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 진홍빛 일출
진홍빛 일출이 사위를 비췄다.
붉은 빛살을 따라 새벽 어스름이 사라져 갔다. 묵묵히 앉아 있던 팔척장신의 거한이 몸을 일으켜 주위를 돌아봤다.
“시간 됐다.”
거한을 중심으로 기척들이 나타났다. 이윽고 어스름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눈빛들.
딱히 몸을 숨기고 있었던 건 아니다.
기척을 죽이고 존재감을 지우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는 것일 뿐. 애초에 그런 습관 덕에 지금껏 살아남아 온 이들이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많을, 앞날이 창창한 백 명 남짓한 청년들. 마교와의 숫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역전의 무사들.
용검대원들.
그들의 꼴은 허름하고 초췌했다. 하기야 저들이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을 본다는 게 더 어려운 일이다.
이미 이곳 사천성에 들어선 뒤로 십여 회의 전투를 치렀다.
특이한 것? 물론 많았다. 검, 도끼, 활…… 수많은 무기를 쓰는 무인들을 만나온 그들이었지만 이번 적은 너무나 특이했다.
마치 오래된 기담에서나 등장할 법한 괴물 놈들.
사천성은 이역(異域)의 괴물과 괴인들로 가득했다. 십오 척 장신에 황소의 머리를 지닌 괴인이라든가, 아가리에서 화염과 뇌전을 쏘아 대는 도마뱀 따위라든가.
그래도 그들은 승리하여 살아남았다. 그것이 용검대고 거한과 그의 수하들이었다.
“…….”
그리고 거한은 그들을 이끈 채 한 번 더 사지로 몸을 던져야 한다.
‘가련한 녀석들. 너무 잘났다는 점이 너희의 발목을 항상 붙잡는구나.’
그들을 바라보는 거한의 눈에 회한과 연민이 스쳤다. 그저 찰나의 시간뿐이었지만.
“그래, 배는 어떻게 잘들 채웠냐?”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사나운 미소들. 피로함이 그나마 덜한 몇몇 수하들이 대꾸를 해준다.
“이런 거 먹고 건사나 하겠습니까?”
“이거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습니다.”
그건 그랬다. 밥이라 해 봐야 챙겨 온 건육이 전부였으니.
최후의 만찬이라기엔 너무 초라했다.
아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하소연할 곳도 달리 없고.
‘빌어먹을 놈들.’
거한의 눈에 분노가 스쳤다.
그와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린 이들.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게 될 이들. 그러고도 죽는 날까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이들.
천무맹주 남궁운과 군사 제갈현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쳤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은 금세 지워진다. 어차피 그들이야 꼭두각시 아닌가.
진정한 실세는 따로 있었다.
‘빌어먹을 장로 놈들!’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팔부혈선.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다면 머리통을 으스러트려 버리고 싶었다. 이따위 명령은 집어치우고만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
진마동으로 들어가 싸워야만 한다.
정의감의 발로는 아니었다.
애초에 거한이나 그의 수하들이나 의협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단지 이것 외엔 길이 없기 때문에, 그 때문에 그들은 사지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란아.’
마음속으로 딸의 이름을 부른 후, 거한은 옆에 놓인 애병(愛兵) 폭뢰검을 들어 올렸다.
“감상에라도 젖어 있는 거요? 어울리지 않게 멍하니 앉아만 있게.”
용검대주 화륜패는 나직이 웃었다. 다분히 시비조인 목소리.
귀여운 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딱딱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갓 약관을 넘긴 애송이. 그리고 최연소로 조장이 된 천재.
용검대 제삼조장, 정천.
“이놈아, 내가 그런 거랑 어울리는 인간 같으냐?”
“안 어울리니까 묻는 거잖수.”
“잠깐 좀 생각할 게 있었다.”
“란아라도 생각한 모양이우.”
이럴 때만은 묘하게 날카롭다. 평소엔 남이 무얼 하든 상관도 않는 녀석이.
“흠흠. 그런 것 아니다.”
“아닌 것 같지 않은데요.”
“시끄럽다! 준비는 다 한 거냐?”
정천이 어울리지 않게 피식 웃었다.
