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章 핏빛의 소호
장유추 일행이 포달랍궁을 떠난 지 열흘째.
처음에 비하여 그다지 근육이 붙지도 않은 나랍멸에게 정천이 선언했다.
“내 가르침은 이게 전부야. 수업은 끝났어.”
나랍멸은 약간의 아쉬움과 시원함을 동시에 느꼈다.
겉보기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육즙조차 삼켜 본 적 없는 몸은 앙상한 뼈대와 가죽만이 있을 뿐이었다. 체격이 변하기엔 열흘이란 기간은 너무나 짧았다.
그러나 나랍멸은 이제 주먹을 뻗을 때 눈을 감지 않았다. 일격마다 무게를 실을 줄 알게 되었다.
그는 진짜 무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건 겉보기 이상으로 큰 변화였다.
“이젠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일행을 쫓아가야겠지. 흔적이라도 찾기 위해서는.”
이미 며칠 전부터 장유추 일행의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동시에 약탈자들의 동향 역시 묘연해졌다.
수많은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는 없었다. 전투의 소식조차도 들려오지 않았다.
확실한 사실은 한 가지뿐.
장유추 일행도 약탈자들도 행방이 묘연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정천은 포달랍궁에 남아 나랍멸의 지도에만 집중했다.
그 사실에 나랍멸은 미안함을 느꼈다. 그래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말해 봐야 정천의 비웃음만 살 것이 분명했으니.
‘당신은 약속을 했고 훌륭히 지켰지요. 이제는 서장이 빚을 갚을 때입니다.’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린 나랍멸이 손짓을 했다. 비무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십이천승이 매 한 마리를 든 채로 다가왔다.
부리 끝부터 꽁지까지 새카만 빛깔의 흑응(黑鷹)이었다.
얼핏 봐선 까마귀 같아 보였지만 눈매나 부리 등은 매의 그것이었다.
“어려서부터 훈련시켜 놓은 아이입니다. 세상 어느 곳에 있든 간에 하늘로 날려 보내면 무조건 제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
“팔룡천법왕의 힘이 필요할 땐 언제든 이 아이를 날리십시오. 발목에 위치를 적은 서신을 묶으면 될 겁니다. 중원 어느 곳이 되었든 달려가겠습니다.”
“그러지.”
정천은 흑응을 받아들었다. 영리한 흑응은 이내 정천의 어깨로 올라탔다.
“아무래도 임윤은 대막의 무리와 결탁했던 모양입니다. 뒤늦긴 했지만 무승들이 여러 정황 증거들을 찾아냈습니다.”
“최악의 경우엔 내 일행이 함정에 빠졌을지도 모른다는 거군.”
“죄송합니다.”
“사과할 것 없어. 그럴 경우까지 상정하고서 서장을 돕기로 한 거니까. 그리고 그만큼의 대가를 받아 냈지. 팔룡천법왕의 약속을.”
나랍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 불민한 몸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뭐, 없는 것보단 낫겠지. 개똥도 약에 쓸 수는 있는 법이니까.”
나랍멸은 쓴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정천의 가시 돋힌 말투엔 친숙해지질 않았다.
그의 옆에서 나유타는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천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정천은 그 사실에 개의치 않았다.
“일단은 귀암산으로 돌아갈 생각이야. 어쨌든 배후가 대막이란 것은 알고 있으니, 수틀릴 경우엔 놈들의 땅으로 가 보면 되겠지.”
“북쪽, 호화호특까지 갈 생각이군요.”
“그래야 한다면.”
“동료들의 복수를 위해서입니까?”
“아니.”
정천은 짐을 싸든 채 몸을 돌렸다. 그는 포달랍궁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며 나직이 말했다.
“내 적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해서다.”
* * *
월골이 창도를 목표로 잡은 것은 개인적인 판단에 의해서였다.
진운룡의 서신은 그저 서장의 심장을 찌르라고만 말하고 있었다. 그 문장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표현되어 있지 않았다.
월골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신뢰로 해석했다.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신뢰한다는 의미로.
