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八章 반격의 시작 (128/146)

第八章 반격의 시작

안휘성으로 치고 들어간 사파 군단은 세 개의 군단 중에서도 가장 질이 안 좋았다.

무공 수위 면에서도 그랬고 충성도 면에서도 그랬다. 가장 불만이 많았고 가장 단합이 되지 않았다. 진운룡이 그들을 비교적 침공이 용이한 안휘성으로 보낸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한 사정 때문에 삼대엔 특별한 지휘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안휘성에 들어선 직후 삼대의 무인들이 가장 먼저 벌인 짓은 내분이었다.

“이대로 북진하여 합비를 친다! 남궁세가를 짓밟고 안휘성을 차지하는 거다.”

“아니다. 일단은 주변의 군소 문파들을 치는 것이 먼저다!”

“그러다가 정파 놈들이 반격할 여력을 갖추면 어쩔 셈이냐?”

“이미 시간은 충분히 주었다. 반격의 준비 따윈 옛날에 갖췄을 게다! 그러니 우선은 각개격파를 해야지!”

“속전속결이 최고다!”

“각개격파라니까!”

삼대는 두 파벌로 갈라져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안휘성에 들어서기 전까지 싸움이 안 난 게 도리어 신기했다.

‘최악이구나.’

삼대 소속으로 배치된 명신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특이하게도 진운룡은 그를 데려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인 명규도 마찬가지였다.

“당분간 심심하진 않을 테니 네놈을 곁에 두어 무료함을 달랠 필요도 없겠지. 네놈에게도 줏대라는 게 있을 테니 알아서 해 봐라.”

“이번 원정이 네겐 큰 경험이 될 것이다. 네 힘으로 한번 무언가를 이루어 보아라.”

진운룡과 명규의 말이었다. 철저한 무관심과 애정 어린 관심이란 차이만 빼면 명신에게 있어 피가 되고 살이 될 말들이었다.

‘나의 힘으로.’

물론 명신은 지휘관도 아니고 상전은 더더욱 아니었다.

삼대에 속한 어느 무인도 명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진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리라.’

마음을 굳힌 명신이 다투고 있는 무인들 한가운데로 끼어들었다.

“잠깐! 제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한참 다투던 무인들이 떨떠름하게 명신을 쳐다봤다.

“네놈은 흑천문주의 아들이군. 아비의 위명을 믿고 설치려는 것이냐?”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군. 여기엔 네 아비도 진운룡도 없다.”

이미 반쯤 병장기를 꺼내 든 무인들. 안 그래도 명신을 눈엣가시로 보고 있던 차였다.

명신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약간이지만 괜히 나섰다 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러나 이미 끼어든 마당이었다.

이제 와서 물러나 봐야 좋을 것은 없었다.

“잘난 척하려는 것도, 설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선배님들께 좋은 방안을 말씀드리고픈 거지요.”

“그런 걸 설친다고 하는 거다.”

“멍청한 놈. 우리가 왜 네놈의 말을 들어야 하지?”

명신은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말을 더듬지 않기를, 겁먹었다는 걸 들키지 않기를.

“여기에서 멍청하게 말다툼이나 하고 있는 것보단 훨씬 나을 테니까요.”

“하!”

“하하하!”

신경질적인 웃음들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기어코 뽑혀 나오고 마는 갖가지 무기들.

조금이라도 얕보였다간 당장 도륙이 날 기세였다.

“그래. 그럼 똑똑하신 도련님께서 한번 말해 보시지. 그 좋은 생각이란 걸 말이다.”

“얼마나 대단한 군략인지 볼까?”

“혓바닥 잘못 놀렸다간 어찌 될지는 알겠지?”

갖가지 협박에 명신은 혼절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실제로 이들은 당장에 명신을 토막 내고도 남을 작자들이었다.

‘침착해라. 범 아가리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말짱한 기분으로 팔다리를 뜯길 것이다.

명신은 아찔한 생각을 애써 지웠다. 하필 떠오르는 것이 이런 잡생각이라니.

겨우 불안을 가라앉힌 명신이 입을 열었다.

“유격대를 운용하면 됩니다.”

“유격대라고?”

“그렇습니다.”

다행히 설명도 안 듣고서 칼을 날리는 사람은 없었다. 명신은 하늘에 감사하며 빠르게 설명했다.