“준비랄 게 뭐 있겠수. 무기랑 몸뚱이만 챙기면 그만인데. 어쨌든 대주님 빼고 다들 준비됐습니다.”
“그렇군.”
몸을 일으킨 화륜패는 먼 곳을 응시했다.
정확히는 그들의 목적지가 될 장소를.
깎아 만든 듯한 인공적인 형태의 절벽. 그 아래로 무저갱 같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동굴이 하나.
진마동(眞魔洞)이라 명명된 곳이었다.
지금까지 사천성에서 발견된 모든 악수(惡獸)들의 본거지. 이미 모든 조사는 비영대에 의해 끝난 직후다. 사실 확인을 위해 미리 파견됐던 선발대가 전멸한 것도 이 근처.
그들의 원혼이 소리치는 듯싶다.
원수를 갚아달라고.
“들어가자.”
짤막히 말한 화륜패가 걸음을 옮겼다. 거창한 연설이나 감정을 들끓게 하는 포효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 것 없이도 용검대는 항상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 줬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터였다.
그리고 화륜패는 그들의 맨 앞에서 검을 휘두를 것이다.
“…….”
정천은 화륜패의 뒷모습을 말없이 응시했다. 생각해 보면 그의 수염 가득한 얼굴보다도 저 탄탄한 등을 더 자주 보았던 것 같았다.
항시 누구보다도 앞에 나서서 싸워 온 대주.
이번 전투를 마치고 나면 술이나 한 잔 대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 끝나고 나면 말이지.”
“예?”
비교적 새내기인 애송이 하나가 깜짝 놀라며 말을 받았다. 고작 혼잣말이었을 뿐인데도 놀라는 걸 보니 헛웃음이 났다.
그때 느껴지는 인기척.
정천은 곧바로 화륜패에게 소리쳤다.
“대주, 불청객이 옵니다.”
막 진마동의 어둠 속으로 들어서려던 화륜패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면 이 작전에 투입되는 건 비단 용검대 하나만이 아니었다.
그걸 떠올리니 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나타난 이들은 용검대와 비슷한 숫자의 타격대. 하나같이 기분 나쁜 흑색 도포를 펄럭이고 있었다.
용검대 입장에선 절로 살기가 치미는 모습이었다. 하기야 그건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일 테지만.
화륜패는 걸음을 돌려 흑의인들에게로 다가갔다.
“늦으셨군. 겁먹고 달아난 줄 알고 우리끼리 들어가려던 참이었지.”
“약속 시간에 맞춰 왔을 뿐이오.”
이마에 큼직한 흉터를 지닌 중년인이 대꾸했다.
화륜패는 그의 이름과 별호를 잘 알았다. 아니, 잘 안다 뿐이겠는가.
지금껏 몇 번이고 그와 병장기를 부딪쳐 보았다.
어찌 보면 평생의 반려자만큼이나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강룡단주……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가 펼치는 무공과 초식만큼은 눈 감고도 따라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어차피 무인에게 있어 중요한 건 그것뿐이다.
천마신교 최강의 타격대 강룡단.
용검대와는 이미 몇 차례나 혈전을 펼쳤다.
이곳에 모인 숫자의 배 이상이 서로 간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 때문이리라. 독 안개처럼 사위를 감싸고 있는 지금의 살기는.
사실 화륜패나 강룡단주도 그 살기에 도취되고 싶은 마음은 한가득이었다.
당장이라도 무기를 뽑아 들어 상대의 두개골을 쪼개고만 싶었다.
그게 무의미하기에 하지 않을 뿐.
이미 웃대가리들이 협정이랍시고 손을 맞잡은 뒤다. 어제까지의 전쟁은 오랜 옛날 일인 양 치워졌고, 이제 그들은 협력해야 하는 입장이다.
우습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그들은 무뢰배가 아니라 한 단체의 고위직이었다. 정치적인 관점을 무시하고 행동하는 일 따위는 있을 수가 없었다.
집에서 기다릴 가족들 때문에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성격상 사탕발림 따위가 나올 리는 없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화륜패였다.
“그쪽에서 풍겨대는 살기가 꽤나 거슬리는구려.”
“이쪽이 할 말을 선수 치시는군.”
“애들 교육 좀 똑바로 하셔야겠소.”
“역시 이쪽이 할 말이오.”