그리고 월골은 서장의 심장이 단순히 포달랍궁이나 팔룡천법왕을 가리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본디 법왕 나랍멸은 서장의 안위만을 지킨다. 그 외의 곳을 지키고 싶다손 쳐도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한계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다.’
이백 년의 생을 통틀어 반년밖에 누릴 수 없는 궁 바깥의 삶.
그런 제약을 지닌 팔룡천법왕의 존재는 중원인에게 있어 큰 위협이 아니었다.
결국 서장만 건드리지 않으면 될 일. 더군다나 서장 자체는 중원에 있어서도 그리 매력적인 땅이라 보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중원의 ‘용’이 염려한 것은?
‘서장의 힘을 중원으로 끌어들이고자 파견된 이들일 터.’
임윤을 통해 얻은 정보 안엔 마교의 사절단 얘기가 있었다.
소수의 사절단이 서장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이야기, 팔룡천법왕을 설득하려는 것 같다는 이야기.
월골은 거기에 주목했다.
그 순간 진운룡이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부순다!’
어쩌면 진운룡은 단순히 서장과 팔룡천법왕을 견제하기만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에 그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월골은 그 이상을 원했다.
중원의 용의 신용을 얻고 싶었다. 고금제일의 무인인 그의 오른팔이 되고 싶었다.
자신의 이름을 대막과 중원의 역사에 새기고 싶었다.
그 바람이 월골을 움직였다. 월골은 자신이 지닌 정보와 재량을 총동원, 마침내 용이 경계하는 자의 동료들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젠 그녀들을 미끼로 하여 놈을 끌어내려 하고 있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했다.
* * *
귀암산으로 급보가 날아든 것은 신생 용검대와 강룡단이 중원으로 출정하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급보의 내용은 천마를 비롯한 마인들의 마음을 단번에 뒤집어 놓았다.
“대막이…….”
“움직였단 말인가?”
임철형과 멸살독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실 더 믿기 어려운 내용은 그다음이었다.
“그 정체는 기병 일천으로 이루어진 정예 부대. 함정에 빠져 궁후 요태희와 구절검후 백미련이 포로로 붙잡혀 있다고?”
“뇌혈도 장유추가 그들을 추격 중. 그들의 목적지는 창도…….”
남궁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용린의 표정 역시 어둡기 그지없었다.
창도는 천마신교의 소유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대막의 무리가 그곳에 들어서는 것 자체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그 의도를 생각해 본다면 얘기가 달랐다.
일천의 정예 기병대는 단번에 귀암산을 찌르고 들어 올 수도 있었다.
이제 겨우 천마 세습의 혼란기를 벗어난 마교로선 좋을 것이 없었다.
게다가 붙잡힌 이들의 면면 역시 문제였다. 비록 마인들은 아니라지만 천마 진백란이 직접 임명한 사절단이었기 때문이다.
천마좌에 앉은 진백란이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대체 그렇게 될 동안 정천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거지?”
“모르겠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임철형이 대답했다.
서신은 화연란이 작성하여 보낸 것이었다.
다급하게 보낸 까닭에 가장 중요한 것들만 적어 보냈고, 포달랍궁에 있을 정천에 대한 이야기는 당연히 누락됐다.
“아마 정천은 모종의 이유로 함께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있었다면 두 여인이 붙잡힐 리는 없었겠지요.”
남궁운이 말했다.
사실 이는 남궁운만이 아니라 회의장의 모두가 생각하고 있던 점이었다.
이미 정천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반(反)진운룡 동맹의 중심이었다.
“그렇다면 당장 정천이 도우러 올 수 없는 상황이란 뜻이기도 하겠군.”
“역시 우리가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임철형과 멸살독마가 번갈아 가며 말했다.
백미련이나 요태희에게 호의가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순전히 그녀들이 천마의 사절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천마의 위명을 먹칠할 수도 있는 일. 이는 내부적으로 진백란을 반대하는 세력에게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되도록 빨리 그녀들을 구출해야 했다.
진백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역시 두 타격대를 보내야겠지?”
용검대와 강룡단.