“안휘성의 심장은 남궁세가입니다. 우리 본대는 남궁세가를 향해 직진해야 합니다.”

속전속결을 외쳤던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각개격파를 외쳤던 이들의 표정은 험악해졌다.

아차 싶은 명신이 재빨리 덧붙였다.

“하지만 군소문파를 토벌하는 것도 분명 필요한 일입니다. 자칫하면 배후를 급습당할 수도 있고, 군소 문파라 해도 연합한다면 상당한 골칫거리가 될 테니까요.”

아까와는 반대되는 표정들이 얼굴에 떠올랐다. 명신은 침착하려 애쓰며 말을 이어갔다.

“단순히 본대를 둘로 나눌 순 없습니다. 그래 봐야 멀쩡한 전력만 양분하는 꼴이 될 테니까요.”

“그래서?”

“각 조를 정하여 돌아가며 유격대 임무를 병행하면 됩니다. 소수정예의 유격대는 본대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니, 주변의 문파를 급습한 다음 본대로 귀환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흐음.”

“나쁘진 않구만.”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

다행히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명신은 내심 안도하며 설명을 계속했다.

“그사이 본대는 곧장 남궁세가까지 나아가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최소한 이동 경로 선상과 그 주변에 위치한 군소 문파들을 깨트리며 전진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배후를 급습당할 위험도 역시 현저하게 낮아지겠지요.”

“그렇군.”

“흑천문주가 자식을 제법 똑 부러지게 키웠구만.”

“사파 연맹에 제갈량이 납셨군.”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들을 꺼내는 무인들이었다.

그래도 명신으로선 날붙이가 날아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웠다.

“물론 판단은 선배님들의 몫입니다.”

“우리야 뭐…….”

“나쁘지 않으니, 따라서 나쁠 것은 없겠지.”

“감사합니다. 그럼 유격대 편성을 제가 임의로 하여도 좋을까요? 자질구레하고 번거로운 일이니 선배님들께선 귀찮으실 것 같습니다.”

“흠흠. 그럼 그러도록 해라.”

“우리야 정파 놈들을 해치울 수만 있으면 되니.”

“알겠습니다. 그럼 유격대에 관한 것은 제가 일임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의를 갖추며 말하는 명신이었다.

이로써 표면적으로는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삼대를 통솔할 수 있게 된 명신이었다.

애초에 삼대 자체가 지휘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고, 진군 자체도 엉망진창인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각 파벌과 문파의 우두머리들은 자기 밥그릇만 챙기고 있었다.

다행히 그들이 함께한 시간이 짧았기에 파벌끼리의 연합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런 만큼 각 우두머리의 발언권의 크기는 동일했다.

덕분에 직, 간접적으로 모든 파벌에 관여할 수 있게 된 명신의 발언권이 커졌다.

명신은 무인들의 심기를 달래 주는 어법을 사용했다. 어려서부터 명규에게 배운 언변술 덕분이었다.

게다가 유격대 운용을 핑계로 각 파벌의 우두머리들을 직접 만나 친분을 쌓았다. 물론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명신이 저자세를 유지했다.

때문에 거의 모든 우두머리들이 명신을 신뢰하게 되었다.

칠 주야가 채 지나지 않는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유격대 운용도 소홀히 하진 않았다.

사파 연맹엔 중원 곳곳의 사소한 기록까지 적혀 있는 지도가 있었고, 안휘성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명신은 그것을 기초로 하여 유격대를 움직였다. 꼭 필요한 곳에만 전력을 집중시켜 승리를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러 소규모의 문파들만을 노렸다. 당장 중요한 것은 적의 전력을 줄이는 것보다도 이쪽의 사기를 진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전력 자체는 우리가 유리하다. 굳이 얼마 안 되는 적의 전력을 줄이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아버지에게서 전수받아 온 제왕학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흑천문주 명규는 훗날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또한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할 줄 아는 인물이기도 했다.

무공이나 문파의 성향을 따졌을 때 정파에 가까운 흑천문이 사파 연맹에 속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천무맹의 그늘 아래에선 위로 치고 올라갈 길이 없다. 구파일방과 십대세가가 버티고 있는 한 신진 세력은 웅비할 수 없다.’

명규가 사파에 속한 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용의 꼬리가 되는 것보단 뱀의 머리가 되는 편이 나았기에.

