다.
유령마객은 지니고 있는 약재와 내단을 총동원해 모용중강을 치료했다.
한동안 인사불성이던 모용중강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숭산으로 갑시다.”
모용중강이 깨어나자마자 한 말이었다.
유령마객은 나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소. 진운룡과 사파 무림의 다음 행보가 그곳일 게 뻔하오.”
“그렇기 때문에 가자는 것이오. 어차피 그대들도 정파 무림과 손을 잡으려는 게 목적 아니오? 어쩌면 이미 손을 잡았을 수도 있겠군.”
“정확하오.”
“역시 그날, 황룡성의 생존자들을 마교에서 구명한 모양이군.”
“그렇소.”
모용중강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당장이라도 자식들의 소식을 묻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묻지 않았다.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산더미였다.
“그렇다면 더더욱 숭산으로 가야 하오. 당장 소림사에 남아 있을 이들을 규합하여 퇴각해야 하오.”
“귀암산으로 말이오?”
모용중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전의 그였다면 소림사에서 결사항전하는 쪽을 택했으리라.
소림사는 정파의 심장이며 상징이었기에, 그곳을 잃는 순간 정파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천무맹이 존재하지 않을 때의 일.
‘천무맹의 수뇌부가 보존되어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천무맹은 소림사 이상으로 거대한 상징이었다. 천무맹이 남아만 있다면 정파는 죽지 않는 것이었다.
설령 마교에 의탁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모용중강은 숭산으로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소림사에 남아 있을 이들을 살려 내어 천무맹에 보탤 수 있게끔.
그러나 유령마객의 생각은 부정적이었다.
“이미 진운룡은 숭산으로 향했을지도 모르오. 최악의 경우엔 놈보다 우리가 늦게 도착할 수도 있소.”
“그렇기에 서두르자는 것이오.”
유령마객은 고민했다.
그곳에서 살아 나온 것만으로도 천운이었다. 그런데 다시 죽음을 향해 걸어 들어가야 하다니.
그러나 죽음이야 처음 무림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각오해 온 것이었다. 실제로 지금껏 죽음의 위기를 넘긴 것도 여러 번이었다.
당장 죽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야말로 무림인의 삶.
두렵다고 하여 달아날 순 없었다.
“알겠소. 한번 해 봅시다.”
* * *
저녁녘 땅거미가 진득하게 진다. 그 아래로 채 사라지지 않은 흙냄새가 산천에 진동한다.
그보다도 지독한 죄책감과 자괴감이 온몸을 감싸고돈다. 떨쳐도 떨어지지 않는 진드기처럼.
음영은 형언할 수 없는 심정을 느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종남산의 기슭. 산사태가 휩쓸어버린 현장이었다.
다른 무인들이 정파 패잔병들을 추적하러 갔지만 그는 걸음을 떼지 못했다.
음영 주제에 그래선 안 됨을 알면서도 그는 도저히 싸울 수가 없었다.
대신에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우스운 일이었다.
사파 출신의, 그것도 일개 음영에 지나지 않는 그가 죄책감이라니.
이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한때 독왕의 수하들이었기 때문일까?
혹은 진운룡의 잔혹함이 도를 지나쳤기 때문일까.
죽을 이유가 없는 이들이었다.
이 전쟁에 연루된 어느 누가 그러지 아니할까만, 음영에겐 토사 아래 파묻힌 이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 역시 언젠가는 저렇게 될 것이다.
사실 죄책감보다도 그 두려움이 더 컸다. 비겁하고 치졸하지만 그게 인간이었다. 잘 모르는 이의 죽음엔 무감각하면서도, 그 죽음이 자신과 연관될 수도 있다면 두려움에 벌벌 떠는.
평범한 인간.
‘나는…….’
“감상이라도 하고 있는 것이냐?”
“……!”
화들짝 놀란 음영이 돌아섰다. 그곳엔 진운룡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서 있었다.
피떡이 된 사내 하나가 그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간헐적인 기침만이 그가 아직 살아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긴장된 음영의 시선에 진운룡이 피식 웃었다.
“이것 말인가? 화산파 장문인이라는군.”
“…….”
“흥.”
진운룡은 사내, 백월청을 내동댕이쳤다. 처참하게 땅바닥을 구른 뒤에도 희미하게 이어지던 백월청의 호흡이 끊어졌다.
그렇게 또 한 명이 죽었다.
그의 모습 역시 음영에겐 미래의 자신처럼 보였다.
그 공포를 아는지 모르는지, 진운룡은 태연한 표정으로 음영에게 말하고 있었다.
“일대 놈들은 당분간 네가 지휘해라. 일단은 천중산 쪽으로 지원을 가는 것이 좋겠지.”
“…….”
“본좌는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
음영은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저 몸을 부르르 떨고만 있을 뿐.
혀를 찬 진운룡이 닦달했다.
“알겠나!”
“아, 알겠습니다.”
음영은 겨우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꾹 닫았다. 조금만 더 열어 놓았다간 오열이라도 하고 말 것 같았기에.
‘이자는 악귀다! 사신이다! 우리는 언제가 모두 죽고 말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진운룡은 처음부터 그랬다. 중원의 틀을 깨겠다느니, 경계를 부수겠다느니 미사여구를 늘어놓았지만, 결국은 내키는 대로 사람을 죽이겠다는 의미가 아니던가.
