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二章 선택의 시간
‘일이 귀찮게 꼬였군.’
진운룡은 혀를 차며 생각했다.
모용중강의 속내쯤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별다른 지략을 쓰지 않은 것은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전 따위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자신감. 단번에 전의를 상실시켜 달아나게 만들겠다는 자신감.
하지만 백월청의 분투와 모용중강의 기지가 상황을 바꿨다. 예기치 못한 두 가지 변수가 기어코 난전을 이끌어 냈다.
이제 정파군과 사파군은 한데 뒤엉켰다.
‘그냥 전부 쓸어버릴까?’
잠깐 고민하던 진운룡이 고개를 저었다.
좋지 않은 생각이었다.
수하들을 아끼기 때문은 아니었다.
주인에게 공격받은 사파군마저 적으로 돌아설까 걱정되기 때문도 아니었다.
굳이 이유를 따진다면 정천 때문이었다. 놈이 아직 이 땅 위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놈 때문이다. 이 모든 게 놈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진운룡이 사파를 차지하게 된 계기부터가 정천 때문이었다.
홀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존재.
조건부로나마 자신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존재.
그런 존재가 있기에 만약을 대비한 팻감을 만들어 둘 수밖에 없었다.
만약의 경우 자신을 보호해야 할 수하들, 전력이 되어야 할 수하들을 말이다.
그런 수하들을 자꾸 잃을 순 없었다.
그렇기에 한데 쓸어버릴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들은 사파 내에서도 최정예가 아니던가.
독왕군이야 본디 갈월의 것이었던 데다 진운룡에 대한 불신도 상당히 컸다. 그랬기에 본보기도 보일 겸하여 쓸어버린 것이었다.
이들은 달랐다.
비록 힘에 굴복한 것이긴 해도 진운룡에게 충성하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마저 잔인하게 죽인다면 어느 누구도 진운룡에게 충성하지 않을 터였다.
“하는 수 없지.”
진운룡은 혀를 차고서 기초적인 초식만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정도만으로도 일격에 몇 명씩 사람이 죽어 나갔다. 애초부터 딛고 있는 경지가 타인들과는 아득히 다른 까닭이었다.
퍼퍼퍼퍽!
서걱!
베고 부수고 쪼개고 깨트렸다. 진운룡의 호흡 한 번에 반경 십 장 내의 모든 적들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이까짓 것들. 몇 명이 몰려오든 무의미한 시간벌이에 불과하다.”
진운룡은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백월청과 모용중강과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피하십시오!”
“여긴 저희에게 맡기십시오!”
화산파의 무인들이 진운룡을 막아섰다. 두 사람에게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함이었다.
“어리석군.”
진운룡이 중얼거렸다. 그의 두 눈이 순간적으로 빛을 토했다.
파팟!
“컥!”
“허어억…….”
그 순간 두 명의 무인이 코와 귀와 입으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것을 본 다른 무인들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심멸.
요란할 것도 없었다. 그저 가볍게 심장의 피를 역류시켰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건장한 청년들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체내의 피를 증발시킬 수도 있다. 각막 안쪽의 수정체를 깨부술 수도 있다. 척수신경을 비틀어 시체나 다름없게 만들 수도 있다.
진운룡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저 그의 살의만 있다면 무엇이든.
“크윽!”
“호신강기를 끌어올려! 놈의 사술에 대항해야 한다!”
무인들의 외침에 진운룡은 피식 웃었다.
심멸은 사술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들이 갈고닦는 무공의 궁극적인 형태일 뿐.
태초의 인간은 맨손으로 세상에 맞서 왔다. 그것만으로 부족함을 알기에 무기를 사용했고, 보다 효과적으로 싸우는 법을 터득했다.
이른바 무(武)의 탄생이었다.
인간의 기술은 나날이 발전했다.
그리고 차츰 보다 적은 노력으로 보다 큰 힘을 이끌어 내는 법을 배워 나갔다.