현재로서 바랄 수 있는 최선책이었다.
현재의 천마신교는 안팎으로 상처투성이였다.
천마 진천백의 출정으로 인해 상당한 병력 손실을 겪었고, 그의 죽음으로 인해 벌어진 내전으로 인하여 또다시 상처가 곪았다.
물론 약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능히 회복할 저력을 지니고는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대규모의 병력을 움직이기 힘든 상황.
그런 만큼 당장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건 두 타격대뿐이었다. 그랬기에 진운룡을 견제하고자 중원으로 보내려던 것이었고.
진백란이 멸살독마를 돌아봤다.
“독마, 창도 쪽에도 보급고가 마련되어 있나요?”
“송구하오나 천마, 그곳까지는 미처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마교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서쪽이 아닌 동쪽이었다.
“그러면 철기병대를 운용할 수는 없겠군. 아니,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몰라요. 대막의 기병들은 말 위에서도 평지처럼 활을 쏜다고 하니.”
철기병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는 기동력이다. 그리고 대막의 궁기병은 그 기동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병종이었다.
맞서 싸운다면 쓸데없는 마갑이 없는 편이 좋았다.
“강룡단주와 용검대주를 불러오도록.”
곧이어 두 명의 사내가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한 명은 강룡단주로 임명된 무정검 관식, 다른 한 명은 용검대주로 임명된 모용훈이었다.
두 사람은 천마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표했다.
“천마를 뵙습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진백란이 말했다.
“그대들의 출정지가 조금 전 변경되었다.”
“그렇군요. 어디입니까?”
“창도. 대막의 기병들이 그대들의 적이 될 것이다.”
관식과 모용훈의 눈썹이 꿈틀했다. 두 사람으로선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었다.
“그거 재미있겠군요.”
관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애초에 그가 단주 자리에까지 오른 건 저 무식할 정도의 호승심 덕이었다.
반면 모용훈은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대주 자리에 오른 건 이 질릴 정도의 신중함 덕이었다.
“초원이 길러 낸 기병들이 상대라면 정정당당한 전술만으로는 힘들 수 있겠군요. 자칫하면 창도 자체를 전장으로 삼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진백란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본좌가 윤허하겠다. 창도를 불사르는 한이 있더라도 놈들을 쓸어버리도록. 그리고 반드시 포로들을 구출해야 할 것이다.”
“포로들이라 하셨습니까?”
모용훈의 물음에 남궁운이 대답했다.
“궁후와 구절검후가 그들에게 붙들렸다고 하네.”
“……놀랄 일이군요. 대막의 무사들은 예상한 것 이상의 실력자들인가 봅니다.”
모용훈의 말에 멸살독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겁쟁이 같은 말이나 할 텐가?”
대놓고 시비를 거는 한마디였다. 이에 모용훈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지요.”
“그 말은 본인이 겁쟁이임을 인정한다는 말이렷다?”
“아니, 독마께서 귀먹은 늙은이임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건방진 놈!”
“예의란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지요.”
노강호와 젊은 고수는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매서운 살바람이 몰아치는 듯했다.
애초에 그의 소속은 마교가 아닌 천신맹. 그리고 천신맹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인 천무맹이었다.
현재는 동맹 관계이긴 해도 바로 몇 달 전까지만도 서로를 죽이고자 안달이 났었던 마교와 천무맹이었다.
그것도 무려 수백 동안을 이어져 온 관계가 아니었던가?
그렇다 보니 이런 식의 신경전도 예사였다. 모용훈의 기질이 부드럽다 보니 그나마 이 정도에 그친다고 봐야 했다.
“사사로운 자존심 싸움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요, 독마?”
진백란의 한마디에 멸살독마가 움찔했다.
이제는 눈빛만으로도 마교의 노강호들을 제압할 수 있게 된 그녀였다.
“처, 천마, 그것이 말입니다…….”
“시끄러워요. 다시 본좌 앞에서 추태를 부렸다간 목을 치겠어요.”
“끄응…….”
멸살독마가 기어들어 가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상황을 진압한 진백란이 모용훈을 돌아봤다.
