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十一章 우리와 같은 인간 (131/146)

第十一章 우리와 같은 인간

인간에 의해 기초가 세워졌으되 빚어낸 것은 사막의 모래바람이니.

창도를 가리키는 오래된 말이었다.

모든 것이 중원의 풍습과는 다른 곳. 작게는 건물의 서까래에서부터 크게는 성벽을 쌓아 놓은 양식까지, 모든 것이 중원과는 달랐다.

모래로 이루어진 게 아닌가 싶은 성벽 아래로 월골과 그의 부족민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백미련과 요태희는 포박된 채 행렬의 중간쯤에 끼어 있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군요.”

“이곳은 무법도시나 마찬가지니까요.”

약탈한 노예를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 도시였다. 붙들린 채 걸어가는 그녀들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으.”

백미련이 살짝 비틀거리자 그녀들을 끌고 가던 대막인이 줄을 거세게 당겼다.

“괜찮아요?”

“본후…… 아니, 나는 괜찮아요.”

사실 그녀들은 괜찮다고 보기 힘들었다. 한 명의 전투로 인해, 다른 한 명은 고문으로 인해 중상을 입었다.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까닭에 상처가 곪아 속병을 만들고 있었다.

버티고 있는 것은 그녀들이 본디 고수이기 때문. 기초적인 내력이 있기에 걷기나마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마 지금은 병사 한 명분의 전력조차 낼 수 없을 터였다.

월골은 군량과 물자만 보급한 후 부족민들을 성 밖으로 보냈다. 본디 유목민들인 까닭에 막사를 치는 쪽이 편했던 까닭이다.

성내에 머무르는 것은 월골 본인을 비롯하여 소수의 정예들뿐.

그들도 쉬고자 함이 아니라 할 일이 있기에 성에 머무르는 것이었다.

월골은 여장을 풀자마자 자신의 방으로 요태희와 백미련을 불러들였다.

방에 들어선 그녀들은 흠칫했다. 월골의 발아래엔 임윤이 곤죽이 된 채 널브러져 있었다.

“이자를 알고 있겠지?”

요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월골은 건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자는 지난밤 홀로 달아나려 했다. 내가 이자의 가족들을 풀어주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말이다.”

“그냥 놓아줄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가족들을 만날 수 있도록. 어차피 그를 통해 얻을 것은 다 얻었으니 자비를 베풀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런 논리라면 이자를 죽이는 게 곧 자비를 베푸는 게 된다.”

“그게 무슨…….”

요태희가 말끝을 흐렸다. 월골의 말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깨달았던 것이다.

백미련이 더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가족들을 이미 죽였군. 처음부터 인질들을 놓아줄 생각은 없었던 거야.”

“그렇다.”

월골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백미련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월골이 가책을 느낄 이유는 없었고, 백미련에게 그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죄 없는 이들을 해쳐 온 것은 그녀라고 해서 다를 게 없었으니까.

이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강호의 이치이다. 강자는 약자의 생사여탈권마저 쥐고 있다는 이치.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얼마나 흐르든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업보를 가지고 사는구나.’

어쩌면 무인이란 작자들은 모두 업보를 짊어진 채 살아가는 게 숙명일지도 모른다.

백미련은 고개를 젓고서 화제를 돌렸다.

“우리에겐 무슨 용건이 있지?”

“꼭 용건이 있어야만 너희를 부를 수 있는 건가? 나는 초원의 왕이며 무엇이든 내 뜻대로 할 수 있다.”

“왕치고는 꽤 초라한데. 따르는 사람도 적고 상태도 지저분하군.”

가시 돋힌 말에도 월골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초원의 아들들은 돼지처럼 살이 쪄서 보석과 패물을 온몸에 둘러야 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너희들 게으른 중원인들과는 달리 말이지.”

“…….”

“너희를 붙잡던 날 도망친 늙은이와 계집이 있었지. 보아하니 우리의 뒤를 밟는 눈치더군.”