두 중년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진 않았다.
척.
화륜패 옆으로 인형 하나가 걸어 나왔다. 이미 큼직한 장검을 뽑아 든 뒤였다.
정천이었다.
“아침나절이라 몸도 찌뿌드드한데 준비운동이나 간단히 하고 가는 건 어떻수? 그쪽에서도 날랜 놈 하나 내세우시지. 아니면 댁이 덤비시든가.”
대놓고 시비를 거는 모양새. 강룡단주의 얼굴이 당장 일그러졌다.
“네놈은 뭐냐.”
“용검대 제삼조장 정천.”
“조장 따위가 감히 대주들끼리의 대화에 끼어든다고? 천무맹도 볼 장 다 봤군.”
“그 볼 장 다 본 놈들에게 숱하게 털렸던 건 누군지 모르겠군. 그리고 어차피 같이 칼밥 먹는 처지에 지위 따지는 것도 우습지 않소?”
강룡단주의 말문이 막혔다. 황당한 놈이지만 하는 말은 제법 그럴싸했다.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건방졌다. 이미 강룡단원들 몇몇은 당장 덤벼들 태세였다.
“…….”
강룡단주는 화륜패에게 눈짓했다. 이 미친 자식 좀 어떻게 해 보라고.
“…….”
화륜패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놈은 나도 못 말리는 독종이라고.
“…….”
짧은 계산이 강룡단주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졌다. 이 망할 놈을 도륙 내 버릴까. 아니면 관대하게 그냥 넘어가야 할까.
저울추로 비유한다면 평형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강룡단주가 화륜패보다는 확실히 이성적인 사람이란 점이었다.
“……관두지. 네놈 같은 애송이와 장난질을 할 생각은 없으니.”
“시시하군. 꼬리를 내리는 거요?”
“싸울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지.”
“흥.”
정천이 검을 회수했다. 한숨을 쉰 화륜패가 그를 슬쩍 밀쳐 내고는 강룡단주에게 말했다.
“더 떠들 것도 없으니 들어가도록 합시다.”
“음.”
용검대주와 강룡단주, 두 대표가 동시에 진마동의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그것을 시작으로 두 타격대의 대원들이 진마동으로 속속 들어갔다.
“너, 어둠 속에서 뒤를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한 강룡단원의 말이었다. 정천을 향한 으름장.
정천은 피식 웃고서 맞받아쳤다.
“덤빌 거라면 정면으로 와라. 뒤에서 오는 놈들에겐 인정사정 봐주지 않거든.”
“정말 주둥이 하나만큼은 죽어서도 나불거릴 것 같군.”
설레설레 고개를 젓고서 걸음을 옮기는 강룡단원. 다른 단원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정천은 조금 뒤 입가의 비웃음을 지웠다. 강룡단에 대한 호승심이나 적의보다도, 눈앞의 어둠에 대한 불안이 더욱 컸다.
‘지금까지의 임무와는 다르다.’
그것은 이미 사천성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느꼈다. 단순히 싸워야 할 상대가 특이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뭔가가 더 있는 것 같은데…….’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각. 이른바 육감이란 것인데, 이는 황룡성의 뒷골목 시절부터 정천의 목숨을 몇 번이고 구해 주었었다.
그저 이번에도 그러기만을 바랄 뿐.
‘이번 임무는 좀 일찍 끝났으면 좋겠는데.’
돌아가 봐야 반겨 줄 이 얼마 없는 황룡성.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고향이었다.
이번에 돌아가게 되면 최소한 두어 달쯤은 빈둥거릴 생각이었다. 그간 모아 둔 성과급도 제법 되니 주루를 오가며 편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그때까진 정천으로서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곳으로 돌아가기까지 십 년이란 시간이 걸릴 줄은.
* * *
창도의 전경은 이제 지척이었다.
정천은 강룡검의 기운을 한층 배가시켰다. 그런 후에 백여 장 거리에 있는 천막을 향하여 그대로 휘둘렀다.
쐐액!
방출된 검기는 단박에 천막을 후려쳤다. 중심이 되는 기둥이 박살난 천막은 안쪽을 향하여 폭삭 무너졌다.
비명 섞인 욕설과 함께 기어 나오는 대막인들.