“본좌가 대신 사과하지.”
“아닙니다.”
모용훈도 약간 당황한 눈치였다. 확실히 진백란이 정파인을 대하는 방식은 아버지인 진천백이나 역대 천마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그녀는 시선을 조금 올렸다.
“그 두 사람은 본좌의 사절이었고, 그 이전에 본좌의 손님들이었다. 본좌는 작금의 사태를 그냥 두고 볼 생각이 전혀 없다. 그것이 진운룡이 부려 놓은 수작이라면 더더욱!”
“역시 대막은 진운룡에게 호응하여 거병한 걸까요?”
“정황만 본다면 그렇다고 해야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들이 이 시기에 움직일 이유가 없으니.”
임철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백란은 정황을 읽는 면에 있어서도 합격점이었다.
‘정천의 선택이 옳았던 것 같군.’
강자존의 법칙에 의하면 천마의 자리는 정천의 것이 되었어야 했다. 사실 가장 이상적인 형국은 천마가 된 정천이 전대 천마의 딸인 진백란과 결혼하는 것이기도 했고.
그러나 차선책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게 임철형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아직 두 사람이 맺어지게 될 가능성도 아주 없지만은 않았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두 사람의 후계자는 중원과 무림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기재가 될 터였다.
물론 지금으로선 그저 요원하기만 한 일이었다.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일단은 대막의 수작을 분쇄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진백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명령했다.
“두 타격대의 지위는 관 단주와 모용 대주에게 맡기겠어. 초원의 놈들에게 우리의 싸움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도록.”
“존명!”
“알겠습니다.”
* * *
“응?”
“저건 뭐야?”
소호에 다다른 사파 연맹 삼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남궁세가의 무인들도 아니고, 정파 무림 연합군도 아니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한 사람의 노인이었다.
“이제야 왔구먼.”
장죽을 짚은 노인이 낮게 중얼거렸다. 너무 작은 목소리인지라 들은 사람도 없었다.
노인은 소호를 동쪽으로 낀 채 북으로 쭉 이어지는 대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워낙 폭이 넓은지라 그냥 지나칠 수도 있긴 했지만, 노인의 양옆으로 목책을 깔아 놓아 그러지 못하게 해 놓았다.
척 봐도 진군을 막겠다는 심보.
“어이, 애송이. 저게 무슨 짓이라고 생각하느냐?”
“정파 놈들은 말라비틀어진 노친네 하나랑 나무 울타리 따위로 우릴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네 생각은 어떠냐?”
사파 무인들이 앞다투어 명신에게 질문했다.
이미 지략적으로는 완전히 그에게 의존하고 있는 무인들이었다.
‘매복일까?’
명신은 턱을 괴었다. 그럴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동쪽으론 소호가, 서쪽으론 민둥산이 하나 있을 뿐. 근방 어디에도 병력을 숨겨 놓을 만한 지형이 존재하지 않았다.
‘물속에라도 숨어 있지 않는 한은…….’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았다.
그러나 과연 물속에 매복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호흡만 낭비하게 되어 정작 전투를 제대로 치를 수 없으리라.
생각을 마친 명신이 말했다.
“제가 혼자 노인장을 만나 보겠습니다.”
“흠.”
“그러게나.”
사파 무인들은 별달리 걱정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노인이 강해 봐야 얼마나 강할 것이며, 명신 하나쯤 위험해져 봐야 문제는 없으리란 계산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명신을 신뢰만 할 뿐 아끼는 건 아니었으니까.
명신은 홀로 노인에게로 걸어갔다.
“노인장, 여기서 홀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노인의 흰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희를 기다리고 있었지.”
“정파의 무인이십니까?”
“그렇진 않다.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협력하고는 있다만.”
명신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노인장 홀로 저희 삼천 명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아니.”
고개를 저은 노인이 말했다.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순간 명신의 등허리로 소름이 돋았다. 노인에게선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것이 무엇인가 떠올려 본 명신이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명신의 경악에 노인이 눈을 빛냈다.