또한 뱀의 머리가 훗날 용의 머리로 크게 될 수도 있었기에.

‘나의 대에선 중원을 호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아들의 대에서라면!’

명규는 그러한 목적 아래에 명신을 단련시켰다. 무공의 측면에서는 물론이고 정신적 측면에서도.

그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직 어린 만큼 이따금 어수룩한 측면을 보인기도 했지만.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명신은 명규가 그토록 보고자 했던 경지에 올라섰다. 최소한 이지적인 측면에서는 말이다.

명신은 삼대를 완전히 휘어잡고 있었다. 정작 통솔되고 있는 무인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이제 이틀 후엔 합비입니다.”

명신이 헐어 버린 지도를 가리켰다. 안휘성 경계에 들어설 때까지만도 멀쩡하던 지도가 이제는 누더기가 다 되어 있었다.

명신의 손가락이 합비에서 아래로 이어졌다.

“내일 중으로 소호(巢湖)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아마 남궁세가와 정파 연합군이 야전을 벌인다면 그곳을 택할 겁니다.”

“드디어 결전이란 말이군.”

애꾸눈 무인이 사납게 웃었다. 휑하니 빠져 있는 이빨 사이로 걸쭉한 침이 흘렀다.

“어떻게 싸우는 게 좋을까?”

“물을 것이 있나. 기냥 냅다 후려치는 거지.”

“멍청한 놈. 정파 놈들이 함정을 파고 있을 거다.”

“그깟 함정이 두려워 싸우지 못할까? 무서우면 네놈은 소호를 헤엄쳐서 가라.”

“헤엄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배를 타고 소호를 건너는 것은 어떨까?”

“배를 어디서 구해?”

“나룻터에서 약탈하면 되지.”

초기와 달리 제법 군사회의다워진 모습이었다. 떠오르는 발상이란 게 단순하기는 했지만.

명신은 그들의 의견을 세심히 듣는 척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무시했다. 어차피 도움이 될 만한 의견은 하나도 없었다.

“지금까지의 유격대 방식을 응용하는 건 어떨까요?”

“응용이라고?”

무인들이 귀를 종긋 세웠다.

지금껏 명신의 말을 들어 패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의도하건 그렇지 않건 대개의 경우엔 명신의 말을 따랐다.

교묘한 언변 때문에 자기네가 조종당한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여러분은 삼대 전체를 십여 개의 유격대로 나누어 움직였습니다. 그렇다면 총 십 개 조의 유격대를 동시에 운용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으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일까?”

“어쩌면 생각보다 간단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보내는 전음을 조장 분들께서 다른 분들에게 하달하시면 될 테니까요.”

“그런가?”

“어렵지는 않을 것 같구먼.”

애초에 이것이야말로 명신이 유격대를 굴린 진짜 이유였다.

지난 이레 동안의 유격은 모두 이번 결전을 위한 훈련이나 다름없었다. 정작 본인들은 그 사실을 몰랐지만 말이다.

‘이거라면 적들이 어떻게 나오는 자유롭게 대응할 수 있다.’

명신은 그렇게 확신했다. 어릴 적부터 깨쳐 온 각종 병법서들이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 융화되고 있었다.

‘어쩌면 내겐 이쪽, 병법가의 길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내게 딱 어울리는 천직일지도.’

명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자질에 자부심을 갖게 된 그였다.

아버지 명규의 기대와는 약간 다른 쪽으로 발현되고 만 자질이었다.

사파 무인들은 명신의 계획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사실 생각하는 것 자체를 귀찮아하는 그들에게 딱 어울리는 방식이기도 했고.

그러나 이튿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남궁세가의 무인들도, 정파 연합군의 병사들도 아니었다.

* * *

‘좋지 않군.’

장유추는 이를 악물었다.

화연란을 데리고서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한 그였다. 그 와중에 요태희와 백미련은 대막의 무사들에게 포박당하고 말았다.

다행히 죽이진 않은 모양. 포로로 두어 써먹으려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당장 포달랍궁으로 달려가야 했을 그였지만…….

‘가는 길을 모르니 원!’

스스로 생각해 봐도 황당한 일이었다. 도망치느라 바빠서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그들은 오로지 임윤의 안내에 의지하여 이곳까지 왔었던 것이다.

기억 속 지형을 더듬어 돌아갈 수도 없었다.