역시 장유추와 화연란의 추적을 알고 있는 모양.

두 여인의 얼굴에 긴장감이 스쳤다.

월골은 그녀들의 표정을 굳이 읽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들의 반응 따위야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그들 중에 ‘용이 경계하는 자’도 속해 있나?”

“……그게 무슨 말이지?”

“중원의 용. 중원이란 틀을 깨고자 하는 이가 유일하게 경계하는 존재. 나는 그 존재가 서장에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더불어 너희 둘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거라고도.”

백미련과 요태희의 시선이 서로를 훑었다. 그 행동만으로도 월골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었다.

“내 추측이 맞았나 보군.”

두 여인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미 월골은 대답을 들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표정이었지만.

“그럼 이 의문만 해소하면 되겠군. 우리 뒤를 밟는 이들 중에 그가 포함되어 있나?”

“…….”

“손가락이 모두 잘린 다음에야 대답하게 되면 손해일 텐데?”

“우릴 협박해서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게다가 네가 우릴 죽이리란 걸 뻔히 아는데 네게 협력할 것 같고?”

백미련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묻어났다. 몸만 성했던들, 결박만 조금 느슨했던들 월골에게 덤벼들었을 것이다.

“아니.”

월골이 딱딱한 투로 말했다.

“하지만 최소한 고통 없이 죽여 줄 수는 있지. 임윤의 가족들도 그렇게 했다.”

어쨌든 죽이긴 하겠다는 말. 너무 말투가 담담하여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백미련이 엿이나 먹으라고 말하려 할 때였다.

“그는 아직 서장에 있어요. 어쩌면 지금쯤 그곳을 떠났을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곳 근방엔 없다고 봐도 좋아요.”

요태희의 대답이었다.

백미련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두려움 때문에 대답한 게 아님을 잘 알았기에.

그녀가 대답했다는 건 그래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군.”

월골이 걸터앉은 걸상의 손잡이를 톡톡 건드렸다. 그것만으로도 목재 걸상의 손잡이에 홈이 파였다.

“최소한 너희를 더 살려 둘 필요성은 있겠군. 그가 올 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할 테니까.”

“…….”

“어떻게 해야 그자를 이리로 불러올 수 있나? 처음엔 단순히 포달랍궁으로 전서구를 보낼까 했지만, 그쪽에서 무시해 버리거나 이미 네 말대로 궁을 떠났을 가능성도 있다.”

“누구 좋으라고 가르쳐 줄 것 같아?”

“나는 너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니다. 명령하고 있는 거지.”

“웃기는군. 본후는 그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아.”

“차라리 죽고 싶다고 빌게 된 직후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해볼 테면…….”

요태희가 백미련을 제지하며 나섰다.

“그만. 그를 이곳 창도로 불러들일 방법을 알려 드리겠어요.”

“궁후!”

“이제 그만 됐어요, 백 소저. 자존심 싸움이나 벌이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나요?”

“하지만…….”

“게다가 저자에게 알려주는 것도 좋겠지요. 진운룡이 경계하는 자가 대체 어떤 남자인지.”

월골의 눈빛이 순간 빛났다. 호승심 때문이기도 했고 깨달음 때문이기도 했다.

“그자, 중원의 용의 이름이 진운룡인가?”

“……무림을 붕괴시키려 하는 미치광이에 대해 묻는 거라면, 그래.”

“그랬군. 그러나 너희들 중원인의 사고관은 참으로 편협하군.”

“그게 무슨 뜻이지?”

“중원, 무림, 강호. 너희는 언제나 틀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 안에 갇히려 한다. 북방을 가로지르는 만릿길의 장성부터가 그렇지. 우리를 두려워하여 너희들 스스로 집 안으로 숨어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꼴이 아니냔 말이다.”

“…….”

“그자, 진운룡은 중원의 틀을 깨려 한다. 무림을 열어젖히고 강호를 넓히려 한다. 그것이야말로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는 웅대한 뜻이다.”