“너는 이 늙은이에 대해 무언가 아는 눈치로구나. 아마도 진운룡 그 친구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모양이지?”
“……!”
명신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어, 어떻게 그분을?”
“재미있는 인연이로군.”
“노인장은 그분과 어떤 관계입니까?”
“악연이지.”
노인의 눈빛이 잠시 아득해졌다.
“그 친구는 오래전에 한 가지 계획을 획책했지. 자신과 뜻이 맞는 동지들과 함께 중원인들의 목숨을 이용할 계획을 세웠었다.”
“…….”
“나와 다른 이들은 그에 반대했지. 그 결과 우리는 수많은 중원인을 죽음으로 이끈 전쟁을 벌여야 했어.”
“설마…….”
진운룡은 초대 천무맹주다. 물론 그 사실을 믿는 이는 없고, 그저 그가 그 이름을 사칭한다고만 생각하고들 있었지만.
그러나 명신은 진운룡이 정말 수백 년을 살아왔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분과 대적했었다는 이 노인은……!’
초대 천무맹주의 숙적이 누가 있을까?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다.
어느 누구라도 단 한 명만을 떠올릴 테니까.
“노인장께선…… 초대 천마이십니까?”
명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노인, 진천백은 여전히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과연 보통 꼬마는 아닌 모양이구나. 그리고 운이 좋은 꼬마이기도 하군.”
“예?”
“이 늙은이가 특별히 선심을 써서 너는 살려 주마.”
두근.
명신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진천백의 주변으로 무시무시한 살기가 꿈틀거렸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 아이들을 살려 둘 이유는 없군. 그 친구에게 경고하는 의미로라도 확실히 궤멸시켜야겠지.”
“노인장!”
“좀, 자 두어라.”
진천백이 바람처럼 명신을 스쳐 갔다. 그 순간 점혈당한 명신의 몸이 허수아비처럼 허물어졌다.
노인은 그대로 내달려 삼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뭣!”
“미친 늙은이가?!”
사파 무인들은 당황했다. 그들도 노인의 폭발적인 살기를 느꼈던 것이다.
푸화아악!
시커먼 강기가 노인의 양손에서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흑룡의 발톱과도 같은 모습.
천마신공의 흑마광조(黑魔狂爪)였다.
노인은 두 개의 발톱을 십자형으로 휘둘렀다. 그 순간 맨 앞쪽에 있던 무인들의 몸뚱이가 네 갈래로 쩌억 갈라졌다.
졸지에 이십여 명이 비명횡사했다. 무인들도 노인이 보통 무인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헉!”
“이런 개자식!”
병장기를 뽑아 든 무인들이 진천백에게 달려들었다.
그저 무작정 돌진하는 막무가내 공격. 처음 명신이 구상했던 유격대 운용 같은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진천백은 구태여 다른 초식을 펼치지도 않았다. 당황한 무인들은 오합지졸과 다를 게 없었다.
촤악! 촤아악!
흑마광조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여지없이 피와 살점이 튀어 올랐다. 소호의 언저리엔 사파 무인들의 비명만이 애처롭게 울렸다.
“크아아악!”
“커헉!”
전체 병력의 일 할이 소모되는 데엔 반 각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되고 나니 무인들의 머릿속엔 공포만이 자리 잡았다.
“이,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아!”
“히익!”
후방의 무인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전부가 포위하여 덤벼든다면 승산이 충분했지만, 공포에 눈이 먼 그들로선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이미 늦었다네.”
진천백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시점에 이미 삼대의 후방은 남궁세가 무인들에 의해 가로막힌 상태였다.
그들은 매복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 위치가 삼대의 전방이 아닌 후방이었을 뿐.
졸지에 삼대는 사방으로 포위당해 버렸다.
북쪽은 진천백이, 동쪽으론 소호가, 서쪽엔 바위산이 있고 남쪽엔 남궁세가 무인들이.
“어르신의 말씀대로 되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남궁천이 중얼거렸다.
며칠 전 진천백이 찾아왔을 때 어느 누구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미치광이 노인이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빙그레 웃은 진천백은 자신의 무위를 아주 약간 선보였다.