경공을 펼치고 움직이느라 지형을 머릿속에 담지 못한 까닭이다.

임윤은 두 여인과 함께 붙들렸다. 아니, 애초에 같은 편이니 붙들렸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젠장. 도망칠 때 놈도 데리고 왔어야 하는 건데.’

괘씸한 것도 있었고 상황이 워낙 급박했기에 그냥 버려두고 왔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치명타가 될 줄이야.

결국 장유추와 화연란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일단 놈들을 쫓아가자.”

대막의 수장은 두 여인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목적은 아마도 포달랍궁일 터. 그러니 그들을 쫓아가면 뭔가 나올 것이다.

‘당장의 목적은 두 사람의 구출이다.’

화연란은 금세 마비 증상에서 회복됐다.

두 사람은 대략 오십 리의 거리를 둔 채 기마병들을 뒤쫓았다. 혹여나 기마병들이 공격해 오더라도 충분히 피할 여유가 있는 거리였다.

물론 이쪽의 미행은 오래전에 발각됐을 터.

그럼에도 대막의 무사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따라올 테면 따라오라는 듯.

‘그 오만한 콧대를 반드시 꺾어 주마!’

내심 분노의 칼날을 가는 장유추였다.

“으음…….”

백미련이 신음과 함께 깨어났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온몸에서 격통이 일었다.

그녀는 치료받지 않은 상태로 드센 밧줄에 결박되어 있었다.

“괜찮아요? 며칠 동안 깨어나지 않아 걱정했어요.”

요태희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니 천막 기둥에 묶여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 역시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고문이라도 당한 듯 온몸에 피멍이 가득했다.

시선을 느낀 요태희가 쓴웃음을 지었다.

“정천에 대해 말하라더군요. 침묵을 지켰더니 이 꼴로 만들었어요.”

“정천에…… 대해서?”

“그의 표현으로는 ‘용이 경계하는 자’라더군요. 그 용이란 게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죠?”

“진운룡…….”

“그래요. 대막을 움직인 사람은 진운룡이에요. 최소한 효과가 있는 것은 이 부족뿐인 것 같지만.”

백미련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극심한 고통만 느껴질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었다.

요태희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손이라도 자유로웠다면 치료했을 텐데.”

“본후가…… 얼마나 혼절해 있었지?”

“대략 사흘 정도예요. 그 사이사이에 드문드문 깨어난 적도 있었지만 이내 다시 기절해 버렸어요.”

“사흘씩이나…….”

백미련은 기절하기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의 온몸을 난타하던 대막인의 모습을. 그것을 떠올리니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이 빚은 반드시 갚겠어.”

“그럴 수 있으면 좋겠군요.”

그녀와 달리 요태희의 목소리는 비관적이었다.

“월골은 우릴 살려 둘 생각이 없어요.”

“월골?”

“이 부족의 족장이에요. 이들의 언어로는 ‘초원을 짓밟는 늑대’라고 불리더군요.”

“흥.”

코웃음을 친 백미련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고통이 극심해서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라도 질문을 뱉었다.

“우릴 살려 두지 않을 거란 말은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예요. 애초에 월골이 우릴 인질로 붙잡고 있는 것도 죽이기 위해서예요.”

“죽이기 위해서?”

“정천이 지켜보는 앞에서 죽이겠다더군요. 그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주고 싶다고…… 아마도 우릴 그의 연인이나 아내 정도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풋.”

백미련이 실소를 내뱉었다. 정작 정천이 그녀들에게 관심이나 둘지 의심스러웠다.

“새삼 궁금해지는걸. 눈앞에서 우리가 죽는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불길한 얘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당신 같은 존재도 죽는 게 두렵나?”

요태희의 눈빛이 깊어졌다.

“글쎄요. 모르겠어요. 수백 년을 살아왔고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것들도 보아 봤지만…….”

“그런데도 죽고 싶지는 않다?”

“모르겠어요.”

만족스럽진 않은 대답. 백미련은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어떻지?’

백미련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마라혈천이던 시절, 그녀에게 남아 있는 것은 팔부혈선이 걸어 놓은 세뇌와 자신을 버린 부모에 대한 복수심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생부를 죽였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만큼 만족스럽진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손에 묻은 핏자국이 지워지지는 않겠지만.’