“당신이야말로 잘못 알고 있군요.”

요태희의 목소리가 조금 격앙됐다.

“그는 그렇게 원대한 목표를 품은 사람도 아니고 위대한 인물은 더더욱 아닙니다.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희생시킨 비정한 인간일 뿐.”

“말도 안 되는 모략을 하는군. 근래 십여 년 동안 중원의 소식에 귀를 기울여 왔다. 그러나 네가 말하는 일 따위가 벌어졌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천무맹이 붕괴됐다는 얘기는 들어봤을 텐데요? 황룡성이 회오리 안에 갇혀 버렸다는 얘기도요.”

“그랬지.”

“그런 짓을 벌인 게 누구라고 생각하죠?”

월골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처음 천무맹의 붕괴 소식을 들었을 땐 천신의 진노라도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한 명의 인간이 벌인 짓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이 그자의 짓이었다니…….”

“진운룡은 그런 존재입니다. 사람이란 말조차 과분한 악귀라고요.”

“아니, 그럼에도 그는 위대한 자다.”

요태희는 낭패감을 느꼈다. 이건 숫제 꽉 막힌 벽과 얘기하는 것만 같았다.

“너희는 너희 동포의 죽음에 대해서만 분개하는군. 그러나 우린 이미 긴 시간에 걸쳐 초원과 사막에 피를 뿌려 왔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는 그 사실 자체에 분노하진 않았다.”

“…….”

“적을 죽이고 원하는 것을 이룬다. 생사의 경로를 걷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 아니던가? 그 규모가 조금 크다고 해서 괴물로 취급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그건…….”

요태희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궤변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 역시 손에 피를 묻힌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제 말하라. 중원의 용이 경계하는 자를 불러들일 방법을.”

입술을 잘근 깨문 요태희가 대답했다.

“그건……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저 기다리라고?”

“그의 성격대로라면 이미 포달랍궁을 나섰을 테니까요. 보름 가까이 우리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 테니, 서장에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겠지요.”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그가 이곳으로 온다는 확증은 없으니까.”

“올 겁니다. 이곳이 마교로 향하는 길목이기에.”

월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다시 말해 그가 마교로 향할 것이란 뜻인가?”

“이 근방에서 최고의 정보력과 인재 동원력을 지닌 집단이 천마신교니까요. 정천의 성격대로라면 가장 합리적인 길을 택하겠죠.”

“놈의 이름이 정천인 모양이군.”

“그래. 널 죽일 자의 이름이지.”

백미련의 살기 어린 말에도 월골은 웃었다.

“기대하고 있다.”

“죽기 직전이 되어서도 그렇게 여유로울 수 있을까?”

“바보 같은 질문이군. 나는 이미 열 살 무렵에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성인이 될 무렵부터는 죽음을 항시 옆에 달고 살아왔지.”

“대단한 영웅 나셨군그래.”

“그만. 네 악의뿐인 비아냥을 더 들어줄 아량은 없다.”

월골이 손바닥을 쳤다. 방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사들이 그녀들을 끌어냈다.

“일단은 이레 동안 기다려 주지.”

끌려 나가는 요태희에게 월골이 말했다.

“그 후에도 놈이 오지 않으면 너희는 죽는다. 놈이 최대한 빨리 달려오길 바라야 할 것이다.”

* * *

흑색 무복을 입은 이천의 병력이 붕괴된 산비탈을 옆으로 돌아 올라오고 있었다. 숲의 상당 부분이 소실된 까닭에 위쪽의 정파인들은 그 광경을 똑똑히 목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맨 앞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으며 걷고 있는 사내.

진운룡이 온다.

모용중강이 재빨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생각해 내라! 놈과 저 병력을 상대할 방법을!’

이제 와 돌아보면 이곳에 전 병력을 집중시킨 게 실수였다.