그를 미쳤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때마침 제갈각이 보낸 전서구도 날아들었다.
다시 말해 진천백은 전서구보다 빠르게 합비까지 왔다는 뜻.
그 이후 모든 일은 진천백의 계획대로 이루어졌다. 이번 매복책 역시 마찬가지.
남은 것은 천무맹과 황룡성, 그리고 아버지의 복수뿐이었다.
“모두 쓸어버린다! 사파의 떨거지들을 하나도 남겨 두지 말아라!”
“와아아!”
남궁천의 명령에 따라 남궁세가 무인들이 돌진해 들어갔다.
피에 굶주려 있는 그들에게 전의를 상실한 사파 무인들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오백의 무인들이 몇 배는 되는 사파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으으!”
“제기랄! 이래서는 싸우는 수밖에 없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파 무인들이 전열을 가다듬었다. 사방이 포위된 것이 배수진의 효과를 낸 것이다.
그러나 배수진도 전력이 비슷할 때나 의미가 있는 것. 진천백은 여전히 그들을 도륙하고 있었고 남궁세가 무인들도 정예 중의 정예였다.
소호의 수면이 붉은빛으로 물들어 갔다. 헤엄쳐서라도 도망치려던 무인들의 시체가 둥둥 떠올랐다.
끝없이 이어지는 비명만이 그 위를 장식했다.
“…….”
명신은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린 그의 앞으로는 끝도 없이 나열된 시체의 산만이 존재했다.
진천백이 그의 옆으로 걸어와 섰다. 그 움직임에 명신은 흠칫했다.
“말하지 않았더냐. 너는 살려 줄 것이라고.”
“…….”
부드럽게 웃은 진천백이 말을 이었다.
“가서 진운룡에게 전해라. 네 옛 친구가 결착을 내기 위해 찾아갈 것이라고. 오랜 사슬을 이 손으로 끊고 말 것이라고.”
“…….”
“가서 전해라.”
진천백이 명신의 목덜미 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조금 전까지도 힘이 쭉 빠져 있던 명신이 벌떡 일어났다.
남궁천이 말을 가져와 명신에게 고삐를 내밀었다. 말에 올라탄 명신이 냅다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제 명신과 저 말은 탈진할 때까지 달려가 진천백의 말을 전달할 것이다.
체력이 다해 죽더라도 말을 전한 다음에야 죽을 것이다.
진천백은 그 사실에 어떤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껏 숨어만 지냈던 것에 가책을 느꼈다.
‘우리의 손으로 시작된 일이다. 우리의 손으로 끝을 내야겠지.’
결자해지.
지금 진천백의 머릿속엔 그 생각밖에 없었다.
“어르신, 떠나실 생각입니까?”
남궁천의 물음에 진천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적은데 해야 할 일은 많군. 그러니 어서 바삐 걸음을 재촉해야겠지.”
“감사합니다. 그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늙은이는 자네들에게 감사를 들을 만한 사람이 아닐세.”
짤막히 말한 진천백이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십니까? 우선 상처부터 치료하셔야지요!”
전투는 일방적이긴 했지만 아무 피해도 없진 않았다. 애초에 전력 차이가 워낙 컸던 까닭이다.
남궁세가 무인들은 절반가량이 전사했다. 남궁천 역시 허벅지와 어깨에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가장 상태가 심각한 사람은 진천백이었다. 하나만으로도 즉사에 가까운 상처를 세 개 이상 달고 있었으니까.
수천의 무인이 죽어 가며 겨우 낸 상처들임을 생각해 본다면 그리 심한 것은 아니겠지만.
“미안하지만 이 늙은이는 따로 치료할 방법을 생각해 두었네.”
“합비로 가시면 저희 세가의 비전 내단을 지급해 드릴 수 있습니다.”
“고마운 얘기군. 하나 그보다 좋은 것을 알고 있어서 말이지.”
남궁천은 더 진천백을 설득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부디 목적한 바를 달성하시기를.”
예를 표하는 남궁천에게 진천백이 빙긋 웃었다.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럴 것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