그 한 갈래가 무기의 발전이요, 다른 한 갈래는 무공의 발전이었다.
그러한 뿌리를 지닌 것이 무공이다. 그렇다면 그 무공의 궁극이란 당연히 보다 간단히 적을 죽이는 것에 있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고.
두꺼운 갑주를 가르기 위해 검기가 탄생했다. 갑주를 대신하기 위해 호신강기가 탄생했다. 그것을 다시 부수기 위해 검강이 탄생했다.
싸움과 싸움이 이어지며 만들어 낸 발전.
그 끝에 있는 것이 심멸이었다.
인간의 의지를 검과 일치시키는 신검합일. 그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의지를 살의와 일치시키는 것이 심멸.
지금의 진운룡은 말 그대로 무의 화신이었다. 무림사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될 궁극의 무인이었다.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하는 건 그저 궁여지책에 지나지 않았다.
“무의미하다.”
피핏!
진운룡의 두 눈이 번뜩였다. 세 명의 무인이 추가로 쓰러졌다. 역시나 칠공에서 피를 쏟으며.
“으, 으아아아!”
마지막 남은 무인이 애처롭기까지 한 자세로 돌진해 왔다. 그로서는 달리 택할 수 있는 길이 없으리라.
진운룡은 이번에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의지로써 무인의 뇌를 끓여 버릴 뿐.
“커어어어억.”
기괴한 비명과 함께 무인이 널브러졌다.
“크으……!”
백월청이 눈물을 삼켰다. 이런 건 싸움이 아니었다. 이런 것을 생사투라 부를 수는 없었다.
—감내해야 하오.
—……!
—감내해야만 하오, 백 문주. 아무리 포기하고 싶더라도, 달아나고 싶더라도 지금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소. 놈의 기력이 소모되기를, 저 괴물의 기세가 조금이나마 약해지기를!
모용중강의 전음이었다.
결국 병력을 제물 삼아 진운룡의 체력을 깎아 내자는 것.
그러려면 미친 듯이 발악해야 했다. 온몸을 불사른다는 각오로.
백월청은 직계인 일대제자들에게 전음을 날렸다.
—모두들, 합화유하진(合華流火陣)을 펼친다.
일대제자부터 사대제자까지의 총 오십 명이 하나가 되는 검진.
일대제자가 총 열두 명이니 이론적으로는 육백 명이 동원되어 열두 개의 검진을 펼칠 수 있다.
물론 이론과 실전은 전혀 다르다. 이미 진을 이루는 인물 중 몇몇은 불귀의 객이 되었고.
비어 버린 자리는 할 수 없이 임기응변으로 때워야만 했다.
—저희가 먼저 가겠습니다!
삼제자인 윤광우의 전음이었다. 그와 그 휘하의 문도들은 이미 진운룡을 포위한 진을 구성하고 있었다.
“자신 있다면 어디 한번 뚫어 보아라!”
“네놈도 이것으로 끝이다!”
오십의 검수가 합화유하진을 이루었다. 오십이 곧 하나이며 하나가 곧 오십인 필살의 살진이었다.
쿠구구구.
오십 명이 하나가 되어 내뿜는 검압이 진운룡을 짓눌렀다.
그의 호신강기조차 뚫지 못할 수준이긴 했으나 약간 답답함을 느낄 정도는 되었다.
어지간한 초식으로는 쉽게 깨트릴 수 없으리라.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놈들이 바라는 바일 테고.
“본좌의 기력을 깎아 놓겠다는 것인가.”
얕은 수작.
그러나 효과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궁극의 무인이라 해서 한계가 없다는 건 아니니까.
“재미있군.”
멸마환영무의 광채가 한층 강렬해졌다. 진운룡의 두 손에서 뿜어져 나온 강기가 채찍처럼 휘어졌다.
무극혈존편(無極血尊鞭).
심상찮은 강기에 합화유하진을 총괄하는 윤광우가 눈을 부릅떴다.