결국 정파인이 됐든 사파인이 됐든,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진운룡이란 이름의 절대적인 죽음.
그를 향한 충성은 죽음을 잠시 유예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차피 다들 독왕군의 전례를 따르게 될 테니 말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음영은 자신의 삶이 너무나 초라해졌다. 이건 마치 개나 돼지보다 못한 삶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배반이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 그렇다면 죽음을 재촉할 뿐인데?’
음영의 갈등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운룡은 명령을 마치고서 몸을 돌린 뒤였다.
“명령을 들었으면 한시바삐 움직이도록 해라. 멍청히 서 있지만 말고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진운룡이 걸음을 뗐다. 그는 축지법이란 말이 연상될 법한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아마 진운룡은 음영의 갈등을 간파했으리라. 그 정도로 영악하고 초월적인 인간이니까.
그리고 그것에 어떤 거리낌도 느끼지 못했으리라.
그에겐 음영 따위의 고민은 의미조차 없을 것이기에.
“나는…….”
음영은 시선을 내렸다. 이제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버린 백월청의 모습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음영은 백월청의 시신을 묻을 땅을 파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뒤로도 멈추지 않았다.
* * *
한편.
상처투성이의 노인이 귀암산을 찾은 것은 비슷한 시각이었다.
노인은 일말의 지체 없이 천마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지기들을 보자마자 소리쳤다.
“천마를 만나러 왔다! 길을 비켜라.”
문지기들이 그리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새 천마의 입지가 아직은 불안한 상태였기에, 하루에도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거는 멍청이들이 꽤나 많았다.
“험한 꼴 보기 전에 꺼지시오, 노인장.”
“귀찮게 굴면 목을 날리겠소.”
그들의 협박에 진천백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은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진천백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문지기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다가왔다.
“이런 빌어먹을 늙은이가……!”
“엇?”
두 문지기가 허공을 날아 내동댕이쳐졌다. 진천백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로 걸어가 철문을 후려쳤다.
쿠웅!
철문이 굉음을 내며 밀려났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진천백에게로 천마궁의 금위군이 모여들었다.
“멈춰라! 더 들어오면 베겠다!”
진천백이 낮게 혀를 찼다.
“요즘 아해들은 물러 터졌군. 예전이었다면 떠들 시간에 일단 베고 보았을 게다.”
“무슨 소리를……!”
진천백이 가볍게 내공을 격발시켰다.
콰릉!
벽력이 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고막을 찢겨 나가는 느낌에 금위군들이 귀를 붙들고 쓰러졌다. 내공이 얕은 몇 명은 귀에서 피를 흘리며 혼절했다.
내공을 격발하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
금위군들은 눈앞의 노인이 보통 인물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못해도 마교십존급.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실력자. 그들이 상대할 계제가 아니다.
금위군 대장이 당황하여 물었다.
“노, 노인장은 대체 누구요?”
“알 필요 없다. 천마에게 안내나 하라.”
금위군 대장이 어찌해야 할지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간만에 재미있는 일이 터졌군.”
귀도신마였다.
그의 두 눈이 환희와 살기로 넘실거렸다.
애병 귀령도를 뽑아 든 그가 미소를 띤 채 걸어오고 있었다.
진천백은 빠르게 귀도신마를 위아래로 훑었다.
‘제법이군. 작금의 마교도 그리 허술하지만은 않다는 겐가.’
강하다. 무공만 놓고 보자면 제갈각이나 모용중강보다도 한 수 위였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내비치는 투기가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진심으로 싸움을 좋아하는 자가 아니라면 저런 투기를 내뿜을 수 없으리라.
평소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한판 붙었겠지만, 지금의 진천백은 바빴다.
“천마에게 안내 좀 해줄 수 있겠나?”
“이 몸을 이긴다면 해드리리다.”
“급한 일이네. 싸움 상대라면 차후에 해줄 테니 일단 안내부터 부탁하이.”
“미안하지만 힘들겠소.”
진천백은 피식 웃었다.
“이래도 말인가?”
스스스스.
진천백에게서 연기처럼 기운이 흘러나온 순간, 호승심 가득하던 귀도신마의 표정이 급변했다.
“이건……!”
분명했다.
마교의 명운을 지배할 수 있는 자에게만 허락된 천하 유일의 무공. 귀도신마를 비롯한 마교의 수뇌들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세상 유일의 마공.
천마신공이었다.
“어떻게 노인장이 그걸……?”
귀도신마는 그답지 않게 경악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인이 뿜어내는 천마신공의 기운은 전대 천마 진검운이나 현 천마인 진백란의 그것보다도 정갈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이것이 진짜배기라는 양.
진천백은 기운을 거두고서 나직이 물었다.
“어떤가. 이제는 좀 천마에게 안내해 줄 생각이 들었는가?”
“…….”
스르릉.
귀령도를 도갑에 집어넣은 귀도신마가 예를 취했다.
“누구신지 모르겠으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대선배님께 멍청한 후배가 뒤늦게나마 인사를 드립니다.”
지켜보던 금위군들이 입을 쩍 벌렸다. 천하의 미친개 귀도신마가 저렇게 예를 차리는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던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진천백이 대답했다.
“후배의 사과를 받아들이겠네. 어쨌든 천마에게 안내 좀 해주게. 급한 일일세.”
“알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