인외의 존재인 진운룡에게 있어 일반적인 군략은 통용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산을 불사르거나 깎아내릴 수가 있다. 고지대의 유리함은 그 앞에서 무의미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고지에 고립된 형국이 되었다.

‘차라리 평야였다면 포위전으로 몰고 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미 지나 버린 일. 후회하고 땅을 친들 의미가 없었다.

애써 정신을 가다듬은 모용중강이 명령했다.

“지금부터 부대를 셋으로 나누겠소. 백 문주, 나와 함께 놈들을 좌우 양면으로 치고 들어갑시다. 어떻게든 혼전 양상으로 이끌어 진운룡이 활개 치지 못하게 하는 게 급선무요.”

멀쩡히 달려들어선 극한에 다다른 진운룡의 초식에 유린당할 뿐이다.

최대한 빨리 사파 놈들과 뒤엉켜야 했다.

“놈이 자기 부하들을 아끼는 성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그래도 최소한 사파 놈들과 동귀어진을 할 수는 있겠지.”

말을 뱉으면서도 모용중강은 헛웃음이 나왔다.

‘몇 배의 전력을 지닌 쪽임에도 자살 특공을 사용해야 하다니.’

이야기를 듣는 백월청도 어이없는 기분이리라. 사실 진운룡의 무위를 보지만 않았어도 이런 전술 따위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인간이 아니다.

백월청은 진운룡의 계획에 일절 토를 달지 않았다.

“알겠소. 화산의 문도들은 내가 지휘하리다.”

“나는 연합군을 지휘하겠소. 그리고…….”

모용중강이 뒤쪽을 향해 소리쳤다.

“종남의 아들들아! 너희는 우리가 적을 붙들고 있는 동안 전장을 우회하여 아래로 내려가라! 내려가서 대기 중인 사파 놈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선사하라!”

“복수를!”

“사파의 심장에 복수의 검을!”

광기 어린 무인들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장문인과 동도들이 눈앞에서 산 채로 매몰되었다.

그 엄청난 충격은 지금 비로소 복수심과 증오로 돌변했다.

“가자!”

“와아아아!”

모용중강의 외침에 삼만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봉군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 무작정 돌격. 전력으로 끝장을 보겠다는 계산이었다.

‘시간을 끌수록 우리에게 불리하다.’

죽지 않은 이상은 얼마든 싸울 수 있는 게 무인이란 작자들이다.

물론 팔다리가 모조리 잘려 나가거나 하는 극단적인 경우라면 또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죽은 거나 다름없으니 별 의미가 없다.

육체가 살아 있는 한, 숨이 붙어 있는 한, 내력이 남아 있는 한 무인은 싸울 수 있다.

그렇기에 전투가 길어질수록 불리한 쪽은 소수의 강자보다는 다수의 약자들이었다.

죽은 이가 살아 돌아올 순 없다.

그러나 체력이 바닥난 사람이, 기력을 소진한 사람이 회복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물며 진운룡 같은 존재라면.

‘이 전투로 놈을 죽이지 못하면 다음번엔 이만, 혹은 그 이하의 전력으로 놈과 싸워야 한다.’

그다음이라면 일만 이하, 그다음이라면 수천, 그다음이라면 수백.

진운룡을 상대할 병력은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와 함께 진운룡을 죽일 가능성은 한없이 떨어지고야 마는 것이다.

결국 전력이 최대치인 지금이야말로 최초이자 최후의 기회라 할 수 있었다.

진운룡은 웃었다.

‘본좌는 너의 생각을 안다, 모용중강. 네가 알 정도의 사실은 본좌 역시 알고 있다.’

모용중강의 기세가 공기를 타고 전해져 왔다. 반드시 여기서 결착을 내고야 말겠다는 필살의 기세.

지극히 합리적인 계산의 결과물일 터였다.

그렇기에 진운룡은 이미 시작부터 이기고 들어가는 거나 다름없었다.