그들을 향하여 이차 검격이 쏟아졌다.
콰과과광!
커다란 흙먼지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 사이로 박살난 살점이나 핏물이 튀는 것도 같았으나 정천은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시선은 창도의 서문에 고정된 상황.
당장 문을 열지 않으면 철문째로 박살을 내 버릴 생각이었다.
덜컹!
정천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은 아니겠지만, 창도의 서문이 낡은 쇳소리와 함께 열렸다. 그 사이로 월골이 환도를 쥔 채 걸어 나왔다.
‘놈인가.’
정천을 확인한 월골의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그가 두려워할 만도 하군.’
중원과 중원 외의 수많은 무인들과 병장기를 나누어 온 그였다. 그럼에도 정천과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마치 피부 위에 철벽을 덧씌운 양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홀로 사위를 압도하는군.’
천마신교는 강하다. 일련의 기마대가 나타났을 때, 마침내 마교와 붙게 되리란 생각에 월골의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놈은 그보다도 강하다.
월골은 약간의 환희를 느꼈다.
서장을 압박하라는 진운룡의 명령을 어긴 것이 정답이었다.
그는 이제 와서야 자신과 자신의 혈족에게 걸맞은 강자와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월골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만나게 되었…….”
쐐애액!
사막의 바람을 찢으며 파공음이 쇄도해 왔다. 그 정체가 정천이 날린 흑색 검기임은 조금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월골의 환도가 반사적으로 휘둘러졌다.
카앙!
검강을 두른 환도가 검기와 충돌하여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뻐근한 느낌이 손목을 뚫고 어깻죽지까지 전달되었다.
“…….”
등허리를 적시는 식은땀.
하마터면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한 채 목이 달아날 뻔했다.
“성질이 급하군, 중년인.”
“너 같은 놈들이 하는 말은 대개 쓸데없거든.”
정천의 차가운 대꾸에 월골이 피식 웃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분노하고 있나? 내가 네 여인들을 데리고 있어서? 중원의 용을 숭배하고 있어서?”
“중원의 용?”
“그렇다. 중원과 중원 바깥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영웅 말이다.”
“네가 누굴 말하는 건지는 대충 알 것 같군. 하지만 그놈더러 영웅이라니, 제정신은 아니군.”
여타 천막에서 달려 나온 대막 무인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는 정천을 포위했다.
그것을 본 월골이 황급히 왼손을 들어 올렸다.
성급히 공격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정천은 포위망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어쨌든 넌 착각을 하고 있다. 내가 서두르는 건 분노했기 때문이 아니야.”
“그렇다면 무엇 때문인가?”
“그다지 거창한 이유는 없어. 그냥 빨리 끝내고 쉬고 싶을 뿐이다.”
“지닌 능력에 비해 포부는 형편없군. 너는 역시 중원의 용의 그릇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군.”
“좋을 대로 떠들어라. 그따위 그릇은 이쪽에서 사양이니.”
탓!
말을 마친 정천이 곧바로 땅을 박찼다. 월골은 설렘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에 아쉬웠고, 싸울 수 있기에 설레었다.
“가만히들 있어라. 놈의 목은 내가 취하겠다!”
크게 일갈한 월골이 두 손으로 환도를 쥐었다.
힘 싸움에선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밀려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우우웅!
환도의 형태를 따라 초승달 형태로 늘어난 검강이 정천의 미간을 겨누었다. 반면 일직선 형태인 강룡검의 검강은 월골의 심장을 노렸다.
두 사람의 검로가 충돌 직전에 변했다. 어느 쪽이 됐든 단순한 호신강기로 넘어갈 수준의 검강은 아니었다.
카앙!
결과적으로 제법 정직한 형태의 공격이 되었다. 두 사람의 검강이 그대로 충돌했다.
정천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지금껏 진운룡이나 유극태 정도를 제외하면 강룡검과 일합이나마 맞섰던 고수가 전무했다. 그런 것을 대막인인 월골이 해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경악할 일은 아니었다. 무림은 넓고, 세상은 그 무림보다도 넓은 법이었으니.
순식간에 제이격, 삼격이 이어졌다. 두 사람의 검이 큼직한 궤적 수십 개를 허공에 그었다.
차차차차창!