“충격에 대비하라!”
콰아아앙!
무지막지한 폭음과 함께 강렬한 빛이 사방을 에웠다. 종남산을 들썩이게 할 돌풍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 * *
진천백은 소호에서의 전투가 끝나자마자 곧장 북서쪽으로 향했다.
공력을 십이성 발휘한 경공을 펼쳐 단기간 내에 하남성에 도착한 그는 천중산의 전투가 교착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제갈각에게 맡겨 두면 되겠군.’
시간은 정파의 편이었다. 군량이 바닥난 사파는 곧 회군하게 될 것이다.
역시 어디까지나 문제는 진운룡이었다.
‘생각해 보면 너답지 않은 일이었다.’
홀로 일국에 준하는 힘을 지닌 그였다. 애초에 휘하에 군단을 거느린단 것조차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가 천무맹을 세웠던 것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문’을 만들기 위함일 뿐이었다. 천무맹이 있는 쪽이 편했기에 만든 것이지, 그 무력을 빌리고자 함은 결코 아니었다.
애초에 진운룡은 천무맹 무인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수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진천백이 천마신교를 세웠다.
마교는 대외적으로는 천무맹을, 실질적으로는 진운룡을 제거할 것을 천명했다.
전쟁이 벌어졌다.
진운룡의 곁엔 후에 팔부혈선이라 불리게 되는 동지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진천백 역시 마찬가지였다.
양쪽의 전력은 비등했다.
그렇다면 남는 전력의 수준이 승패를 결정하는 법.
진천백은 그것을 노리고서 자신의 지식을 열심히 설파했다.
훗날 천마신공이라 불리는 무공은 약간씩이지만 거의 모든 마교의 무공에 영향을 주었다.
진운룡으로서도 달리 도리가 없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할 수 없이 휘하의 무인들을 키워야 했다.
그렇게 그와 다른 혈선들도 정파 무림에 자신들의 지식을 전수했다.
무림은 그들이 설파한 지식을 뿌리 삼아 발전해 나갔다.
여전히 싸움이 횡행하고, 여전히 사람들이 죽어갔지만, 무공은 끝없이 발전해 갔다.
‘어찌 보면 우리야말로 죄인일 테지. 그들에게 지식이란 독사과를 전달한 죄인.’
인간은 전쟁을 통해 힘과 지혜를 발전시킨다. 그렇게 스스로를 변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천백은 자신의 행적에 죄책감을 느꼈다.
무공의 발달이란 것 자체가 과연 올바른 일이었을까 하는 죄책감을. 그저 가진 자의 오만이 아니었을까 하는 죄책감을.
그랬기에 죽음을 가장하여 은거에 나섰다.
그의 빈자리는 그의 후손들이 훌륭하게 메워 주었다. 훗날 천마라 불리게 되는 이들이.
그리고 지금.
천마도 사라지고 천무맹도 사라진 지금, 진운룡은 여전히 휘하의 군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진천백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는 진운룡은 물론, 당시 요태희를 비롯한 동지들마저 속였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지.’
또 한 명. 진운룡에 필적하는 강자가 한 명 더 나타났다는 것.
그리고 그는 아마도 천무맹의 궤멸과 황룡성의 붕괴와 관련이 있으리라.
물론 심증일 뿐 물증은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대략적인 예상을 하는 것은 가능했다.
‘황룡성의 자리에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는 회오리는 거대한 공간 왜곡이 만들어 낸 균열의 흔적이다. 그렇다는 건 극한까지 다다른 최강의 절초가 펼쳐졌다는 의미일 테지.’
인간을 넘어선 일격.
아마도 마룡의 숨결쯤은 되어야 그 힘에 비견될 수 있으리라.
그리고 황룡성이 붕괴되던 그날, 비교적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간 것은 천마 진검운이 이끌고 온 마교의 군단이었다.
‘그 강자는 마인들과 함께 갔다!’