모용중강이 가장 두려워하는 방식으로도 싸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방법이란 치고 빠지는 식의 싸움. 진운룡 홀로 적을 공격, 일부를 죽이고 빠지는 식으로만 싸우면 필승이었다.

물론 그것을 알기에 진운룡은 그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본좌는 어떤 방법으로 싸우든 승리하기에 본좌인 것이다.”

진운룡의 몸에서 순백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모든 이의 의식마저 앗아갈 듯한, 무림을 멸하려는 악귀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아득하고 압도적인 강기.

고금제일의 무공.

멸마환영무의 기운이었다.

진운룡의 몸이 순간적으로 엄청난 돌진을 했다. 삽시간에 허공을 가로질러 정파군의 코앞까지 질주하는 그 모습은 문자 그대로 축지법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이 본좌의 무공이다.”

나직이 중얼거린 진운룡이 일권을 뻗었다.

멸마금강권(滅魔金剛拳)!

순간 진운룡의 전방의 반경 삼십여 장이 새하얗게 타올랐다.

이윽고 무지막지한 압력이 반경 내의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짓눌러 버렸다.

압살!

사정권에 든 무인들 모두가 뼈와 살점으로 해체되어 버렸다. 마치 거대한 바위에 찍혀 압축된 양.

콰아아앙!

무시무시한 굉음이 뒤를 이었다. 벼락이 명멸한 후 터져 나오는 천둥처럼.

일격만으로 백 단위의 무인들이 비명횡사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무인들의 전의가 거꾸러질 수도 있는 장면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궁극의 무.

남의 일이었다면, 옛 무용담에서 발췌된 장면이었다면 가슴이 설레었으리라.

그러나 지금의 그들은 당하는 쪽이었다. 그들의 가슴은 공포와 충격으로 쿵쾅거리고 있었다.

“이놈! 진운룡!”

그 와중에 고함을 내뱉는 이가 있었다. 고함이라기보다도 차라리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모용중강이 북풍유련(北風劉聯)의 초식으로 진운룡에게 달려들었다.

섬전 같은 검강이 전좌우방의 서른여섯 갈래로 나뉘어 진운룡을 노리고 들었다.

“흥.”

진운룡이 전각을 밟았다.

쿠웅!

순간 그 주변의 땅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땅바닥이었던 바위와 흙무더기가 북풍유련의 검로를 방해했다.

“큭!”

당황한 모용중강이었으나 이제 와서 검을 거둘 순 없었다. 조금만 주저하더라도 곧장 진운룡의 반격이 날아들 것이다.

그는 돌진하는 몸에 한층 기세를 더했다.

“하아아압!”

본디 모용세가의 검법을 이루는 것은 쾌검과 연격의 두 기둥.

모용린도 그러했고 그녀에게 검을 가르친 모용중강도 그러했다.

그런 만큼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보다는 속도와 부드러움으로 적을 제압하는 데에 익숙했다. 지금의 모용중강은 한마디로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성공적이었다.

파파파팍!

모용중강은 기어코 수천 관은 됨직한 흙무더기와 바위를 모조리 꿰뚫었다.

그 너머엔 여전히 진운룡이 있었다.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지은 채.

“훌륭했다. 그러나 무의미하군.”

콰앙!

모용중강의 허벅지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제멋대로 터진 화산처럼,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작스레 피가 터졌다.

‘심…… 멸!’

모용중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호신강기마저 뚫고서 타격을 입힐 줄이야.

이를 잘근 악문 모용중강이 기합성을 토했다.

“크아아앗!”

그는 북풍유련의 식을 중도에 노도만경(怒濤萬鏡)의 식으로 변환했다.

변화무쌍하기가 중원제일인 모용세가의 검이기에 가능했다.

차르륵!

몸을 수차례 회전시킨 모용중강이 마침내 진운룡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그의 검강이 진운룡을 찢어발기려 몰아쳤다.

제대로만 먹힌다면 뼈와 살점이 모조리 채 썰리듯 잘려 나갈 터.