그녀는 살인자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무인들이 마찬가지였다. 무림이란 굴레 안에 속해 있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마라혈천이던 그녀는 언제 죽더라도 상관없었다. 마음속에 담겨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난 죽고 싶지 않아요.”

백미련의 말에 요태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평소 자신을 본후라고 불렀던 백미련이었다. 더불어 요태희에겐 쌀쌀맞은 말투를 썼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나’라고 부르고 있었다. 요태희에게 경어를 쓰고 있었다.

아마도 처음으로 구절검후가 아닌 백미련으로서 그녀를 대하고 있는 것이리라.

“저도 죽고 싶진 않아요, 백 소저.”

“뭔가 좋은 방도가 없을까요?”

“우리끼리 이곳을 빠져나갈 수는 없어요. 필연적으로 외부의 도움이 필요해요.”

백미련의 표정이 굳어 갈 때 요태희가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 뇌혈도 대협이 이 무리를 뒤쫓아 오고 있어요.”

“……포달랍궁으로 가는 게 아니고 말인가요?”

“우린 돌아가는 길을 모르잖아요.”

백미련은 헛웃음을 지었다. 너무나 바보 같은 상황에 웃음이 다 나왔다.

“한심하군요, 우리들.”

“그러게 말이죠.”

그녀들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요태희라면 모를까, 평소의 백미련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놀랄 일이었다.

웃음을 그친 요태희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들은 지금 동쪽으로 향하고 있어요. 포달랍궁이 아닌 사천성을 향해.”

“어째서죠? 정천을 원한다면 포달랍궁으로 가야 할 텐데.”

“아마 팔룡천법왕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라고 봐야겠죠. 이들의 목적은 법왕을 묶어 두는 거지 그를 풀어놓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월골은 무척 자신감이 강한 사내더군요. 창도(昌都)에 도착하여 전서구를 보내 정천을 유인하겠다는 작전을 거리낌 없이 말했어요.”

“멍청이군요. 죽음을 재촉하려 하다니.”

“더군다나 우리에게 기회를 주어 가면서 말이죠.”

창도는 사천성과 서장의 경계에 걸쳐 있는 도시다. 다시 말해 마교의 밀정과 첩보원들이 개미 떼처럼 깔려 있는 도시라는 것.

도시 내부에 들어서기도 전에 그들에 대한 정보가 확산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그녀들에 대한 정보도 흘릴 수 있다면.

“놈을 마주하는 건 정천이 아니라 천마와 마인들이 되겠군요.”

“우리가 조금만 더 정보를 빨리 뿌릴 수만 있다면요.”

귀암산에서 창도까지는 이틀 걸리는 거리다. 왕복에 보름 이상 소요되는 포달랍궁과는 상황이 달랐다.

“장유추 그 바보 늙은이가 조금만 눈치가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죠.”

백미련의 한탄에 요태희가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지금 그는 혼자가 아니에요.”

* * *

“장 선배님.”

진지한 얼굴로 화연란이 말을 꺼냈다.

“저들,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어요.”

“응?”

장유추가 돌아보자 화연란이 설명했다.

“구태여 숨길 것도 없다는 듯 동쪽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어요. 포달랍궁 쪽이 아니라요.”

“동쪽이라고? 어째서?”

“그것까진 잘 모르겠지만, 이대로 계속 가면 창도로 들어서게 될 거예요.”

창도가 어딘지는 장유추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서장으로의 여정을 시작했던 도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건…….”

화연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앞서 가면 지원을 부를 수 있어요. 포달랍궁이 아닌 마교에 말이죠.”

“그렇군!”

장유추의 얼굴이 대뜸 밝아졌다.

지원 자체만 놓고 본다면 모든 면에서 포달랍궁보다 마교가 나았다. 정천이 직접 온다거나 하지 않는 한은 말이다.

장유추는 벌떡 일어났다.

“그럼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자. 노부는 놈들을 뒤쫓을 테니 너는 창도로 먼저 가 전서구를 날리도록 해라.”

“알겠어요.”

간단히 목례만 한 화연란이 사막의 모래 위를 달려 나갔다. 밤의 한기 섞인 바람이 엄습해 왔지만 그녀를 막진 못했다.

장유추는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이십 리쯤 떨어진 위치를, 화톳불이 타오르고 있는 대막의 막사를 노려보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제 곧 빚을 갚게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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