그렇다면 지금쯤 귀암산에 있을 터. 없다고 해도 최소한 그곳에서 위치를 알아낼 순 있을 것이다.
때문에 진천백은 선택해야 했다.
‘지금 종남산으로 가서 진운룡과 결착을 낼 것인가. 아니면 마교로 가서 또 한 명의 강자를 만날 것인가.’
어려운 선택이었다.
또한 괴로운 선택이기도 했다.
모용중강이 뛰어난 무인이자 지략가란 것은 잘 알았다.
그가 이끄는 병력과 화산, 종남의 무인들도 굳건하다는 것 역시 잘 알았다.
그러나 진운룡은 격이 달랐다.
그것은 수백 년 전의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에도 이미 진천백을 앞서고 있던 그였으니.
그리고 그 격차는 지금 더더욱 벌어져 있으리라.
은거하며 거의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았던 진천백과 달리, 진검운은 팔부혈선으로서 천무맹을 막후 조종하며 많은 실리를 취했다.
사해팔방에서 진상되는 갖가지 영약과 내단을 습득했을 것이며, 자신의 무공을 더욱 갈고닦아 발전시키기도 했을 것이다.
그것이 무려 삼백여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로 인해 발생한 차이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하지만 이쪽엔 삼만의 대군이 있다. 그들과 합세한다면…….’
진천백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선택으로 인해 무림의 미래가 바뀔 수 있었다. 세상의 내일이 달라질 수 있었다. 그 사실의 무게는 엄청났다.
‘지금 싸워야 하나, 후일을 도모해야 하나.’
전자를 택하면 승산은 아슬아슬하다. 자칫하면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후자를 택하면 승산은 상승한다. 그러나 삼만의 죽음이 종남산을 붉게 물들일 것이다.
한참 고민하던 진천백은 결국 서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를 용서하게.’
마음속으로 모용중강과 무인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진천백이었다.
그의 발걸음 뒤로 희미한 핏자국이 조금씩 남았다. 소호에서 얻은 상처가 경공을 펼치는 동안 다시 터진 까닭이었다.
그는 아픔마저 잊은 채 귀암산으로 달려갔다.
* * *
창도에 풍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도시의 동쪽으로 일련의 기마대가 나타났다. 하나같이 살기등등하게 무장한 일백의 무인들이었다.
일백 기마대는 창도로 들어서지 않았다. 그저 성벽의 파수꾼들이 똑똑히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 대기한 채 기다릴 따름이었다.
마치 무언의 시위라도 하듯.
꼭 누군가를 나오라고 불러내는 것만 같았다.
그들에 대한 소식은 삽시간에 도시를 휩쓸었다. 원체 침략과 공습을 자주 당했던 도시이기에 불청객들의 등장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의심은 대막의 부족민들에게로 향했다.
그 소문은 월골의 귀에도 들어갔다.
“동쪽. 천마신교인가.”
그들이 노리는 게 누구일지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월골은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중원엔 모조리 겁쟁이들뿐이라지만 천마신교만큼은 예외였다.
애초에 그들의 성정 자체를 중원인과 동일시할 수 없기도 했고.
초원의 전사에 비등한 자들을 고르라면 월골은 주저 없이 그들의 이름을 말할 것이다.
‘그런 그들이 내 목을 원하는군.’
요태희와 백미련 때문일 터.
아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한 것보다 너무 빨랐다.
‘그놈들. 우릴 뒤쫓아 온 놈들이 도움을 청했구나.’
월골은 내심 쓴맛을 느꼈다.
물론 패배하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와 그의 부족민들은 드넓은 초원의 전사들이었다. 무패의 강자들이었다.
그저 정천 한 명에게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만이 아쉬울 뿐.
‘그들이 조금만 더 늦게 왔더라도 기꺼워하며 싸웠을 것이다.’
싸워야 할까, 좀 더 기다려야 할까?
한참 고민하던 월골은 선택했다.