“이번에도 훌륭했다.”

진운룡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허나 역시 약하구나.”

콰앙!

모용중강의 몸이 달려들었던 자세 그대로 튕겨져 날아갔다. 검강이 둘러져 있던 그의 검은 산산이 깨어져 버렸다.

“커헉!”

바닥과 충돌한 모용중강이 검붉은 피를 토했다.

너무나 허무한 결과였다.

“이놈—!”

백월청이 진운룡의 사각에서 달려들었다. 애초에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그에게 사각이 존재할 리는 만무했지만.

백월청은 진운룡의 갈빗대를 가르려 했다. 결을 따라 갈라 버리면 내장을 쏟고 쓰러질 터였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턱!

그의 검은 진운룡이 가볍게 뻗은 왼팔에 허무하게 붙들리고 말았다.

“……!”

깜짝 놀란 백월청이 강기를 끌어올렸지만 진운룡의 손바닥만 조금 그을렸을 따름이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쨍강!

손아귀를 그러쥔 것만으로 백월청의 검이 분질러져 버렸다.

그 순간 백월청은 검에서 손을 떼고는 허리춤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쓸 수밖에 없는가.’

느긋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백월청은 급히 검을 뽑아 들었다.

명검십존 중 하나이자 화산의 비보이기도 한 명검.

염화용아(炎火龍牙)가 뽑혀져 나오며 빛을 토했다.

“타핫!”

백월청은 천류무한검(天流無限劍)의 절초를 펼쳐 짓쳐 들어갔다.

무림제일의 명검에 십이성 공력을 모조리 쏟아부은, 그가 펼칠 수 있는 궁극의 오의였다.

파바바밧!

오색 빛깔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백월청의 몸도 천류무한검의 검강과 같은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검신합일(劍身合一)의 경지.

위기 상황에서 빚어난 극도의 집중력이, 절정의 검과 십이성 공력의 힘을 빌려 백월청의 한계를 초월하게 했다.

그 순간, 백월청은 아주 잠깐이지만 진운룡의 경지를 넘보고 있었다.

“……!”

진운룡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백월청이 두려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이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리게 했다.

진운룡에게 죽음의 위기를 선사했던 그것을.

지금의 백월청에게선 정천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네놈!”

진운룡도 멸마환영무를 십성까지 끌어올렸다. 정천을 제외하면 그 누구에게도 선보이지 않은 경지였다.

콰아앙!

눈을 멀게 할 것 같은 빛이 사위를 감쌌다. 무시무시한 기의 파동이 돌풍을 일으켰다.

그 충돌의 중심에서 백월청이 튕겨져 나왔다. 상의가 갈가리 찢어지고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지만 모용중강만큼의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

진운룡도 두 걸음을 물러나 있었다.

그의 주먹이 찢겨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인가?’

백월청은 허탈한 기분이었다.

잠시나마 본래의 한계까지 넘어 일격을 먹였는데 그 결과가 고작 이것이라니.

그때 쓰러져 있던 모용중강이 소리쳤다.

“놈도 피를 흘린다!”

쿨럭거리며 피를 토하면서도 모용중강은 연신 소리쳤다.

“놈은 강하다! 괴물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인간이기도 하다. 나나 너희와 같은, 우리와 같은 인간! 놈도 피를 흘린다. 그러니 죽일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우리의 목숨을 불사른다면!”

“대단한 웅변이로군.”

진운룡이 비아냥거렸지만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때로는 바보 같은 웅변도 놀라운 설득력을 보이는 법이었으니.

그의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다.

“가자! 놈을 죽여 우리의 후손에게 미래를 선사하자!”

“와아아아!”

잠깐 동안 소실됐었던 정파군의 기세가 되살아났다. 백월청도 고통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놈들을 모조리 죽인다!”

마침내 정파군과 사파군이 한데 뒤엉켰다.

전투는 그 순간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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