모래바람이 드세게 몰아쳤다. 검강이 충돌하며 일으키는 풍압 때문이었다.
창도의 서문 앞이 삽시간에 먼지에 휩싸였다. 홀린 듯 지켜보던 대막인들이 기침을 하며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연신 번뜩이는 검강.
얼핏 보면 호각이었으나 어느 한 쪽의 얼굴빛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낭패로군.’
월골은 속으로 생각했다.
크게 밀리진 않았다. 아직 놈이 여력을 많이 남겨 두고 있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거야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무기.
그의 환도는 절세의 보도(寶刀)였다. 물론 명검칠존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한 자루만으로도 황소 수십 마리의 가치를 갖는 명품이었다.
그런 환도의 날이 눈에 띄게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강기의 수준이 분명하다는 뜻.
겉보기엔 호각이나 월골 쪽이 조금씩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대막의 싸움은 비단 내공 대결만이 아니다. 월골은 환도를 크게 휘두른 후 뒤로 몸을 날려 거리를 벌렸다.
그사이 그의 두 손은 환도를 회수하고서 활과 화살을 집어 든 뒤였다. 실로 놀라운 속도.
“조준!”
그의 외침과 함께 대막의 무사들 모두가 활을 들어 올렸다. 백미련을 무너트렸던 수법.
‘일대일의 대결은 네게 승리를 양보하마.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은 아니다!’
비무나 무공 대결에서의 승패 따위는 바보들에게나 의미가 있는 법.
진정한 승패는 죽음의 사선에만 존재하는 법이고, 그 경계에 있어 비겁함이나 정정당당 따위는 발을 붙일 수 없었다.
“발사!”
타라라락!
연달아 시위를 떠나는 화살들.
월골은 한 호흡을 쉰 다음 시위를 당겼다. 시간 차를 두어 정천의 허점을 꿰뚫겠다는 생각.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무너져 본 적이 없는 전술이었다. 그 실상이야 무척 단순하지만, 본디 단순한 것이야말로 효과적인 법이었다.
문제는 그게 본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겠지만.
“……!”
이번엔 월골의 눈동자가 확대됐다.
정천은 등을 돌린 채 내달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달아나고 있었다.
‘어째서?’
비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입장도 아니었고.
그저 의아함만이 떠올랐다. 단순히 사격을 피하기 위해? 아니다. 놈 정도의 강자가 그런 얄팍한 생각을 할 리가 없잖은가.
해답은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수하들의 고통에 찬 비명 소리와 함께.
“쳐라! 모조리 쓸어버려라!”
“저 얼간이들의 등에 칼맛 한번 제대로 보여 주자!”
용검대와 강룡단. 창도 외곽을 지키고만 있던 그들이 어느새 다가와 무사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하필 대막의 무사들은 활을 꺼내 든 상태. 반면 저들은 검과 창으로 무장한 채 말 위에 올라 있었다. 게다가 완전한 접근전…….
대막 무사들이 손 한번 제대로 못 쓰고 무너지는 것도 당연했다.
‘대체 어느새……?’
이윽고 월골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사실 생각할 것도 없이 간단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나름대로 호각세의 대결을 펼쳤고 대막 무사들의 관심 역시 거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모래먼지까지 한껏 일으키며 싸웠으니, 저들이 접근할 여유야 많았을 것이다.
‘나의 패착이다. 내가 수하들을 부릴 수 있다면 놈 역시 응당 그러한 것을!’
중원인, 특히나 정파인이란 것들은 일대일 대결이란 것에 거의 광신적인 집착을 가진다. 마치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협의 발로라는 양.
월골은 중원인에 대해 제법 많이 아는 편이었다. 때문에 도리어 편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놈은 여느 중원인과는 다르다. 그것을 생각했어야 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어이없는 실수다.
그러나 거대한 패배는 대부분 어이없는 실수에서 오는 법이었다. 거대한 철옹성을 무너트리는 것은 백만의 대군도 아니요, 절세의 장수도 아닌 자그마한 균열이라 했던가.
“아니! 아직은 아니다!”
월골이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포효했다.
“나는 초원의 왕이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월골은 활을 집어 던지고 환도를 뽑아 들었다. 그의 눈이 무시무시한 투기로 물들었다.
싸움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