“이참에 그들에게도 초원의 검을 가르쳐 줘야겠지.”
월골이 자리에서 일어나 갑주를 걸쳤다.
“천마신교와 싸운다!”
* * *
“마침내 왔구먼.”
장유추가 사납게 중얼거렸다.
그는 창도 너머의 동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용검대와 강룡단의 모습이 잘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느낄 수는 있었다. 그들이 토해 내는 기염을. 그들이 뿜고 있는 전의를.
이제 미행의 나날도 이것으로 끝이었다. 장유추는 광천뇌도를 짚고서 일어섰다.
“노부는 이제 저들과 합류하겠다. 너는 귀암산으로 먼저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구나.”
화연란의 대답은 없었다.
“음?”
그녀를 돌아본 장유추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화연란은 동쪽의 창도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 반대편인 서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보이세요?”
화연란이 물었다. 장유추가 얼떨떨하여 반문했다.
“보이다니, 뭐가?”
“저기요.”
화연란이 지평선을 가리켰다.
“누군가가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어요.”
“이곳으로?”
장유추의 시선이 그녀의 손끝을 따랐다. 그는 두 눈을 찡그린 채 지평선을 응시했다. 태양이 가라앉으며 붉은 광채를 토해내고 있는 곳으로.
검은 이물이 일렁이고 있었다.
사람의 신형이었다. 그것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거리를 가늠했을 때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반 각이 채 지나기 전에 장유추의 눈이 신형을 완벽히 포착했다.
“도착했구먼.”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화연란의 얼굴도 그제야 비로소 밝아졌다.
신형 역시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곧장 달려왔다.
장유추가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늦었군. 조금만 더 늦었어도 자네 없이 잔치를 시작할 뻔했네.”
“장 선배가 여기 있다는 건, 놈들이 창도에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다네. 궁후와 구절검후가 붙잡힌 상황이네.”
고개를 끄덕인 정천이 창도를 응시했다.
화연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천마께서 용검대와 강룡단을 보내신 모양이에요. 그들도 지금 도시의 동쪽에 집결해 있어요.”
창도의 서문 밖으로는 수십 개의 천막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도시로 들어가지 않은 대다수의 대막인들이 설치해 놓은 것이었다.
“란아, 이 녀석 좀 잠시만 맡아 줘.”
“네? 아, 네…….”
정천은 떡고물처럼 어깨에 달라붙어 있는 흑응을 떼어서 내밀었다.
화연란은 조금 놀란 눈으로 흑응을 보았다. 정천이 그렇게나 거세게 달려왔는데도 녀석은 꾸벅꾸벅 졸고만 있었다.
“혹여나 실수로라도 날리지 마. 날리는 순간 나랍멸에게로 날아가게 되어 있으니.”
“알겠어요.”
화연란도 장유추도 이 멍청해 보이는 매가 팔룡천법왕과의 연락 수단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흑응을 품에 살며시 안았다.
정천이 걸음을 떼며 말했다.
“이곳에서 기다려.”
“그래. 그게 좋겠다.”
장유추가 정천을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정천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선배도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뭐라고?”
“지금 저와 함께 가면 말려들 수도 있습니다.”
살기가 뚝뚝 묻어 나오는 목소리.
마른침을 삼킨 장유추가 물러났다.
“알겠네.”
“감사합니다.”
나직이 말한 정천이 걸음을 옮겼다.
그와 동시에 도시 반대편에 있는 관식과 모용훈에게 전음을 날렸다.
—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도시로 진입하지 마라. 휘말리게 될 수도 있다.
—대형? 대형이십니까?
—정천 형님?
—그래, 나다. 거듭 말하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도록.
전음을 마친 정천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의 두 손에서 흑색 강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츠츠츠츠.
강룡검이 양손아귀에 구현됐다. 정천의 두 눈이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밤의 어스름을 등 뒤로 한 채 그가 도시를 향해 내달렸다.
〖강룡검제 1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